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출시된 모바일 게임 ‘랜덤 다이스’는 국내 게임업계에 신선한 충격파를 던졌다. 쟁쟁한 대형사들이 화려한 그래픽으로 유저들을 유혹하는 가운데, 단출한 그래픽과 콘셉트로 구글 플레이스토어 매출 순위 톱 10에 이름을 올리면서다.
▎창업 초기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는 어떤 일이든 ‘업의 본질’부터 고민하게 하는 습관으로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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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게임 ‘랜덤 다이스’를 개발한 곳은 지난 2015년 설립된 ‘111퍼센트(%)’다. 설립 당시 ‘1인 기업’으로 출발한 111%는 지금도 전 직원 80여 명 규모의 중소기업이다. 하지만 랜덤 다이스 하나만으로 2020년 한 해 동안 1500억원 이상을 벌어들였다. 전체 매출은 1600억원, 영업이익만도 500억원에 달한다. 한국 게임산업을 이끄는 이른바 ‘3N’ 등 조 단위 매출을 기록한 공룡들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대형사 대비 2%에 못 미치는 인력 규모를 고려하면 분명 놀라운 성과다.111%를 이끄는 수장은 올해 34살의 청년 CEO 김강안 대표다.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인재 같지만, 김 대표는 대학 시절부터 숱한 창업에 도전해왔다. 실패를 거울 삼아 다시 일어서기를 9번이나 반복한 ‘9수생’이 오히려 그의 닉네임에 더 어울릴 법하다. 창업과 실패, 피벗으로만 치면 이미 창업 베테랑 격이다.연세대 컴퓨터과학부 10학번인 김 대표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줄기차게 창업의 문을 두드렸다. 2013년 교내 창업지원단이 주최한 ‘청년CEO경진대회’에서 받은 최우수상이 그 시작. 부상으로 받은 창업지원금 1000만원을 고스란히 털어 넣어 ‘스탬프로드’라는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나섰다. 연인·커플에게 데이트코스를 짜주고, 코스 완주 도장을 받으면 리워드를 지급하는 서비스였다. 6개월에 걸쳐 개발한 이 앱을 1000명이 내려받았지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다.“첫 사업부터 보기 좋게 망했어요. 1000명 중 코스를 완주한 커플이 딱 1쌍이었죠. 그분들께 마케팅용 경품을 몰아드리고 응원하면서 사업도 접었습니다. 만든 사람만 재미있게 생각했지, 시장성은 제로였다는 걸 알게 됐어요. 본질을 놓쳤던 거죠.”이후로도 풀 죽은 ‘학생 CEO’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안면 인식 기술이 미처 상용화되지 않았을 때, 눈·코·입을 분석해 잘 나온 셀카를 추천해주는 서비스를 내놓았는가 하면, 스마트폰을 흔들면 허공에 글자가 써지는 앱도 내놓았다. 개발한 앱만 30개, 서비스 수만 해도 9개에 이른다. 김 대표는 “계속 도전한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연이은 실패가 성공의 발판 되다
▎지난해 10월 열린 111% 창립 5주년 기념 파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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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대신 망할 거면 빨리 망하자고 생각했죠. 안 되면 바로 방향을 틀 수 있게요. 망하고 다시 만들고, 또 망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스피드예요. 자본과 인력을 갖추지 못한 작은 스타트업일수록 안 되는 아이템은 빨리 접고, 피드백을 바탕으로 빠르게 피벗하는 게 생존 비결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개발 기간이 짧고 수익도 빨리 거둘 수 있는 아이템을 고민하던 차에 눈에 띈 게 게임이다. 단 두 명이 개발한 ‘길건너친구들’이란 호주 게임이 글로벌 히트로 석달 동안 90억원을 벌어들였다는 뉴스가 눈에 들어왔고, “이거구나”라며 무릎을 쳤다.“최대한 빠르게 캐주얼한 게임을 만들고 수익이 들어오면 바로 다시 투자해서 새로운 게임을 만드는 선순환 구조가 가능하다 생각했어요. ‘비비탄’이라는 게임을 혼자 개발했는데, 실제로 과금하는 유저가 늘면서 바로 수익이 나더군요. 무료 게임을 즐기기 위한 광고수익도 쏠쏠했죠. 외부 투자를 받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라 처음부터 자체 수익을 내기로 결심했고, 게임이라는 사업 아이템이 그걸 가능하게 해주었어요.”초기에는 게임 개발과 디자인 모두를 김 대표 혼자만의 개인기로 해결했다. 수십 개 앱을 만들고 실패한 경험 덕에 기획과 개발부터 간단한 디자인까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비비탄’에 이어 ‘포퐁’과 ‘찰스’가 연이어 히트했고, 그때 처음으로 마케터와 디자이너, 개발자를 1명씩 채용했다.
