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음악 이야기를 하려거든 증거와 근거를 대야 한다 

어떤 음악가가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말했다고 치자.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을 거론하며 그를 옹호할 수는 있겠다. 그가 한 말은 진실일까.

▎오스트리아 빈의 성 마르크스 묘지 (St. Marx Cemetery)에 있는 모차르트의 무덤. 여기서 모차르트가 안식을 취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사진:위키피디아
그가 무척 뛰어난 음악가라고 가정해보자. 그의 연주에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고, 많은 사람이 그의 연주를 듣고 큰 위로를 받는다. 어쩌다 방송에 나와 음악에 대해 말하는 그의 모습은 꽤 잘생겼고, 그 말은 하나같이 주옥같다. 종종 그는 삶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가 아스라한 수필에서나 볼 법한 느낌 좋은 말만 한다면야 무슨 문제이랴. 그런데 그가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발언했다면? 그의 팬 중에는 표현의 자유를 거론하며 그의 발언을 옹호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표현의 자유에는 거짓을 말할 자유도 있다는 유식한 말을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믿는 이도 있을 것이다. 더는 팬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소동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그의 발언은 사실일까? 그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사람인가?

그의 발언이 사실인지는 차치하고, 그가 사실을 알 수 없는 위치에 있다고 판단하는게 옳을 것이다. 그는 뛰어난 연주자일 뿐 위안부 연구가는 아니다.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자기 전공 이 외의 분야에서 우리는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아마추어가 아니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모차르트 연구가인 볼프강 힐데스하이머는 유명한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중대한 오해를 퍼트렸다고 말한다. 발터는 모차르트가 개방적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었으며, 항상 기분이 좋고 악의 없는 젊은이였다고 말했는데, 이런 진술은 모차르트에 대해 널리 퍼진 통속적 이야기이며, 모차르트의 어떤 이미지를 기대하며 희망하는 이가 지어낸 말일 뿐이다(볼프강 힐데스하이머, 『모차르트』, 양도원 역, 한국문화사, 2014). 나이가 지긋한 클래식 팬들은 20세기 초중반의 훌륭한 지휘자였던 브루노 발터의 LP 명반들을 잘 알 것이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그의 지휘를 공짜로 들을 수 있다. 힐데스하이머는 발터가 위대한 지휘자였지만 훌륭한 모차르트 연구가는 아니라고 말한 셈이다. 힐데스하이머가 틀렸을 수 있다. 그렇다고 발터가 옳다는 보장은 없다. 음악에도 워낙 많은 분야가 있기에 한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라고 해도 다른 분야에서도 전문가이기는 어렵다. 그런데, 사람들은 힐데스하이머보다 발터를 더 신뢰할 것이다. 더 유명하니까. 오늘날에도, 유명 연주자가 한 말은 공부를 많이 한 음악학자가 한 말보다 사람들에게 더 멋지게 들린다.

“인기는 무식한 사람들의 귀도 간질일 수 있단다”

누구도 모차르트가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는지는 사실 완벽히 알기 어렵다. 죽은 지 수백 년이 넘은 사람에 대해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특히 그의 내밀한 심성에 대해? 모차르트의 음악 대부분이 밝고 경쾌하여 들으면 기분이 좋을 수는 있다. 그런 음악을 쓴 작곡가가 실제로도 늘 기분이 좋았을까? 35세에 타계한 모차르트의 전기를 읽노라면 고달픈 삶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삶을 산 모차르트가 늘 기분이 좋았다고? 게다가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고? 악의가 없었다고?

슬프고 진지한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을 그 시대 청중을 고려하자. 모차르트는 프랑스 대혁명(1789)이 발발한 지 3년 뒤인 1791년에 타계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정치적 자유와 인권 등을 주장한 이들이 주도한 것으로, 혁명을 통해 왕과 귀족, 성직자들이 주축이었던 프랑스 왕국이 무너졌다. 모차르트는 작품 대부분을 이 혁명 이전에, 무척 보수적이었던 신성로마제국에서 작곡하고 발표했다. 이 보수적 제국의 수도 빈에서 음악가라면 누구나 선망했을 궁정 음악가 자리를 노렸지만 끝내 얻지 못했다. 그런 그가 해탈한 사람이 아니라 힐데스하이머의 표현대로 “복종의 천재”였다고 생각하는 편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지배계급이었던 왕족과 귀족, 성직자들에 대한 복종뿐 아니라 새로이 부상하는 시민계급 대중에 대한 복종까지, 모든 것이 그의 음악의 특성을 결정하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부친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게 1780년에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네가 작곡할 때, 음악적 재능이 없는 이들도 생각하기를 바란다. 청중 100명 중에 10명만 뭔가를 좀 아는 사람인 것을 너도 잘 알지 않니? 소위 말하는 인기를 잊지 말아라. 인기는 무식한 사람들의 귀도 간질일 수 있단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의 이런 당부를 전적으로 따랐는지는 알기 어렵다.

시대를 앞선 프리랜서 예술가 모차르트는 궁정 음악가나 교회 소속 음악가였던 선배들과 달리, 종종 당시의 체제를 비판하는 듯한 작품을 작곡했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그렇다. 피가로가 결혼하려는데, 그의 귀족 주인이 그의 아내 될 사람을 탐하고, 그런 그를 피가로와 주위 사람들이 혼내준다는, 불경한 이야기를 담은 연극에 바탕을 둔 오페라다. 이런 작품을 쓴 모차르트의 생애를 독일 사회학자 엘리아스는 궁정 귀족이 지배하는 경제에 종속된 시민 집단의 비극적 상황을 보여준 사례라고 말한다. “모차르트는 시민계급 출신으로서 놀랄 만한 용기로 귀족 고용주와 그 위임자를 상대로 저항 운동을 벌였다. 그는 개인적 품위와 음악 활동을 위해 혼자만의 힘으로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패배했다.”(노베르트 엘리아스, 『모차르트』, 박미애 역, 문학동네, 1999) 엘리아스의 말은 사실에 대한 중립적 묘사라기보다는 해석 혹은 평가에 가까워 보인다. 물론 근거는 있다. 따라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의 해석이 지나친 것으로 생각할 수는 있다. 모차르트가 저항했건 복종했건, 우리는 그의 내심을 알지 못한다. 추측할 뿐이다.

