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역을 어떻게 따냈냐고? 나 아니면 아무도 못한다 했지.”(박정자) 이쯤 되면 원조 ‘걸크러시’다. 영화 [미나리]의 아카데미상 수상으로 배우 윤여정의 일거수일투족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영화계에만 시니어 파워가 있는 건 아니다. 배고프고 초라한 연극판을 60년간 지켜온 박정자는 여든 살에 열아홉 살 청년의 프러포즈를 받았다. 5월 공연된 연극 [해롤드와 모드]는 박정자에게, 아니 모든 여배우에게 각별한 의미였다. 62세였던 18년 전 시작한 작품을 실제로 극중 나이인 80세가 될 때까지 출연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한 무대였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프로젝트에 마침표를 함께 찍은 이는 절친한 후배 윤석화였다.
[해롤드와 모드]는 19세와 80세의 사랑이라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는 스테디셀러 연극이다. 작가 콜린 히긴스(Colin Higgins)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동명 영화(1971년)로 먼저 알려졌고, 1973년 다시 히긴스가 연극으로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1987년 김혜자, 김주승 주연으로 초연되어 현재까지 총 일곱 차례 공연됐는데, 그중 초연을 제외한 여섯 번의 공연에 박정자가 주인공 ‘모드’ 역으로 출연하며 박정자의 시그니처 공연이 됐다.“2003년 처음 막을 올린 공연장이 윤석화가 운영하던 ‘정미소’였어요. 우리가 으쌰으쌰 힘을 모아 공동제작을 했는데, 좋은 관객을 많이 만났죠. 그래서 이걸 여든까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윤석화가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묻더군요.”(박) “왠지 계속하실 것 같아서 물었죠. 극 중 나이가 될 때까지 하겠다는데, 그 열정이 후배로서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여배우로서 멋지더군요. 농반진반 ‘그 후엔 내가 해도 되냐’고 하니, 그럼 마지막 공연은 저더러 연출을 하라고. 그런 약속이었어요.”(윤) “약속이라기보다 참 보기 드문 우정이라고 생각해요. 서로에게 애정이 없으면 그런 선물을 주고받을 수 없죠.”(박)두 사람은 얼핏 물과 기름처럼 보인다. 중성적이고 엄격해 보이는 박정자와 영원히 철들지 않는 소녀 같은 윤석화는 14살 차이에 작품에 대한 의견도 달라 보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같이 하는 시간이 많은 사이”(박)라고 했다. 긴 세월 연극판을 지키며[왕자 호동](1991), [세 자매](2000) 등 한 무대에 서기도 했지만 부쩍 가까워진 건 윤석화가 제작·연출한 [나는 너다](2010)부터다. “윤석화를 알기 전에 [신의 아그네스]가 먼저였죠. 누가 혜성처럼 등장했다는데, 가서 보니 과연 많은 사랑을 받을 만하더군요. 젊을 땐 각자 다른 무대에서 활동했지만, 나이 들어 서로 벌거벗고 만나게 됐어요. 같이 목욕도 하고, 맨얼굴, 맨마음, 맨몸으로 만나는 사이죠. 윤석화가 나 때문에 늙어준 것 같아요.(웃음)”(박) “연극이란 게 참 이상해요. 처절하게 혼신을 다해도 해낼까 말깐데 돌아오는 건 없고, 그러다 보니 그림자가 짙죠. 같은 길을 가는 선배가 있어서 든든해요. 세월이 마치 발효식품처럼 우리를 끌고 왔지만 저절로 쌓인 신뢰는 아니죠. ‘연극’이란 모티베이션으로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윤)사실 두 사람은 똑같다. “유난스럽고 감정을 못 숨기고 원초적” (박)이란 점에서. “그런데 어떨 때는 내가 아주 빨간데 석화는 파랗고, 또 석화가 빨가면 내가 파랗고 그래요. 그게 변덕이라는 건데, 우리한텐 변덕도 대단한 에너지죠. 보통 배우들이 대중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성격은 아니에요. 유난스럽고 변덕스러우니까.(웃음)”(박) “작업을 위해 예민해질 수밖에 없으니 유난스러워 보기도 하지만, 그런 열정 없이는 이런 일 못해요. 나는 일상으로 돌아오면 부드러운 여잔데, 선생은 일상도 카리스마인 게 차이긴 하죠.(웃음)”(윤)
세월이 발효시킨 신뢰
