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古都) 베로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향이기도 하다. 베로나는 이탈리아에서 매우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며 쾌적하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도시환경을 자랑한다.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랜드마크는 로마제국 시대 초기에 세워진 원형극장이며, 매년 여름에 대규모로 열리는 야외 오페라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베로나 시가지와 아레나의 유적이 보이는 브라광장. / 사진:정태남

16세기 말, 한반도가 임진왜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을 때 영국에서 셰익스피어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불멸의 사랑 이야기를 썼다. 다름 아닌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첫 막이 오르기 전, 해설자가 다음과 같이 이 극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날지 미리 말해준다.

“세도 있는 두 가문이 아름다운 베로나를 무대로 하여 오래 쌓인 원한으로 또 싸움을 일으켜 평온한 시가를 어지럽게 만듭니다. 이 두 숙명적인 원수의 배 속에서 불우한 한 쌍의 연인이 태어납니다. 이들의 사랑은 불행하고 불우한 파멸인 죽음으로 끝나고, 두 가문의 갈등도 끝납니다.”

해설자는 이 극의 배경이 베로나임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베로나는 서쪽으로는 밀라노, 동쪽으로는 베네치아, 남쪽으로는 볼로냐·피렌체·로마로 통하고, 이탈리아와 독일을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이며 아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古都)이다. 현재 베로나 인구는 25만 명 정도이고 이탈리아에서 매우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게다가 쾌적하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도시환경을 자랑한다.



베로나의 아레나

▎로마제국시대의 원형극장 아레나의 유적. / 사진:정태남

베로나 시가지 중심부에는 중세 베로나를 황금기로 이끌었던 스칼라 가문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스칼라 가문이 통치할 때인 13세기의 베로나가 배경이다.

베로나는 로마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도시이다. 따라서 스칼라 가문의 흔적 사이로 2000년 전 로마제국 시대의 유적이 곳곳에 눈에 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유적은 브라 광장(Piazza Brà)에서 볼 수 있다. 이 널따란 광장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은 로마의 콜로세움처럼 생긴 원형극장 유적, 즉 ‘베로나의 아레나(Arena di Verona)’이다.

베로나의 아레나는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고학자들은 기원후 14년에서 54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니까 로마의 콜로세움보다 몇십 년 앞서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콜로세움과 비교해볼 때, 수용인원이 콜로세움은 최대 7만 명, 베로나의 아레나는 약 3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옛날 이러한 원형극장에서 벌어졌던 여러 행사 중 검투사 시합은 최고의 볼거리였다. 이곳에서 울려 퍼지던 피의 함성은 끊임이 없었고, 경기장 바닥에 깔아놓은 모래는 검투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곤 했다. 아레나(arena)는 바로 ‘모래’를 뜻하는데 ‘원형경기장’이란 뜻으로 굳어져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한편 우리는 편의상 원형극장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타원형극장이다.

베로나의 아레나는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지진이 이 지역을 강타하는 바람에 관중석 외곽 부분은 일부만 남고 대부분 무너져 내렸고 그후에는 폐허의 길에 접어들었다. 중세에 이 유적은 사형장, 기사들 간의 결투장, 창녀굴 등으로 전락했으며, 그러다가 1580년에는 어느 정도 복원되어 권력자들의 힘을 과시하는 행사장이 되었다. 1700년대에는 이곳에서 투견과 투우가 벌어졌고, 우(牛)시장 등으로 사용되다가 가끔 연극 공연 무대가 되기도 했다. 그 후에는 오로지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만 관심을 끌 정도의 유적으로만 남아 있다가, 지금은 수준 높은 야외 오페라 공연장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이곳은 최대 2만2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또 2026년에는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 폐막식이 바로 이곳에서 성대히 열릴 예정이다.

