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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 

초미세 제조기술이 국가 명운 가른다 

장진원 기자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위기를 맞았다는 우려가 크다.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압도적인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었지만, 시스템반도체로 대표되는 파운드리 부문에선 선두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격 하락이라는 악재까지 겹쳤다. 삼성전자에서 30여 년간 한국의 반도체 굴기를 이끈 산증인인 임형규 전 사장은 “그럼에도 답은 반도체에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위기가 곧 기회였던 한국 산업사의 면면이 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세계 무대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싱글톱’ 산업을 꼽으라면 단연 반도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반도체 수출액은 1280억 달러에 달한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약 20%를 반도체가 차지하고 있다. 국가 국내총생산(GDP)의 약 8%, 제조업 총생산액의 약 10%가 반도체산업의 몫이다. 글로벌 반도체시장 점유율은 18.4%로 2위, 메모리 반도체 점유율도 57%로 압도적인 1위다.

국가 핵심 산업이자 우리 경제의 버팀목인 반도체산업에 최근 들어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가격 하락에 따른 수익성 저하가 주요 배경이다. 실제로 최근 수출 실적 부진은 반도체 가격 하락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글로벌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아 최강자가 된 메모리 반도체에 비해 시스템반도체로 대표되는 파운드리 부문의 약한 고리도 풀어야 할 또 다른 숙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 시장을 장악한 데 반해 파운드리 산업은 TSMC 등 대만이 주도하고 있다. 대만보다 뒤늦게 파운드리 시장에 뛰어든 삼성전자가 시장점유율을 조금씩 높여가며 선전하고 있지만 단시일 안에 TSMC의 아성을 뛰어넘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기회이자 위기로 다가온 한국 반도체산업에 어떤 처방이 필요할까. 삼성전자에서 한국의 반도체 굴기를 몸소 이끌어 온 임형균 전 사장을 만나 해답을 물었다. 1976년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삼성전자에 엔지니어로 입사한 임 전 사장은 재임 28년간 삼성 반도체 부문에서 대부분의 사업 개척에 참여한 산증인이다. 엔지니어로서 비휘발성 메모리 분야를 개척해 낸드플래시 메모리 사업 창출을 주도했고, 메모리 개발 총괄임원으로서 삼성의 D램 사업이 글로벌 톱으로 올라서는 과정을 이끌었다. 사장으로 승진한 2000년부터는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사업 방향을 재정립하고 글로벌 일류화를 추진했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안에서도 임 전 사장만큼 산업 초기와 미래 비전 설계를 모두 경험한 이는 많지 않다. 임전 사장은 최근 양향자 의원과 대담 형식으로 한국 반도체산업의 생생한 발전사와 미래 비전을 담은 책『히든 히어로스』를 펴내기도 했다. 3시간여에 걸친 인터뷰는 반도체라는 개별 산업군을 넘어, 한국 정보산업 전반의 역사와 미래를 되짚는 시간이기도 했다.

‘히든 히어로스’라는 책 제목이 궁금하다.

책 서문에 쓴 대로 반도체산업은 한국이 첨단 산업국가로 도약하는 첫걸음이었다. 이병철·이건희 두 회장의 탁월한 경영이 삼성 반도체 굴기의 원천이 됐지만, 사실 신화의 바탕은 한국 사회가 배출한 수많은 인재의 헌신적인 노력이다. 반도체 제조공정에 허들이 1000개가 있다면, 각각의 허들을 책임진 히든 히어로 1000명이 있었던 셈이다. 기술 인재 확보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책 제목을 일부러 그렇게 정했다.

최근 정부도 반도체 인재 양성을 천명하는 등 분위기가 바뀌고 있지 않나.


저변을 늘린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일해보면 뛰어난 소수의 리더가 큰 성과를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 100명이 모인 팀이 있다면 특출난 10여 명이 팀을 이끄는 거다. 지금 우리는 메모리에 이어 파운드리라는 새로운 전쟁을 앞두고 있다. 과거 메모리에서 일본을 제친 것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다. 상위 0.1%의 뛰어난 인재들이 반도체 전쟁의 최전선에서 이끌어줘야 하지만 요즘 현실이 녹록지 않다. 이공계 인재들이 의대로 빠지고 벤처 창업에만 관심을 둔다. 최상위 인재들이 첨단산업에 기여해 한국이 여기까지 온 게 사실이다. 의대도 플랫폼도 좋지만 첨단산업에서 히든 히어로들을 키우는 문화와 사회적 인식이 절실하다. 이재용 회장 혼자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지 않나.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이자 핵심인 반도체가 앞에서 끌고 그 뒤를 디스플레이, 소재, 자율주행, 바이오 등이 따라가야 한다. 여기에 나라의 핵심 인재들이 모여야 한다.

