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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28) | 생각을 보여주는 작가, 안규철 

“예술은 의자를 화분에 심어 나무로 키워내는 일”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나온 작가 안규철(66)의 작업을 두고 미술평론가 이건수는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했다. ‘언어 같은 사물, 사물 같은 언어’. 그는 자신의 사유를 ‘글’로 풀어내고, 이를 일상에서 쓰이는 사물로 혹은 그 사물을 변형한 뒤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삶의 모순과 부조리, 사회와 그 사회를 이루는 개인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무겁지 않게, 외려 재치 있게 다루는 솜씨가 훌륭하다. 설립 때부터 24년간 교편을 잡았던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지난해 퇴임한 그가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사물의 뒷모습’(5월 13일~7월 4일) 전시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해온 작업 중 의미 있는 대표작을 부산에서 처음 소개하는 회고전이자 전업 작가로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출사표다.

▎1991년 독일 유학 중 발표한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 앞에 선 안규철 작가. / 사진:국제갤러리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외과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춘천에서 보내다 아홉 살 때 혼자 고모 집이 있는 서울로 유학을 왔다. 이 시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과외 선생님이었다. 공부 시간에 뭔가 잘못을 하면 과외 선생님은 그에게 창문 앞에 의자를 놓고 올라가 바깥을 내다보며 보이는 모든 것을 설명하라는 ‘벌’을 내렸다.

“익숙하게 보아온 세상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로 설명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 할 얘기가 없어서 ‘다 했는데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돌릴 때마다 선생님은 내가 무심코 빼놓았거나 얼버무렸던 것들을 신기하게도 찾아냈다. (…) 그것은 종이 위에 물감 대신 말로 풍경화를 그리는 일과 같았다. (…)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세상이 하나의 책처럼 읽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놀라운 책은 읽고 또 읽어도 항상 새롭고 끝이 없었다.”(안규철의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중)

1973년 미대에 입학해서는 연극반 생활에 푹 빠졌다. 3학년 때는 연극반장까지 했다. 그런 그를 두고 한 교수는 “미술대학 연극반인지 연극대학 미술반인지 모르겠다”고 푸념할 정도였다. 이때 연습을 도와주던 선배들이 민정기, 임옥상 등이다.

군복무를 마친 뒤 그는 작가가 아닌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공간’을 거쳐 ‘계간미술’에서 모두 7년 동안 기자 생활을 했다. “미술계를 좀 더 넓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조망을 얻고, 글쓰기를 통해 이미지를 언어로 번역하는 개념적 사고를 훈련할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1980년대 초반 국내 미술계는 모더니즘과 민중미술로 양분돼 있었다. 잡지사에서 최민, 성완경, 김윤수 선생 등의 원고를 받으러 다니다 그들과 가까워진 젊은 기자는 민중미술 운동을 주도하던 ‘현실과 발언’에 1985년 가입해 사회의 현실과 미술의 역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1984년 6월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가 마침 동시에 열린 백남준 전시와 요셉 보이스 전시를 볼 수 있었어요. 그때 미술이 더 근본적으로 지금의 시대 전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생각하게 됐죠. 작가의 드로잉 하나, 작은 전시 하나가 결국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 돼야 한다는 보이스의 태도와 사회적 책임감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결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987년 프랑스를 거쳐 이듬해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민주화 항쟁이 막 불붙은 국내와 68운동이 이미 20년 전 일이 되어버린 독일에서의 ‘역사적 시차’는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동양인 작가가 서양인 작가들과 동시대 현대미술을 하면서 느껴야 했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마찬가지였다. ‘작업이 계속해서 시사적인 사건에 대한 일러스트레이션 상태가 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의문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어떤 상황을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일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일상적인 사물과 언어로 옮겨가게 만들었다. 독일과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사물이 그 자체로 ‘공용어’라는 점에 착안했다. 1991년 독일 유학 중 한 대안공간에서 발표한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은 그런 생각이 녹아 있는, 작가로서의 첫 작품이다.

뒷모습에서 진짜 모습 찾기


▎‘푸른 벨벳의 방’(2021), Pencil on paper, 30×42 cm / 사진:국제갤러리
이번 국제갤러리 부산 전시에서 기자들에게 가장 먼저 설명한 것도 이 작품이었다. 그는 “제 자화상 같은 작품”이라고 운을 뗐다. 문이 두 개가 있다. 한쪽 문에는 ‘Leben(삶)’이라고 적혀 있는데, 손잡이가 없다. 다른 문에는 ‘Kunst(예술)’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번엔 손잡이가 다섯 개다. 두 문 사이에 화분이 있고, 화분에 심어져 있는 것은 나무 의자다.

