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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이 만난 아트 인플루언서(10) 뮤지컬배우 김소현 

데뷔 20주년 맞아 다시 초심으로… “아직 해결 못 한 숙제 있죠” 

사진 김현동 기자
2001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히로인 크리스틴으로 데뷔한 김소현(46)이 데뷔 20주년을 맞은 올해 다시 크리스틴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오페라의 유령]이 아닌 [팬텀](3월 17일~6월 27일, 샤롯데씨어터)이다. 뮤지컬 [팬텀] 역시 가스통 루르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이 원작이다. 김소현은 [오페라의 유령] 350여 차례에 [팬텀] 50여 차례를 더해 총 400여 차례 크리스틴을 노래한, 한국 뮤지컬계에서 깨지기 힘든 기록의 보유자다. 4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스무 살 크리스틴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는 그는 “매일 마지막 공연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할 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는 안 한다”고 했다. 아직 몇 년 더 하고 싶은 눈치다.

▎김소현은 뮤지컬 [팬텀]이 자신에게 ‘한국에서 크리스틴 역할을 가장 많이 한 배우’라는 도장을 찍어줬다고 했다.
데뷔 이래 출산 때를 제외하고 일을 거의 쉬지 않았다는 김소현은 늘 분주하게 움직인다. [팬텀]을 준비하면서도 [명성황후] 25주년 기념 공연을 병행했다. 무대에서 위엄 있는 국모를 연기하다가 연습실에 가면 스무 살 아가씨로 돌아가 발랄한 대사를 해야 하니, 문득문득 자아가 끼어들어 “좀 부끄럽기도 했다”고. “최근에는 어리게 시작해도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역할만 해왔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어린 역할은 오랜만이라서요. 실제 나이와 차이가 많이 나는 역할을 하려니 더욱 몰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사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팬텀]은 남녀 주인공만 같을 뿐, 원작에 접근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두 얼굴의 크리스틴’을 다 연기해본 유일한 배우인 그는 두 크리스틴에 대한 접근 방식도 아예 딴판이라고 했다. “[오페라의 유령]은 노래가 진짜 많지만, 오히려 기교는 크게 필요 없어요. 마지막 곡 말고는 약간의 성악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노래들인데, [팬텀]은 대사가 많으면서도 노래는 기교를 부려야 해요. 그래서 더 어렵죠. 성악 발성을 아예 빼야 하는 곡도 있고, 다양한 목소리와 재주를 보여줘야 해요.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뛰어다니고 춤추고, 정말 체력이 필요한 역할이에요.”

[팬텀]의 크리스틴은 엄청난 ‘고음맛집’이라 어려운 역할인데.

고음은 그 배역, 그 장면에 몰입하지 않으면 소리가 나오지 않아요. [명성황후] 때도 엔딩곡인 ‘백성이여 일어나라’에서 하이 D를 내는 부분이 있는데, 어느 날 파이팅 넘치게 울부짖었더니 지휘자님이 ‘헐크인 줄 알았다’고 하시더군요.(웃음) 그 정도로 상황에 몰입해서 하는 거죠. 어떨 때 그 상황에 몰입하지 못하면 힘도 안 나와요. 고음이나 대사나, 역할에 몰입하는 게 정답인 것 같아요.

2016년에도 [팬텀]에 출연했었죠.

막연히 그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다시 하자고 해서 사실 깜짝 놀랐어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라 망설임 없이 하기로 했죠. 그렇다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는 안 해요.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부담스러우니까요. 즐겁게 하고 싶어서 그렇죠. 미래를 계획하다 보면 거기 도달해도 그런가 보다 싶은데, 못 미치면 괴롭더라고요. 언젠가부터 그저 매일매일 마지막 무대처럼, 오늘의 공연을 소중히 여기기로 했어요.

20년째 크리스틴을 하고 있으니 ‘크리스틴 장인’ 반열인데.

사실 아직도 숙제가 있어요. 제 자아와 너무 부딪치는 캐릭터거든요. 팬텀이 가면을 벗으면 크리스틴이 충격을 받고 도망가잖아요. 그 장면이 너무 힘들어요. 팬텀 역의 규현·박은태·전동석·카이의 외모가 너무 뛰어나서 더 그렇기도 하고요.(웃음) 극으로 봐선 팬텀의 처절한 아리아를 유발하기 위해 도망가는 게 맞지만, 저라면 도망가지 않을 텐데 싶은 마음이거든요. 그 후에 진심을 표현하는 장면을 지난 시즌엔 잘 해결하지 못해서, 이번 시즌의 숙제가 됐어요. 이번에는 꼭 해결해야죠.

