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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독일 베를린(Berlin) 

베를린장벽 붕괴 33주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이듬해인 2000년 10월 3일에는 동서로 갈라져 있던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되었다. 수도 베를린에서는 브란덴부르크 대문과 부서진 조각으로 남은 베를린장벽, 개축된 독일국회의사당이 격동의 독일 역사를 증언한다.

▎베를린 심장부 광장 파리저플라츠에서 본 브란덴부르크 대문. / 사진:정태남
10월 3일은 우리나라에서는 개천절이고, 독일에서는 통일기념일이다. 독일통일을 상징하는 건축물을 꼽는다면 다름 아닌 수도 베를린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대문이다. 그 형태는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입구 프로필라이온을 연상하게 한다. 베를린은 원래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는데 근엄한 분위기가 넘치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브란덴부르크 대문은 ‘서대문’에 해당한다. 1786년에 프로이센의 왕으로 즉위한 프리트리히 빌헬름 2세는 기존의 서쪽 대문을 헐고 평화를 상징하는 새로운 베를린의 관문인 브란덴부르크 대문 건립을 계획하고는 1788년에 착공, 3년 후인 1791년에 완공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대문은 베를린 서쪽으로 50㎞ 떨어진 브란덴부르크와 연결하는 관문이었다.

브란덴부르크 대문, 베를린장벽, 독일국회의사당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베를린은 온통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지만 브란덴부르크 대문은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종전 후 독일의 서부는 전승국인 미국·영국·프랑스가, 동부는 소련이 점령하게 되면서 동독 지역 안에 있던 베를린은 브란덴부르크 대문을 중심으로 미국·영국·프랑스가 관할하는 서베를린과 소련이 관할하는 동베를린으로 분단되었다. 동베를린 시민들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기 시작하자 1961년 8월 13일, 동독 공산정권은 자본주의와 파시스트로부터 동독 시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브란덴부르크 대문을 중심으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경계에 높이 3.6m의 긴 콘크리트 장벽을 세웠다. 서베를린 시정부는 이를 ‘치욕의 장벽’이라고 불렀다.

이리하여 브란덴부르크 대문과 베를린장벽은 어느 누구도 통과할 수 없게 되었고 서베를린은 동독 지역 안에 있는 유일한 자유의 보루가 되었다. 그로부터 28년 동안 베를린은 물리적으로 분단된 상태로 있었으며 베를린장벽은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철의 장막’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 기간 동안 서독은 끊임없이 독일통일을 추구했다. 서독 입장에서 보면 동독은 다른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동독과 서독이 양측에 대사관이 아닌 대표부를 설치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편 분단 시대에 서독에서 자동차 편으로 서베를린에 가려면 동독 지역 통과 비자를 먼저 받고 난 다음 차가운 얼굴을 한 동독 경찰로부터 입국 검문 절차를 받은 후 지정된 도로를 따라 몇 시간 달린 다음, 베를린 외곽에 도착하면 다시 섬뜩한 출국 검문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마음 졸이는 순간을 보내고 서베를린의 체크포인트 안으로 들어서면 비로소 자유의 땅을 밟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베를린장벽을 넘어 자유의 땅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려다가 총에 맞아 희생된 사람은 2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브란덴부르크 대문 북서쪽 건너편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들은 동독을 탈출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영혼을 기리고 있다.


▎분단의 상징에서 통일의 상징이 된 브란덴부르크 대문. / 사진:정태남


1987년 6월 12일, 서베를린을 방문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브란덴부르크 대문 앞에서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총서기장을 향하여 “만약 당신이 평화를 간구한다면, 소련과 동유럽의 번영을 간구한다면, 또 자유를 간구한다면, 여기 이 대문으로 오시오. 그리고 이 대문을 열어젖히시오! 이 장벽을 무너뜨리시오!”라고 외쳤다. 그 후 2년이 지난 1989년 여름, 헝가리에 휴가 갔던 동독 주민들이 헝가리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탈출하기 시작하자 헝가리는 아예 국경을 개방해버렸다. 동독 주민들이 서방으로 대거 탈출하면서부터 동유럽에 닥친 자유화의 물결이 마침내 동독으로도 파급되자 서슬 퍼런 동독 공산정권이 꼬리를 내렸고 마침내 11월 9일에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이듬해인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공식적으로 통일되었으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0년에는 베를린이 다시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되었다. 또 격동의 독일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현장인 브란덴부르크 대문은 분단의 상징에서 통일의 상징이 되었다.


