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 대해 명확한 이유가 없는 생리적 거부감은 실제로는 자신에 대한 거부감이다.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어두운 면을 남에게서 보니, 마치 자신의 모습이 들킨 것 같아서 수치스럽고 짜증이 나는 것이다.
▎레메디오스 바로 [우연한 만남] 1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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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 가면 ‘저 사람과는 참 안 맞네’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싫은 사람도 있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생리적으로 싫은 느낌을 주는’ 사람도 있다. 이야기를 하면서 상대의 생각을 들어보니 ‘안 맞는다’는 느낌이 더 강해지는 듯하다. 이 느낌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명확한 이유가 없는 생리적 거부감은 실제로는 자신에 대한 거부감이다.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어두운 면을 남에게서 보니, 마치 자신의 모습이 들킨 것 같아서 수치스럽고 짜증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이유 없이, 생리적으로 싫어진다. 스위스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Carl Jung)은 이런 부분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림자’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성격이라고 의식하는 것과 반대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어두운 부분이라 외면해왔던 자신의 모습이다.
타인에게서 발견한 나다른 사람에게서 나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했을 때 기분 좋은 경험을 했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을 공통점으로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방에게 나도 그렇다며 반갑게 이야기할 수 있는, 드러낼 수 있는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비슷한 모습에서 동정심을 느꼈다면, 안쓰러워하는 스스로의 모습과 닮은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한 나와 닮은 모습이 스스로가 거부하던 모습이라면 불쾌한 감정이 떠오른다.스페인 출신의 초현실주의 작가 레메디오스 바로(Remedios Varo)는 스페인 내전과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멕시코로 망명하여 생애 대부분을 멕시코에서 보냈다. 그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두려운 현실을 받아들이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그림자와 그것을 다루는 자아의 모습들이었다. 작품 [우연한 만남]의 주인공은 상자를 열고 있다. 어둡고 좁은 상자 안에는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고, 이 둘은 파란 천으로 연결되어 떼어낼 수 없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누군가에게서 나의 어두움을 발견한 순간이다.용기 없고 남의 눈치를 보느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보면 마치 스스로를 보는 듯해서 화가 난다. 이상만 바라보며 실질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나, 나태하고 게으른 나, 비열하고 이기적인 나, 남의 눈치를 보느라 실속을 챙기지 못하고 자책하는 나, 남과 비교하며 저울질하고 겸손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나, 도덕적인 신념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나,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나 등 스스로가 미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남들에게서 발견하면, 우리는 그 사람이 이유 없이 싫어진다.
자신이 만든 또 다른 자아
▎레메디오스 바로 [죽음이 떠나간다] 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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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죽음이 떠나간다]에는 실타래를 잡고 앉아 있는 여성이 등장한다. 무채색 털실을 들고 있는 그녀의 실 끝이 닿은 곳에는 사람 형상의 인물이 두둥실 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붉은 머리의 여성과 체형도 비슷해 보인다. 사실 이 검은 형상은 그녀가 실타래로 만들어낸 자신의 모습이다.그림자는 누군가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라는 자아를 만들어간 우리가 동시에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가 그림자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여성이 있는 장소도 무채색이다. 이 배경도 그녀 자신이 만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인식하는 대로 환경을 받아들인다. 자신의 신념과 태도, 가치관으로 만들어진 세계 속에 각자의 객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여성은 자신의 환경도, 자신의 그림자도 계속해서 스스로 만들어나가고 있다.그림자가 미운 여성은 이 그림자를 자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보내려 한다. 그런데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림자의 가슴에서 빨간 새가 날아오고 있다. 새의 빨간색은 여성의 머리색, 피부색과 같은 색이다. 그렇다. 내가 미워하는 그림자는 떠나보내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림자의 저 깊은 곳에 있는 것은 결국 살아 있는 나 자신이었다.
그림자와 함께, 조화롭게
▎레메디오스 바로 [조화] 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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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나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다음에 필요한 것은 그림자와의 소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어떤 그림자가 있는지 분류해보는 것도 좋다.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그림자는 무수히 많다. 분류가 끝났다면 각각의 그림자가 내 안에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과거에 겪었던 트라우마 때문에 만들어진 예민한 그림자도 있을 것이고, 경쟁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남을 짓밟는 그림자도 있을 것이며, 나 자신을 지키려고 만들어진 비겁한 그림자도 있을 것이다.그림자는 얼핏 듣기에는 부끄럽고 남들에게 당당하지 못한 나의 일부라 생각되기에 최대한 가려야 할 존재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융은 그림자를 다루는 가장 좋은 방식은 소통하며 화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분명 그림자를 통해 얻은 혜택도 있고, 그림자를 통해 성장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비겁함은 나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었고, 남을 짓밟고 싶은 마음은 내가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버릴 수 없는 나의 부분으로 내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레메디오스 바로의 작품 [조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벽에서 나타난 인물과 마주하고 있다.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이기에 깊숙이 숨겨놓았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이 소통하는 수단은 악보를 그릴 때 사용되는 오선이다. 꽃, 크리스털, 구 등 다양한 오브제를 오선 위에서 움직이며 선율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은 그림자를 벽 안에 가두는 대신 함께 음악을 만들기로 했다. 주인공 뒤편에는 다른 그림자가 독단적으로 악보를 만들어가고 있다. 아마 주인공은 지금의 악보가 완성되면 뒤돌아 그 악보를 수정하게 될 것이다. 그림자와 조화롭게 조율해가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 안에 존재하는 그림자와 소통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빛과 그림자
▎레메디오스 바로 [별죽] 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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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사물이 있으면 그림자는 당연히 존재하고 공중에 떠 있지 않은 한 그림자는 사물에 바싹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가장 가까이에서 자신의 어둠을 담당하는 그림자를 오히려 자신의 든든한 아군으로 바꿔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작품 [별죽] 속 주인공은 우주의 별들을 기계로 끌어모으고 있다. 그리고 왼손으로 이 기계를 빙빙 돌려 별을 갈아내고 있다. 이렇게 갈린 별들은 별죽이 되어 새장에 갇혀 있는 달에 보양식으로 전달된다. 주인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은 그림자는 보름달처럼 꽉 찬 모습일 수 있지만, 주인에게 미움받은 그림자는 장점도 퇴색되면서 그믐달이 되어버린다.그림자에는 장점이 많다. 그렇기에 융은 그림자가 창조성의 기반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어둡다는 이유로 외면받아왔던 모습들은 대체로 사회적으로 부인되어 왔던 모습들이다. 7대 죄악이라 불리는 탐욕, 나태, 정욕, 시기, 분노, 교만, 식탐과 같은 모습은 주로 그림자로 불렸다. 그러나 조금만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보자. 욕심이 있기에 인간은 성장하고(탐욕), 휴식도 반드시 필요하다(나태). 때론 사랑이 인생에서 1순위가 될 수도 있으며(정욕),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더 열심히 움직이게 하기도 한다(시기). 화를 참고 지내기보다는 표현하는 것이 건강할 수 있으며(분노), 자신이 이루어낸 결과를 남들에게 자랑하고(교만), 고생한 나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선물로 줄 수도 있다(식탐).그림자의 밝은 부분을 성장시키고, 또 그 빛이 주변 그림자도 밝힐 수 있다면 이는 분명 성장에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림자가 어두운 존재이고,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의 어두운 면들이 보름달을 통해 빛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나 자신이 될 것이다.
※ 김소울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미술치료전공 겸임교수이자 가천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객원교수이다. 플로리다마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치유미술관』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