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보딩, 서핑, 스케이트보딩, 힙합을 기반 문화로 한 퀵실버, 스투시, 수프림 등 글로벌 브랜드의 계보를 이을 ‘피치스’가 국내외에서 비상하고 있다. 피치스의 정체성에 대해 모호해하는 사람이 많다. 영상 제작, 패션, 자동차 커스터마이징 등 사업 영역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피치스는 자동차 문화를 코어컬처로 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표방한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인 크리에이터들이 만들어가는 토종 브랜드로서 글로벌 성장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피치스의 크리에이터 스태프 / 사진:Peach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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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 11월 14일 새벽 2시, 서울의 자동차 서비스 메카인 성수동 일대에는 다양한 개성을 뽐내는 차들이 몰려들어 도심 밤거리를 화려하게 밝혔다.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통해 불특정 다수가 약속된 시간, 약속된 장소에 모였다가 사라지는 이날 플래시몹에 자동차 450대가 몰려들었다.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A지점에 도달하면 커피 한 잔, B지점으로 오면 차량용 방향제를 나눠줬다. 이날 모임을 주동한 이는 바로 여인택 피치스(Peaches) 대표. 이날 성수동 일대의 작은 소동으로 인해 그는 경찰에 불려가 조사도 받았다.“자동차를 즐기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코스를 짜고 연대하는 이런 행사는 재미있고 짜릿한 스트리트 문화 중 하나예요. 이 행사는 피치스와 아모레퍼시픽의 브랜드 협업이었죠. 재미있는 행사를 기획하면 자동차를 최대 1000대까지 모을 수 있습니다.”피치스는 최근 자동차 문화를 구심점으로 하는 가장 힙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콘텐트에는 패션, 음악, 자동차 스타일링이 융합돼 녹아 있다. 국내에는 다소 생소한 개념의 이 문화와 콘셉트는 자동차 스트리트 문화가 발달한 미국 LA와 일본 도쿄에는 이미 활성화돼 있다. 영화 [분노의 질주]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피치스의 파급력은 숫자로 증명된다. 피치스의 자동차, 힙합 관련 유튜브 콘텐트는 총 6100만 뷰, 인스타그램 팔로워 12만 명으로 강력한 팬덤 커뮤니티를 보유하고 있다. 이 컬처코드를 향유하는 이들은 고성능·클래식카 스타일링에 열광하는 럭셔리 밀레니얼이다. 최근 전국에서 자동차 뒷범퍼에 피치스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차량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피치스의 팬덤은 차 문화를 즐기는 마니아들이에요. 매달 피치스 스티커를 1500장만 한정 판매하므로 매달 1500대씩 늘어나는 피치스 팔로워들을 도로에서 볼 수 있죠.”
▎여인택 피치스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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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스를 먼저 주목한 곳은 글로벌 브랜드였다. 2018년 나이키는 피치스를 ‘주목해야 할 브랜드’로 선정했고, 지난 수년간 포르쉐, BMW M, 메르세데스 AMG, 현대차, 한국타이어, 삼성 갤럭시, 페덱스, EA스포츠, 워너브라더스, 코카콜라 등과 여러 차례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했거나 논의 중이다. 한편 국내외 힙합 레이블과도 협업해 여러 영상을 제작했다.특히 현대차의 벨로스터 N 프로젝트는 핵간지 영상뿐만 아니라 같은 모델 소유자들의 커뮤니티 문화, 피치스 로고가 박힌 휠캡 생산 등 여러 캠페인 믹스로 구성됐다. 운전자가 자신이 선택한 모델을 기반으로 즐길 수 있는 여러 문화를 색다른 시도로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피치스, 그들은 누구인가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도원에서는 자동차 스타일링이 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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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자동차 관련 영상은 대부분 도심을 질주하는 자동차와 성공한 듯 슈트를 차려입은 운전자가 나오는 이미지예요. 클리셰(틀에 박힌 표현)죠. 젊은 세대도 주류 자동차 소비층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이런 콘텐트에 매력을 느낄까 의구심이 있었어요.”피치스는 2017년경 한 수입차 브랜드 동호회에서 출발했다. 여 대표는 여기서 엑소, 에프엑스 등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했던 김종권 감독과 만났다. 그들은 국내 자동차 문화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다 음악, 패션, 자동차 스타일링을 조합하는 연금술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도는 섹시한 자동한 뒤태를 의미하는 ‘Peaches’가 적힌 스티커를 디자인해 배포하는 것이었다. 