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리어댑터라 불리며 각종 IT기기를 주무르던 대학생이 어느새 벤처캐피털을 이끄는 자리에 올랐다. 그 대학생이 바로 벤처업계에 21년간 몸담아온 이동현 신한벤처투자 대표다. 최근 업계 젊은 심사역을 끌어들이며 새로운 투자 전략 수립에 여념이 없는 그를 만나봤다.
#3000억원 규모 ‘원신한 커넥트 신기술투자조합’ 조성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 ‘신한퓨처스랩’ 운영
#혁신 성장 플랫폼 ‘신한 스퀘어브릿지’ 확대

모두 신한금융지주가 운영 중인 벤처·스타트업 투자 관련 사업들이다. 지난해 12월 14일 열린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인 ‘신한퓨처스랩’의 ‘제7회 데모데이 행사’에서 조용병 신한금융그룹(이하 신한금융) 회장은 “디지털 생태계 조성과 스타트업의 성장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올해 1월 3일 2022년 신년사에서는 “기존 금융사들 역시 디지털전환을 서두르고 있지만, 인터넷 은행과 빅테크 계열 금융사들의 새로운 시도가 시장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며 “그룹사의 디지털 플랫폼 전반을 ‘바르게, 빠르게, 다르게’ 운영하여 빅테크·플랫폼 기업과의 경쟁에서 당당히 앞서 나가자”고 밝혔다.

결국 혁신 금융의 역량을 강화하자는 의지는 혁신성장기업 투자와 맞닿아 있는 셈이다. 실제 조 회장은 이미 수년 전부터 정부의 유망 벤처기업 지원 정책에 부합해 국가 신성장동력을 발굴하고, 신성장 생태계 조성에 앞장서 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혀왔다. 여기에는 기업의 혁신적인 기술과 아이디어를 금융 소비자에게 전달해 신한금융과 동반 성장하겠다는 뜻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후 한국판 뉴딜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금융의 뉴딜정책인 ‘신한 네오(N.E.O.) 프로젝트’와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인 ‘신한퓨처스랩’ 등이 대표 상생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신한금융은 이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는지 벤처캐피털도 자회사로 품었다. 2020년 9월 말 두산그룹이 지분 96.77%를 쥐고 있던 벤처캐피털 네오플럭스를 인수한 것이다. 당시 조 회장은 “신한금융은 이번 네오플럭스 인수를 통해 유망 벤처기업의 창업 초기부터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하는 전 과정을 지원할 수 있는 토털 투자금융 서비스 체계를 완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신한벤처투자로 명패를 바꾸고 달린 1년 남짓. 운용자산(AUM) 규모는 1조원을 넘겼고, 국내 71개 벤처캐피털 중 12위에 이름을 올리며 다른 대형사 뒤를 바짝 쫓고 있다.

“대표로 취임 후 3년 내 벤처캐피털 부문의 운용자산을 1조원으로 늘리고 5년 내 국내 최고 VC 업체로 올라서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년 조금 넘는 시점에 절반은 지켰네요.(웃음) 2020년 12월 신한금융 계열사와 함께 1200억원 규모의 블라인드 펀드를 결성한 이후 속도가 붙었습니다. 그리고 산업은행, 한국성장금융 등으로부터 2300억원 규모 ‘신한벤처투모로우투자조합1호’가 결성돼 전체 운용자산이 1조원을 넘어섰네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지난달 서울 강남 테헤란로 글라스타워에 있는 신한벤처투자 본사에 만난 이동현(50) 대표가 말했다. 그는 “양적인 성장과 동시에 심사역을 충원하고 VC 투자본부와 PE 투자본부가 중심인 조직도 개편하는 등 질적인 성장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 신한벤처투자는 지난 1년간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약사 출신의 심사역을 선발하고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바이오 분야의 투자에 특화된 전문가를 영입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벤처캐피털 베이스인베스트먼트의 설립 멤버인 김승현 부장을 영입해 초기투자팀도 꾸렸다.

