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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열 오로라월드 회장 

세계를 매혹한 오로라 유니버스 

장진원 기자
한국의 봉제완구 산업은 1980년대 황금기를 거쳐 1990년대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오로라월드는 국내 캐릭터 완구 업체 중 자체 브랜드로 세계시장에 진출한 유일한 기업이다. 매출의 80% 이상이 수출에서 나온다. 지난 44년간 회사를 이끈 창업주 노희열 회장은 끝없는 혁신만이 생존과 성장의 바탕이라고 말했다.

1962년 처음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오늘날 한국 경제발전의 초석이 됐다. 당시 정부는 부족한 자본을 외부에서 끌어오고, 이를 바탕으로 한 수출 주도형 공업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당시 한국의 초기 산업화는 섬유, 신발, 봉제 등 노동집약적 산업이 주도했다. 자원, 자본, 기술 어느 것 하나 갖추지 못했던 시절, 낮은 임금과 풍부한 노동력은 경공업 중심의 수출 정책에 밑거름이 됐다. 값싼 노동력을 투입해 만든 의류와 신발, 봉제 제품을 미국, 일본 등 가격경쟁력을 확보한 지역으로 수출하는 것이 당시 공업화와 경제개발의 핵심이었다.

봉제완구 산업도 한국의 초기 산업화에 일익을 담당한 업종이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1987년 국내 완구 수출은 약 10억7000만 달러로 정점을 찍었다. 요즘처럼 완구 종류가 다양해지기 전이라, 당시 대부분의 수출용 완구는 ‘봉제 인형’류가 차지했다. 1980년대 초중반까지 봉제 인형과 섬유업은 국가 수출의 기간산업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봉제완구 수출이 10억 달러를 넘어선 1987년 무렵엔 국내에 크고 작은 완구업체가 700여 곳에 달할 정도로 성했다.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국내 인건비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산업구조도 경공업에서 자동차, 철강, 조선, 전기·전자 등 중화학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완구 제조업체들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생산기지를 옮겼다. 2006년 들자 아예 완구 수출액이 1억 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한때 700곳을 넘기며 전성기를 맞았던 국내 봉제완구 제조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지금까지 자체 브랜드를 유지한 채 세계시장에서 활약하는 국내 기업은 사실상 ‘오로라월드(Aurora World, 이하 오로라)’가 유일하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현재 오로라가 생산하는 캐릭터 완구는 연간 6000만 개에 달한다. 이 중 4000만 개가 미국에서 팔린다. 미국에선 브랜드 인지도 2위, 영국과 러시아에선 판매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매출의 80% 이상을 해외시장에서 벌어들이는 글로벌 ‘인형왕’이다.

매출의 80%를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글로벌 ‘인형왕’


▎오로라월드는 30년 전부터 캐릭터 완구의 메카인 독일 뉘른베르크에 상설 전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2023년에는 이를 확장해 최대의 전시 공간을 마련했다. 올해 초 열린 스프링페어(Spring Fair)에 참석한 노희열 회장과 해외 마케터, 상품기획 매니저들이 함께했다.
오로라는 국내 완구산업이 황금기를 누리던 1981년에 창업했다. 창업주 노희열 회장은 그 시절 대부분의 경쟁사와 마찬가지로 해외 바이어에게 주문자위탁생산(OEM)을 수주해 ‘캐릭터 토이’ 사업에 진출했다. 창업 당시 사명인 오로라무역상사는 1980년대 초 오로라의 경영 방점이 ‘OEM 수출’에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봉제완구를 앞세워 글로벌 시장을 호령했던 한국 완구의 황금기가 꺾이기 시작한 건 1990년대 들어서다. 치솟는 인건비는 생산 거점을 국내에서 중국, 동남아 등 해외로 옮겼다. 국내에서 완구를 제조해서는 바이어가 원하는 가격을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중국 등 가격경쟁력으로 무장한 해외 기업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국내 완구 시장도 로봇, 자동차, 유명 캐릭터를 앞세운 일본 제품이 장악하기 시작했다. 700곳이 넘던 완구 제조사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춘 배경이다.

