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방식부터 바꾸었다. 소통을 가로막았던 사무실 칸막이를 허물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종이 문서 대신 태블릿을 쥐여줬다. GS그룹의 디지털 대전환의 여정은 작지만 깊은 곳부터 시작됐다. 그룹의 디지털전환을 돕고 있는 최누리 GS그룹 전무를 만났다.
▎GS그룹의 디지털전환 여정을 이끌고 있는 최누리 전무. 그는 내부의 디지털 인력을 교육한 다음 각 사에 다시 보내 자신들의 회사 실정에 맞는 전략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한다. / 사진:GS그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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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역량 강화로 기존 사업의 진화와 미래 사업 발굴에 나서야 한다.”(2019년 허태수 회장 취임사) “디지털 역량 강화와 친환경 경영으로 신사업 발굴에 매진해야 한다.”(2020년 신년사) “디지털전환과 그에 따른 사업구조 개편으로 미래를 준비하자.”(2021년 신년사) “내외부와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고객의 문제를 자발적으로 해결하는 오픈이노베이션 조직문화를 더욱 확산해나가자.”(2022년 신년사) “그동안 축적해온 디지털과 오픈이노베이션 업무 혁신을 기반으로 우수 인재들이 더욱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들어달라.”(2023년 신년사)2019년 취임한 허태수 GS그룹 회장의 주문은 명확하고 한결같았다. ‘디지털 대전환’을 통한 혁신이다. 디지털·글로벌 역량을 갖춘 인재 확보·육성, 일하는 방식과 조직문화 개선을 위해 애자일(Agile)한 조직문화 구축, 오픈이노베이션의 생태계 조성이라는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했다.변화를 서두르지는 않았다. 직원들에게 ‘디지털 DNA’를 심어주는 기초 단계부터 차근차근 밟아갔다. 먼저 직원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무 공간을 혁신했다. 허 회장의 취임에 맞춰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진행해 직급에 따라 수직적으로 배치했던 책상을 벌집 모양으로 재배치했고,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모여서 소통하고 휴식할 수 있는 라운지와 회의 공간을 큼직하게 마련했다.그런 다음 일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줬다. 개개인의 디지털 업무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SaaS 기반의 협업 솔루션을 도입했고, 태블릿PC를 지급했다. 회의부터 결재까지 모든 업무 과정을 종이가 아닌 태블릿PC로 처리하도록 주문했다. 허 회장에게 보고할 때도 태블릿PC만 챙겨 가는 모습이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다.GS그룹이 디지털 대전환을 공표한 지 4년이 흘렀다. 그사이 GS그룹에는 디지털 관련 조직이 탄생하고 확장됐으며, 각 계열사에서 유의미한 업무혁신이 일어나고 있다.“‘디지털을 위한 디지털은 안 된다, 업무공간부터 디지털에 적합한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직원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업무혁신은 그다음에 할 수 있다’는 게 디지털전환을 시작하며 허 회장님이 강조한 메시지입니다. GS그룹에 합류해서 보니 대부분의 계열사가 DT, DX팀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어요. 초기에 가장 애썼던 부분은 각 계열사에 디지털 문화를 전파하고 관련 조직을 꾸린 것이었습니다. 이제 GS칼텍스, GS에너지에 DX랩이 생겼고 GS E&R, GS EPS 등 발전사에도 DX 조직이 생겼습니다. 제가 디지털전환을 총괄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각 사에서 잘할 수 있도록 퍼실리테이터(진행촉진자) 역할을 하는 것이죠.”지난 2월 9일 GS그룹 본사에서 만난 최누리 전무(업무지원팀)가 자신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최 전무는 GS홈쇼핑에서 데이터를 기반으로 업무와 사업 방식에 혁신을 지원해온 인물이다. 2019년 허 회장과 함께 GS그룹에 합류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계열사들의 디지털전환을 돕고 있다. 경기과학고를 조기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기계공학 박사를 마친 그는 삼성SDS, 삼성전자 등에서 근무하다가 GS홈쇼핑에 합류하며 GS맨이 됐다. GS홈쇼핑 경영기획담당 본부장을 거쳐 GS텔레서비스 대표이사와 CI사업부장을 지냈다. 그는 카이스트 재학 시절인 2000년, 기계장비의 성능과 안전을 컴퓨터로 테스트하는 벤처회사를 차렸던, 디지털전환의 퍼스트무버이기도 하다. 최 전무는 “GS홈쇼핑에서 데이터를 도입해 문제를 해결하고 판매고와 고객 만족도를 올릴 수 있었다”며 “이처럼 직원들이 스스로 업무 개선의 방법으로 디지털전환을 떠올리고 적용하는 등 자연스럽게 디지털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전무에게 그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들어봤다.
초기 1년은 디지털 문화 정립에 힘썼다.회사가 디지털전환을 하겠다고 발표하면 직원들은 겁부터 날 것이다. 임원들은 종이로 보고를 받을 테니, 결국엔 원래 하던 일에 디지털 작업까지 더해져 일이 두 배로 늘어날 거라는 생각에서다. 그런 우려를 잘 알기에 상대적으로 직급이 높은 임직원을 대상으로 디지털 교육을 많이, 자주 진행했다. 그에 앞서 사무 공간과 직원식당을 리노베이션했다. ‘의식주’ 중에 식과 주가 이루어지는 환경 자체를 오픈 이노베이션과 디지털에 친화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보고자 했다. 벽들을 허물고 서로 모여 소통하는 공간으로 다시 디자인했다. 이전엔 계열사 간 교류가 거의 없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섞이고 정보를 공유하는 문화가 정착됐다.
