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듣는 사람 마음대로 들어도 되는 음악? 

사느라 바쁜데 음악이라도 편안히, 마음대로 들어야 하지 않을까. 음악 들을 시간도 없는데 음악이 만들어진 시대적 맥락까지 알아야 하나? 알면 좋다.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일과 음악을 듣는 일을 연결하는 좋은 경험을 추천한다.

▎로렐라이 언덕. 로렐라이(Loreley)는 독일의 라인란트팔츠(Rheinland- Pfalz)주의 장크트 고아르스하우젠(Sankt Goarshausen 혹은 St. Goarshausen)이라는 마을 근처 라인강 기슭의 커다란 바위이다. ‘요정의 바위’라는 뜻이 있는 이 바위에는 라인강을 항해하는 뱃사람들이 요정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빠져 난파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살균 처리되지 않은 생우유를 찾는 미국인들이 있다. 그들은 그런 우유가 더 맛있다고, (사실과 다르지만) 영양가가 더 높다고, (역시 사실과 다르지만) 인간은 생우유를 마시도록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소비자의 우유 선택 권리도 주장했다. 결과는 관련된 발병 사례의 증가였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0건, 2010년부터 2012년까지 51건이 보고됐다(앤드루 슈툴먼, 『사이언스 블라인드』, 바다출판사). 갓 짜낸 생우유라면 모를까, 배달되기까지 며칠 동안 상온에 노출될 생우유를 선택할 권리를 주장하다니, ‘코로나19에 걸릴 자유’를 주장하는 것처럼 어리석어 보인다.

우유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질병이라는 가시적 피해를 가져온다. 잘못된 의학 상식은 해로움을 넘어 치명적일 수 있다. 잘못된 투자 정보는 돈을 날릴 수 있다. 정부에 대한, 정치인에 대한 유권자의 오해로 인해 나라의 장래가 어두워질 수 있다. 음악이나 예술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어떤 피해를 가져올까. 별로 없는 것 같다. 음악은 듣는 사람 마음대로 들어도 되는가? 미술은 보는 사람 마음대로 보면 되는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논리적으로 옹호해주는 학자들이 있다. 오스트리아 미술사학자 알로이스 리글에 따르면, 미술작품의 관람자는 화가가 2차원의 캔버스에 현실과 비슷해 보이게 그린 것을 3차원적 세계로 전환한다. 그렇게 하면서 캔버스 속 대상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그림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관람자의 참여’다. 또 다른 오스트리아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리글의 이 개념을 더 다듬어 ‘관람자의 몫’을 제안했다. 다양한 몫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몫으로 인해, 관람자는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심리적 가치를 구성할 수 있다.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실제와 무관하게 말이다. 여기서 관람자를 감상자로 바꾸어보자. 그러면 음악 이야기에 적용할 수 있다. 감상자는 자기 관점에서 음악을 해석하고 나름대로 의미를 만들어낸다. 리글과 곰브리치의 논리는 훗날 20세기 중반 이후에 기호학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됐다.

관람자와 감상자의 적극적 해석은 창조적이다. 창조적인 이 과정이 꼭 좋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창조는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이상한 연상, 심지어 오해 역시 심리적·미학적 창조의 결과다. 음악은 연상(association)을 통해 감상하는 이가 특히 많은 분야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이 곡을 들으니 꼭 …가 …하는 것 같군.” 누군가의 말이나 책도 이렇게 자유로이 해석해도 될까? 독자는 완전한 창조자인가?

고대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Ars Lunga Vita Brevis”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라틴어를 “Life is short, and art long”이라고 영역한다. 이 영어는 꽤 오래전부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로 번역됐다. 장삼이사는 금세 사라지지만 위대한 예술작품은 오래 남는다는 의미다. 기원전 5~4세기의 고대 그리스에서 ‘art’는 근대적 의미의 예술이 아니라 ‘기술(Techne)’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기술로서의 의술의 길은 먼데 그걸 배우기에 인생이 턱없이 짧다는 탄식을 한 것이다. 젊었을 때 열심히 공부하라는 권고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말을 예술의 보편적 위대성으로 해석한 이들은 위대하고 보편적인 예술을 창조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진지한 예술가들에게 잘못 이해된 히포크라테스의 말은 다짐이 되었을 것이다. 그 다짐은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되었을 것이다. 오독과 오해, 오역은 창조의 바탕이다.

어떤 책에 대한 오독이 심각한 문제를 유발했던 예도 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는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에서 학교 교재로 쓰였고, 법 조항에도 인용됐다. 고대 게르만인은 로마 영토 밖에서, 특히 라인강 동쪽에 거주하며 로마인들을 위협했는데, 타키투스에 따르면 이들은 단순하고, 소박하며, 용감하고, 충성스러우며, 순수하고, 정의로우면서 명예로웠다. 서기 98년에 쓰인 『게르마니아』 속 게르만인의 이런 모습은 근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독일의 지도자들이 생각하는 독일인의 정체성이어야 했다(크리스토퍼 B. 크레브스, 『가장 위험한 책』, 민음인). 히틀러는 그런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1세기의 게르만인은 15세기 이후 독일인의 조상일 가능성이 낮았다. 하지만 1세기의 그들은 조상이 되어야만 했다. 그들은 숭배되어야 했고, 15세기 이후 사람들은 1세기의 그들처럼 영웅이 되어야 했다. 영웅적 민족은 영웅적 국가인 독일을 통일하고, 건설하고, 더 나아가 영토를 확장해야 했다.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허상으로서의 독일적 특성을 강조하는 선동에 직면한 일부 삐딱한 예술가들은 조롱으로 화답했다. “혹시 게르만족은 담배를 피우는가? 맥주는 마실 것이다. 아니, 게르마니아의 진정한 후예라면 반드시 마셔야 한다. 타키투스가 특별히 게르만족의 맥주 세레비시아를 언급했을 정도니까.”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한 말이다. 19세기 초반만 해도 이렇게 훼방꾼이 있었다. 후반에 가면 독일인들은 이제 많은 것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음악은 가장 강력한 독일적인 어떤 것이었다. 독일인을 게르만인으로 만드는 전대미문의 곡해공정(曲解工程)은 음악과 함께 완성됐다.