반도체가 우리 산업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어느 정도인가.

수출액이나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 정도를 짚는 건 반도체산업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다.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리면서 반도체가 더 중요해졌다는 걸 얼핏 알고 있지만, 반도체가 왜 우리의 생명줄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는 부족하다. 반도체는 개별 산업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정보산업 전체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어낸 핵심이다. 반도체를 ‘산업의 쌀’이라 부르는 이유다.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이 절대적인 강자 아닌가.

메모리라는 메인 스테이지를 우리가 장악한 건 분명 엄청난 성과다. 실제로 반도체를 제외한 다른 산업군을 다 합쳐도 반도체에서 번 것을 못 따라간다. 왜 그럴까? 이걸 이해하려면 산업 발달사를 고찰해봐야 한다. 한국이 중화학공업을 천명하며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정책으로 자동차·항공·기계·정밀화학·제약 산업 부문에서 선진국을 빠르게 따라잡은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2차 산업혁명, 즉 1900년대 초반에 태동한 산업들이다. 바꿔 말하면 이미 구미 선진국들이 장악한 산업이란 뜻이다. 자동차나 제약 모두 고부가가치 제품은 여전히 그들이 장악하고 있다. 100년 넘은 노하우를 따라잡기란 어렵다. 반도체는 다르다. 미국과 일본이 먼저 시작했지만, 2차 산업혁명 당시 태동한 산업군에 비하면 신산업이다. 새롭게 태동한 산업에선 기존 선진국이 신흥공업국을 이긴 역사가 거의 없다. 신산업이 고도화될 때는 우수한 자국 엔지니어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30년 전 반도체라는 신산업에서 우리가 그렇게 미국과 일본, 유럽을 넘어섰다. 지금 중국이 딱 그런 나라다. 20년 전부터 공대에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들어 지금의 산업 굴기를 이뤄내고 있다. 반도체산업 자체로는 파운드리라는 더 큰 전쟁이 남아 있다.

파운드리는 TSMC 등 대만이 최강자다. 우리가 넘어설 수 있나.

어렵지만 가능하다. 대만은 시스템(비메모리)반도체의 대표 격인 로직 반도체를 1985년부터 생산했다. 그전까지는 시스템 반도체에 대한 개념도 부족했는데, TSMC 등이 미래를 잘 내다본 결과다. 우리는 당시 메모리 시장에서 생사를 건 전쟁 중이었고, 대만보다 15년이나 늦게 로직 라인을 깔았다. 메모리에서 1위를 해도 결국 반도체 넘버 2에 불과하다. 전체 시장은 파운드리가 훨씬 크다. 삼성도 최소 10년 이상 약점을 보완해야 한다. 메모리에서 일본을 제친 것처럼 파운드리에서 대만을 완전히 꺾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장을 5 대 5로 나눠 톱 2가 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가 될 거다.

최근에는 미국도 파운드리 시장에 힘을 쏟고 있다.

인텔이 파운드리 시장의 가장 큰 변수이다. TSMC가 원톱인 상황에서 인텔이 선전하면 삼성의 입지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텔도 쉽지 않을 거다. 미국의 반도체 관련 엔지니어 인프라 자체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고, 소프트웨어와 플랫폼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도 영향을 미친다. 우주, 국방 등 글로벌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 인력을 빼면, 엔지니어가 많이 필요한 커머셜 시장에선 미국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메모리와 파운드리도 모두 커머셜이다. 미국이라도 모든 것에 집중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미국 입장에서도 대만의 독주는 불편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는 몰라도 기업 입장에선 TSMC가 어려울 때를 대비한 차선책이 있어야 한다. 늦었지만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에서도 대만과 유일하게 대적하는 상황이다. 인텔이 헤매고 대만이 지정학적 위협을 받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지금으로선 삼성이 유일한 차선책이다.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의 실력은 어떤 수준인가.