▎거리에 전시된 베를린장벽. / 사진:정태남


브란덴부르크 대문에서 한 블록 북쪽에는 독일 국회의사당이 자리 잡았다. 1894년부터 독일제국 의사당이었던 이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베를린을 공격한 소련군에 의해 상당부분 파괴된 후 방치되었다. 독일이 동서로 분단되어 있을 때 서독의 의사당은 임시수도 본(Bonn)에 있었고, 동독의 의사당은 1976년에 완공한 ‘공화국 궁전’(Palast der Republik), 일명 ‘인민궁전’이라는 정부청사 안에 있었다.


▎동독을 탈출하다가 목숨 잃은 영혼을 기리는 하얀 십자가들. / 사진:정태남
통일 독일의 수도가 베를린으로 정해진 다음에 독일 정부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유서 깊은 독일제국 의사당을 복원, 개축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국제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영국 건축가 노만 포스터(Norman Foster)의 설계안에 따라 독일 국회의사당은 1999년에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국회의사당의 돔은 원래 모습과 달리 바깥을 볼 수 있는 유리 돔(dome)으로 개축되었는데 이것은 이 역사적 건축물이 지닌 미래지향적인 요소이다.

‘독일인들의 노래’


▎관광객들을 위해 재현한 동독 경찰의 출입국심사 모습. / 사진:정태남
독일 국회의사당 앞에 휘날리는 독일 국기를 보면 독일 국가(國歌)가 흘러나올 듯하다. 독일 국가의 정식 명칭은 ‘독일인들의 노래 (Das Lied der Deutschen)’이다. 이 선율은 ‘시온성과 같은 교회’라는 제목의 개신교 찬송가로도 불린다.

그런데 ‘독일인들의 노래’는 원래 독일 국가로 사용하기 위해 작곡되지는 않았다. 이 곡은 오스트리아의 대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이 1797년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2세에게 바친 ‘황제 찬가’인 ‘신이여, 프란츠 황제를 지켜주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이다. 이 노래는 하이든의 ‘황제 사중주(Kaiserquartett Op. 76. No.3)’의 제2악장 테마 선율로도 사용되었다.

하이든의 ‘황제 찬가’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가처럼 사용되었는데, 1841년에는 독일 민족주의 시인이자 대학교수였던 팔러슬레벤은 이 선율에 독일 민족주의를 찬양하는 가사를 붙였다. 이것이 1922년에 독일 국가로 승격되어 나치 독일이 패망하던 1945년까지 불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동서로 분단된 다음 동독에서는 별도의 국가가 만들어졌지만 서독에서는 한동안 국가가 없었다. 그러다가 1952년에 ‘독일인들의 노래’를 그대로 서독의 국가로 쓰기로 했다. 단, 게르만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가사 1, 2절은 제외하고 3절만 부르기로 했다. 독일이 통일된 다음에는 서독 국가 ‘독일인들의 노래’를 통일 독일의 국가로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새로 단장된 독일 의사당과 독일 국기. / 사진:정태남
‘독일인들의 노래’ 첫 소절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
Für das Deutsche Vaterland!


첫 줄에서 아이니히카이트(Einigkeit)는 ‘단일성’, ‘일체성’, ‘통일’이란 뜻이고 레히트(Recht)와 프라이하이트(Freiheit)는 각각 ‘정의’와 ‘자유’란 뜻이니 전체를 번역하면 ‘통일과 정의와 자유를 조국 독일을 위하여!’가 된다. 즉, 서독이 그랬듯이 통일된 독일이 추구하는 것도 정의의 나라, 자유의 나라임을 만방에 재천명한 것이다. 독일통일을 어느 누구보다 더 부러워하는 우리는 이것을 ‘통일과 정의와 자유를 조국 대한민국을 위하여’로 한번 바꾸어보고 싶지 않은가?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분야 외에도 미술, 음악, 역사, 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로마를 중심으로 30년 이상 유럽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에 여러 권이 있다.(culturebox@naver.com)

202211호 (202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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