게임이라는 업의 본질을 파고들다‘소경 문고리 잡는’ 식의 성공으로 넘기기에는 젊은 CEO의 도전기가 충분치 않다. 데이트코스를 짜주는 앱으로 첫 도전에서 실패를 맛본 김 대표는 인터뷰 초반부터 언급했던 ‘본질’의 가치를 줄곧 강조하는 범상치 않은 포스를 드러냈다.“개발자만 만족하는 건 본질이 아니에요. 어떤 기업이나 서비스든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걸 몇 번의 실패 끝에 알게 된 거죠. 111%를 있게 한 랜덤 다이스가 대표적이에요. 111%가 지금까지 개발한 게임만 150개가 넘어요. 랜덤 다이스는 심플한 그래픽이지만, 게임을 즐기는 유저가 뭘 원하는지 기획 단계부터 철저히 고민한 결과예요.”랜덤 다이스는 다양한 특성의 주사위를 설치해 몰려오는 적을 막는 타워 디펜스 게임이다. 1대1, 혹은 둘이서 적을 막는 ‘전략형 대전’ 게임으로 분류된다. 수백 번 실패 끝에 김 대표가 꿰뚫어낸 전략 대전 게임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고민 끝에 떠올린 건 다름 아닌 축구였다.“골을 넣으면 이기는 단순한 룰 같지만, 11명 선수 각자 포지션과 역할이 나누어져 있잖아요. 승리라는 본질을 두고 정해진 시간 안에 수많은 전략을 세우는 게 바로 축구라고 생각했어요. 승리의 재미를 극대화하는 건 뭘까요? 바로 골이죠. 그중에서도 역전골, 그것도 종료 직전 터지는 역전 ‘극장골’이 축구가 주는 재미의 본질이라고 결론 내렸어요.”득점과 역전, 반전이 주는 쾌감은 랜덤 다이스 설계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김 대표는 주사위 하나를 추가할 때 역전이 얼마나 일어나는지, 반전카드는 언제 어떻게 써야 하는지, 보스는 언제 출현시킬지를 “반쯤 미쳐서 파고들었다”고 돌이켰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디자인은 심플해졌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하지만 파고들수록 무수한 전략이 가능한 게임이 탄생했다.“랜덤 다이스 성공 이후 본질에 충실하려는 게 습관이 돼버렸어요. 아마존 CEO 베이조스의 인터뷰 중 ‘10년 후에도 바뀌지 않을 가치에 주목한다’는 구절을 특히 좋아해요. 수천 년 전부터 변하지 않은 인간의 본질을 파고드는 데 성공한다면 어떤 아이템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랜덤 다이스의 성공은 개발과 수익, 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루 매출 3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올라서는 순간 과감하게 1억원 전체를 마케팅에 투자하는 방식이다. 안정적인 매출에 비례한 마케팅 확대 전략은 게임 흥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히는 리텐션, 즉 재방문율을 높이는 바탕이 됐다. 게임업계에선 보통 리텐션율 60%를 넘는 작품을 ‘갓게임’이라 부른다. 현재 111%는 랜덤 다이스를 비롯해 4개 정도의 게임이 리텐션율 60%를 넘어섰다.‘비비탄’ 성공 이후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한 팀을 꾸리는 ‘셀’ 조직은 창업 이후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은 조직 구성의 원칙이 됐다. 스피디하면서도 효율적인 사업을 위한 조직문화 정립을 강조하는 김 대표의 고집 때문이다. 현재 111%에는 개별 프로젝트를 맡은 셀 6개가 돌아가고 있다. 각각의 셀은 개발자 2명과 아트(디자이너) 부문 3명으로 꾸려진다. 창업 초기 셀마다 1명이던 아트 파트도 이펙터, 애니메이터 등으로 세분화했다.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순간, 해당 셀이 해체되고 또 다른 셀로 다시 구성된다.“학생 때나 창업 초기에는 모두 가족같이 지냈어요. 