한국의 시스템반도체 역사는 곧 삼성전자의 역사다. 삼성이 시스템반도체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린 건 메모리에서 싱글톱을 차지한 후 2000년대 들어서였다. 2001년에 시스템반도체 사업 방향을 재정립했고, 2003년 들어서야 로직 전용 라인 건설을 추진했다. 당시에도 이미 엔비디아, 퀄컴 같은 강자들이 즐비했던 만큼 매우 어려운 시장이었다. 삼성은 처음에 10개의 중요한 사업 방향을 정했다. 그중 하나가 파운드리고, 나머지 9개가 칩 설계 분야였다. 일종의 사내 팹리스였다. 각 사업부에서 자체 칩을 설계하고 생산했는데, 예를 들어 TV용 칩은 디지털 TV 시대가 열리면서 성과를 거뒀다. PDA가 등장하면서 모바일 CPU도 어느 정도 성공을 맛봤다. 어려움을 겪은 건 통신용 모뎀이다. 2000년대 들어 CDMA가 뜨고 애니콜이 히트했지만 삼성도 전용 칩 내재화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퀄컴에 의존해야 했다. 나중에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모뎀과 모바일 CPU가 합쳐진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로 진화했는데, 삼성도 ‘엑시노스’라는 이름으로 경쟁 중이다. 하지만 20년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퀄컴 등 경쟁자를 따라가기 버거운 게 사실이다. 최근 애플이 아이폰 전용 칩을 선보였는데 퀄컴 칩보다 뛰어난 성능을 보여줬다. 삼성은 퀄컴을 넘지 못했고, 애플은 넘어섰다는 뜻이다. 이미지센서도 삼성이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조 단위가 넘는 꽤 큰 시장인데 1위가 소니, 2위가 삼성으로, 그 차이가 크지는 않다. 디스플레이용 칩도 삼성이 잘한다. 가장 큰 시장인 AP 부문에서 퀄컴과 대만의 미디어텍 등을 넘어서야 한다.

일본 소니 이야기를 했는데, 과거 미국을 제쳤던 일본 반도체는 왜 지금처럼 쪼그라들었나.

메모리 반도체를 우리가 석권하고 일본이 패배한 데는 여러 배경과 과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먼저 삼성의 경영진과 히든 히어로들, 첨단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정부의 강한 의지가 맞물려 얻은 엄청난 성과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1947년 반도체가 처음 발명됐다. 이후 20년 정도 주요한 발명들이 이어졌지만 산업화는 크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 1970년대 말에 PC가 나오면서 정보화사회가 폭발적으로 열렸다. 반도체 수요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고, 반도체 기술도 성숙되고 미세화가 이뤄지면서 집적도가 크게 향상됐다. 1970년대 초반부터 반도체 기술 성숙을 주도한 건 미국이었다. 일본도 곧이어 뛰어들었고, 10년쯤 후인 1980년대 들어선 아예 미국을 따돌렸다. 삼성이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1983년이다. 10년 정도 늦었지만 초창기 신산업에서 10년이라는 격차는 그리 큰 게 아니었다. 일본의 추격에 놀란 미국은 1985년 플라자합의로 일본의 기세를 꺾기에 이르렀다. 1988년 들어 일본이 반도체 감산을 시작하니 D램 가격이 폭등했다. 바로 이 시기에 삼성이 주도면밀하게 힘을 비축한 것이다. 1992년쯤 되니 일본과 실력이 엇비슷해졌고 1995년 들어선 완전히 추월했다. 반도체 사업 진출 10여 년 만에 이룬 성과다. 1997년 들어선 공급이 넘치며 메모리 반도체에 대공황이 닥쳤다. 가격도 10분의 1로 폭락했다. 바로 이 치킨게임에서 삼성이 승리한 게 오늘날 메모리를 석권한 결정적 배경이다. 삼성의 도전과 혁신에 미일 갈등이라는 지정학적 요소가 합쳐진 결과다. 또 하나 결정적인 건 전자·정보산업의 급격한 발전이 반도체 집적화와 수요를 끌어올린 데 있다.

PC의 등장 말인가.


PC가 반도체 성능을 끌어올린 것도 맞고, 반도체 성능의 획기적인 발전이 PC 산업을 더 크게 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또 다른 결정적인 배경은 컨슈머 가전산업의 발전이다. 한마디로 디지털화다. 2000년대 들어서기 전만 하더라도 TV는 소니의 트리니트론이 최고 브랜드였다. 삼성전자 TV는 매장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래서 신경영도 시작된 거 아닌가. 그러다 디지털이라는 거대한 변화가 불어닥쳤다. 아날로그 시절에는 통신은 노키아·지멘스 등 유럽이, 컴퓨터는 미국이, TV·카메라·DVD·콘솔게임(플레이스테이션) 같은 컨슈머 전자는 일본이 꽉 쥐고 있었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산처럼 보였다. 삼성도 컨슈머와 통신에 뛰어들었지만 일본과 유럽을 따라가지 못하고 죽만 쒔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삼성이 퀄컴과 연합해 애니콜을 내놓아 유럽과 바로 경쟁했다. 열심히 준비한 덕에 기술장벽이 사라진 틈새를 삼성이 장악하기 시작한 거다. TV도 브라운관에서 LCD 평판으로 대체됐다. 달라진 디지털 환경을 뒷받침하기 위해선 그만큼의 성능을 가진 반도체가 필수였다. 반도체의 발전 과정이 세트의 발전을 이끈 디지털 혁명을 삼성이 주도하게 된 배경이다.