1981년 창업한 오로라는 올해로 창업 44년 차를 맞았다. 40년이 넘은 업력도 그렇거니와, 전 세계 캐릭터 완구 시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플레이어라는 사실만으로 기업이 가진 경쟁력을 가늠할 수 있다.

국내 완구 산업에서 차지하는 오로라의 위상은 단순한 생존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2020년 1416억원이었던 매출액은 2021년 1781억원, 2022년 2317억원, 2023년 들어선 2326억원으로 최고치를 찍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88억원에서 284억원으로 급증했다. 일찍이 지난 2000년에는 국내 최초로 캐릭터 중심의 시각디자인업으로 코스닥시장에 상장했다. 수백 개 기업이 명멸해 간 가운데 오로라만의 독보적인 위상이 드러나는 성과들이다.

산업화 시대 거목들의 서사가 으레 그렇듯, 노 회장도 무엇 하나 풍족한 것 없는 농가에서 태어나 맨주먹으로 글로벌기업을 일궈낸 자수성가 CEO다. 1957년 충북 충주 출생인 노 회장은 창업 계기를 묻자 “그 질문에 답하려면 보릿고개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데 괜찮겠느냐”며 이야기를 풀었다.

“베이비부머 1세대입니다. 전쟁 직후였어요.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공부나 대학 같은 걸 꿈꾸기 어려운 시절이었죠. 책보를 둘러메고 키보다 큰 짐 자전거를 끌며 40리길을 다녔습니다. 광주리에 담긴 쉰 보리밥을 물에 씻어 고추장 찍어 먹고, 쇠꼴 베러 나가는 게 일과였어요. 저뿐만 아니라 대개가 그랬습니다. 어릴 때부터 ‘왜 이렇게 가난할까, 잘살고 싶다’는 욕망이 머릿속에 깊이 자리 잡았던 것 같아요. 20대 젊은 나이에 내 사업을 해야겠다고 맘먹은 것도 가난이 준 결핍 때문이었을 겁니다.”

변변한 채비도 없이 상경을 결심한 노 회장은 서울에 올라와 완구회사에 취업했다. 심부름꾼 격인 급사에서 시작해 자재와 구매, 무역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배웠다. 고된 업무에도 주경야독하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3~4년이 지나 취업과 졸업이 겹칠 즈음이 되자 완구회사 업무의 기본과 경영이 눈에 익기 시작했다.

“스물다섯 나이에 ‘내 일을 하겠다’며 사표를 냈습니다. 영어에 소질이 있어 동시통역학원을 다니기도 했던 터라 무역상사를 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대형 완구사들이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지사 몇 곳을 남겼는데, 그걸 인수했어요.”

당시만 해도 한참 변두리였던 서울 마천동 시장 골목에 재봉틀 50대와 직원 300명을 들였다.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잠을 줄여가며 일했다. 아내도 종일 공장에 머물며 직원들의 끼니를 해결했다. 창업 초기 사업이 안착할 수 있는 관건은 OEM 수주였다. 해외 바이어들로부터 안정적인 일감을 받는 게 절실했지만, 초보 기업가에게 녹록한 여건이 있을 리 만무했다.

“바이어 한번 만나려고 반도호텔, 워커힐호텔 같은 곳에서 일주일씩 진을 치곤 했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1984년 즈음 되니 해외 바이어가 우리 공장을 둘러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길들이기 차원이었는지 한국에 들어오고도 일주일이 넘도록 전화 한 통 없었죠. 공장에 와달라고 사정사정하니 ‘샘플을 보내라’고 하더군요.”

장난 같은 바이어의 반응에 허탈한 마음을 달래길 보름여. 뜻하지 않게 텔렉스로 연락이 왔다. “왜 샘플을 보내지 않느냐”는 문의였다. 긴가민가하는 불안은 수출신용장이 발행되며 확신으로 바뀌었다. 300만 달러 규모의 첫 수출 오더를 준 당시 바이어는 이후로도 오랜 기간 오로라의 해외 파트너로 함께하며 인연을 이어갔다.

