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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24) 스스로 그러하도록 빚다, 이헌정 

여행을 떠나서 내 도자기를 본다 

사진 김경빈 기자
자연스럽다는 말은 ‘스스로(自) 그러하다(然)’는 뜻이다. 작가 이헌정(54)의 기물은 자연스럽다. 흙이 물과 불을 만나 공기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드러낼 수 있도록, 조금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그는 옆에서 도울 뿐이다. 서울 용산구 박여숙화랑에서 1월 28일까지 열리는 전시 ‘이헌정의 도자, 만들지 않고 태어난’은 ‘만들지 않고 태어난’ 작품이 어떤 것인지 한눈에 느껴볼 수 있는 자리다. 도자기, 도자 조각, 도자 설치, 도자 건축을 선보여온 그가 이번에 집중한 작품은 도자 의자다. 역병으로 인해 멈춘 시간과 닫힌 공간 속에서 묵묵히 흙을 빚고 불을 붙여 ‘탄생시킨’ 신작들이다. 다들 부드럽고 듬직하고 따스하다. 지치고 고단한 사람은 모두 앉아 좀 쉬어 가라는 듯.

▎이헌정 작가의 도자는 ‘각’이 있되 ‘모’가 나 있지 않다. 뜨거운 가마 속에서 절대자의 손으로 완성된 흔적은 자연스럽다.
미대는 어떻게 가게 됐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뜸 “4년제 대학을 가려다 보니”라고 답했다. “아버지가 고1 때 돌아가시고 방황을 많이 했어요. 고3이 되니까 정신이 번쩍 나더라고요. 1년을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다시 더 노력해서 홍대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아버지는 인천의 고깃배 선주였다. 부자(父子)는 주말마다 바다로 갔다. 아버지는 배 위에서 어린 아들을 바다로 던져 넣었고, 아들은 헤엄을 쳐서 다시 배로 기어올라왔다. 서해에서 출발해 동해로 돌아온 적도 있다. 병상에 오래 계시다 하늘나라로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바다는 그에게 아버지가 됐다.

“바다가 참 좋아요. 수업 땡땡이치고 강릉 경포대로 바다 보러 간 적도 있어요. 작업실 이름도 ‘바다(BADA)’라고 붙였죠. 옥빛을 내는 유약도 저는 ‘태평양’이라고 불러요.”

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난 것도 바다를 곁에 둔 도시였기 때문이었을까.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예요. 어딜 가든 자유롭게 사는 인간이 되고 싶었죠. ‘조금 더 자유롭게’가 제 삶의 목표입니다. 유학하면서 ‘히피’를 주제로 논문도 썼으니까요. 경쟁이 심한 뉴욕보다 샌프란시스코가 더 끌리더라고요.”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은사 로버트 라스뮤젠은 한국인 제자의 자유로운 영혼을 따뜻하게 보듬어주었다. “넌 작업을 너무 열심히 해. 그렇게 살지 마. 그냥 즐겨.”

여행은 세상과 나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방법


▎1, 2. 박여숙화랑 지하 1층 전시장 모습. / 3. 작업 중인 이헌정 작가. / 4. 이헌정 작가의 스튜디오 내부. / 5. 이헌정 작가의 스튜디오 외부.
자유로운 영혼이라면 여행을 좋아하겠다.

그렇다. 내 인생을 상징하는 단어가 여행이다.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여행과 예술은 어떤 관계인가.

내 생각에, 여행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예술이다. 행사를 위해, 전시를 위해, 또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자연스럽게 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여행이 예술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왜 그런가.

작가는 세상을, 또 자기 작품을 객관화된 시각으로 봐야 한다. 고집이 너무 센 것은 작가로서 좋은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와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래서 여행이 필요한 것이다.

자주 훌쩍 떠나는가.

여행은 떠나는 것과 다르다. 여행이 완성되려면 귀환이 전제되어야 한다.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여행인 것이다.

여행을 가서 뭘 하나.

글 쓰고, 일기도 쓰고, 드로잉도 한다. 도자기는 안 한다.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정보를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여행의 궁극의 목적은 멀리서 날 바라보는 것이다. 멀리서 바라본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럼 돌아왔을 때 도자기가 객관적으로 보인다. 불경 『화엄경』에서 동자승 선재가 여행을 하면서 세상 이치를 깨닫는 것과 비슷하다.

얼마나 자주 가나.

일 년의 3분의 1은 여행으로 보낸 것 같다. 물론 코로나19 이전 얘기다. 미국 오리건주 몬타나에 있는 한 비영리재단의 이사로 있는데, 정기적으로 이곳에 간다.

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

화장실이 깨끗해야 한다. 그래서 잘 안 가는 나라도 있다.

인상적이었던 여행은.

