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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대기자의 ‘상수경영(上手經營)’(4) 

영웅은 절망의 순간에 나온다 

위기는 곧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물론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져야 가능한 얘기다.

▎소진은 기원전 382년 낙양에서 태어난 중국 전국시대 중엽의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강국 진나라에 대적하기 위해 나머지 6국이 연합하는 합종설을 주장했다고 한다. / 사진:위키피디아
우리가 자동차 운전을 배울 때 코너링 구간에서는 추월을 하지 말라고 들었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동차 경주에서는 코너링 구간이 아니면 추월이 불가능하다. 직선 구간에서는 모든 레이서가 전속력으로 달리는 까닭이다. 따라서 자동차 경주에서 모든 추월은 코너링 구간에서 일어난다.

코너링 중에 추월을 하려면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코너링의 일반 원칙은 아웃-인-아웃(out-in-out)과 슬로 인 패스트 아웃(slow in fast out)이다. 아웃-인-아웃이란 코너링 구간에서 바깥쪽으로 진입해서 안쪽으로 살짝 들어간 다음 다시 바깥쪽으로 빠져나오는 기술이다. 슬로 인 패스트 아웃은 코너링 구간에 속도를 줄여 진입했다가 속도를 올리며 빠져나오는 것이다. 둘 모두 원심력을 최대한 극복하며 코너를 돌기 위한 방법이다.

코너링 구간에서 추월을 하려면 상대방보다 안쪽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보다 속도를 올려야 한다. 그만큼 전복 위험이 커진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쓴 시도가 성공을 거둘 경우 상대를 따돌리는 쾌감은 더욱 커진다.

흔히 위기(危機)란 단어를 놓고 기회(機會)를 함께 말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래서다. 안정적인 상황보다는 위기 상황에서 승부를 뒤집을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구한테나 그런 것도 아니다. 자동차 경주에서도 그렇지만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큼 실력이 뒷받침돼야 하며 뛰어난 상황 판단 능력이 있어야 한다. 또 그 무엇보다 강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 중국 전국시대 중기에 세 치 혀 하나로 6국의 재상 자리에 오른 소진(蘇秦)처럼 말이다.

소진은 동주의 낙양 출신인데 뜻한 바 있어 동쪽 제나라에 가서 사상가이자 권모술수의 달인이었던 귀곡자(鬼谷子)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여러 해 동안 이리저리 떠돌다가 거지 꼴을 하고 고향에 돌아왔는데 형제들과 형수, 처첩들이 비웃으며 말했다.

“주나라 풍습에 밭을 갈거나 공업과 상업에 힘써 2할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게 사람의 도리인데, 그는 본업을 버리고 다만 혀만 놀리고 말만 일삼고 있으니 곤궁하게 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소진은 부끄러워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혼자 틀어박혀 생각했다.

“사내로 태어나 머리 숙여 배움을 구하거늘 아무 영달도 얻지 못한다면 공부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소진은 강태공이 지은 병법서인 『주서(周書)』의 ‘음부(陰符)’를 찾아 열심히 읽어 1년여 만에 ‘췌마술(萃摩術)’을 터득했다. 췌마술은 상대의 내심을 헤아려 그것을 자기의 뜻으로 바꾸는 술책을 말하는데, 원래의 스승인 귀곡자 역시 췌마의 달인이었다. 소진은 귀곡자에게서 췌마의 눈을 뜨고 태공망으로 인해 입신의 경지에 오른 셈이다.

“이것만 있으면 당대의 모든 군주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

거지 꼴에서 6국의 재상 돼

소진은 우선 주나라 궁궐을 찾아가서 자신의 지혜를 설파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래 큰 인물들은 고향 땅에서 더 대접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공자도 그랬고 예수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소진은 진나라로 건너갔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마침 진나라는 상앙(商鞅)을 제거한 직후여서 소진 같은 유세가들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소진은 마침내 연나라로 가 문후(文侯)에게 유세할 기회를 얻었다. 이어 연·조·한·위·제·초 등 6국의 임금을 구워 삶아 강대국 진나라에 맞서는 6국의 남북 연대를 이뤄냈다. 이러한 소진의 합종책(合從策) 탓에 동쪽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던 진나라는 15년 뒤로 야망의 실현을 미뤄야 했다.

