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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대기자의 ‘역설의 리더십’(9) 

경쟁자를 가까이 두라 

동물의 세계, 잠재적 경재자를 미리 제거하면 좋다. 하지만 인간사는 좀 다르다. 복잡한 경쟁 구도 속에서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경쟁심리를 나의 경쟁력 강화에 써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리더의 자리는 위태로운 자리다.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실제는 송곳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은 형세이기 쉽다. 내가 높은 경쟁률을 뚫고 올라온 만큼, 아래에 있는 많은 사람도 내 자리에 오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까닭이다. 정상의 영광을 영원히 차지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디 현실이 그리 녹록한가. 언젠가는 다 내려놓고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수밖에 없다. 순리를 거부하다가는 강제로 끌려 내려오는 치욕을 당하는 결과를 얻을 뿐이다.

그래서 리더의 자리에 오른 뒤 주위를 경계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사례가 많다. 무리를 이끄는 수컷 사자처럼 말이다. 늙은 지도자에게 도전해 서열 1위로 새롭게 올라선 수사자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전임자가 낳은 새끼 수사자들을 물어 죽이거나 무리에서 내쫓는 일이다. 언젠가 자기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들을 내치는 것이다. 그렇게 후환을 없애야만 리더의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 역시 기본적으로는 동물의 세계와 마찬가지다. 잠재적 경쟁자를 미리 제거할수록 리더가 정상의 자리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길어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후의 결과는 사뭇 다르다. 삶의 지상 목표가 종족 번식인 동물의 세계와 달리, 인간 세상은 복잡다기한 경쟁 구도 속에서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잠재적 경쟁자의 제거가 자칫 나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잠재적 경쟁자들을 무조건 없애버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 그들의 경쟁심리를 나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게 중요하다. 그러한 작업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뤄내느냐에 따라 결과는 극과 극이 될 수 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일세를 풍미한 동서양의 두 절대군주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진시황은 흔히 잔학무도한 인물로 묘사된다. ‘분서갱유(焚書坑儒)’가 대표적인 사례다. 사상 통제를 위해 각종 서적을 불태우고 유생 수백 명을 생매장했다는 사건이다. 이 사건의 진위에는 논란이 있지만, 진시황이 매우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은 분명한 것 같다. 그에 대한 모든 기록이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대단히 유능한 군주였다. 헛된 명분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용주의적 개혁을 추구했으며, 인재를 소중히 여기고 합리적인 간언을 받아들였다. 일례로 운하 건설의 책임자인 정국이 한나라 첩자임이 밝혀지자 국내에 머물던 모든 타국인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참모인 이사가 “진나라는 대대로 타국인들을 받아들여 발전해왔다”고 소를 올리자 곧바로 명령을 취소했다. 또 초나라 정벌에 60만 병력이 필요하다는 노장군 왕전의 말을 무시하고 좌천시켰다가 나중에 그의 말이 맞는 것으로 드러나자 몸소 왕전의 처소로 달려가 용서를 구하고 다시 등용하기도 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황제의 얼굴

이 같은 리더십이 없었다면 수백 년 동안 할거해온 한나라를 비롯해 조나라, 위나라, 초나라, 연나라, 제나라 등 6국을 1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차례로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때론 지나쳐 잔혹함이 되긴 했지만, 그것은 곧 과감한 결단력과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 같은 리더십으로 중국의 전설 속 성군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온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는 자신감을 보였던 진시황도 말년에는 정상의 자리가 위태로운 자리임을 느꼈다.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연나라 사람 형가의 암살 시도가 있었지만, 황제로 등극하고 나서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암수가 더욱 가깝고 날카로워지고 있음을 알았던 것 같다.