한 5년쯤 전에 포르투갈에 갔을 때, 산악자전거도 가져갔다. 첫날 멋지게 타고 나갔는데, 그만 넘어져 안경이 깨지고 어깨도 부러졌다. 더 안타까운 것은 거리를 걷다가 BMW 요트 스쿨을 발견하고 매주 토요일에 요트를 배우기로 했는데 무산된 것이다. 요트 운항법을 꼭 한번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기에, 그래도 가르쳐달라고 애걸했지만 “두 손이 온전해도 바다에 빠진다”며 단칼에 거절하더라. 너무 슬퍼서 웃음만 나왔다. 그래서 와인만 마시다 돌아왔다. 하하.

포르투갈 여행을 버킷 리스트로 삼는 사람이 많다.

마침 제2스튜디오가 포르투갈의 한 섬에 있다. 하이브리드적인 장소를 찾다가 포르투갈을 골랐고, 어찌하다 보니 섬 프로젝트도 진행하게 됐다. 제목이 ‘이스트맨(Eastman·동방박사)’이다. 이 섬은 15세기부터 사람들이 살던 곳인데 5개 서로 다른 지역의 흙과 오래된 목재를 모아 5m짜리 의자를 만들었다. ‘자연+인간’의 역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유튜브에서 ‘hunchung lee’ 치면 나온다. 이에 대한 대응처럼, 제주도에 ‘웨스트맨’ 작업도 진행 중이다. 비영리 작업으로, 기업의 후원도 알아보고 있다.

‘완벽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한국적 미학이 바탕

이번 전시는 의자라는 사물의 세계로 깊이 있게 들어간 의미가 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건축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며 익힌 구조적 요소도 녹아 있다. “컬렉터분들도 이번 전시는 왠지 편안하다, 완숙미가 느껴진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지금까지 매번 새로운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스펙트럼을 계속 넓혀 전시를 했다면, 이번에는 하나에 깊게 빠져보았다고 할까요.”

그는 도자기는 우연이 많이 개입하는 예술로, 가마 안에서 무수히 많은 변화가 생기며, 자신은 그저 ‘불 때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도자기 하는 작가는 재료에 선택된 사람들이며, 도자기는 작가를 겸손하게 만드는 매체”라는 것이다. 누군가 완성하는 것을 자신의 노동으로 도와줄 뿐.

이번 전시에는 2020년 만든 신작 35점이 나왔다. 제작에는 각각 한 달에서 석 달 정도 걸렸다. 박여숙 대표는 “이헌정 작가의 작품은 ‘면’이 모여 ‘각’을 이루면서 ‘덩어리’가 되지만, 그 각은 ‘모’가 나 있지 않다”며 “현대적이지만 한국 전통 도예의 멋스러움을 알기에 경쟁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미술평론가 이건수에 따르면, 그의 작품은 ‘완벽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한국 미술의 미적 본질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레에 근거한 전통적인 도예는 절대적인 대칭과 수적인 비례를 근간으로 만들어졌다. 중심점과 중심선이 허용하는 영역을 벗어나기 힘든 원심력의 산물인 것이다. 이헌정의 거의 모든 작품은 이 원심력을 왜곡시키고 탈피한다.”(전시 서문 중)

이 작가는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처음 한 전시에서 물이 줄줄 새는 도자기를 선보였는데, 그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준 사람이 박 대표였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 “전통은 논리로 계승하는 것이 아니다. 깨우친 것이 작품에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런 가치는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먼저 알아보았다. 그의 이름이 대중에 알려진 것도 2009년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에서 할리우드 배우 브래드 피트가 그의 작품을 구입하면서부터다(작가는 이제 제발 ‘브래드 피트의 작가’ 같은 말은 그만 써달라고 읍소했다). “사실 그 전에, 1997년쯤에 ‘빛의 작가’로 유명한 제임스 터렐이 한국에 왔다가 제 작품을 보고 갤러리스트한테 5000달러를 준 뒤 ‘이걸 작가에게 주고 작가가 원하는 걸 만들어달라고 해라’ 하셨대요. 나중에 터렐이 운영하는 작가 레지던시 모집 공고가 났길래 거기 합격해 ‘제가 그때 그 작가입니다’라며 인사하고 싶었지만, 선정되질 못했어요. 안타깝죠.”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영국의 건축가 노먼 포스터, 인도 출신의 설치미술가 수보드 굽타, 미국 랩퍼 퍼프 대디도 그의 고객이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공방 ‘바다’에 빠져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직장인처럼 규칙적으로 작업을 한다는 이 작가는 “나이 오십 전까지는 검증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며 “이제는 차라리 좀 순수해진 듯하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이 한숨 여유로워진 이유일 터다.

코로나19로 여행이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지만, 작가는 다시 어딘가로 마음의 여행이라도 떠날 것이다. 그의 예술은 여전히 계속되어야 하기에.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202102호 (2021.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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