한국 완구 산업의 황금기를 열다


▎오로라월드는 세계 최고 백화점으로 꼽히는 영국 런던의 헤롯 백화점에 국내 캐릭터 완구 상품 최초로 입점한 기록을 갖고 있다. 노희열 회장이 오로라 베어(Aurora Bear) 제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첫 해외 수출의 레퍼런스를 쌓자, 무역상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1985~1986년 들어서자 3000만 달러 수출 달성에 성공했다. 서울 길동에 꿈에 그리던 사옥까지 올렸다. 오로라와 노 회장도 한국 완구 산업의 황금기를 오롯이 맞았다. 1990년 들어선 국내 생산기지를 인도네시아로 옮겼다. 3만3000㎡(1만여 평) 너른 부지에 직원 3000명을 고용했다. 가격경쟁력이 확보되니 마진이 40%대까지 치솟았다.

“큰 완구 박람회가 열리면 세계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코트라가 여는 쇼룸에 인형 보따리를 잔뜩 싸 들고 가서 바이어들을 만났죠. 1980년대만 해도 미국, 유럽 등에 바이어 수십 명이 있었어요. 5성급 호텔에서 한 달이면 보름을 살다시피 했죠. 거기서 밥 먹고 차 마시며 바이어들을 상대해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맺은 네트워크 덕분에 사업도 잘됐습니다.”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1980년대 중반 들어서다. 중국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자 노동집약형 산업들이 진공청소기처럼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완구 산업도 중국이라는 폭풍을 피하지 못했다. 제품의 질은 차치하고 가격경쟁력에서 완전히 밀렸다. 세계를 주름잡던 한국 완구의 명성도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건 발상의 전환이었다. 당시를 돌아보던 노 회장은 “OEM으로는 생존하기 어려운 국면이 닥쳐왔다”고 회고했다. 바이어의 이름이 아닌 오로라라는 내 브랜드로 승부를 보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최고급 호텔에 묵는 바이어들이 제품 가격 10센트를 올려주지 않겠다며 버티는 걸 보니 화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내 공장에서 생산한 자체 브랜드를 우리가 조직한 판매망에서 팔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992년 홍콩 판매법인을 시작으로 그해 미국 캘리포니아 판매법인을, 1999년에는 영국 햄프셔 판매법인을 연이어 설립했다. ‘굴러온 돌’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아시아의 OEM 생산업체가 본토에서 직접 영업하겠다고 선언하자 온갖 텃세가 몰려들었다.

“미국에 처음 진출할 때는 A&A라는 사명을 썼어요. 오로라 아메리카라는 뜻인데, 금방 들통날 게 빤했죠. 그때부터 저작권, 디자인 관련 소송이 쏟아졌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완구사가 소송을 걸어왔는데, 나중에는 우리 디자인을 카피한 게 밝혀져 역소송 끝에 이긴 적도 있습니다. 진출하는 나라가 어디든 그랬어요. 지금도 미국, 영국 등 큰 해외법인에는 인하우스 법무조직을 갖추고 있습니다. 아예 매출의 1%를 법무비용과 보험료로 잡아놓을 정도죠.”

노 회장은 “자체 브랜드를 안착하기까지 피눈물을 쏟아낼 만큼 고통스러웠다”고 돌아봤다. 기존 고객사가 OEM 물량을 끊어버리는 일이 정해진 수순인지라 단기간은 매출 감소나 손해도 감수해야 했다. 해외 세일즈 조직과 바이어들의 유착도 헤치기 어려운 난관 중 하나였다.

“미국의 세일즈맨들은 팀 단위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요. 봉제공장에서 재봉사가 팀원들 이끌고 다니는 것과 비슷하죠. 작은 아시아인이 와서 사업한다 하니, 팀 단위로 움직이면서 압박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바이어와 결탁해 조금이라도 싼 값에 제품을 넘기려는 작전이죠. 모든 게 커미션 베이스니 그런 장난이 많았습니다.”