피치스 스티커를 붙인 자동차 영상은 곧바로 인스타그램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도쿄에서 열린 포르쉐 전문 튜닝업체 RWB(Rauh Welt Belgriff)의 행사에 두 사람은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가 스케치 영상을 제작했다. 강렬한 비트 음악이 어우러진 감각적 영상을 유튜브에 게재했고 이는 전 세계에서 폭발적 조회수와 공유수를 기록했다.여 대표는 “이때 우리 콘텐트의 전 세계적 파급력을 실감했고 하나의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다”며 “우리가 세운 가설과 아이디어를 대외적으로 검증을 받아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곧바로 두 창업자는 법인을 설립하고 2018년 국내 대표 스타트업 이벤트인 스파크랩 데모데이에서 아이디어와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여 대표는 앞서 요식업 창업 경험이 있어 사업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사업계획을 검증받고 외부 투자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피치스의 발상은 결국 투자로 이어져 누적 투자금 40억원을 유치했다. 피치스에는 한국타이어, 만도 등이 주주로 참여하고 있으며, 최근 신용보증기금의 유망 스타트업 보증제도인 ‘퍼스트 펭귄’에 선정됐다.
▎피치스가 주최한 야간 플래시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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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대표는 자신을 ‘돌연변이’라고 일컫는다. 그는 미시간대 문화심리학 전공, 서울대 사회심리학 석사를 마치고 심리학 교수가 되기 위한 길을 걷고 있었다. 실제 여 대표가 군복무 시절 집필한 『군대 심리학』은 베스트셀러였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 과외 활동으로 디제잉을 배웠고 대학 시절 한인학생회 부회장으로서 주요 20개 대학의 한인학생회를 대형 클럽에 집결해 3500명을 모으는 등 행사 기획에 재능을 보였다. 그는 “전공한 학문을 기반으로 지식을 실제 적용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며 “본질적으로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한 문화사업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후 주변 사람들과 ‘CNP 푸드 그룹’을 창업하고 기업가가 되기 위해 실전 경험을 쌓기도 했다.여 대표를 중심으로 피치스는 현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패션 디자이너, 뮤지션, 캐릭터 디자이너 등 재능과 끼가 넘치는 아티스트 스태프 13명으로 구성돼 있다. 각자 전문 분야는 다르지만 자동차 문화를 사랑하고 즐긴다는 공통점이 있다.“스트리트 문화는 여러 방향으로 파생할 수 있어요. 일본 하라주쿠 스트리트 문화의 대부로 불리는 디자이너 겸 디렉터 후지와라 히로시는 여러 팬덤을 만들며 다양한 문화 브랜드를 만들었죠. 우리 스태프들도 여기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각자의 브랜드로 성장하도록 피치스가 씨를 뿌려주고 싶어요.”
해외 팬덤 기반으로 LA에서 출범
▎피치스의 패션 아이템은 한달에 한번 온라인으로 한정 판매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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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스는 해외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미국 LA를 기반으로 브랜드 협업 영상 콘텐트를 제작하는데 주력했다.“우리가 LA에서 시작한 이유는 피치스가 LA에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었고 LA는 잘 아다시피 자동차 및 스트리트 문화의 본거지이기 때문이었죠. 당시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와 협업이 많았죠. 나이키, BMW, 포르쉐 등에 이어 현대자동차 N 프로젝트는 단일 규모로는 가장 컸어요.”피치스의 감성 제안에 글로벌 브랜드와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이유를 묻자 여 대표는 “우리의 강점은 자동차를 이해하는 폭이 넓다는 점”이라며 “여러 자동차 브랜드를 직접 소유해봤고 그 경험을 기반으로 차의 성능과 디자인을 깊이 이해하고 있어 이를 영상에 잘 녹여낼 수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피치스의 영상 콘텐트는 단순히 멋짐을 넘어 즐기는 문화의 실체까지 깊게 파고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피치스는 LA의 대형 주유소를 개조해 자동차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집결 공간을 조성하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계 대형 정유사 브랜드와의 협업이었다. 피치스가 상상해온 사업들을 하나둘 구체화하는 가운데 2020년 코로나19라는 복병을 만났다.