크리스틴처럼 오페라가수를 꿈꿨으니 나만의 ‘팬텀’이 있었겠죠.

저의 팬텀은 어머니예요. 사실 노래가 직업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성악을 하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노래를 너무 들어서 어릴 땐 노래 부르기가 싫었거든요. 어머니가 ‘예원 가자’, ‘예고 가자’고 끈질기게 설득하셔도 꿈쩍도 안 했는데, 고2 겨울방학 때 일단 들어보라며 주신 ‘라보엠’ CD에 완전히 매료됐죠. 그때부턴 자는 시간도 아까워 이불 뒤집어쓰고 노래를 불렀어요. 지금도 어머니가 매 공연 1시간 전에 발성연습을 시켜주시고, 뭔가 맘에 안 드시면 공연 5분 전에도 전화를 하시죠. 데뷔 때는 어느 날 하우스매니저가 저더러 ‘벌써 스토커가 생겼다’면서, 중년 여성이 매일 로비에 보자기를 쓰고 찾아와서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린다는 거예요. 어머니가 제가 너무 걱정되는데 매일 티켓 구하기가 힘들어 로비 모니터로 보셨던 거죠. 이 정도면 진정한 팬텀 아닌가요.(웃음)

“오페라는 이루지 못한 사랑”


▎뮤지컬 [팬텀]에서 오페라 스타를 꿈꾸는 크리스틴 역을 맡은 김소현. / 사진:EMK뮤지컬컴퍼니
김소현이 혼자 최고령 크리스틴인 건 아니다. 또 다른 크리스틴인 소프라노 임선혜도 그와 서울대 성악과 동기다. 각각 뮤지컬과 고음악 분야에서 정상에 오른 두 사람이 같은 작품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라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에도 눈길이 쏠린다. “많은 분이 라이벌이라고 하시는데 전혀 아니에요. 각자 분야에서 따로 활동해왔으니까요. 동기이자 친구죠. 어려운 역할을 나눠 맡게 돼서 선혜한테 고맙고, 서로 의지가 돼요. 대학 2학년 합창발표회 때 딱 한 번 듀엣곡을 부른 것 말고는 공연으로 만나는 게 처음이라 굉장히 반갑기도 하고요.”

오페라가수를 꿈꿨는데 어쩌다 뮤지컬배우가 됐나요.

대학원 다니면서 유학을 갈 예정이었죠. 유럽 데뷔를 도와줄 기획자가 나타났는데 이탈리아로 떠나기 나흘 전 한 선배가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을 보라고 추천하신 거예요. [오페라의 유령]이 어떤 작품인지도 모를 때라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어요. 오디션을 심사한 원작자들이 저의 당당함에 놀랐다고 할 정도로 태연하게 노래했죠. 기획자에게 [오페라의 유령]이 끝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끝나고 나니 도저히 떠날 수 없더군요. 뮤지컬을 너무 사랑하게 됐거든요. 곧바로 ‘웨스트사이드스토리’에 들어갔고, 그 후로 쉬지 않고 작품을 했어요.

뮤지컬계 적응이 쉽지만은 않았겠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어려웠죠. 서로 다 선후배에 친구인데, 저만 아는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된 느낌이라 노력을 많이 했어요. 오페라와 뮤지컬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생각도 했죠. 나중에 돌아보니,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소심한 저 혼자 그런 생각을 했더라고요.(웃음)

“오늘이 제일 젊은 마지막 날”

오페라를 포기할 만큼 뜨거웠던 뮤지컬 사랑도 10년쯤 지나자 심드렁해졌다. ‘뮤지컬과 결혼했다’는 마음으로 일에만 매달렸던 만큼, 슬럼프가 오니 뮤지컬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때도 [오페라의 유령]이 그를 도왔다. 상대역으로 지금의 남편 손준호를 만난 것이다.

“대사 한마디, 노래 한 소절이 너무 어려울 때였어요. 8살 연하라는 것만 빼곤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서로 용기를 냈죠. 출산 때문에 공연을 못 하게 되니 무대의 소중함이 새삼 와닿더군요. ‘이대로 은퇴인가’ 생각하니 저절로 슬럼프가 극복됐어요. 아이를 낳자마자 다시 데뷔하는 심정으로 곧바로 복귀했죠. 그런 제 마음을 헤아리고 2~3년간 본인이 일을 쉬면서까지 육아에 매진해 준 손준호씨 덕분이에요.”