“이 공간은 결국 인생과 예술 사이의 어중간한 중간 지대고, 그 중간 지대에 있었던 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 안에서 내가 무얼 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예술가가 되겠다고 독일까지 와서 내가 도대체 무얼 하고 있지 하는 질문 속에서 저의 상태를 몇 가지 사물로 함축해 보여준 것이죠. 동화 속에서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왕이 낸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것처럼, 다섯 개 질문이 담긴 손잡이를 한꺼번에 다 돌려야 문이 열릴 텐데. 게다가 의자를, 죽은 나무로 만든 의자를 화분에다 심고 그걸 키워서 다시 살아 있는 나무로 만들어내려고 하는, 이 불가능한 일을 내가 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었던 거죠. 이런 불가능한 모험과 도전을 통해 ‘어떻게든 저 문을 열고 예술의 길로 들어서야겠다’라는, 저 자신에 대한 다짐이 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맞은편 바람벽에는 소용돌이치는 바다 풍경을 그린 거대한 캔버스가 보인다. A4 용지 크기의 3호짜리 캔버스 200점을 나란히 이어 붙인 ‘그들이 떠난 곳에서-바다 II’다.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 출품했던 작품을 재현한 것이다. 당시 그는 전시장에 붙였던 그림을 사진만 찍고 다 뜯어서 광주 시내 곳곳에 내다 버렸다. 그리고 지역신문사에 ‘그림을 분실했는데 발견하신 분은 연락을 주십시오’라는 광고를 냈다. 그렇게 회수된 작품이 20여 점. 그는 돌아온 작품 20여 점만 듬성듬성 걸고 전시했다.

“파격적인 행위였죠. 그림을 걸라고 만들어놓은 전시장에서 작가가 그림은 전시하지 않고 오히려 길거리에 죄 내다 버리고, 그것을 상상해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저는 이 행위를 통해 1980년 광주의 수많은 실종자를 소환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제 그림들처럼 저들도 광주 시내 어딘가에 유령처럼 보이지 않는 소문이 되어서 떠돌고 있다, 이런 생각을 했던 거죠.”

이번 전시의 제목인 ‘사물의 뒷모습’은 작가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화두다. 일상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평범한 사물의 뒷모습을 통해 사물의 진짜 모습, 거기 담겨 있는 사람들의 삶과 세계의 진실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보인다’는 말처럼, 매일 보던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낯설고 새로운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작가의 관심사다.

“이런 제 관심사는 미술에서 시각적 만족이나 매혹 같은 것을 기대하는 관객들한테는 상당히 불편하고 낯선 것일 수 있겠죠. 하지만 미술이 그런 감각적인 가치만 추구한다면 어떤 근본 가치를 놓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 작업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전시에 앞서 순수문예지 ‘현대문학’에 연재해온 글과 그림 69편을 모은 세 번째 책 『사물의 뒷모습』도 지난 3월 출간됐다. 삶에 대한 통찰은 그의 글 곳곳에서 반짝이는데, 가령 ‘예술가가 사라지는 법’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나는 영화가 끝났는데, 자막이 올라가고 있는데 지평선 너머로 퇴장할 생각을 하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날이 이미 밝았는데 누군가가 끄는 걸 잊어서 불이 켜 있는 가로등처럼 어색한 모습으로 미술계라는 곳에서 서성거리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제는 하루하루 내가 무엇을 하기에 아직 은퇴를 하지 않는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의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가 화분에 심은 의자는 이제 막 잎사귀를 틔웠을 뿐이다.


▎‘2/3 사회 II’(1991 / 2021), Leather, rubber, and magnet, Dimensions variable / 사진:국제갤러리



▎‘완성되지 않는 벽’(2021), Pencil on paper, 30×42 cm / 사진:국제갤러리



▎‘모자 II’(detail),(1994 / 2004 / 2021), Fedora, showcase, pencil drawing on wood, 31.5×36×14 cm / 사진: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열리고 있는 안규철 개인전 ‘사물의 뒷모습’의 설치 전경. / 사진:국제갤러리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202106호 (2021.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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