“피치스의 초기 비즈니스 모델은 B2B 영상 제작이었어요. 하지만 코로나19 상황에서 계획됐던 여러 프로젝트가 불확실성으로 무산됐어요. 이런 상황을 계기로 오히려 자체 브랜드 성장에 집중하기 시작했죠. B2B사업은 매력적이었지만 중장기적으로 브랜드 성장과 자체 상품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피치스의 글로벌 팬덤을 만든 도쿄RWB 행사 스케치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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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상황에서 피치스는 유연하게 비즈니스 모델을 피벗하고 패션 및 자동차 스타일링 굿즈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LA에는 지사만 남기고 상대적으로 코로나19 방역 상황이 좋은 서울로 사업 기반을 옮겼다.2020년 4월 피치스는 자사 웹사이트에서 자체 브랜드 상품을 공식 판매하기 시작했다. 스트리트 문화를 보여주는 개성적인 패션 아이템 외에도 액세서리, 자동차 용품 등을 디자인하고 생산했다. 판매 방식도 파격적이었다. 한 달에 한 번만 한정 제품을 판매한다. 판매가 시작되면 불과 몇 시간 만에 준비된 물량은 소진된다. 오히려 이런 판매 방식이 피치스 제품의 가치를 높여 중고 사이트에서는 판매가격보다 고가로 거래되기도 한다. 여 대표는 “피치스 브랜드 제품은 소수 한정 판매 방식을 유지할 계획”이라며 “한편 최근 슈퍼카 연계 브랜드의 협업 제안이 진행 중인데 브랜드를 세분화해 대중 채널 유통과 오프라인 판매도 곧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여 대표에 따르면 피치스의 2021년 매출 목표는 70억원으로 매출의 70%가량을 굿즈가 차지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쿨내 진동하는 복합문화공간 ‘도원’
▎피치스와 현대 고성능 N의 협업 프로젝트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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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서 추진하던 자동차 마니아들의 복합문화공간 조성 사업을 서울로 옮겨왔다. 성수동 뚝섬역 부근에 자리 잡은 ‘도원’이 4월 29일 공식 개장한다.2314㎡(700평) 규모의 방직공장을 개조한 이 공간에는 ▶차 스타일링 개러지 겸 영상·화보 스튜디오 ▶갤러리 및 자동차 전시공간 ▶파티를 위한 야외 정원 ▶편집숍 ▶2층 스케이트보트 파크 ▶위스키바와 햄버거 매장 등으로 구성된다. 무엇보다도 이 공간에서는 화려하게 변신한 고급차들을 여기저기에서 즐길 수 있어 매력이 가득하다. 이 공간은 신차발표회나 소셜모임 베뉴, 콘서트장으로도 손색이 없다.“이 공간에서 피치스 문화의 실체를 만듭니다. 자동차에 관한 모든 라이프스타일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죠. 이 공간에서 피치스 팬덤이 더욱 강화될 거예요. 자동차 문화의 집합소 혹은 아지트는 많은 남성의 로망입니다.”
피치스는 2021년 이 공간 사업에 우선 집중할 계획이다. 이미 해외에서 도원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여 대표는 “도원을 통해 글로벌 브랜드 협업이 더욱 활성화할 것”이라며 피치스에 몰려오는 협업 제안을 통해 다양한 기회를 만들어간다는 복안이다.
▎피치스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를 아우르는 자동차 문화 기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표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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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까지 피치스 브랜드 가치를 국내외에서 키운 다음 LA, 도쿄, 런던 순으로 다시 해외시장에 진출한다는 로드맵을 갖고 있어요. 최근 해외 유명 편집숍과 입점을 논의하고 있어요. 해외 굴지의 유통망이 피치스에 관심을 두고 있어서 해외시장에서도 기반 확보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어요.”현재 피치스는 자본 논리보다는 ‘멋있다’를 판단 기준으로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시도들을 추구하고자 한다.“여러 곳에서 협업 러브콜을 많이 받고 있는데 정말 하고 싶은 것이나 엉뚱한 기획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어요. 이것이 피치스의 진짜배기 색깔을 만들어내고, 많은 피치스 추종자가 원하는 바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개인들의 꿈을 실현해보는 기업으로서 자유분방함 속에서 성장할 것입니다.”- 이진원 기자 lee.zinone@joongang.co.kr·사진 김현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