외부 인재 영입에 열을 올리는 이 대표도 ‘신한 순혈’이 아니다. 이 대표는 신한금융지주가 네오플럭스를 인수하면서 기용된 내부 인사였던 까닭이다. 그는 1997년 장기신용은행에 입사해 처음 금융권에 입문했고, 이후 무한기술투자, 튜브인베스트먼트(현 HB인베스트먼트) 등을 거쳐 2010년 네오플럭스에 합류해 국민연금 펀드 운용부터 LP지분유동화 펀드 운용까지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왔다. 주로 제조 일반, IT융합, 소프트웨어 부문 투자에 집중했고, 수석심사역과 이사·상무 등을 거쳤으며 네오플럭스 벤처투자부문 2본부장(전무)을 맡고 있었다. 당시 VC 자회사 수장 선임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신한금융이 그를 택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 대표는 벤처투자업계에서 보기 드문 은행권 근무 경력자였고, 심사역 경력에 펀드레이징부터 회수, 사후관리, 조직 장악력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그는 은행업과 비은행업을 넘나들며 두루 경험한 덕인지 시장 니즈를 잘 짚어낸다. 이 대표가 꾸린 투자전략실이 하는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시장에 최적화된 펀드 운용 전략을 세운다. 시장에 최초로 선보인 출자자(LP) 지분 유동화 펀드, 하이브리드 펀드 등이 여기서 나왔다.

이 대표는 ‘출자자 지분 유동화’ 방식으로 세컨더리펀드에 출시해 벤처업계 ‘돈맥경화’를 풀어준 주역으로도 유명하다. 2016년 한국성장금융이 이 펀드 조성에 나섰고, 네오플럭스를 위탁운용사(GP)로 낙점했다. 이후 고용보험기금, 산재보험기금, 정부모태펀드 등이 참여해 총 760억원 규모의 ‘네오플럭스 마켓프론티어세컨더리펀드’가 조성돼 벤처캐피털 생태계에 묶여 있던 민간 LP를 상당수 해방해줬다. 이때 패스트파이브, 직방, 빅히트엔터테인먼트, 탑선, 파멥신, 에이블리 등을 주요 포트폴리오로 끌어올 수 있었다. 이 대표는 “세컨더리펀드는 벤처캐피털이나 최대주주가 보유한 구주 물량을 전문으로 사들이는 펀드를 의미하는데 기존 벤처펀드 투자자는 조기에 자금을 회수할 수 있고, 후속 투자자는 안정적인 투자처를 넘겨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며 “통상 기업이 창업 이후 기업공개(IPO)까지 걸리는 시간이 평균 13년 이상인 점을 고려하면 ‘돈 가뭄’에 단비였던 셈”이라고 말했다.

벤처업계 ‘돈맥경화’ 풀어준 펀드 출시

하이브리드펀드 ‘마켓프론티어 투자조합 2호’도 시장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하이브리드펀드는 기업의 신주와 구주에 함께 투자하는 것”이라며 “성장 단계에서 구주를 매각하려는 기존 주주와 안정적으로 우호 지분을 확보해 경영에 전념하려는 창업자의 수요를 모두 충족해준다”고 말했다. ‘시장 니즈’를 최우선으로 둔 이 대표의 전략이 통한 셈이다.

그는 ‘시장 니즈’를 제대로 잡으려면 자리에 연연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대표는 “2017년 바이오 분야 창업은 최고조였고, 2018년에는 벤처캐피털 투자 규모도 정점에 달했다”며 “이후 추락하기 시작했지만, 장기적으로 바이오는 성장할 분야라고 생각했기에 전문 실무 인력을 대펀(대표펀드매니저)으로 올리고 내가 핵심 인력으로 들어가 투자에 나섰다”고 했다. 주위 임원들이 ‘상무급이 대펀을 맡아야 하지 않냐’며 불만을 쏟아 냈다. 당시 그는 “우리(세대)는 스마트폰 기기가 나와서 반도체 관련 회사에 투자할 때 공부해서 쌓은 지식으로 투자에 나섰다”며 “스마트폰 기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해온 젊은 실무진은 사용 경험을 쌓은 세대라 마켓을 제대로 짚어낼 수 있다. 이들이 대펀을 맡아야 제대로 투자할 수 있지 않겠냐”고 설득했다.

