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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25) 중국(中國)이라는 도그마_1 

 

국내 반중 감정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치솟고 있다. 중국은 한국 전체 수출에서 30% 이상을 차지하는 경제적 파트너이지만 북한 등의 요인으로 정치적으로는 불편한 상대이다. 우리는 중국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베이징 동계올림픽 기간 내내 편파판정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올림픽이 끝나면 아마 중국은 개최국으로서 얻는 명성보다 국가 브랜드가 추락한 손실이 더 클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올림픽이 중국의 국가 통합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전 세계 국가들에서는 불공정한 국가라는 이미지가 더 강화될 것이고, 중국을 경계하는 나라가 더 많아져 중국의 경제성장에도 걸림돌이 될 것 같다.

우리가 중국이라는 호칭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중화사상에 동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야 한다. 한자라는 게 시각적 각인효과가 커서, ‘中國’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자연스럽게 중화사상을 받아들이는 효과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 대까지도 중국이라는 호칭 대신 ‘중공(中共)’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이는 중국공산당(中國共產黨)을 줄여서 불렀던 것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해 일개 정당(중국 공산당)의 점령 지역으로 비하하려고 ‘중공’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1992년 중국과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면서 중국 사람들이 중공이라는 표현을 극도로 싫어하자 한국과 일본 정부는 중공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스스로 자제했다. 한국과 일본 외교관들이 쓰기 시작한 중국이란 호칭이 이제는 일반화된 것이다.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중국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중화사상에 동조한다는 느낌이 들어 껄끄럽다. 이 글에서도 현재 중국과의 전통적 흐름이 연결될 때는 중국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되도록 청나라, 당나라 같은 그 시대의 국가 이름을 사용했다.

중공이 ‘중국’이 된 까닭


▎임진왜란의 판세를 바꿔놓은 제2차 평양성 전투를 그린 ‘평양성 전투도’.
오늘날 중국의 넓은 땅덩어리는 불과 200년 전에 청나라가 역대 최대로 넓혀놓은 땅인데, 중국 사람들은 그 땅덩어리 위의 모든 역사를 자기들의 역사로 만들려 하고 있다. 우리도 중국이라는 애매한 호칭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그 땅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중국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한반도를 몽골제국이나 거란, 여진 등 유목민족이 침략했던 역사를 중국이 침략했다고 표현하는 사람이 많다. 현대 중국 학자들은 훈족, 돌궐, 거란, 여진, 몽골을 중국의 일원으로 간주하지만 훈족, 돌궐, 거란, 여진, 몽골은 자기들을 농경민인 한족의 일원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지리학적인 중국 대륙과 그 땅 위의 모든 역사상 국가를 중국이라고 부르는 신중화주의의 프레임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조선후기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지배할 때, 명나라를 숭상했던 가장 큰 이유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줘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이여송의 명나라 군대 대부분은 누루하치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이성량의 여진족 용병들이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당시 명은 만주의 주요 거점만 군벌을 통해 간접 지배하고 있었다. 명나라가 우리 한민족과 친연성이 큰 여진족에 돈을 대준 것이고, 임진왜란 때 싸웠던 명나라 군사들은 명나라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여진족 군사들이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고마워해야 할 대상은 임진왜란 때 돈을 대준 명나라와 명나라의 용병으로 조선에 와서 싸워줬고 그 덕택에 청나라로 발전한 여진족 군벌들이었다. 못난 임금 선조는 명나라 원군을 불러온 것을 자기의 업적으로 끌어올리고 싶어 했고 이순신과 의병들의 활약은 깎아내리려고 했다. 조선의 왕들은 명나라의 은혜에 감복해 숙종부터 고종 때까지 200년간 청나라 몰래 망해버린 명나라 왕들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렸다.

