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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7) 생각보다 더 가까운 실크로드 

 

보통 실크로드 하면 우리와는 거리가 먼 서역의 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한반도와 만주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북방 초원 실크로드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왕성한 교역을 했고, 삼국통일 이전까지 중국뿐만 아니라 만주, 몽골고원의 유목민족을 통해 초원 실크로드 국가들과도 활발하게 교역을 했다.

▎실크로드였던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2015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로 들어가서 8일 동안 사마르칸트·부하라·히바·우르겐치를 거쳐 다시 타슈켄트로 돌아오는 1200㎞여 일정으로 실크로드를 여행했다. 이 지역의 소그드 상인들은 삼국시대, 남북국 시대에 한반도까지 장사를 하러 다녔고 고구려 사신들은 7세기 사마르칸트까지 찾아와 외교전을 펼쳤다. 실크로드와 관련된 자료를 찾다 보면 중국과 같은 농경정착민들의 편향된 사서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앞으로 고고학적 발견이 이뤄지면 고대 한반도와 중앙아시아의 교류도 더 많이 밝혀질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싸울 때 “너 몇 살이야?”,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게”라며 나이에 따른 질서를 강요하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이는 21세기 한반도가 유교적 질서를 따르는 농경문화가 강한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농사는 정해진 장소에서 살면서 매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구조다. 특히 계절에 따른 영농 노하우가 필요해서 연륜이 축적된 노인의 역할이 커지며 대가족적인 집단성을 강화한다.

그로 인해 농경문화에서는 가부장적 권위와 연장자를 우대하는 집단적인 서열문화가 존재한다. 고대사회에서 중원과 양자강 이남 지역은 전형적인 농경문화권에 해당되고, 초원의 흉노, 선비, 스키타이 등이 전형적인 유목문화권에 해당한다. 한민족과 만주인, 심지어 일본인의 공통 조상 대부분은 유목·농경의 복합적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후대로 갈수록 농경문화가 강화돼갔다.

유목·농경의 복합 문화를 가졌던 고대의 한민족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역 앞에 있는 실크로드 지도.
한반도는 고려 중기 이후 유교문화의 영향이 거세지면서 자신들의 출발점이었던 북방초원의 문화를 망각하고 중국 중심의 유교·농경문화에 익숙해져갔다. 만주와 한반도 문명의 뿌리였던 초원문명권, 중국의 수나라, 당나라와 대등한 균형을 이뤘던 고구려를 계승하기보다는 소중화를 자처하며 중화문명권에 편입되려고 노력해왔다. 한국전쟁 이후부터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해양세력에 편입되고 북한, 중국에 가로막혀 유라시아 대륙과 단절된 섬나라 아닌 섬나라가 된 아픈 역사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민족은 초원의 길을 통해 선사시대부터 유라시아 문명을 받아들였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한반도와 북방초원(만주, 몽골, 중앙아시아)의 문명이 가까워진다.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로 진출한 이유는 당시 금값에 버금가는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모피를 얻기 위해 사냥했던 길, 모피를 운반했던 길에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놓였다. 러시아 모피 사냥꾼들이 거주했던 요새들이 시베리아의 중심 도시들이 됐다. 시베리아의 담비가 씨가 마를 정도로 이 길로 실려 나갔다. 고조선·고구려·발해·신라·고려에서도 모피는 중요한 수출 상품이었다. 특히 백두산 일대에서 나는 담비 모피가 인기 있어서 소그드 상인들도 발해에 담비 모피를 사러 다녔던 ‘담비의 길’이 러시아 학자에 의해 발굴되기도 했다. 기원전 7세기 제나라에서 고조선의 표범 가죽을 매우 비싼 값으로 수입했던 기록도 남아 있다.