컨슈머 세트 산업에서 스마트폰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구미와 일본이 주도하던 정보·전자산업의 판이 완전히 달라졌다. 스마트폰은 그 자체로 모바일 컴퓨터다. 오른편에는 통신이, 왼쪽에는 카메라와 오디오 같은 컨슈머가 통합돼 있다. 이걸 모두 잘하는 나라가 미국이었고, 결국 애플이 위너가 됐다. 한국은 삼성이 애플의 반대 진영, 즉 구글의 안드로이드와 손잡고 애플에 대적하는 유일한 상대가 됐다. 얼마나 대단한 성과인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유럽에선 노키아가 무너졌고 일본에선 반도체는 물론이고 컨슈머 시장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이 모두는 반도체가 이뤄낸 혁명이다. 모든 변화의 엔진에 반도체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디지털과 반도체 혁명의 가장 큰 승자가 미국이고 그다음이 한국, 이어서 대만이다. 현재 반도체 전쟁은 우리와 대만이 파운드리라는 제일 큰 시장을 놓고 결승전에 오른 상황이다.

최근에는 중국이 새로운 반도체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에겐 위기 아닌가.

중국은 수십 년 전부터 우수한 인재들이 이공계에 몰려 기술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마치 30년 전 우리를 보는 것 같다. 우수한 자국 엔지니어들이 있고 시장도 크다. 무엇보다 사람도 잘 빼간다. 내수시장이 워낙 크니 뭐라도 시도해보기 좋다. 다만 최근의 미중 갈등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회로 다가올 수 있다.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산업 분야에서 중국이라는 강력한 경쟁자의 침범을 미국이 어느 정도 막아주는 셈이다. 제조·엔지니어링 분야를 미국이 모두 장악할 수도 없다. 중국을 뺀 시장도 거대하다. 한국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중국도 우리의 훌륭한 고객이다. 적정한 포지션을 취해야 하지만, 현재의 미중 갈등은 초미세 제조산업 분야에서 한국이 대체할 수 없는 거점 국가로 가는 데 유리한 국면이다.

책에서 대세기술, 필연산업을 강조했다. 어떤 의미인가.

책 서두에 썼듯이 반도체산업의 발전은 차세대 디스플레이, 배터리, 바이오, 신소재 등 거의 모든 미래 제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원천이다. 글로벌 모든 산업에서 반도체가 대체 불가능한 필수재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먹거리 문제를 넘어 국가 안보와 위상이 걸려 있다. 디테일한 산업별 이슈는 몰라도 커다란 산업의 발전 방향은 어느 정도 큰 물줄기가 정해져 있다. 기존의 핵심 역량을 바탕으로 산업 전반이 고도화되는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없던 게 튀어나오지 않는다. 우리를 먹여 살릴 대세기술, 필연기술에 대한 미래 그림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산업이 한국을 먹여 살릴 거라 보나.

나노 관련 첨단공학을 주목한다. 반도체, 바이오, 정밀화학, 기계는 물론이고 요즘은 섬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초미세 제조와 지능형 시스템으로 가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반도체를 비롯한 초미세 제조와 지능형 시스템 모두를 갖춘 나라다. 대만은 반도체와 전자에 지나치게 포커싱돼 있다. 초미세 공법은 우리가 갈수록 경쟁력을 갖춰가고 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바탕이 바로 반도체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 이후 전자산업에 빅뱅이 일어났다. 디지털 혁명은 2010년에 완결됐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지금은 모빌리티 빅뱅의 시대다. 전기차 자체로 글로벌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여기에 자율주행과 배터리 전쟁이 따라온다. 여기에 필요한 시스템반도체도 여전히 승부를 가를 축이다. 그 안에서 한국이 뭘 먹을 수 있느냐를 봐야 한다. 전자산업 빅뱅기에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와 컨슈머 세트를 장악했다. 전기차는 100년 넘게 구미와 일본이 장악한 내연기관과는 전혀 다른 게임이다. 현대차가 전기차에서 위너가 돼야 한다. 그다음은 모빌리티 인텔리전스 시스템이다. 자율주행부터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다 포함한다. 과거 디지털전자 혁명의 승자가 미국이고 뒤이어 우리가 20% 정도를 먹었다면, 미래 모빌리티 혁명에서 비슷한 성과만 내도 대단한 일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역시나 사람이고, 핵심이 바로 히든 히어로스다. 한국 사회가 이들을 키워내느냐 아니냐에 따라 나라의 명운이 좌우될 게 분명하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임익순 객원기자

202303호 (202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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