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윤보다 인재
|
2. 중앙보다 지역독일의 히든챔피언들은 지역에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독일에는 보덴슈텐디히(bodenständig)라는 말이 있어요. 영어로는 ‘down to earth.’ 두 발이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처럼 기초가 튼튼한 사람, 견실한 기업을 뜻하는 말로, 굉장한 극찬입니다.” 독일의 격언을 설명하며 예로 든 기업이 밀레와 파버카스텔이다. “밀레 가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대표적인 독일 히든챔피언입니다. 본사가 귀터슬로(Gütersloh)에 있어요. 들어보셨나요? 귀터슬로는 NRW주에 있는 아주 작은 도시예요. 인구도 얼마 안 돼요. 이 지역에 있는 우수한 인재들이 밀레에 갑니다. 바이에른주 뉘렌베르크(Nürnberg)에서 창업한 파버카스텔은 260년 동안 연필만 만들고 있어요. 해외로 이전하지도 않고, 그 지역에서 직원들도 대를 이어 근무하지요. 당연히 지역 기업 충성도가 높아지고, 지역 경제가 활성화됩니다.” 독일 사회 깊이 자리 잡은 ‘신뢰’ 덕분이다. 2008년 금융위기에도 독일 경제는 재정건전성과 고용안정성 덕분에 성공적으로 위기를 극복해 주목을 받았다. 김 대표는 당시 독일 지역 은행 사례를 들었다. “당시 기업에 자금을 대출해준 지역 은행들은 상환금을 바로 회수하지 않았습니다. 기업이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지만 곧 지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는 “지역과의 친밀감, 연계성이 생각했던 것보다 높았다”며 “독일에서 ‘반기업 정서’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중소·중견 기업들이 지역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신뢰 관계를 형성해온 덕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3. 외형보다 실리“외형(face)이 아니라 실리(fact)를 추구합니다.” 김소연 대표는 반려견 목줄을 만드는 기업 ‘플렉시(FLEXI)’ 사례를 들었다. “개 목줄 만드는 회사라고 하면, 액세서리 정도로만 여기기 쉬운데, 50년 역사를 가진 이 회사는 목줄 아이템으로만 195개 제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점유율 70%를 차지합니다. 이것 하나로 승부하는 데 얼마나 많은 혁신과 정성이 들어갔을지 상상해보셨나요?” 그가 반문했다. 그는 “독일의 ‘실리’ 위주의 철학이 하나의 아이템에 오랫동안 집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김 대표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열쇠 뭉치를 꺼내 들었다. “제가 독일에서 갖고 다니는 열쇠인데 다섯 개입니다. 굉장히 무거운데, 디지털 도어록이 없는 독일은 열쇠 문화입니다. 그리고 이 열쇠는 절대로 복제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열쇠 기술이 정교하기 때문에 오히려 보안과 개인정보를 지켜주는 열쇠 문화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 대표가 덧붙였다. “열쇠 하나뿐일까요? 독일은 선박, 용접, 커팅 기술에 이르기까지 생산기술이라는 ‘뿌리 기술’이 충분히 성숙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디지털 도어록이 일상화된 한국에선 경제 원동력이 ‘빨리빨리’였고, 경쟁 우위를 잡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국 중소·중견기업 중 70% 이상이 자기 기술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혁신하고 자체 기술을 가지려면 결국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팩트에 집중했을까요?”
4. 소유보다 공유김소연 대표의 역할은 한독 간 비즈니스에서 중간자 역할이다. 기업 간 파트너십에는 유독 할 말이 많아 보였다. 특히 독일의 ‘공유 문화’를 배우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기업 의존도가 큰 한국 경제가 큰 기둥 하나로 서 있다면 독일은 튼튼하고 작은 여러 개 기둥 위에서 있는 거예요. 각 분야가 골고루 분산되고 협력을 하니 기술력으로 이어지고 시너지를 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김 대표는 ‘공유’의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한국은 음식을 나눠 먹는 문화는 잘돼 있지만, 지식이나 기술에서는 배타적입니다. 학교 다닐 때 요점 정리 노트는 나만 갖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요. 기술 공유가 잘 안 되다 보니까, 처음부터 다 다시 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김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독일 기업은 공통분모가 있는 기업 간 모임이 잦다. 기업이 자사 연구소를 두고도 공동 투자금을 모으거나 협력해 기술을 개발, 적용하는 네트워크가 잘 갖춰져 있다.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석좌 교수가 말한 ‘클러스터(cluster)’ 형성과 비슷한 맥락이다. 독일 남서쪽 슈바르트발츠 시계 클러스터가 경제 대공황과 일본 시장에 밀려 무너진 적이 있었다. 이때 시계 클러스터가 사라진 자리에서 의료기기 클러스터가 태동했다. 축적된 ‘정밀공학기술’이 기반이 되고, 지역 네트워크가 살아 있어서다. “B2B 영역에서는 고객과 장기적인 관계가 중요한데, 센터에 입주하는 한국 기업들은 주변 맥줏집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기술을 논의하는 풍경을 매일같이 마주하게 됩니다. 비즈니스 거리감이 좁혀진다는 건 컨소시엄을 이룰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키워드이죠. 독일에서는 개별 기업들이 컨소시엄 형태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정부에 건의해 실행하는 경우도 많아 기술 공유가 자연스럽습니다.”
5. 속도보다 방향독일 기업들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속도보다 방향을 중시해서다. 특히 자신들의 단점을 보완하는 ‘방향 전환’에는 매우 적극적이다. 독일 경제는 이제 IT 분야에서의 변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소연 대표는 정부 경제정책 방향이 기업 향방을 좌우한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올해 6월 독일 정부가 2차 추가 경정안을 발표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두 번째다. 주제는 ‘미래 먹거리 산업’이었다. “1차 추경안이 ‘소상공인 살리기’로 자금을 푸는 것이었다면, 2차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강조했다. “독일에서는 코로나19 이후 오히려 미래기술 산업에 대해 앞당겨 생각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위기 때 오히려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는 게 기저에 깔려 있어요. 원래 독일은 ‘친환경’ 의식이 높은 나라인데, 오히려 코로나19 이후 어젠다가 되고 경기부양책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미래 산업의 방향을 정한 이상, 독일 기업들은 친환경·에너지 부문에 박차를 가할 겁니다.”김소연 대표는 인터뷰 말미에 “한국과 독일은 ‘산업적 공생관계’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적 이슈가 경제, 산업 파트너에 영향을 주는 이웃 국가는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지만 독일과 한국은 역사적으로 부담이 되는 게 없고 분단의 역사와 제조 기반의 강국이라는 점에서 공통점도 있습니다.” 협력 사례도 언급했다. 아우디의 첫 양산전기차 이트론(e-tron) 시스템에 삼성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가 장착됐고, 폴크스바겐 전기자동차 배터리의 전략적 파트너로 LG화학, 삼성 SDI, SK이노베이션이 참여하고 있다. 김소연-슈뢰더 NRW연방주 경제개발공사 한국 대표는 “한국 기업은 이제 글로벌 플레이어로 협력할 수 있는 미텔슈탄트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며 “더 많은 한독 기업 협력 사례가 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