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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31) 복제와 창조 사이, 정소연 

원본 뒤틀어 그리기… 진짜와 본질이란 과연 무엇일까 

사진 김경빈 기자
정소연(54)은 회화와 미디어와 설치를 넘나드는 작가다. 미대 서양화과 학·석사에 공대 석사, 영상공학 박사 학위까지 두루 수집한 그의 작품에는 원본과 복제, 현실과 환상, 실재와 가상, 평면과 입체, 붓과 컴퓨터, 정지화면과 동영상이 묘하게 겹쳐 있고 또 스며 있다. 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니 따져보면 50년 화업인데, 작품에서 배어 나오는 내공 덕분에 그 말이 아주 과장스럽거나 지나친 수식어라고 여겨지진 않는다. 그의 열네 번 째 개인전이 서울 평창동 누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제목이 ‘지각의 공간, 인식의 장소’(8월 5~28일)다. 무슨 의미일까. 그는 왜 이렇게 어려운 제목을 붙였을까.

▎식물도감에서 스캔한 꽃과 풀을 자신의 방식으로 왜곡해 유화로 그려낸 ‘포스트 네버랜드’ 시리즈 앞에 선 정소연 작가.
이번 개인전 제목에 담긴 의미를 풀기 위해서는 전시 서문을 쓴 미술평론가 황인의 말을 빌려올 필요가 있다. “미술은 일찍부터 신체로부터 독립하려는 시각과 그 시각의 극단인 소실점을 중간 기착지로 삼아 시각 너머의 정신적인 영역으로 도전했으나 여전히 지각(perception)의 세계를 떠나지 못했다. 한편 기술을 기반으로 발전한 근대 이후의 공학은 신체가 지각하는 세계를 넘어서서 인식(recognition)을 기반으로 하는 수학의 세계에 그 터전을 잡게 되었다. 신체와 함께하는 지각은 장소(place)를, 신체를 떠난 인식은 공간(space)을 지향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지각의 공간, 인식의 장소’는 ‘지각의 장소, 인식의 공간’에 대한 반어법이자 장소와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작가의 역설적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공학자이면서 아티스트이고 아티스트이면서 공학자인 정소연은 공간의 세계에서 장소를 끄집어내고 장소의 영역에서 공간을 추출해내거나 심지어 장소와 공간이 혼재하는 실험적 양상까지 시도해보려 한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작가가 자신만의 장소이자 공간을 구현한 작품 중 하나가 ‘네버랜드(Neverland)’ 시리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 피터 팬이 살고 있다는 바로 그곳. 정소연의 ‘피터 팬’은 각종 식물도감에 사진이나 세밀화의 형태로 실려 있는 여러 가지 꽃과 풀이다. 죽지도 시들지도 않는, 항상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는 ‘이데아’로서의 존재다.

그는 이런 각종 식물 이미지를 일일이 스캔해 컴퓨터 폴더 안에 넣어두었다. 폴더 이름도 ‘빨간 꽃’, ‘노란 열매’, ‘옅은 초록 풀’ 등으로 붙여놓아 구상에 따라 찾기 쉽게 했다. 모니터에서 적절한 꽃과 풀을 클릭해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하나의 화면을 구성한 뒤, 이를 캔버스에 유화물감과 붓으로 정교하게 옮겨 그린 작품이 바로 ‘네버랜드’ 연작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실현 불가능한 기호의 숲을 나는 ‘네버랜드’라고 명명한다. 도감에서 차용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네버랜드는 꿈과 현실이 해체된 또 다른 현실이자 그사이에 존재하는 블랙홀이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이미지로 꿈 같은 세계 구현


▎Post-Neverland 4(2015), Width 120㎝, Oil on Wood / 사진 : 누크갤러리
이번 전시에서는 ‘포스트 네버랜드’ 연작을 볼 수 있다. 2015년에 이어 올해 그린 작품들이다. 포토샵을 이용해 식물도감 속 이미지의 형체를 확 늘이거나 줄이고, 곡률을 서로 다르게 준 덕분에 평면 작업이지만 유리구슬 속 정글을 보는 것처럼 입체적이다. 접은 종이 같은 화면에 그림자를 넣은 구성 역시 입체적으로 보이게 한 시도다.

“외국에서 발간된 식물도감에는 사진이 많은 데 비해 한국 식물도감은 그림(세밀화)이 대부분이에요. 저작권 문제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수채 물감과 색연필로 그린 세밀화를 모니터에서 죽 늘리면 저렇게 부드러운 색이 나와요.”

‘네버랜드’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열대와 온대와 고산대에서 각각 살고 있는 식물들이 제 캔버스 안에서는 다 같이 살고 있지요. 하늘에서 땅을 향해 자라거나 옆으로 커지는 등 중력의 법칙도 적용받지 않아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모습들이죠. 저는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이미지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 같은 세계를 그려내고 싶었어요. 꽃을 그린 게 아니라 꽃이라는 기호를 그림으로써 말이죠.

