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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25) 아트 실버스미스의 꿈, 이상협 

널찍한 은판을 망치로 두드리고 또 두드려 은 달항아리 두둥실 

실버스미스(silversmith)는 은 세공인을 말한다. 보통 은반지나 은귀걸이 같은 것을 만든다. 작가 이상협(48)은 “평범한 실버스미스가 아니라 ‘아트 실버스미스’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공예를 넘어서는 조각, 실용성을 넘어 눈으로 즐길 수 있는 ‘큰 작업’에 더 끌렸기 때문이다. 현대 금속공예의 중심으로 꼽히는 영국에서 17년을 보내는 동안 그의 ‘영 디자이너 실버스미스 어워드’ 대상 수상작은 런던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에 입성했고, 한국적 미감을 드러낸 은으로 만든 달항아리와 호리병 같은 기물들은 유수의 아트페어와 갤러리를 통해 세계 미술계에 ‘윌리엄 리(William Lee)’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서울 신라호텔 안에 있는 휴크래프트에서 개인전 ‘플로우(FLOW)’를 최근 마친 그를 만났다. 사직동 인근에 있는 어두컴컴한 그의 ‘대장간’은 뽀얀 달덩어리가 탄생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최근 신라호텔 휴크래프트에서 전시를 마친 이상협 작가. 키가 53㎝에 달하는 은 달항아리는 2억원에 육박한다. 금속공예 대가인 일본 무사시노 예술대학의 히로시 스즈키 교수는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끝없이 이어가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는 작업”이라며 “내가 아는 한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할 것”이라고 평했다. / 사진 이상협 작가, 신인섭 기자
우리 시대 문화와 공감대 담긴 미래의 유물 만들고파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안 하고 못 했어요. 공고에 가서 귀금속 주얼리를 배웠죠. 고3 2학기가 되면 취업을 해야 하는데, 선생님께 반지나 귀걸이 같은 세공이 아닌 ‘대공’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전자·설탕통·쟁반 같은 테이블 웨어가 더 끌렸거든요.”

‘우노실버웨어’에 입사해 만난 이종길 실장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모든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마스터들만 한다는 ‘망치 성형’이 대표적이었다.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노동’이었다. 퇴근 후에도 작업을 계속하는 모습을 본 스승은 “잘하고 싶냐?”고 묻더니 “많이 때려보면 된다”는 말만 남겼다. 많이 때려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결과물은 원숙미가 다르다면서.

“이게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보니, 어느 순간 내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하고 싶은 걸 하려면 공부를 해야겠구나, 결국 내가 공부를 해야 하는구나, 대학을 가야 하는구나’ 깨달았죠. 영국이 금은세공으로 유명하고, 형도 ‘이왕이면 영국 영어’라기에 공방 차리려고 모아둔 1000만원을 들고 1997년 9월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습니다.”

두 달 만에 IMF 금융위기가 터졌다. 1450원이던 원 파운드 환율이 3000원을 넘겼다. 유학생 80%가 귀국했다. “네 형도 아니고, 니가, 거길, 왜 가냐”던 친척의 말을 떠올리며 절치부심, 새벽 사무실 청소부터 배달·접시 닦이·공연 현장 보조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악착같이 버텼고, 영국 친구에게 개인 레슨도 받으며 고시 준비하듯 영어를 익혔다. 엑시터 컬리지 오브 아트에서 파운데이션 과정을 마치고 유니버시티 오브 런던 아트 캠버웰 컬리지에 금속공예전공으로 입학했다.

“대학에 가서 배운 건, 제가 만드는 것이 이 시대의 문화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어요. 학자들이 유물을 보면서 ‘이 시대엔 이런 쓰임을 위해 이런 걸 만들었겠구나’ 유추하잖아요. 저도 우리 시대의 문화와 공감대가 담긴 미래의 유물을 만들고 싶었어요.”


▎고드름 꽃, 30×30×20㎝ / 사진 이상협 작가, 신인섭 기자
세계적인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앤서니 곰리의 작업실 아르바이트는 그의 삶에서 굵직한 이정표가 됐다. 어시스턴트 모집에 유수 대학을 나온 학사와 석사들이 줄을 섰지만, 곰리의 선택은 학벌이 아니라 ‘손이 되는’ 조력자였다. 거의 직원처럼 10여 개 작업에 참여하고 30개 이상을 피니싱하면서, 조각이라는 예술의 매력이 흠뻑 빠져버렸다.

“전공을 조각으로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을 만큼 좋아했죠. 그러다가 ‘내가 하고 있는 작업도 조각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3D 형태를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항아리를 좋아하고, 내 생각을 담아 만들면 실용적인 화병으로 쓰일 수도 있지만 오브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되고 싶었던 건 장르 전문가가 아니라 내 머릿속의 생각을 효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작가였던 것이죠.”

자신만의 한국적 미감 보여주기 위해 도예 책 섭렵


▎은잔, 8×8×11㎝ / 사진 이상협 작가, 신인섭 기자
왜 세공보다 대공에 끌렸나요.