▎연극 [해롤드와 모드]중에서 해롤드 역의 임준혁(오른쪽)과 공연 중인 박정자. / 사진:신시컴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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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소동이 유일한 취미인 19세 부잣집 도련님 해롤드가 어느 날 한 장례식장에서 엉뚱한 80세 할머니 모드를 만난다. 우연한 만남이 몇 번 이어지면서 자유분방한 모드의 일상에 함께하게 된 해롤드는 난생처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녀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해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결혼반지를 준비한다.연극 [해롤드와 모드]의 스토리는 어찌 보면 판타지다. 죽음을 동경하던 19세 청년이 삶을 달관한 80세 노인을 정말 사랑했을까. 어쩌면 80년이라는 긴 세월을 버텨낸 인생 자체를 사랑하게 됐다는 메타포가 아닐까. 하지만 박정자는 생각이 달랐다. “19세든 80세든 인간은 다 외롭다”는 것이다. 그는 “80세 할머니도 19세 청년도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그게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아닐까”라고 했다. 윤석화가 연출로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도 ‘사랑의 모멘텀’을 만드는 것이었다. 18년간 꾸준히 이 작품을 보면서 19세가 80세를 사랑하게 되는 결정적 순간의 표현이 아쉬웠다는 것이다.“극장 환경이 아무 메커니즘을 쓸 수 없는 형편이라 잠도 못 자고 고민했다”는 연출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쇼팽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한 로맨틱한 음악들, 별빛 가득한 밤하늘과 고요한 바다, 숲을 붓터치까지 살려 표현한 서정적인 영상은 관객의 마음을 녹진하게 했고, 다소 엉뚱한 듯 지혜로운 말과 행동만 보여주는 80세 여인은 과연 사랑할 만했다.하지만 이 사랑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모드는 해롤드에게 삶의 의미를 가르쳐준 뒤 뜻밖의 선택을 한다.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전개다. “아직 젊어서 이해가 안 가나 봐? 참 아름다운 용기라 생각해요.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긴 할 텐데, 모드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마지막을 선택한 거니까. 상식, 종교를 떠나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죠. 나도 그렇게 가벼워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만큼 지혜롭지 못하니까요.”(박) “이 작품은 삶과 죽음에 관한 부조리극이에요. 교회 장례식장에서 만난 19살이 80살에게 프러포즈까지 하는데 그날 모드가 죽는다는 메타포에 5060 이상은 공감할 거예요. 죽음을 통해 오늘 하루를 더 잘 살아야 한다는 삶의 소망을 주는 거죠.”(윤)
일곱 번째 공연이니 좀 수월했을까. 틀렸다. 연극은 언제나 ‘라이브’고, 배우는 나이를 먹는다. “80에 할 수 있는 대사량이 아니거든요. 백성희, 장민호 선생이 80에 어떤 작품을 했나 봐도 그래요. 박정자의 억척스런 열정 덕분에 가능했죠.”(윤) “60년 동안 연기를 했지만 점점 두려워져요. 어려선 뭣도 모르고 좌충우돌했지만 철이 드니 겁이 많아지네요. 관객들은 사람 냄새 난다며 좋아할지도 모르죠. 연극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거니까.”(박)
▎박정자와 윤석화는 “그 누구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은 사이”라고 했다. / 사진:신시컴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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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이 급격하게 디지털화되면서 연극도 달라졌다. 기술을 활용해 기발한 무대를 만들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져 보일 정도다. 이런 시대에 연극이 무슨 소용일까. “연극이라는 게 제대로 대접도 못 받고 환경도 열악하지만,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떤 예술과도 달리 서로 호흡을 주고받는 것이니까. 호흡이란 게 굉장히 중요해요. 호흡이 끝나는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극장이란 공간에서 서로 호흡을 나누면서 어떤 예술도 줄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감동을 전하는 게 연극배우죠. 그래서 영국에서는 ‘스테이지 액트리스’에 대한 존중이 각별해요. 우리는 TV 예능에 나와야 배우로 통하니, 내가 영국 가서 올리비에상이라도 받아야 연극에 관심을 가져줄까요.(웃음)”(윤) “벌써 1970년대에 연출가 김정옥 선생이 ‘배우들이 TV만 하니까 이제 로봇 데리고 연극해야겠다’길래, 로봇이 눈물 흘릴 줄 아느냐, 뜨거운 가슴 가질 수 있냐고 물었었죠. 우리가 같이 경로 할인 받아서 영화 [미나리]도 보고 뮤지컬도 봤는데, 공연장에 가면 가슴이 뜨거워져요. 관객들이 찾아와준 게 너~무 고맙고. 사실 내가 이번에 출연료를 안 받았어요. 아니 출연료로 티켓을 사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300명을 초청했죠. 내 생일을 자축하면서 사람들을 무대로 초대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요.”(박)