1871년에 통일된 독일은 이후 급속도의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냈고, 독일인들은 자신감과 애국심이 필요했다. 모든 민족의 자신감과 애국심이 전쟁의 동력이 되지는 않겠으나, 후발 자본주의 국가 독일에는 동력이 됐다. 본질상 아프리카 식민지 땅따먹기였던 1차 세계대전의 불길한 기운은 도전자 독일의 노래를 통해 자양분을 얻었다. 오래전에, 유대인 시인인 하이네가 썼던 시 ‘로렐라이’에 프리드리히 질다가 작곡했던 같은 이름의 노래가 있었다. 오늘날 로렐라이 하면 사람들은 이 노래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 말고도, 19세기 후반부터 여러 작곡가에 의해 50여 개에 이르는 ‘로렐라이’가 작곡됐다. 여기에 덧붙여, 대략 1900년부터 1910년 사이에 라인강과 관련된 노래의 작곡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이것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음악가들이 민족주의적 광풍에 비판 없이 휩쓸리고 있었으며, 그런 그들은 그들대로 일반 대중을 어리석고 위험한 광풍의 세계로 밀어붙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1938). 비엔나 헤리덴 광장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서 히틀러의 합병 선언을 듣고 있다. 오스트리아인 다수는 히틀러와 나치 독일을 환영했으며, 유대인 박해에도 적극적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사실 오래전부터 알프스와 라인강은 게르만족의 상징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사는 게르만족에게 알프스는 힘, 불굴의 의지, 불멸을 의미했고, 라인강은 민족주의 전설의 발상지였다. ‘로렐라이’와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을 비롯한 [니벨룽겐의 반지] 연작들, 슈만의 ‘라인 교향곡’을 비롯해 라인강을 노래한 수많은 가곡은 독일인에게 민족주의적 자의식을 깨워주는 음악이었다(베로니카 베치, 『음악과 권력』, 컬처북스). 그런데 이 작품들은 아직 통일되지 못한 약소국 독일에서 만들어졌다. 수많은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래서 근대적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어내자는 지식인들의 열망이 있었다. 요컨대 19세기 중반까지의 독일 민족주의는 딱히 위험하지 않았다. 문제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19세기 후반부터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웅장한 ‘알프스 교향곡’을 작곡했던 1915년에 이 작곡가가 활동했던 오스트리아와 그가 태어났던 나라 독일은 이미 1년 전에 개전한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알프스 교향곡’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 1차 세계대전과 무관한 것으로, 아름다운 알프스를 표현한 것으로 들으면 될까. 혹은 알프스와 무관하게, 즉 자유롭게 들어도 될까. 사실 많은 이가 그렇게 하고 있다. 나는 TV의 한 여행 프로그램에서, 파란 태평양 바다를 보여줄 때 쓰인 이 교향곡을 들은 적이 있다.

모든 전쟁이 다 그러하겠지만, 1차 세계대전은 특히 어리석은 사건이었다. 사망한 병사만 4000만 명이었다. 전쟁을 부르짖던 호전광들은 그럴 줄 몰랐을까. 전쟁이 발발했던 해인 1914년 초에 다음과 같이 말한 이가 있었다. “대단히 장엄하고 위대한 시대다. 이런 시대를 나는 깊이 동경해왔다. 나는 조국을 수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오래전에 눈떴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조국을 방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초등학교에서는 문법과 지리 대신에 체조와 행군, 달리기, 군사훈련과 돌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음렬음악의 창시자 아널드 쇤베르크가 여기서 언급한 조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이다. 이 제국은 1차 대전에서 패해 1918년에 해체됐다. 쇤베르크는 이 전쟁에 군인으로 참여했다. 42살 나이로. 그와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젊은이가 있었으니 훗날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다. 두 사람이 마주쳤다는 기록은 없다. 오스트리아는 이후 이 어리석은 유대인 작곡가가 속해 있던 유대인 공동체를 박해하고 유대인들을 살육했다. 사람들은 이 범죄를 저지른 나라로 독일을 떠올리겠지만 오스트리아 역시 떠올려야 한다. 히틀러가 이끌던 독일은 전쟁을 준비하며 강력한 독재적 병영 국가를 구축했다. 뭘 모르고 전쟁을 지지했던 유대계 오스트리아인 표현주의자의 주장은 1930년대의 독일 정부에 의해 그대로 현실화됐다. 체조와 행군, 달리기, 군사훈련 등을 학교에서 다른 과목들에 우선하여 가르쳤다! 쇤베르크가 나치의 두뇌였을까. 수많은 게르만족 군국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나치 정부에 의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병영 국가화는 쇤베르크 같은 작곡가조차 지지했던 길, 즉 그 나라들의 국민 대다수가 가고자 했던 길을 따라가며 이루어졌다.

많은 유대인이 조국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충성을 표시하기 위해 1차 대전에 참전했다. 그렇게 충성하고 또 충성하면 박해가 없어질 거라는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참담한 오해였다. 세상 모든 사안에 대해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팩트가 중요하다. 음악에 대해서도 오해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름다운 노래 ‘로렐라이’와 웅장하고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이 백미인 ‘알프스 교향곡’을 음악 그 자체로 듣는 것이 일종의 오해일 수 있다. 들으면서도 전쟁의 비극을 잠시나마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2105호 (2021.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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