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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꼴에서 6국의 재상 돼소진은 우선 주나라 궁궐을 찾아가서 자신의 지혜를 설파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래 큰 인물들은 고향 땅에서 더 대접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공자도 그랬고 예수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소진은 진나라로 건너갔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마침 진나라는 상앙(商鞅)을 제거한 직후여서 소진 같은 유세가들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소진은 마침내 연나라로 가 문후(文侯)에게 유세할 기회를 얻었다. 이어 연·조·한·위·제·초 등 6국의 임금을 구워 삶아 강대국 진나라에 맞서는 6국의 남북 연대를 이뤄냈다. 이러한 소진의 합종책(合從策) 탓에 동쪽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던 진나라는 15년 뒤로 야망의 실현을 미뤄야 했다.진나라가 감히 함곡관 밖으로 군사를 내보낼 생각도 못 하게 만든 이 강력한 연대를 성사시킨 뒤, 소진은 6국의 재상 자리에 올랐다. 어느 날 소진이 임금 부럽지 않은 행차로 고향을 지나는데 형제와 처족들은 차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엎드려 기어서 식사 심부름을 했다. 소진이 웃으며 형수에게 말했다.“전에는 그렇게 위세를 부리더니 어째서 지금은 이토록 공손하십니까.”형수는 몸을 떨며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사과했다. 소진은 탄식하며 말했다.“똑같은 사람이라도 부귀하면 친척도 우러러보고 빈천하면 업신여긴다. 하물며 남이야 더 말할 것 있으랴. 만약 내게 밭 두어 뙈기만 있었던들 오늘날 이렇게 여섯 나라 재상의 인수를 찰 수 있었겠는가.”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위기가 없었다면, 그저 두어 뙈기 밭에서 나오는 소출로 만족하며 살았다면 소진은 오늘날 이름을 남기기는커녕 범상한 필부로 살다 먼지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위기는 곧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물론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그렇다는 얘기다.합종연대란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소진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기에 가능했다. 실제로 연나라 문후가 죽자 곧바로 구멍이 뚫렸다. 이웃한 제나라가 국상으로 뒤숭숭한 연나라를 급습해 10개 성을 탈취한 것이다. 그러자 소진은 제나라 왕 앞에 나아가 연나라의 성을 빼앗은 것을 축하했다. 제 왕이 흡족해하자 소진은 땅바닥에 쓰러져 곡을 하기 시작했다. 제 왕이 소진을 일으켜세우며 그 이유를 묻자 소진이 대답했다.“이제 제나라의 명운이 다했으므로 미리 조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연나라가 합종으로 진나라를 견제하고 있다고는 하나, 진나라는 연나라의 장인 국가로 연나라의 뒤를 봐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가 사위국인 연나라의 땅을 빼앗은 사실을 알면 곧 제나라를 침공해 복수할 게 분명합니다. 연나라와 연대 없이 어찌 제나라가 강대국 진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제나라가 연나라 성을 빼앗은 것은 독초를 씹은 것과 다름없습니다.”소진의 말을 듣고 제 왕은 겁에 질려 연나라 성을 반환했고, 합종연대는 가까스로 유지됐다. 하지만 6개국의 이해관계가 너무도 얽혀 있어 동맹이 오래 지속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동맹은 깨졌고 소진은 제나라로 건너가게 됐다. 제나라 왕은 소진의 명성을 사모해 그를 지극히 환대했다. 하지만 한 대부가 자객을 시켜 소진을 제거하려 했다. 소진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소진은 제나라 왕에게 유언을 남겼다. 자신이 죽거든 반역죄를 씌워서 시체를 거열형에 처한 뒤 거리에 내놓으면 자객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제 왕이 소진의 말을 따르자, 과연한 사람이 나서 자신이 소진을 죽였노라 주장하고는 상을 청했다. 제 왕은 그 자객을 국문해 배후에 있던 대부까지 잡아 처형했다. 그야말로 세 치 혀로 6개국 재상 자리에 오른 소진다운 최후였다.
자객 찾아낸 소진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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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위험을 용기로 극복엘리자베스 궁정의 신하들과 보좌관들은 필리페 2세와 협상에 나서 영국과 여왕 자신을 구하라고 진언했다. 하지만 그녀는 평화를 구걸하는 것은 나라를 빼앗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혹독했던 유년기부터 온갖 위기와 위험을 겪으며 터득한 교훈들을 잊지 않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교훈이었다.엘리자베스 1세는 무적함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무장한 상선을 포함해 배 80척을 동원함과 동시에 손수 보병을 소집해 스페인 병사들의 육지 상륙을 저지하도록 했다. 보좌관들은 여왕에게 영국군이 집결해 있는 틸베리 캠프에 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정정이 불안한 상황에서 영국 내 가톨릭 동조 세력이 여왕 암살을 기도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절망적으로 자신의 왕국을 지키는 병사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야 했다. 그래야만 더 큰 위험을 막을 수 있었다. 스페인 침공이 예상되는 바로 전날 엘리자베스는 기병 장교의 갑옷으로 무장하고 틸베리 캠프를 전격 방문했다. 놀란 병사들 사이에 여왕의 힘찬 연설이 울려 퍼졌다.“사랑하는 나의 병사들이여! 나의 안전을 염려한 몇몇 측근이 내게 무장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한다. 나를 사랑하는 충직한 병사들을 믿지 못하면서까지 구차하게 살 생각은 없다. 폭군들이나 두려워 떨라. 나는 지금까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신께 맹세하건대 (…) 내가 온 것은 기분 전환을 위해서가 아니다. 여러분과 생사고락을 같이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다. 신과 나의 왕국, 나의 백성들을 위한 일이라면 내 명예와 목숨을 티끌같이 여길 것이다. (…) 비록 갈대처럼 연약한 여자의 몸이지만 내게는 왕의 심장과 용기가 있다.”엘리자베스는 병사들에게 맹목적 애국심을 강요하지 않았다. 먼저 자신의 목숨을 걸었고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에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보상을 약속했다. 그러한 용기와 현실 인식 능력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사실 틸베리 캠프의 병사들은 단 한 번도 전투 명령을 받은 적이 없었다. 스페인 병사들이 영국 땅을 밟을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적함대는 플리머스 연해에서 영국 함대를 잡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프랑스 북부 도시 칼레 연해에서 불타는 폐선을 돌진시킨 영국군의 기습적 화공 전략으로 타격을 입었다.무적함대는 어쩔 수 없이 북쪽으로 달아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지나 가까스로 스페인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풍랑까지 만나 리스본 항에 입항한 배는 고작 54척이었다. 대서양의 패권이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넘어오는 순간이었다.영국은 이 같은 해상권을 바탕으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북아메리카 버지니아 식민지의 기초를 확립했다. 셰익스피어, 스펜서 등 영국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국민 문학의 황금시대가 펼쳐진 것도 이때였다. 위기를 기회로 승화한 엘리자베스 1세의 용기와 지혜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들이었다.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왕위에 오르기 전 위기의 시절 주위에서 숱하게 벌어진 수많은 정략결혼과 그 파장들을 지켜보며 자신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수많은 청혼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대관식 반지를 들어 보이면서, “나는 이미 잉글랜드를 남편으로 섬기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