OEM 벗어나 세계 최고 브랜드 세우다

발주량과 납기만 맞추는 되는 OEM과 자체 브랜드 직판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바이어의 오더에 따라 디자인과 생산량을 맞추고 가격만 결정하면 되던 기존 영업에 비해, 내 브랜드를 시장에 알리고 소비자의 선택을 받게 하는 일은 비교 자체가 어려웠다. 하지만 무모한 도전에 나선 노 회장의 선택은 현재 오로라를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는 유일한 한국 기업이라는 자리에 올려놓았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견제와 방해는 창업 초기에 바이어를 한 명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던 뚝심을 되살려냈다.

OEM에서 자체 브랜드로, 그것도 글로벌 시장에서 승부하겠다는 비전을 현실로 이룬 원동력은 무엇일까. 노 회장은 철저하게 제품 자체의 경쟁력으로 이기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근간은 ‘품질’과 ‘디자인’이다. 오로라가 만드는 캐릭터 완구는 제품의 견고함은 물론 안정성에서 정평이 나 있다.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제품인 만큼 생산관리와 소재, 품질검사 등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ISO9000 등 국제 생산 표준을 정확히 지킨다. 입체적 패턴이 기본인 덕에 웬만한 의류보다 작업 공정이 까다롭지만, 전 세계 어떤 생산 시설에서나 똑같은 표준을 엄격히 지켜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

디자인은 전 세계 어떤 경쟁사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는 영역이다. 전체 직원 중 40%가 디자인 인력일 정도다. 노 회장은 이를 PD(Product Development) 역량이라고 표현했다. 오로라는 이미 1999년 사내에 디자인연구소를 설립했다. 현재 미국, 영국, 독일, 동유럽, 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 현지인으로 구성된 디자인 전담 조직을 갖췄다. 이들이 1년에 세 번 서울 본사에 모두 모여 정보를 나누고 나라별·지역별 상품 기획에 나선다.

“패션부터 컬러, 유행하는 온갖 트렌드를 나라별로 꼼꼼하게 파악합니다. 입사 후 30년 넘게 일한 전문가가 많아요. 어떤 물건이라도 한나절이면 봉제 제품으로 나옵니다. 40년 넘게 쌓아온 암묵지가 상품화 역량을 극대화한 거죠. 전 세계에서 모인 포커스그룹이 상품 기획과 타깃 시장, 수량까지 정한 후 생산과 판매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오로라의 뛰어난 디자인 역량은 단순히 예쁘고 귀여운 인형을 만드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노 회장은 독립적인 테마와 콘셉트를 주제로 한 라인업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오로라 유니버스’를 만들어냈다. 제품 1개당 페트병 8개를 사용해 만든 소재를 적용한 에코 네이션(Eco Nation), 다양한 동물의 아기 시절을 섬세한 디테일로 표현한 미요니(Miyoni), 딸기, 맥주잔 등 동물이 아닌 사물을 의인화한 팜팔(Palm Pals) 등이 1년에 6000만 개 넘게 팔린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오자미형 동물인형인 플랍시(Plopsy) 라인업도 연간 1500만 달러 이상 팔리는 스테디셀러다.

“지금까지 7만 종이 넘는 디자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어요. 이를 바탕으로 매년 새로운 디자인이 4000~5000종가량 나옵니다. 그중 시장에 내놓는 브랜드는 2~3개뿐이죠. 끊임없는 혁신이 기업 생존의 조건입니다. 소재, 콘셉트, 디자인 등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으면 도태하고 맙니다.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가 완구라고 다를 건 없어요. 우리는 미국에만 6만 건에 이르는 의장등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재는 2년 이상 앞을 내다보고 개발하죠. 안정적인 사업이란 건 없어요. 자전거 페달을 밟듯, 가지 않은 길로 계속 내딛어야 합니다.”

철저한 ‘현장 중심’도 노 회장이 40년 넘게 지켜온 경영 철학이자 원칙이다. 현재 오로라는 디자인 허브와 본사는 한국에, 생산 거점은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세일즈와 디자인은 미국, 영국, 독일, 홍콩 등 주요 거점에 분산돼 있다. 이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전략과 노하우에 대해 노 회장은 “40년 넘게 현장에서 쌓인 암묵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자평했다.