이 대표의 성향이 짙게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는 경영학도였지만, 주위에서는 그를 공대생으로 알 정도로 새로운 IT 제품에 관심이 많았다. 툭하면 해외 사이트를 돌며 PDA, 태블릿, 노트북, 휴대폰 등을 구매해 분해, 조립과 개조를 반복하고 리뷰어를 자청하며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던 얼리어댑터였다. 이 대표는 “새로운 것, 특히 IT 장비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이 대단했다”며 “단순히 성적을 잘 받으려 공부하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익히려는 의지로 관련 분야를 파고들었고, 사용 경험이 쌓이니 ‘업’에 대한 스토리텔링도 술술 나왔다”고 했다.

그가 늘 젊은 심사역에게 관련 ‘업’을 파고드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호기심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래야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걸 남보다 빠르게 캐치할 수 있다는 게 이 대표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사내에서 투자 판단에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멘토 역할에 더 집중하고 심사역이 소신을 갖도록 돕는다. 20년 업력을 지닌 신한벤처투자가 차별화된 경쟁력을 이어가는 것도 VC직원들이 소신을 갖고 투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업계 관계자가 많다.

이런 분위기 덕분인지 투자 성과도 좋다. 이 대표는 “지난해 신한벤처투자는 총 2024억원을 국내외 벤처기업 발굴에 투자했다”며 “2020년 네오플럭스 이름으로 총 749억원을 투자했던 때와 비교하면 투자액이 무려 170% 이상 증가한 셈”이라고 강조했다. 투자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난해에만 의료용 로봇 개발 업체 이지앤도서지컬, 광학검사 전문기업 큐빅셀, 가축 헬스케어솔루션 기업 한국축산데이터, 음성 기반 커리어 대화 플랫폼 커피챗 등 대략 40여 건의 투자가 이뤄졌다.

‘신한’이라는 브랜드도 신한벤처투자의 가파른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이 대표는 “모기업이 신한금융그룹이기 때문에 펀드를 조성할 때 출자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정부가 전략적으로 추진 중인 ‘뉴딜’ 관련 기업을 발굴하는 ‘신한벤처투모로우투자조합1호’ 결성에 큰 밑거름이 됐다”며 “투자 여력도 더 커졌고, 앞으로도 혁신기업을 발굴하는 데 신한의 경험과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인도, 동남아에 부는 DT 열풍은 기회”

이 대표는 기세를 몰아 코로나19로 미뤄뒀던 해외투자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인도의 경우 이미 지난해 국내 VC 중에 가장 먼저 진출해 성과를 냈다. 지난해 인도 모바일 커머스 기업 ‘딜라이트풀고메(Delightful Gourmet Private Limited)’의 투자금을 회수한 것. 2017년 4월 16억8000만원을 투자해 3년 5개월 만인 2020년 9월 86억원가량을 회수했다. 그는 “인도와 베트남,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 지역에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T)을 통한 각종 커머스 플랫폼이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며 “해외 혁신기업에 투자하는 기회를 발굴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투자한 국내 스타트업을 해외시장에 진출시키는 기회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해외투자는 물론 기업 간 비즈니스 연결에도 나서겠다는 뜻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그간의 소회를 풀어냈다.

“정확히 벤처투자 일만 21년을 했네요. 돌이켜보니 투자가로서 잘했다는 생각은 안 드네요.(웃음) 성공적인 투자 포트폴리오도 있었지만 실패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너무 특이한 스타트업이어서, 너무 빨리 투자해서…. 변수도 이유도 참 많았습니다. 미디어 콘텐트 산업 하나만 봐도 지금이야 다들 넷플릭스를 보니까 중요성을 알지만, 10년 전엔 몰랐잖아요. 몇 번 투자에 실패하면서 ‘투자’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가치’가 뭘까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심사역이 하지 않는 펀드레이징 같은 일에도 뛰어다녔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직접투자’보다 젊고 참신한 심사역의 멘토 역할에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이게 시장의 ‘변덕’을 이겨내는 힘이 아닐까요?”

- 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사진 지미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