진나라가 감히 함곡관 밖으로 군사를 내보낼 생각도 못 하게 만든 이 강력한 연대를 성사시킨 뒤, 소진은 6국의 재상 자리에 올랐다. 어느 날 소진이 임금 부럽지 않은 행차로 고향을 지나는데 형제와 처족들은 차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엎드려 기어서 식사 심부름을 했다. 소진이 웃으며 형수에게 말했다.

“전에는 그렇게 위세를 부리더니 어째서 지금은 이토록 공손하십니까.”

형수는 몸을 떨며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사과했다. 소진은 탄식하며 말했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부귀하면 친척도 우러러보고 빈천하면 업신여긴다. 하물며 남이야 더 말할 것 있으랴. 만약 내게 밭 두어 뙈기만 있었던들 오늘날 이렇게 여섯 나라 재상의 인수를 찰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위기가 없었다면, 그저 두어 뙈기 밭에서 나오는 소출로 만족하며 살았다면 소진은 오늘날 이름을 남기기는커녕 범상한 필부로 살다 먼지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위기는 곧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물론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그렇다는 얘기다.

합종연대란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소진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기에 가능했다. 실제로 연나라 문후가 죽자 곧바로 구멍이 뚫렸다. 이웃한 제나라가 국상으로 뒤숭숭한 연나라를 급습해 10개 성을 탈취한 것이다. 그러자 소진은 제나라 왕 앞에 나아가 연나라의 성을 빼앗은 것을 축하했다. 제 왕이 흡족해하자 소진은 땅바닥에 쓰러져 곡을 하기 시작했다. 제 왕이 소진을 일으켜세우며 그 이유를 묻자 소진이 대답했다.

“이제 제나라의 명운이 다했으므로 미리 조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연나라가 합종으로 진나라를 견제하고 있다고는 하나, 진나라는 연나라의 장인 국가로 연나라의 뒤를 봐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가 사위국인 연나라의 땅을 빼앗은 사실을 알면 곧 제나라를 침공해 복수할 게 분명합니다. 연나라와 연대 없이 어찌 제나라가 강대국 진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제나라가 연나라 성을 빼앗은 것은 독초를 씹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소진의 말을 듣고 제 왕은 겁에 질려 연나라 성을 반환했고, 합종연대는 가까스로 유지됐다. 하지만 6개국의 이해관계가 너무도 얽혀 있어 동맹이 오래 지속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동맹은 깨졌고 소진은 제나라로 건너가게 됐다. 제나라 왕은 소진의 명성을 사모해 그를 지극히 환대했다. 하지만 한 대부가 자객을 시켜 소진을 제거하려 했다. 소진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소진은 제나라 왕에게 유언을 남겼다. 자신이 죽거든 반역죄를 씌워서 시체를 거열형에 처한 뒤 거리에 내놓으면 자객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제 왕이 소진의 말을 따르자, 과연한 사람이 나서 자신이 소진을 죽였노라 주장하고는 상을 청했다. 제 왕은 그 자객을 국문해 배후에 있던 대부까지 잡아 처형했다. 그야말로 세 치 혀로 6개국 재상 자리에 오른 소진다운 최후였다.

자객 찾아낸 소진의 지혜


▎국왕 대관식에서 예복을 입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 사진:영국 국가기록
소진도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기를 기회로 일궈낸 이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였다. 2000년에 뉴욕타임스는 지난 밀레니엄 동안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엘리자베스 1세를 첫손가락으로 꼽았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위세에 눌려 유럽의 작은 섬나라에 불과했던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 바로 엘리자베스 1세였다.

그녀의 삶은 그야말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우선 출생부터 그랬다. 아들을 얻기 위해 로마 교황과 등지면서까지 스페인 공주 캐서린과 이혼을 강행한 헨리 8세가 궁녀 앤 불린과 결혼해 낳은 자식이 바로 엘리자베스였다. 헨리 8세의 실망이 오죽했을까. 아들을 낳기 위한 지극정성에도 앤 불린이 유산과 사산을 거듭하자 헨리 8세의 사랑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결국 결혼 3년 만에 앤 불린에게 간통 혐의를 씌워 참수형에 처하고 말았다.