일을 못해도 가족이니 안아줘야 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분위기가 기업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라는 걸 깨달았어요. 조직 자체도 팀 문화로 바뀌고 있었고요. 좋은 사람과 일하기보다 일 잘하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과 일하도록 하는 기업문화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거죠.”기업 규모가 커지면서 조직문화 정립을 고민하던 김 대표의 눈에 든 건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규칙 없이 일한다’는 넷플릭스의 문화였다. 게임의 재미라는 본질에 천착했듯, 좋은 인재를 데려와 마음껏 일하도록 하는 게 경영의 본질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최고의 인재가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기. 111%가 추구하는 조직문화입니다. 실제로 111%에는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어요. 휴가도 마음대로 쓰죠. 하루 4시간인 코워크타임만 지키면 됩니다.”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근무 기강은 “자율에 붙는 책임으로 상쇄된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최고의 대우와 근무 환경을 제공하는 만큼 직원 개개인이 업계를 리드하는 퍼포먼스를 발휘하는 것이 김 대표가 추구하는 111%의 기업문화다. 실제로 김 대표는 올해 평균 연봉 50% 인상을 단행했다. 국내 웬만한 대형사보다 많은 게임업계 최고 연봉이다. “당신은 A급 인재이니, 마음껏 실력을 뽐내라. 그러면 회사는 더 많은 연봉을 줄 수밖에 없다.” 김 대표가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말이다.새로운 게임 룰만 연구하는 전담 조직도 업계에서 찾기 어려운 모습이다. 바둑이나 장기가 태어난 것처럼, 세상에 없는 완전히 독창적인 룰만 연구하는 조직이다. 김 대표는 “새로운 룰을 적용한 게임 30개를 개발했고, 올해 내부 테스트를 거쳐 10개를 출시하겠다”고 밝혔다.자신이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는 문화는 비단 직원들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김 대표 역시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또 다른 도전을 준비 중이다. 지난해 설립한 자회사 ‘쭈(ZZOO)’는 미니게임 개발과 더불어 웹툰 스튜디오 역할을 맡고 있다. 전속 작가와 아트팀을 구성해 웹툰 히트작을 만들고, 이를 강력한 IP로 키운다는 구상이다.
※ 파워리더 선정 이렇게 했습니다IT-컨슈머 부문 2030 유망주는 2020년 12월 29일부터 올해 1월 7일까지 심사위원 10명의 도움을 받아 선정했다. 심사위원은 IT업계 CEO와 관계자, 벤처캐피털(VC) 대표와 심사역 등으로 구성했다. 각 심사위원이 최대 5명의 유망주를 추천했고, 이 과정을 거쳐 총 40여 명이 후보자로 올랐다. 이 중 중복 추천을 가장 많이 받은 순으로 올해의 유망주를 선정했다.
심사위원: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 권오형 퓨처플레이 파트너, 김경범 알토스벤처스 고문, 김준호 딜리셔스 대표, 이기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이사, 이혜민 핀다 대표, 신선미 레이니스트 매니저, 장동욱 카카오벤처스 수석팀장, 천세희 채널톡 COO, 최경희 소풍벤처 파트너(가나다순)-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김현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