그중 하나가 그 유명한 ‘박랑사 저격 사건’이다. 주모자는 나중에 한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를 다시 통일하게 되는 장량(張良)이다. 한나라가 진나라에 망하자 선조 대대로 한나라의 재상을 지내온 명문가의 자손인 장량은 나그네가 되어 정처없이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힘센 장사를 만난다. 장량은 장사에게 매일 무게가 30kg이나 되는 철추를 던지는 연습을 시켰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시황제가 동쪽으로 순행에 나섰던 것이다. 장량은 허난성 우양현에 있는 박랑사(博狼沙)라는 계곡을 거사 장소로 선택했다. 철추를 던지기 좋고 거사 후 도주하기도 쉬운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황제의 행렬을 기다렸다. 이윽고 황제가 도착했지만 아뿔싸! 호위병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똑같은 모양의 황제 마차가 다섯 대나 됐던 것이다. 장량은 가운데 마차를 향해 철추를 던지라고 했고, 장사가 던진 철추는 정확하게 날아가 가운데 마차를 박살 냈다. 하지만 진시황은 다른 마차에 타고 있었다. 이미 자신을 노리는 손길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진시황은 더욱더 자신의 몸을 숨겼다. 지방 호족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호족 자제 12만 명을 수도 함양으로 불러들였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황제의 궁전에는 270개 궁궐이 있었는데 모두가 지하 비밀 통로로 연결돼 있었다. 진시황은 매일 밤 다른 궁궐에서 잠을 잤으며 이동할 때마다 지하 통로로 다녔다. 혹시나 황제를 보게 된 사람은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다. 환관 등 극소수 사람만 황제의 동선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 역시 황제의 소재를 누설하면 목숨을 잃었다.

진시황이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궁궐 안으로 깊숙이 몸을 숨길수록 그의 권력은 녹슬어갔다. 총신과 환관들이 황제에게 알리지도 않고 정책을 시행했다. 그들은 황제의 의도에 반하는 일까지 꾸몄다. 진시황이 다섯 번째 순행에 나섰다가 사구(沙丘)에서 병을 얻어 죽을 때, 황제는 북방에 나가 있던 태자 부소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유언했다. 하지만 환관 조고가 승상 이사를 꼬드겨 부소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을 제거하고 부소의 동생인 호해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황제의 주검은 수레에 실려 수도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생선을 잔뜩 실은 수레가 황제의 수레를 앞뒤에서 호위했다. 시신이 썩는 냄새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중국 최초의 황제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은 초라한 마지막 행차였다. 해가 지지 않을 것 같던 제국 자체도 이후 4년 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참으로 허망하다.

“짐이 곧 국가”라는 말로 유명한 태양왕 루이 14세는 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프랑스 절대 왕정에 저항한 귀족들이 일으킨 두 차례의 ‘프롱드 난’이 어린 루이에게 굴욕적인 경험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루이 14세를 거부한다기보다는 리슐리외의 정책을 계승한 재상 마자랭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어린 루이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1차 프롱드 난 때는 파리 시민들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파리를 탈출해야 했고, 콩데 공의 주도로 발생한 2차 프롱드 난 때는 반란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으니 마음의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자랭이 반란을 진압한 뒤에야 루이 14세는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버지 루이 13세의 급서로 다섯 살에 즉위했음에도 열여섯 살이 되던 1654년이 돼서야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다.

루이 14세는 파리에 돌아오고 나서도 루브르궁에 머무르지 않고 파리 근교의 별궁들을 옮겨 다니며 정사를 봤다. 여전히 그에게 적대적인 파리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귀족들을 통제할 필요도 있었다. 이에 별궁 중 하나였던 베르샤유궁을 공식 거처로 사용하기 위해 대대적 증축에 나섰다.

베르사유궁이 완공되기도 전인 1682년 루이 14세는 서둘러 왕궁과 정부를 모두 베르사유로 옮겼다. 베르사유궁은 기존 왕궁들과는 기본부터가 달랐다. 왕의 침실이 왕궁의 중심이었고 귀족들이 왕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였다. 귀족들에게는 베르사유 시내에 숙소를 제공했고, 서열이 낮을수록 왕궁과 멀어졌다.

왕의 침실엔 100명이 우글우글

매일 아침 8시, 왕의 침대 발치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왕을 깨움으로써 하루가 시작됐다. 다른 시종들이 왕의 침실 문을 열고, 왕족과 대신들이 들어와 왕을 배알했다. 배알 순서도 정해져 있었다. 첫 번째는 왕자들과 왕손들이었다. 그들이 재롱을 떨고 나면 주치의들이 들어와 왕의 건강을 살폈다. 이어 광대와 의상 담당자들이 들어와 그날 왕이 입을 옷과 장식을 조언했다. 다음으로 정부 관리들이 서열에 따라 순서대로 들어와 문안했다. 마지막은 그날 아침에 특별히 초대받은 인사들 차례였다. 그들에게는 왕을 아침에 알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었다. 이렇게 모두 들어오고 나면 100명이 넘는 사람이 왕의 침실에 우글거렸다.