한반도에서 만주·몽골고원·중앙아시아·동유럽에 이르는 건조한 초원 실크로드는 광대한 광역생활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중국에서 전파되었다고 믿는 수많은 문화와 문물의 원류가 중국 너머의 서역과 실크로드에 있었다는 사실도 우리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 민족은 삼국통일 이전까지는 중국보다는 초원 실크로드와 더 친숙한 민족이었을 것이다. 필자가 학교를 다니면서 고대에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배웠던 수많은 문화와 문물의 원형을 이번 실크로드 여행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분포된 빗살무늬토기와 세형청동검은 청동기 시대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농경정주민적인 문화보다 초원의 유목적 문화가 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어가 우랄·알타이어에 속한다는 것에는 논란이 있지만 마땅한 대안 논리도 없다. 우랄·알타이어 설을 받아들인다면 한국어는 북유럽 핀란드어와 친척관계다.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민족들의 언어도 우랄·알타이어계로 우리말과 비슷비슷하다. 한국에 취업하러 오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석 달이면 한국말로 웬만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하고, 한국 인도 우즈벡어나 터키어를 배울 때 일본어처럼 몇 달이면 쉽게 배울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우즈베키스탄 바로 옆에 있는 키르기스스탄의 말과 한국말이 유난히 비슷하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흉노·선비·돌궐·거란·여진·몽골·만주족들과 부대끼며 살아왔고, 이들을 통해 유라시아 초원 실크로드와 바로 연결돼 있었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소주는 원래 기원전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몽골제국이 압바스 왕조를 점령했을 때 농사를 짓는 서아시아인들에게 증류기법을 배워서 쿠빌라이 칸이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 몽골인들이 고려에 머물 무렵 개경 등지에서 빚기 시작했다. 몽골 사람들이 동물의 젖으로 빚었던 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곡물로 빚은 소주가 되었고 유럽으로 건너가서는 보드카와 위스키가 만들어졌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이슬람 국가지만 남자들은 술을 잘 마시고 한국에서처럼 ‘원샷’ 하는 문화가 있다. 가부장적 가족문화로 우리나라 몇십 년 전처럼 중매결혼이 대부분이고 남성의 지위가 높고 교육열이 매우 높다.

몽골제국 시대의 국제 공용어였던 위구르어가 고려 말, 조선 초 한반도에도 엘리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신숙주 같은 엘리트가 위구르어를 잘해서 몽골제국의 이슬람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세종의 찬란한 과학적, 학문적 업적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필자가 방문했던 실크로드 유적지 곳곳에서도 한반도에 영향을 끼쳤던 고대 현지 문화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거쳐 사우디아라비아에 가는 것보다 북방 초원을 거쳐 핀란드에 가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헝가리를 간다면 몽골 초원만 지나면 헝가리 초원이 그리 멀지 않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메르카토르 도법을 사용한 지도는 극지방으로 갈수록 면적이 넓어 보인다.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린 지도에서 그린란드는 남아메리카만큼 커 보이지만 실제 면적은 남아메리카의 1/8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듯 메르카토르 도법은 극지방으로 올라갈수록 면적의 왜곡이 심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정치적인 목적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19세기 영국은 대영제국의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메르카토르 도법을 사용한 세계지도에 자신들의 식민지를 표시해 곳곳에 걸어두었고, 또 소련과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위상을 나타내기 위해, 캐나다나 미국 등 비교적 북쪽에 위치한 국가들은 자국의 강하고 큰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메르카토르 도법을 사용한 지도를 주로 사용해왔다. 한편, 냉전시대 미국에서는 소련이 크게 보이는 메르카토르 도법의 세계지도를 일부러 사용하기도 했다. 독일 역사학자 아르노 페터스는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만든 지도가 유럽과 북아메리카 등을 중심으로 크게 그려져 있어 서구 우월주위를 담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적도와 가까운 제3세계, 개발도상국들을 작게 그림으로써 식민주의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만주의 대흥안령에서 몽골 초원, 카자흐 초원을 거쳐 동유럽까지 동서 1만5000㎞, 남북으로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초원지대는 유목민들에게 고속도로였다.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이 초원지대에서 유목제국의 흥망성쇠에 따라 세계사는 격동을 겪었으며 상업과 문명은 끊임없이 이 초원벨트에서 교류했다. 몽골제국이 유럽을 침공했을 때 헝가리 평원에서 몽골고원의 카라코룸까지 일주일만에 주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대에 몽골 초원에서 한반도까지는 4일 거리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구본 위에 실크로드를 그린 지도.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린 지도를 보다가 지구본 위에 그린 지도를 보면 실제로 북방 초원지대가 한반도와 생각보다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라시아 초원의 고속도로는 구석기시대부터 백두산의 흑요석, 유라시아 전역에서 발굴되는 비너스상을 통해서 한반도에 선진 초원문명을 전달해주는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목문화는 목초지를 따라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구조다. 이는 중앙아시아, 몽골 유목민들이 오늘날에도 게르라는 텐트식 가옥에서 생활하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정주가 아닌 이동식 생활에는 텐트를 정리하고 길을 인도하는 젊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따라서 유목문화에서는 젊은이에게 의지하는 능력주의 문화가 나타나게 된다. 새의 깃털로 장식한 조우관은 한민족의 상징처럼 여겨지는데, 스키타이와 흉노에서 유래한 풍습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에서 조우관을 관모로 썼는데, 이는 조류를 숭배한 유목민들의 샤머니즘적 요소가 반영된 것이다. 한반도에는 고려 말, 조선 초까지 온돌, 양반다리 등 유목적 문화와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지만, 조선 중후기를 거치면서 농경문화와 주자학적 세계관이 강해졌다.

