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소울의 삶과 미술심리(28) 

용서 | 상대의 과오를 덮는다는 것 

용서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방과의 애착, 심리적 거리감, 기대감 등에 따라 잘못을 덮어줄 수 있는 범위도 달라질 것이다. 나는 주변 사람의 실수를 어디까지 덮어줄 수 있을까.

▎프리다 칼로 [우주, 디에고, 나, 세뇨르 솔로틀의 사랑과 포용] 1949
우리가 세상에 막 태어나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영유아 시절, 부모님은 우리가 실수를 해도 따듯하게 포용해주었다. 음식을 먹다 흘려도, 배변 실수를 해도 웃으며 닦아주고 알려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하고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실수는 더는 웃으면서 넘어가는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실수도 실력이고, 실수도 세 번 이상 반복되면 고의라고 여겨지기에, 성인인 내가 저지른 실수를 누군가가 따듯하게 포용해주면 고맙게 기억된다.

사전적 의미의 용서는 다른 사람이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너그럽게 봐준다는 뜻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인 만큼, 개인은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좋은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려 노력하겠지만 관계맺음에 있어서 기대감에 따른 서운함과 같은 가벼운 상처부터 원한과 미움, 증오와 복수심과 같은 깊은 상처까지, 크고 작은 상처는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는 잘못을 저지른 누군가가 있더라도, 그 사람이 누구든 잊고 용서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용서한 자는 ‘용서하는 행복’을 알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무리 용서가 좋다고 해도 용서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방과의 애착, 심리적 거리감, 기대감 등에 따라 잘못을 덮어줄 수 있는 범위도 달라질 것이다. 나는 주변 사람의 실수를 어디까지 덮어줄 수 있을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과오는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당신은 내게 우주니까요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이다. 짙은 눈썹의 자화상으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그녀이지만, 독특한 화풍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는 것은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이다. 칼로는 살아가면서 두 번의 큰 사고를 당했는데, 첫 번째는 16살에 교통사고로 겪은 신체적 사고이고, 두 번째는 21살 연상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 만난 것이다.

디에고 리베라는 민중벽화를 그리는 멕시코 화가로, 그녀를 만날 당시 이미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리베라가 두 번 이혼한 점, 자신보다 21살이 많다는 점, 무신론자라는 점 때문에 그녀의 부모님은 결혼을 반대했으나 결국 둘은 결혼을 했다. 리베라는 자신의 그림 모델들을 포함한 많은 여성과 문란한 관계를 가졌고 결국 칼로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도 내연관계가 되면서 두 사람은 이혼을 했다. 그러나 이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베라가 다시 칼로를 찾아왔다. 칼로는 리베라를 받아들이고 재혼을 하고 그녀가 눈감는 순간까지 리베라와 함께했는데, 칼로의 이러한 무한한 포용을 보여주는 대표작이 [우주, 디에고, 나, 세뇨르 솔로틀의 사랑과 포용]이다.

우주의 여신이 대지를 안고 있고, 대지의 여신은 상처받았지만, 칼로를 안고 있다. 칼로는 리베라를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안아주고 있다. 칼로는 “디에고는 내게 모든 것이었다. 그는 나의 아이, 나의 연인이자 나의 우주이다”라고까지 말했다. 무한한 사랑으로 리베라를 용서하고 품은 칼로는 멕시코의 500페소 구권 지폐의 뒷면에 실린 적 있다. 앞면의 모델은 그녀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이다.

아버지를 용서합니다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평화와 예술의 알레고리] 1638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로, 여성 최초로 직업 화가로 등록된 작가다. 그녀가 19세 되던 해, 영국의 궁정화가였던 그녀의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는 딸의 미술교육을 자신의 동료 화가 타시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큰 실수였다.