이런 베르사유궁에 사생활이 존재할 수 없었다. 심지어 루이 14세조차도 마찬가지였다. 베르사유궁을 방문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모든 방은 다른 방들과 연결돼 있다. 안으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려면 여러 방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방마다 늘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루이 14세는 귀족들이 늘 자신의 가까이에 상주하고 있기를 바랐다. 왕이 누군가를 찾았을 때 자리에 없으면 그는 왕의 총애를 잃을 위험이 있었다. 왕이 늘 주위를 둘러보며 귀족들의 부재를 살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루이 14세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는 프롱드당의 반란이라는 내전을 딛고 권좌에 오른 인물이었다. 반란 주동자는 귀족들이었다. 영주들이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던 봉건시대를 그리워하며 왕권 강화에 반발한 것이다. 실패하긴 했지만 귀족들은 여전히 왕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 불안하지 않았을까.

루이 14세는 오히려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한곳에 모아놓음으로써 위험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베르사유궁에서 모든 사람의 행동은 다른 사람의 행동과 독립해서 일어날 수 없었다. 누군가 지나가면 누군가의 눈에는 꼭 띄었고, 누군가 무엇을 하면 다른 누군가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왕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왕의 눈에 들기 위한 경쟁으로 이어졌다.

1685년부터 지방 귀족들이 하나둘 베르사유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과거 자신의 영지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귀족들이 아침에 왕이 가운 입는 것을 도와주는 일을 차지하려고 싸웠다. 정치적 독립성과 자율성은 서서히 사라졌다. 베르사유궁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파티에 눈멀고 엄격한 에티켓에 얽매인 채 왕의 총애와 후견제로 포장된 그물망에 포획되어갔다.

주지하다시피 루이 14세는 전쟁을 즐긴 인물이다. 그의 치세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대네덜란드 전쟁, 아우스부르크 동맹 전쟁 등 불필요한 전쟁들이 줄을 이었다. 뚜렷한 이익도 없이 프랑스의 영광을 구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같은 루이 14세의 야심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경계를 불러일으켜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게 만들었다.

유럽의 모델이 된 프랑스 궁정문화

유럽 다른 국가의 군주들은 프랑스를 위험 국가로 경계하면서도 루이 14세의 궁정문화에 큰 관심을 보였다. 화려하고 세련된 궁정 예절과 생활 방식이 루이 14세라는 공동의 적을 흠모의 대상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프랑스 국정의 중심인 베르사유궁은 전 유럽 군주들에게 모델이 됐다. 실제로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는 베르사유궁을 모델로 상수시(Sans Souci: 근심이 없다는 뜻)궁을 짓기까지 했다. 세련된 궁정문화에 대한 동경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통한 효율적인 귀족 통제라는 효과가 유럽의 절대군주들을 사로잡았을 게 분명하다.

이처럼 진시황은 아무도 자신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루이 14세는 아무도 자신의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결과는 천양지차였다. 프랑스 역시 루이 14세 사후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것은 과도한 전쟁 비용 탓이 컸다.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한다는 목적에서만 본다면 루이 14세의 방법이 훨씬 성공적이었다. 경쟁자들을 멀리함으로써 점점 더 그들을 적대적이 되게 만들 게 아니라, 그들을 가까이 두고 당근과 채찍으로 내 편으로 만들어야 리더가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진시황은 그런 의미에서 강한 리더가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한비자는 “진나라는 4대 동안 승리를 거뒀지만 늘 공포와 불안 속에서 살았다”고 썼다. 이에 비해 루이 14세는 전 유럽 군주들의 롤 모델이 될 만큼 행복하게 살았다.

물론 오늘날의 민주주의 시대에서 절대왕정 시대의 인물을 본받는 데는 한계가 있다. 만약 루이 14세가 귀족 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생산된 막대한 부를 전쟁이 아닌 백성들을 위하는 데 썼다면, 프랑스는 훨씬 강한 나라가 됐을 것이며 부르봉 왕가 역시 훨씬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라면 루이 14세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들었어야 한다.

“선하고 지혜로운 군주가 그런 모습을 유지하고 압제자가 되지 않길 바란다면 절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요새를 쌓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성채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백성의 선의에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

오늘날의 현명한 리더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이렇게 들어야 한다.

“지혜롭고 선의를 가진 리더가 조직의 발전을 도모하면서 자신의 임기를 오래 유지하려면 잠재적 경쟁자들을 내치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 적절한 보상과 약속을 제공함으로써 리더를 돕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

202001호 (2019.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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