데뷔 10년 차 슬럼프를 출산으로 극복했다면, 20년 차 슬럼프를 막아준 건 코로나19다. “이번에도 제 의지와 상관없이 무대와 멀어지게 됐으니까요. 어떤 일을 하더라도 10년 차, 20년 차에 큰 고비가 온다잖아요. 그런데 내일 당장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되니 딴생각할 틈도 없이 저절로 최선을 다하게 돼요. 마스크 쓰고 계신 관객들 보면 매번 울컥하죠.”

오페라에 대한 미련도 있겠죠.

요즘도 오페라 서곡을 들으면 소름이 끼치고 눈물이 날 정도예요. 그런데 뮤지컬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아요. 음악으로 하는 극이니까. 오히려 모국어로 한국 관객과 교감하는 매력이 있죠. 여주인공이 거의 죽는 것도 그렇고.(웃음) 제가 2019년엔 [엘리자벳], [마리 앙투아네트], [안나 카레니나]를 하면서 백몇 번을 죽었더라고요. 이젠 죽는 게 더 자연스러워요. 최근에도 계속 죽었는데, 크리스틴은 죽지 않으니까 뭔가 하다 만 느낌이랄까.(웃음)

하긴 그를 노래하게 만든 뮤즈, 오페라 [라보엠]의 미미부터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손꼽힌다. 대학 3학년 때 [라보엠]으로 오페라에 최연소 데뷔했을 때의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그때 학교 50주년 기념 오페라로 예술의전당에서 [라보엠]을 했었거든요. [명성황후]와 같은 공연장이었는데, 시해 장면 후에 누워서 천장을 보면 만감이 교차했어요. [라보엠]의 미미가 폐병으로 죽고 난 뒤 올려다봤던 천장이니까요. 20여 년이 흘렀지만 분장실, 천장, 모든 게 그대론데 나만 변했다는 느낌? 코로나 시국이라 그런지 좋았던 추억을 새삼 더 곱씹게 된 것 같아요.”

20년 전을 떠올리면 어떤가요.

그 시절 두려움 없던 20대 김소현이 부럽죠. 지금은 경력과 노하우가 쌓인 만큼 걱정과 징크스까지 많아졌거든요. 제가 사실 공연 4시간 전부터는 물밖에 못 먹어요. 작은 실수를 했을 때 ‘이걸 해서 그랬나?’란 생각에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입에 못 대죠. 관객들의 기대치가 높아진 걸 아니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려는 건데, 아무것도 몰라도, 뭘 해도 용서가 되던 어린 시절이 그립네요. 하지만 20년 후에는 또 지금의 저를 그리워하겠죠. 여배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표현할 수 있는 건 많아지는데 설 자리가 좁아지니까요. 지금 주어졌을 때 감사하게, 오늘에 충실해야 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이미지 변신에 대한 욕구는 없나요.

보통 저에겐 왕비나 귀부인 역할이 주어지긴 해요. 하지만 같은 왕비라도 사실 모든 역할이 엄청 다르거든요. 변신이 없다는 얘기도 들어서 드라마도 찍어보고 했는데, 결국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극대화하자는 결론을 내렸죠. 제가 아무리 섹시한 척 해봐도 너무 안 어울리거든요.(웃음)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 같은 악역은 도전해보고 싶긴 해요.

40대 중반의 여배우에게 화두는 뭘까요.

젊음을 유지하자! 당장 크리스틴을 소화해야 되니까요. 억지로 어려 보이려는 게 아니라, 더 순수한 마음으로 크리스틴을 느끼려는 거죠. 젊은 사람이 노인 역할을 할 때 허리를 구부리곤 하지만, 사실 진짜 노인들은 허리를 펴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순수하게 그 역할에 접근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러려면 더욱더 오늘을 즐겨야 해요. 10년 전에 신혼여행 갔을 때 손준호씨가 사진을 100장씩 찍더군요. 사진 좀 찍지 말라고 하니 ‘오늘이 제일 젊은 마지막 날’이라더군요. 모두한테 그런 것 아닌가요. 오늘은 찍기 싫다고 하지 마시고, 사진도 영상도 추억을 많이 남기시라고 하고 싶어요. 오늘이 제일 젊은 마지막 날입니다.

※ 유주현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백일장과 사생대회를 휩쓸던 영광의 기억을 품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살아왔다. 2010년부터 중앙SUNDAY에서 공연을 중심으로 영화, 문학, 음악, 미술 등 문화예술을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전달하고자 부단히 글을 쓰고 있다.

202104호 (202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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