“생산은 가장 안정적인 곳에서 품질 규격에 맞게, 판매는 질 좋은 제품을 고객 니즈(Needs)와 요구(Wants)에 맞게 팔면 됩니다. 본사는 지원과 통합으로 서포트해야 하고요. 사실 말하긴 쉽지만 실행은 어렵죠. 인터넷 서칭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신발 밑창이 떨어지도록 발품을 팔아야 시장을 제대로 볼 수 있죠. 지금도 오로라 직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시장에 직접 나가 보고서를 씁니다.”

완구 넘어 콘텐트 1위 야망


세계 최고의 캐릭터 완구를 만들겠다는 노 회장의 집념은 오로라를 세계 유일의 봉제완구 원스톱 솔루션을 갖춘 기업으로 만들었다. 자체 브랜드를 기반으로 한 상품 기획부터 생산, 가격 결정, 유통에 이르는 모든 경영 활동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때문이다. 생산 시설 역시 세계 최대 규모다. 인도네시아 보고르와 치안주르 지역에 자리한 인도네시아 법인은 총 9만9173㎡(3만 평) 규모 공장에서 본사 직원 4500명과 아웃소싱 직원 1만여 명이 전 세계 최고 품질의 캐릭터 완구를 연간 3000만 개 공급하고 있다. 중국 법인은 10여 개 주요 협력업체에서 3000여 명이 고품질 완구를 생산한다. 이곳 역시 오로라의 철저한 품질관리 시스템하에 연간 2000만 개 제품을 생산 중이다.

캐릭터 완구라는 한 우물을 파온 노 회장은 지난 2007년 ‘유후와 친구들’이라는 브랜드를 내놓으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자체 브랜드 기반의 콘텐트 사업이다. 전 세계 멸종위기 동물을 기반으로 탄생한 유후 캐릭터는 인형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을 병행했다. 현재 네 번째 시즌까지 제작된 유후 시리즈는 〈YooHoo to the Rescue〉라는 제목으로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이다. 유후 완구도 100종이 넘는 희귀동물 캐릭터가 글로벌 누적 판매량 8000만 개를 돌파할 정도로 메가 히트를 기록했다. 노 회장은 “〈유후와 친구들 시즌 5〉도 준비 중”이라며 10년 안에 캐릭터 완구와 애니메이션에서 독자적인 IP를 10개 이상 확보하겠다“는 비전을 드러냈다. 글로벌 인형왕에서 세계 제일의 ‘콘텐트왕’이 되고 싶다는 꿈이다.

“기업경영은 한시도 쉴 틈이 없는 고된 과정입니다. 더욱이 세계 무대에서 경쟁해야 하니 어려움이 더하죠. 하지만 인형이 아니라 웃음과 행복을 파는 게 우리 일이에요. 오로라의 슬로건이 바로 ‘Gift of Smile’이죠. 제대로 만든 인형은 인간에게, 특히 아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인본주의적인 제품입니다. 그들에게 기쁨을 주고 기업은 적정한 이윤을 얻으면 그만이죠. 이윤을 위해 마구 만들어내는 건 기업이 할 일이 아닙니다.”

노 회장은 지난 3월 강원도 원주시에 오로라 골프앤리조트(이하 오로라CC)를 선보이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도전에 나섰다. 종종 언더파 스코어를 기록할 정도로 소문난 실력파인 노 회장은 “프리미엄급 시설을 갖춘 대중제 골프장을 기획했다”고 소개했다. 사업다각화나 이윤추구는 새 도전의 목표가 아니다. 노 회장은 직원 복지, 골프 꿈나무 육성 등을 위해 필드를 아낌없이 내놓을 계획이다. 최근에는 유소년가족골프협회장도 맡았다.

“돈 더 벌겠다고 골프장을 지은 건 아니에요. 골프산업을 육성하려는 사람은 많은데, 골프장 빌려주는 이는 별로 없더군요. 40년 넘게 기업을 운영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저로 인해 피해 보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됐어요. 골프든 본업이든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웃음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그게 기업가의 숙명이라 생각합니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202409호 (2024.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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