▎연속되는 아치로 이루어진 원형경기장 아레나의 외벽. / 사진:정태남

베로나의 아레나는 음향 시설이 뛰어나다. 신기하게도 관중석 맨 꼭대기 뒤쪽에 서 있어도 저 아래 멀리서 사람들이 말하는 이야기가 귓전에 생생하게 전달될 정도이다. 그러고 보니 1970년 여름 이곳에서 비제(G. Bizet)의 오페라 [카르멘]을 공연할 때 있었던 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오페라를 실내에서 공연할 때는 말을 무대에 올려놓기 힘들지만 아레나처럼 넓은 야외무대에서는 가능하다.

이 공연에는 말이 무려 38마리나 무대에 등장했다. 제1막, 제2막, 제3막이 모두 끝나고 마지막 제4막이 시작되었다. 에스카미요를 선두로 말을 탄 투우사의 행렬이 지나가는데, 행렬의 마지막 말이 갑자기 제멋대로 ‘궤도’를 이탈하여 오케스트라 박스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이때 마침 지휘자가 지휘봉을 높이 치켜들자, 말은 깜짝 놀라 오케스트라 박스 안으로 뛰어내렸다. 악기 부서지는 소리, 연주자들의 비명 소리에 공연장은 완전 아수라장이 되었다.

▎뛰어난 음향 시설을 자랑하는 아레나 내부. / 사진:정태남

불의의 사고를 지켜본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는 다음 순간을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지휘자는 지휘봉을 내리고 오케스트라 박스에 떨어진 투우사를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상스런 욕설을 마구 퍼부어댔다. 그런데 지휘자는 아레나에서는 아주 미세한 소리도 관중석으로 잘 전달된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여름밤의 정적을 뚫고 무대에서 듣기에 민망스런 욕설이 들려오자, 관중들은 모두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세계 최고의 야외 오페라 공연장

▎검투사 출입구에서 본 경기장 아레나. / 사진:정태남

아레나가 오늘날처럼 야외 오페라의 전당으로 거듭난 것은 20세기 초반의 일이었다. 베로나 태생의 성악가 제나텔로 부부는 아레나를 야외 오페라 공연장으로 사용하겠다고 베로나 시정부에 제안했고 시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베르디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13년 8월 10일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가 첫선을 보였다. 이 오페라가 여름 밤하늘 아래 젊은 건축가 파주올리가 디자인한 환상적인 무대 위에서 공연되자, 수천 명에 이르는 관중은 실내무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규모와 분위기에 압도되어 마법에 걸린 듯 황홀경에 빠졌다. 관중석에는 푸치니, 마스카니, 보이토, 일리카 등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거장들과 유럽 문화계의 유명 인사들도 앉아 있었다.

이 공연은 20세기 초 ‘세기의 대공연’으로 기록되었다. 그 후 매년 대략 6월 말에서 8월 말인 여름철에 아레나에서 공식적으로 오페라 시즌을 개최함으로써 베로나의 아레나는 ‘세계 최고의 야외 오페라 전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때부터 ‘아레나(Arena)’가 일반명사가 아니라 ‘베로나의 아레나’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이리하여 해마다 여름이면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을 베로나로 끌어들이고 있는데, 특히 독일 사람들은 오페라 공연을 보러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마치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연상할 정도로 대거 남하한다.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무대장식 일부. / 사진:정태남

그런데 이러한 ‘대박 신화’는 이탈리아가 오페라의 나라이고, 이곳 사람들이 오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했을까? 사실 오늘날 이탈리아 사람들 중에서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오페라를 봤다는 사람은 의외로 그리 많지 않다. 즉, 본고장에서도 오페라는 저변이 생각보다 그리 넓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종합예술인 오페라는 어떻게 공연하느냐에 따라 저변을 크게 확대할 수 있으며 또 새로운 형태의 문화산업으로도 부상할 수 있는 잠재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레나의 성공 신화는 ‘무엇’도 중요하지만 ‘어떻게’도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물론 이러한 성공 신화 뒤에는 ‘베로나’라는 도시 자체가 지닌 여러 가지 매력적인 요소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중 무엇보다도 먼저 베로나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향이라는 사실 말이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분야 외에도 미술, 음악, 역사, 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로마를 중심으로 30년 이상 유럽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에 여러 권이 있다.(culturebo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