한때 사랑했던 아내의 목을 자른 뒤 11일 만에 헨리 8세는 제인 시모어와 재혼했고 둘 사이에 드디어 아들 에드워드가 태어났다. 헨리 8세는 에드워드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앤 불린과의 결혼을 무효라 선언했고 졸지에 서출이 된 엘리자베스는 왕궁에서 쫓겨나 하트필드에 있는 사유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병약했던 에드워드 6세가 열여섯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캐서린의 딸 메리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열렬한 구교 신봉자였던 메리의 등극은 엘리자베스에게 치명적 위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메리 여왕은 이미 국교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영국을 다시 가톨릭 국가로 바꾸기 위해 국교도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대학살을 감행했다. 그녀의 통치기에 워낙 많은 사람이 죽어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아버지 헨리 8세 아래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국교회 신자가 됐던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메리 여왕 앞에서 구교로 개종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개신교도 토머스 와이어트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나자 여왕은 배다른 동생 엘리자베스를 공모자로 몰아 런던탑에 가뒀다.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위기 속에서 살아가던 엘리자베스는 1558년 메리 1세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자유의 공기를 마실 수 있게 됐다. 여왕 자리에 오른 것이다. 숱한 위기를 극복한 엘리자베스 1세지만 위기를 기회로 만든 그녀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여왕이 되고 나서다.

1588년 스페인의 필리페 2세가 리스본 항에 전함 122척과 함포 2000문, 병사 1만9000명으로 구성된 무적함대를 소집하는 순간, 영국과 엘리자베스 1세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16세기 말의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그에 비해 영국의 해군력은 이름만 남은 해안경비대뿐이었고 육군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국이 스페인의 공격을 물리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온갖 위험을 용기로 극복

엘리자베스 궁정의 신하들과 보좌관들은 필리페 2세와 협상에 나서 영국과 여왕 자신을 구하라고 진언했다. 하지만 그녀는 평화를 구걸하는 것은 나라를 빼앗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혹독했던 유년기부터 온갖 위기와 위험을 겪으며 터득한 교훈들을 잊지 않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교훈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무적함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무장한 상선을 포함해 배 80척을 동원함과 동시에 손수 보병을 소집해 스페인 병사들의 육지 상륙을 저지하도록 했다. 보좌관들은 여왕에게 영국군이 집결해 있는 틸베리 캠프에 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정정이 불안한 상황에서 영국 내 가톨릭 동조 세력이 여왕 암살을 기도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절망적으로 자신의 왕국을 지키는 병사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야 했다. 그래야만 더 큰 위험을 막을 수 있었다. 스페인 침공이 예상되는 바로 전날 엘리자베스는 기병 장교의 갑옷으로 무장하고 틸베리 캠프를 전격 방문했다. 놀란 병사들 사이에 여왕의 힘찬 연설이 울려 퍼졌다.

“사랑하는 나의 병사들이여! 나의 안전을 염려한 몇몇 측근이 내게 무장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한다. 나를 사랑하는 충직한 병사들을 믿지 못하면서까지 구차하게 살 생각은 없다. 폭군들이나 두려워 떨라. 나는 지금까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신께 맹세하건대 (…) 내가 온 것은 기분 전환을 위해서가 아니다. 여러분과 생사고락을 같이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다. 신과 나의 왕국, 나의 백성들을 위한 일이라면 내 명예와 목숨을 티끌같이 여길 것이다. (…) 비록 갈대처럼 연약한 여자의 몸이지만 내게는 왕의 심장과 용기가 있다.”

엘리자베스는 병사들에게 맹목적 애국심을 강요하지 않았다. 먼저 자신의 목숨을 걸었고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에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보상을 약속했다. 그러한 용기와 현실 인식 능력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틸베리 캠프의 병사들은 단 한 번도 전투 명령을 받은 적이 없었다. 스페인 병사들이 영국 땅을 밟을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적함대는 플리머스 연해에서 영국 함대를 잡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프랑스 북부 도시 칼레 연해에서 불타는 폐선을 돌진시킨 영국군의 기습적 화공 전략으로 타격을 입었다.

무적함대는 어쩔 수 없이 북쪽으로 달아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지나 가까스로 스페인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풍랑까지 만나 리스본 항에 입항한 배는 고작 54척이었다. 대서양의 패권이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넘어오는 순간이었다.

영국은 이 같은 해상권을 바탕으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북아메리카 버지니아 식민지의 기초를 확립했다. 셰익스피어, 스펜서 등 영국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국민 문학의 황금시대가 펼쳐진 것도 이때였다. 위기를 기회로 승화한 엘리자베스 1세의 용기와 지혜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왕위에 오르기 전 위기의 시절 주위에서 숱하게 벌어진 수많은 정략결혼과 그 파장들을 지켜보며 자신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수많은 청혼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자신의 대관식 반지를 들어 보이면서, “나는 이미 잉글랜드를 남편으로 섬기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

202106호 (2021.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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