신경과학이 앞으로 꽤 발전한다면, 두개골과 뇌가 남겨진 유명 작곡가의 살아생전 내심이 대체로 기분 좋은 상태였었는지를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차르트와 관련해서는 뇌는 물론이고 시신도, 그것을 담은 무덤도 없다. 어떤 두개골이 모차르트의 것이라는 주장은 있으나 확실치 않다. 치밀하고 성실한 역사학자가 발로 뛰며 온갖 서류와 문서를 검토하여 모차르트의 묘를 찾아낼 수 있을까. 새로 찾아낸 문서에 모차르트의 묘가 어디에 있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고 치자. 그 문서가 1791년 모차르트 사망 당시에 작성된 것인지는 철저한 자연과학적 방법에 따라 확인되어야 한다. 모차르트의 작품도 아니면서 모차르트 작품이라고 속여 연주하고 이득을 취하는 사기꾼이 있는 세상이다(김진호의 음악과 삶: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미완의 보물”참조. 포브스 2018년 9월호). 문서 위조 후 그에 기초해 모차르트 묘를 찾아냈다는 논문을 쓸 수도 있다. 이런 위조를 막기 위해 자연과학자의 확인이 필요하다. 그 확인을 거쳐 마침내 찾게 된 묘지 속 모차르트의 뇌 연구는 신경과학자의 몫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될 가능성은 낮다.

모차르트 시대 빈에서는 여러 사람의 시신을 한곳에 모아 매장했다. 모차르트뿐 아니라 많은 망자의 묘를 오늘날 찾기 어려운 이유다. 당시 빈의 계몽 군주는 사람들이 검약 절제한 삶을 살도록 유도했고, 모차르트의 묘를 오늘날 찾을 수 없는 것은 그런 방침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삶과 죽음을 비운으로 점철된 것으로 묘사하는 기존의 모차르트 전기가 틀렸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의 모차르트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그려진 것과 달리, 수입도 꽤 많은 편이었고, 세상 물정을 잘 알았으며, 선천적 천재이기도 하지만 일중독자로서 후천적 노력가였다는 학설이 점점 더 지지를 받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주장에는 확고한 물적 증거와 논리적 추론이 있다는 점이다.

근거 없는 램지어 교수의 논문

차분한 연구와 달리, 모차르트의 이미지는 다양하게 왜곡됐다.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와 최근에 노벨상을 받은 어떤 과학자는 모차르트가 했다고 한동안 알려졌던 다음의 말을 자신들의 책에서 인용했다. “내가 기분이 좋고 쾌활한 상태거나, 마차를 탈 때나 좋은 식사 후에 산책할 때, 혹은 잠 못 이루는 밤중이면 내 마음속에는 수만 가지 상념이 몰려 들어온다.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 것일까? 나는 알지도 못하고 또 나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다. 그들 중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머릿속에 남겨두고 이를 콧노래로 불러본다.” 하지만 이제는 이 말이 모차르트가 했던 말이 아님이 확인됐다. 애초에, 그 수학자와 노벨상 수여자는 이 말을 모차르트가 실제로 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하버드 로스쿨의 램지어 교수는 위안부가 자발적인 매춘부라는 내용의 논문을 써서 모 학술지에 게재했다. 법학자가 ‘위안부 매춘부론’을 설파하려면 매춘의 조건과 내용 등을 적은 계약서가 필요하다. 그 계약서에는 위안부 할머니의 서명이 적혀 있거나 도장이 찍혀 있어야 한다. 문헌학자인 법학자가 주장할 수 있는 ‘위안부 매춘부론’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문헌학(philology)은 문헌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문 분야로, ‘인식된 것에 대한 인식작업’일 뿐 세계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 아니다. 문헌은 간단히 말하면 기록물이다. 자연과학자들이 그 서명과 도장은 물론 계약서가 1940년대 전후의 것임을 밝혀야 한다. 있다면 말이다. 당시의 계약서가 있다 하더라도, 서명을 위안부 할머니가 자발적으로 한 것인지, 도장을 당시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따로 파서 찍은 것은 아닌지도 확인해야 한다. 계약서가 없다면, 매춘 활동을 할 사람을 모집하는 공지를 했다는 증거를 대야 한다.

이러한 경험과학적 연구는 규범 분야 전문가인 법학자에게 어렵다. 그가 아무리 공부를 잘했던 천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램지어는 계약서가 없다고 했다. 그 논문이 실린 학술지는 법과 연결된 경제학 분야 학술지다. 경제학자들은 계약서나 기타 경험적 자료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을까? ‘위안부 매춘부론’은 자연과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기초해야 한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 국한해서 신뢰할 수 있는 말을 하는 전문가를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내면화한 현인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5세기의 철인이 정말로 이 말을 했을까? 그가 정말로 이 말을 했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이들이 있다. 누가 했든,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이도 있다.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을 쓴 독일의 문호 볼프강 폰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 과제가 사제들의 음모일 것으로 의심해 왔다. 그들은 외부세계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꾀어내어 (…) 사람들을 거짓된 내면 성찰로 끌어들이려 애쓴다. 인간은 세계를 아는 정도만큼만 자신을 안다.”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2104호 (202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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