19세 젠틸레스키는 스승 타시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이 사건은 법정 소송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그녀가 강간당했다는 사실보다 숫처녀였는지를 중요시 여기며 법정에 산파를 불러 부인과 검사를 받도록 했고, 7개월간 손가락을 으스러트리는 고문 시빌레를 통해 정말 그녀가 원해서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었는지 되물었다. 결국 7개월 후 그녀는 피해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타시는 2년형을 선고받았고, 이마저도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감면되었다.

이 사건 이후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는 그녀에게 ‘젠틸레스키 가문의 수치’라는 이유로 결혼을 시켜 성을 바꾸려 했다. 빚이 많았던 무명 작가와 결혼해 로마를 떠나 살라는 말을 들은 그녀는 그 뒤로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살았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르테미시아는 다섯 아이를 낳았으나 네 명이 죽었고, 실력 없는 무명 화가였던 남편은 그녀의 재능을 시기해 폭력을 일삼았다. 결국 그녀는 딸을 데리고 로마로 도망쳤다. 한참이 지나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간을 당했던 딸에게 수치스럽다는 이유로 성을 바꾸고 고향을 떠나도록 했던 아버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를 만나러 갈지, 이대로 미움을 안고 살아갈지.

결국 그녀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아버지는 천장화를 의뢰받아 그리고 있었다. 아르테미시아가 아버지를 만나러 간 곳에는 머리가 하얗게 샌 아버지가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재회하고, 아버지의 눈과 손이 되어 천장화를 함께 완성했다. 오랜 시간 아버지에게 가져왔던 원망의 감정을 씻어내고 용서하니,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화가 중 내 딸이 최고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아버지는 그녀와 재회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사망했다.

아들을 용서한 아버지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1669
빛의 화가로 알려진 네덜란드의 바로크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가 그린 [돌아온 탕자] 속에는 젠틸레스키의 이야기와 반대로 아들을 용서하는 아버지의 사연이 담겨 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그의 둘째 아들이 자신 몫의 유산을 받은 후 외지에 가서 모두 탕진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돈을 모두 써버린 둘째 아들은 결국 돼지우리에서 일하는 상황까지 가자 모든 것을 뉘우치고 아버지에게 돌아와 일꾼으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매우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오히려 아버지는 아들을 반기며 달려 나왔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살찐 소를 잡아 잔치를 준비했다.

그러나 첫째 아들 입장에서는 자신은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일을 도왔고, 재산도 성실히 잘 지켰기에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림 오른쪽에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그의 형이다.

둘째 아들은 칼을 차고 있다. 이 칼은 모든 것을 탕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마지막 표식이었다. 이 표식을 지켰기에 아버지는 아들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와 양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그림은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아들은 못마땅해하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그 누구나가 내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용서는 그림을 감상하는 이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용서하는 연습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반대로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상대를 용서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상처를 곱씹고, 피해를 입은 사실에 안타까워하며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감정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앞으로의 다양한 상황을 회피하며 사는, 좋지 않은 습관이 생길 수도 있다. 젠틸레스키도 아버지를 직접 다시 만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용기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후회를 남기지 않게 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것이다.

심리치료 현장에서는 나에게 상처를 입혔던 사람에 대해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게 하는 훈련이 자주 진행된다. ‘너무해, 용서할 수 없어’가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느끼는 감정의 본질을 마주해보자는 의미이다. 화가 나는지, 억울한지, 슬픈지, 안타까운지 등. 그 감정을 마주하고 알아간다면 정말 용서할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더 화를 내고 싶은지 등이 결정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은 가치 있고 소중하기에 나쁜 감정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렇기에 아직 용서하지 않은 상대방을 생각하면 부정적 감정이 많이 떠오를 것이다. 이 감정들 역시 나를 움직이고 살아 있게 만드는 중요한 감정이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곳에 머무를 것이며, 알아봐준다면 나에게 필요한 메시지만 남기고 사라질 수도 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의 편안함을 위해 용서해보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해보면 어떨까.

※ 김소울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미술치료전공 겸임교수이자 가천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객원교수이다. 플로리다마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치유미술관』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

202206호 (202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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