나에 대한 인상을 확실히 전달하려면 작고 세밀한 것보다 큰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큰 작업이 임팩트도 크니까. 또 큰 걸 해봐야 작은 걸 만들 때도 디테일을 살릴 수 있을테니까.

역시 은으로 만든 달항아리가 인상적입니다.

처음부터 팔려고 만든 건 아니었어요. 이렇게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던 거죠. 영국에는 실버스미스가 200명 정도 되는데, 언어도 부족한 외국인이 그들과 경쟁하려면 눈에 띄는 센터피스가 필요했어요. 보통 달항아리 키가 42㎝ 정도 하거든요. 처음에 30×30×30㎝짜리를 만들었더니 금방 팔렸고, 35짜리도 팔리고, 40짜리도 팔렸어요. 그래서 53×55㎝까지 올라간 거죠. 그것도 판금 작업으로.

판금 작업이라면.


▎은 기물을 망치로 두드리기 전 토치로 달구는 모습 / 사진 이상협 작가, 신인섭 기자
은은 덩어리로 작업하기도 하지만 보통 은판으로 합니다. 규격은 없고, 원하는 두께와 크기를 말하면 재료상에서 롤러로 밀어 만들어줘요. 저는 보통 10㎏ 단위로 사서 7㎏은 판으로, 나머지는 알갱이로 보내달라고 하죠. 알갱이로는 부속을 만들어요. 전시장에서 보신 달항아리는 두께가 5.5㎜인 11㎏ 판을 망치로 일일이 쳐서 1㎜ 두께로 편 것입니다. 이 작업을 판금이라고 해요.

5㎜짜리를 1㎜로 만들려면 망치질을 엄청나게 해야겠어요.

왼손으로 판을 잡고 살살 돌려가며 오른손으로 망치질을 하는데, 정교함은 왼손에 달렸죠. 각도와 회전 속도를 조절해야 좋은 형태가 나오니까요. 두꺼운 판을 얇게 펼 때는 힘이 필요하지만 일단 형태를 어느 정도 잡고 나면 리듬감과 반동이 더 중요합니다. 오른손으로 수십만 번 같은 힘으로 내리치는데 그때마다 왼손이 그 진동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해서 무리가 많이 가죠. 하루 8시간 작업하는데, 중간에는 밥도 안 먹어요. 밥을 먹으면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거든요. 큰 작업은 갈수록 힘이 들어서 늘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죠. 후배들에게도 힘 있을 때 크게 만들라고 조언합니다.

은 달항아리의 오라(aura)가 대단한데요.


▎호리병, 17×17×23㎝ / 사진 이상협 작가, 신인섭 기자
유럽인들에게 한국의 미감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다행히 어릴적 스승 작업실이 인사동에 있어서 좋은 골동품을 정말 많이 보았던 것이 큰 힘이 됐어요. 스승님도 맘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그걸 계속 보면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주문하셨거든요. 도예 책은 전공자 이상으로 봤을 겁니다. 한중일 가운데서도 한국, 특히 나만의 선과 비율을 찾으려고 고민했지요. 보기만 해도 ‘한국 사람이, 윌리엄 리가 만들었구나’ 알도록.

이상협 작가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달항아리의 경우 우선 굽을 없앴어요. 굽 때문에 선의 흐름이 끊기는 게 싫었거든요. 도자기에서 굽이 필요한 건 유약이 흘렀을 때 깎아내야 하고 가마에서 구울 때 세워놓아야 하니까요. 굽이 있으면 아무 데나 놓아 두기도 쉽죠. 이렇게 굽은 도자기에는 필요하지만 금속에선 없어도 돼요. 나는 전통적인 금속공예를 하고 있지만, 습관적인 공정을 무조건 따라 하고 싶지는 않아요. 두 번째는 주둥이 폭을 좁히고 목을 낮췄어요. 항아리 주둥이가 넓고 목이 올라온 이유는 뚜껑을 덮기 위해서인데 나는 뚜껑을 덮을 게 아니니까. 호리병의 경우 우리나라 것은 한 손에 딱 잡고 따르기 좋은 모양이거든요. 일본이나 중국 것과는 다르게 목을 조금 길게 뽑고, 구의 어깨 볼륨을 조금 더 슬림하게 현대적으로 풀어냈죠.

빗살무늬 작업도 독특한데요.


▎왼손은 기물을 잡고 오른손으로 망치질을 하는 이상협 작가 / 사진 이상협 작가, 신인섭 기자
녹아내림이나 흘림 같은 문양을 개발해서 계속 선보이고 있어요. 바람의 흔적이 만든 듯, 고드름처럼 죽죽 내려온 듯, 색다른 느낌을 주고 싶어서요. 지금까지는 주로 대칭 형태였는데, 비대칭으로도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나요.

군대 있을 때 금속공예 한다고 했더니 운동권 출신의 동기가 그러더라고요. ‘너는 부르주아들을 위해 일하는구나’. 돈 많은 사람들이나 살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닌데. 더 많은 사람과 즐길 방법은 뭘까 생각하다가 ‘아, 박물관에 넣으면 되겠네’ 하고 생각했어요.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대중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작품. 그런 작품을 계속 만들고 싶습니다.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202103호 (202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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