한민족의 역사도 농경과 유목의 관점에서 다시 편집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민족의 주류를 형성한 예맥족과 퉁구스족은 요하의 동쪽 지역과 한반도에서 유목·정착 복합 문화를 이뤄온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농경정착민적인 문화가 더욱 강한데, 유목수렵 문화가 상존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기원전 3000년경부터 농경문화가 시작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옥천 대천리 신석기 유적에서는 기원전 3500~3000년경의 보리와 밀이 발굴되었고, 진주 평거동 신석기 유적에서는 기원전 3000~2만7000년경의 조·기장·콩속 종자·팥속 종자 등이 발굴됐다. 고성 문암리 신석기 유적에서는 상하 2층으로 구성된 밭의 하층이 발굴되어 그 밭이 만들어진 기원전 3000년경부터 농경문화가 본궤도에 올라 있었음을 보여준다.

충청북도 청원군 소로리에서 1만3000~1만5000년 전의 고대벼 18톨, 유사벼 41톨 등 볍씨 59톨이 발견되었는데 중국 후난성 옥천암 동굴에서 출토된 볍씨보다 2000~4000년 전의 볍씨로 세계 최초의 볍씨로 확인됐다.

물론 당시에는 구석기 빙하기의 말기라서 황해, 현해탄이 없이 한반도, 일본열도, 중국대륙이 한 덩어리로 붙어 있어서 한반도라고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세계 최초의 벼농사 흔적이 한반도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인류사에 커다란 의미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후 벼농사는 동남아, 인도 지역에서 더 활발하게 지어졌고, 한반도에서 기원전 1000년경부터 재수입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400~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탄화미가 여주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10세기 전후에 한반도에 벼농사가 전해지고 삼국시대를 거쳐 몽골제국 시대에 벼농사가 본격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에는 약 3만 개에 이르는 고인돌이 있는데, 남방기원설, 북방기원설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엇갈린다.

필자의 DNA를 분석해보니 동남아인의 DNA가 일부 포함돼 있었는데 농사의 전래와 더불어 한반도에 이주한 조상들이 남긴 DNA 흔적일 수도 있다. 한반도 고인돌에서 유럽 켄트족에 가까운 DNA를 가진 초장두형 유골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에 따라 고대 인도의 아리안족이 쌀농사와 함께 도래했다는 주장도 나와 흥미롭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007호 (2020.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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