작업 스타일은.


▎Post-Neverland 5(2015), Diameter 120㎝, Oil on Canvas / 사진 : 누크갤러리
우선 콘셉트를 잡고, 다음으로 적합한 매체를 찾죠. 그림이 나을지, 사진이 나을지, 동영상이 나을지 판단합니다. 모든 게 컴퓨터 작업으로 미리 끝나 있어요. 머릿속과 모니터에서 수학적으로 치밀하게 계산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죠.

왜 이런 방식을 시도하나요.

페인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고 싶었거든요. 평면이면서 입체인 회화, 움직이는 동영상 같은 회화를 제작해보고 싶었어요.

‘포스트 네버랜드’는 캔버스뿐 아니라 나무 패널에 그린 것도 많네요.

이미지를 이렇게 저렇게 왜곡한 뒤 그 모양대로 목공소에 주문을 해요. 이런 것을 변형 캔버스(shaped canvas)라고 해요. 나무가 오면 여러 번의 사포질과 제소(수성페인트) 칠 작업을 거쳐 만질만질한 표면을 만들죠.

미대 대학원을 나와 공대 대학원에 갔는데, 작품 활동에 도움이 됐나요.

기술의 프로세스를 알게 된 점이 좋았어요. 사실 포토샵을 쓰는 방법만 알면 되잖아요. 그런데 공대에서는 포토샵의 제작 원리도 배워야 했으니까 처음엔 그게 낭비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원리를 알고 있다는 것이 디지털적 발상을 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벽지를 그린 ‘벽지 그림’, 수학적으로 형상화한 ‘벽지 공간’


▎Post-Neverland 6(2015), Diameter 120 ㎝, Oil on Canvas / 사진 : 누크갤러리
세 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는데.

유치원 대신 미술학원을 다녔어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가 장난감이었죠.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 미술부에 들어가 오후 4시까지 그림을 그렸는데, 다 제가 원해서 한 일입니다. 부모님은 외려 그냥 공부하라고 하셨을 정도죠.

이화여대 서양화과 및 동 대학원을 나와 미국 뉴욕 공대(NYIT) 대학원 석사,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박사를 했습니다. 그림에서 미디어아트로 관심이 바뀐 건가요.

그리는 훈련은 워낙 오래하기도 했고, 동영상에 관심이 커졌어요. 하고 싶은 얘기를 담기에 동영상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늘 소니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영상을 많이 찍었죠. 첫 작업은 아기부터 할머니까지 여성들의 눈을 찍어서 세로로 구현한 것인데, 마치 여성 성기 같은 화면이 나오더라고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투병 모습을 통해 삶의 유한함도 그려봤죠.

그러다가 다시 회화로 돌아왔습니다.

2010년인가, 박사 과정 중간에 미국에 갔다가 들른 골드 크라운(선물 가게)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인간과 자연의 모든 순간을 카드 이미지로 구현한 곳이 바로 그곳이더라고요. 나이, 감정, 결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상황 등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있었죠.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비현실적인 사진을 유화로 옮기는 ‘홀마크 프로젝트’를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홀마크 프로젝트’는 미국의 카드회사 홀마크가 제작한 카드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편집해 캔버스에 옮겨 그린 시리즈다. 미술 평론가 류병학은 “‘홀마크 카드-하늘’의 원본은 자연의 하늘이고,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하늘’의 원본은 사진인 셈이다. 그렇다면 정소연의 ‘홀마크 프로젝트-하늘’은 복제의 복제가 아닌가? 원본이 복제물이라면 그곳에는 원본이 부재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작가는 “꿈과 현실, 주입된 이미지와 실재에 관한 이야기인 ‘홀마크 프로젝트’는 장자가 말한 ‘호접지몽’의 21세기 미국판 버전”이라고 대꾸한다.


▎벽지 공간 Wallpaper Space 1(2019), 40 × 24 × 24㎝, Acrylic on Wood / 사진 : 누크갤러리
이번 전시에서는 유럽의 화려한 꽃무늬 벽지를 그려낸 ‘벽지 그림’ 연작과 스트라이프 무늬의 벽지가 살짝 비틀어져 구현된 공간을 설치 작업으로 풀어낸 ‘벽지 공간’ 연작도 볼 수 있다. 장소와 공간의 함수관계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정교하게 만들어낸 작업들이다. 어느 날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다가 ‘벽지가 그림보다 낫네’라는 깨달음을 얻어 시작했다. ‘단색화가 벽지 같은 그림이라면 나는 진짜 벽지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미술평론가 황인에 따르면 “장소 속의 실제 건물이 평면 공간 속의 이데아로 펼쳐졌다가 다시 실재인 입체로 묶어지면서 실재도 이데아도 아닌, 완전한 입체도 완전한 평면도 아닌, 조각도 그림도 아닌 그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공간-장소”다.

작가의 다음 대상은 건축 모형이라고 한다. 또 어떤 장소이자 공간이 등장할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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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호 (202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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