1780년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서 북경을 걸어서 다녀왔다. 개항 전 조선은 명의 해금정책을 따라 하다 청나라가 해금을 완화한 1684년 이후에도 민간 선박이 외국에 가는 것을 금지하고 서양과의 무역도 막았다. 중국에 조공하기 위한 육로 무역만 허용했다. 박지원이 편리한 뱃길이 없어 고생스럽게 북경까지 걸어 다녀오면서 쓴 기행문이 『열하일기』이다. 박지원은 아무런 근거 없이 청나라 선비들을 깔보는 조선의 식자들을 비판했다. 당시의 조선은 100여 년 전에 멸망한 한족이 세운 명나라 왕들의 제사를 몰래 지내면서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발전하고 백성들이 잘살지만 비천한 여진족 오랑캐 출신인 청나라에 대한 정신 승리였다.

6년 뒤인 1786년 북경을 다녀온 북학파 박제가(朴齊家)는 정조에게 제출한 정책 건의안 ‘병오소회(丙午所懷)’에서 “이용후 생에 필요한 선진기술과 도구를 도입하고 국내외 상업과 외국무역을 장려하는 것이 부국강병의 첩경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선 엘리트는 박제가와 달리 국제무역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이 크지 않은 반면, 순박한 풍속이 손상되고 서학이 확산되는 등 부작용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19세기 후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도 조선의 전통적인 해금정책을 자연스럽게 따른 것에 불과하다. 1876년 일본과 수교한 강화도조약 이전에도 북경을 다녀온 몇몇 사람이 개국통상론을 주장했으나 이 또한 소수의견에 불과했다. 조선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벼농사 중심의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개혁하고 싶지 않았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가 종이호랑이가 되어가는 과정을 수십 년간 지켜보면서도 조선의 엘리트들은 외부 세상의 도도한 변화를 외면했다. 농업 중심의 경제에서 상공업 중심의 개방된 경제로 바뀌는 변화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자기중심의 편협한 세계관은 나라를 망국의 길로 몰아넣었다.

도를 넘은 중국 혐오증


▎국내의 반중 시위.
몇 년 전, 일부 한국 언론에 중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배척하는 움직임과 수용하자는 주장이 충돌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필자의 지인인 중국 여행 전문가 윤태옥 선생이 아는 중국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터무니없는 주장이었다고 확인되었다. 오히려 번화가에는 산타 복장, 크리스마스트리와 캐롤이 차고 넘쳐 한국보다 더 난리법석이라고 한다. ‘중국’이라는 주어를 사용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우리나라 부천시 소사동 규모의 허베이성 랑팡시에서 크리스마스에 대한 부정적인 조치가 있었다는 것이 과장된 결과였다. 인구가 15억 명에 육박하는 대국에서 조그만 지방정부 몇 군데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억제하는 조치를 했다고 중국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한국인 선교사 추방 또는 비자 발급 거부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중국에서는 종교는 자유지만 선교는 불법이다. 다른 사람의 사상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에서다. 중국에도 나름대로의 법과 제도가 있고 우리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 유신정권의 박정희 대통령이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어 민간의 습속에 깊숙이 간여했듯이 중국 지방정부에서 크리스마스에 흥청거리지 말자고 할 수 있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에서 공산주의와 앙숙인 기독교 전도사뿐만 아니라 이슬람교 전도사와 불교 전도사도 같이 추방할 것이다. 지방정부의 작은 사건을 침소봉대하고, 선교를 불법으로 정한 나라에서 전도사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 일로 중국을 매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요즘 언론과 유튜브를 보면 중국 혐오증이 도를 넘고 있다. 근거 없는 기사나 과장된 뉴스로 중국을 욕하는 내용에 한국인들이 호응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중국에 불리하고 한국에 유리한 사건 하나만 생기면 별것도 아닌 일을 천지가 진동한 것처럼 과장해서 보도한다. 정작 중요한 중국 경제의 거시적 흐름과 중국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은 별로 많지 않다.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되면서 중국 붕괴에 대한 글이나 동영상도 범람한다.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정통 경제전문가들은 중국 붕괴를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 중국은 괜찮은데 그 사이에 낀 한국 경제의 미래가 큰 걱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 또래는 1년에 100만 명씩 태어났는데 요즘은 1년에 25만 명만 태어난다. 신생아가 70% 줄어든 한국은 일본보다 더 심각한,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절벽이 가까운 미래에 닥칠 것이다. 필자는 지난 30여 년간 중국에 수천억원대의 기계, 장비, 철강 등을 팔면서 중국이라는 나라와 중국 장사꾼들을 경험해왔다. 장사꾼의 눈으로 중국 장사꾼들을 보면서 한국 장사꾼들과 차이를 별로 못 느꼈다. 중국 장사꾼들은 협상을 할 때 엄청난 계획으로 현혹해 사람을 혹하게 할 때도 있었고, 시간을 질질 끌어서 피곤하게 할 때도 있었고, 국제적인 상관례에 어긋나는 황당한 행동들도 했지만 대부분의 중국 장사꾼은 믿을 만한 파트너였다.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등 필자가 봐온 중국 지도자들은 동시대 5년짜리 임기의 한국 대통령들보다 더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집요하게 중화민족 부흥을 추진했다. 중국에서 대규모 텐트 공장을 운영했던 친구가 20년 전에 중국의 저임금 근로자들이 가지고 있는 대국의 자존심을 이야기한 것이 오랫동안 귓가를 맴돌았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중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보다 독하게 일하지는 않았지만, 패를 보기 힘든, 만만치 않은 협상가들이었다. 중국은 산업화 역사가 짧아 중국 기업인들의 경험과 지식은 높은 수준이 아니었지만 돈에 대한 집착, 사업에 대한 집중력, 특히 협상 능력은 우리보다 뛰어났다. 중식당의 원탁 테이블에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합의를 이끌어가는 중국 사람들에게는 상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광대한 영토와 시장을 바탕으로 선진문명을 이끌어왔고, 문화와 인류의 발전을 선도해왔고, 장구한 세월 동안 상공업의 전통을 이어왔다. 조선시대 왕들이 정권 유지를 위해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말로 농업경제 중심의 주자학적 질서를 강요하며, 외적의 침입을 막는다고 백성들을 수레도 못 다니는 꼬부랑길로만 다니게 할 때, 청나라는 세계경제의 30%를 차지하는 상공업 대국이었다.