죽음 통해 삶의 소망 주는 연극두 사람의 공통점은 또 있다. 스스로 설 자리를 만들어왔다는 점이다. 윤석화의 출세작 [신의 아그네스] 대본을 한국에 들여온 게 그 자신이었고, 박정자도 대표작 [페드라], [위기의 여자] 등이 다 ‘스스로 얻어낸’ 배역이었다. “산울림의 임영웅 선생이나 극단 자유의 김정옥 선생은 나를 너무 잘 아니까 강한 역할만 주려고 했죠. [페드라] 때도 내가 하겠다고 나서니 김정옥·이병복 선생은 놀라더군요. 하지만 ‘나 아니면 아무도 못 한다’고 버텼어요. 사실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배우에겐 그런 순간이 필요해요. 한태숙 연출이 단테의 [신곡]을 할 때도 창녀 같은 역할을 달라고 했어요. 상식적인 역할을 거부했던 게 내가 살아남는 방식이었죠. 관객은 박정자가 이런 역할도 한다고 놀라겠지만, 그게 신나는 일이지.”(박) “연극하는 열정으로 뭘 했어도 성공했겠죠. 연극을 통해 세상에 삶의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고 싶어서 부단히 펼쳐놨던 건데, 나이가 드니 더는 내 생각을 표현할 곳이 없어지는구나 싶어서 쓸쓸하기도 해요. 그렇다고 무모하게 덤빌 마음은 들지 않네. 체온이 38.5도에서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온 걸까요.(웃음)”(윤) “난 요즘 허물을 벗는 마음이에요. 어렸을 때 뱀이 허물을 벗는 걸 봤는데, 그땐 너무 무서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름다웠던 거야. 껍질을 벗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 이 나이가 되니 홀가분해질 수 있는 거겠죠.”(박)그래서일까. ‘한국 공연계의 레전드’로 불리는 배우들이 그런 수식어에 손사래를 친다. 타이틀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자유로워졌어요. 어느 영화에 밥집 할머니로 나와달라고 해도 감독이 맘에 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죠. 내가 꿈꾸는 연극은 가장 좋은 때에 이뤄질 거라는 긍정만 갖고 살아요.”(윤) “배역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박정자는 박정자, 윤석화는 윤석화니까. 어느 자리에 있어도 우리 존재만으로 충분하지 않나요.(웃음)”(박)연극배우는 왜 연극을 할까. 가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영화와 TV, OTT까지 가세해 디지털 영상 매체의 시대가 된 지금, 배우 윤여정이 한류 열풍과 맞물려 일상적인 연기로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하는 것을 보면서, 고작 수백 명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연극 무대가 옹색해 보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배우 박정자의, 박정자에 의한, 박정자를 위한 무대가 된 [해롤드와 모드]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어쩌면 모드의 선택도 팔순을 맞은 배우 박정자가 [해롤드와 모드]에 찍는 마침표의 메타포일지 모른다. 그는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이 무대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미 모드의 대명사가 돼버린 박정자의 신들린 연기에, 그리고 이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관객은 눈물지을 수밖에 없었다. 왠지 연극배우가 연극을 하는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았다.
※ 유주현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백일장과 사생대회를 휩쓸던 영광의 기억을 품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살아왔다. 2010년부터 중앙SUNDAY에서 공연을 중심으로 영화, 문학, 음악, 미술 등 문화예술을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전달하고자 부단히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