▎충북 괴산군에 있는 만동묘비.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의종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세계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도 한국 사람들의 혐중은 지나치다. 물론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이웃한 나라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 보통 중국의 국수주의와 전체주의를 비난하지만, 한국의 냉전시대 유산과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영향도 커 보인다. 세계질서는 다극화될 것이고 보호무역의 파도는 더욱 거세질 텐데, 한국의 대외의존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싫든 좋든 앞으로도 계속 긴밀하게 교류하며 살아갈 나라가 중국인데, 편협한 중국 도그마에 갖혀 있으면 아무런 실익이 없고 문제만 커진다. 중국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괜찮지만 맹목적인 혐오는 큰 문제다. 근거 없는 혐중보다는 차라리 논리적인 반중이 훨씬 더 좋다. 중국 젊은 세대들의 애국주의가 동아시아에 큰 위기로 발전할 수 있듯이 한국의 심각한 혐중 정서도 동북아에 위기 요인이 될 것이다. 아시아 연구자 정호재씨는 한국 사회에 불길처럼 타오르는 반중 정서에는 중국을 문명국으로 보지 않는 혐오 감정과 위협적인 중국에 대한 공포의 정서가 섞여 있다고 본다. 앞으로도 수백 년, 수천 년 같이 살아갈 이웃나라와 어떻게 관계를 수립해야 할지 방향을 정하려면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압도적인 인구와 땅덩어리로 가뿐하게 G2에 올라선 중국을 단선적인 혐오와 공포의 시선으로 보기보다는 미국과 더불어 또 하나의 파트너로 바라봐야 한다. 100여 년 전에는 중화사상의 망령, 소중화주의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 지금 이 시대에는 무섭게 떠오른 신중국의 신중화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약 30년간 4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 2018년 9월 Forbes Asia 200대 유망 기업에 서플러스글로벌이 선정됐다. 2015년부터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간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와 인류 무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들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2203호 (20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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