DT, DX팀이 아닌 업무지원팀 소속이다.업무지원팀은 재무·경영관리·미래사업 홍보팀이 하지 않는 경영지원 전반을 담당한다. 총무, 인사, IT, 데이터, 혁신 활동이 모두 포함된다. 건물 리노베이션도 우리가 담당했다. 아무래도 분야를 가리지 말고 모든 부분에서 디지털전환을 이루라는 깊은 뜻 같다.(웃음)
디지털 인력은 어떻게 꾸렸나.각 사에 디지털 역량이 보이는 직원을 중심으로 팀을 꾸리도록 제안했다. 다만 이들도 디지털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디지털 인력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서포터를 보내주고 있다. 서포터는 우리 조직에 있는 혁신 조직, 오픈 이노베이션 커뮤니티 ‘52g’ 소속이다. 52g는 크루와 스튜디오, 두 가지 군으로 나뉜다. 스튜디오는 개발자, AI, 데이터, UX, CX 전문가들이고 크루는 캐털리스트(마음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현장에 투입된 다음 업무 과정을 지켜보고 불편한 점을 캐치해 디지털전환을 제안하고, 그 작업을 함께 수행한다. 거꾸로 각 사에서 크루 역할을 할 직원을 보내기도 한다. 이들에게 디자인 싱킹, 오픈 이노베이션 교육을 진행하고 디지털 PM으로 성장시킨다. 2년 정도 함께하다가 현업으로 돌아가면, 그다음에 다른 직원이 와서 교육을 받는 선순환 구조다. 우리에게 인원을 충분히 보내준 회사는 이미 자신들의 인력만으로도 디지털팀을 꾸릴 수 있게 됐다. GS리테일과 GS건설은 자체적으로 52g팀을 꾸렸다.
그간의 변화는.사무실과 더불어 식당 리노베이션에 힘을 많이 줬다. ‘랍스터 영양사’로 유명한 김민지 영양사를 영입했고, 공간도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거듭났다. 나아가 구내식당 앱을 만들어 미리 메뉴를 볼 수 있고 메뉴마다 잔여 수량을 학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음식의 맛, 식당 이용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는 창도 마련했다. 리노베이션 이후 직원들만 식당을 이용하도록 했는데, 오히려 식당 이용률이 배로 올라갔다. 또 한 가지는 GS건설 현장에서 디지털을 도입한 사례다. 건설 현장에는 구내식당이 없기 때문에 보통 한 명이 작업자들의 메뉴를 모아 도시락을 주문하는 일을 한다. 이름이 적힌 표를 들고 다니며 의견을 수집하고, 번복되는 의견을 계속 업데이트한다. 식사를 할 때까지 이 업무만 한다고 보면 된다. 얼마 전 처음 발령받은 현장소장이 이 과정을 보고 비효율적이란 생각을 했다고 한다. 노션(프로젝트 관리 기록 소프트웨어)으로 표를 만들어 담당직원을 부른 다음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텐데 한번 사용해보지 않겠나?’라고 (강요가 아닌) 제안을 했다. 직원은 수긍했고, 작업자들이 직접 핸드폰에서 메뉴를 선택할 수 있게 되면서 비효율적인 업무에서 해방됐다. 이 외에도 번거로운 종이 결재, 각 작업장의 작업 순서를 조율하는 등의 업무를 필요에 의해 디지털로 전환했다. 이처럼 디지털전환을 외치는 주체가 회사가 아닌 임직원이 됐다는 게 고무적이다.
디지털을 하려는 자와 하지 않으려는 자 사이에 영역 다툼은 없나.숙련된 업무 방식을 바꾸는 건 반갑지 않은 일이다. 발제를 한 사람이 상사가 아닌 동료일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톱다운 방식을 지양하고 직원 스스로가 인식한 불편한 점부터 개선하려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평소에 비효율적으로 돌아가던 일을 디지털을 활용해 효율성을 올려준다는 방식의 접근이다. 고객은 때로 익숙함과 편리함을 혼동하는데, 우리는 불편한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역할을 한다.
직원들이 불편해하는 업무부터 디지털화업태가 서로 다른 계열사가 많은데.앞서 말했듯이 계열사마다 자사 비즈니스에 맞는 목표를 세우면 우리는 인력을 지원한다. 다만 주문하는 게 있다. DX 중인 회사들의 공통적인 고민일 것 같은데, 디지털 인력 스스로가 업무 지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점이 아쉽다. 요청을 받아 처리해주는 부서가 아니라 함께 해결책을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가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디지털 인력을 교육하고 함께 프로젝트를 할 때 AWS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AWS와는 어떤 협업을 했나.디지털전환을 하려면 초기에 서버를 구매하고 솔루션을 도입해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한다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것은 물론 ‘톱다운’ 방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처음 그룹웨어를 바꾸는 데만 20억원 가까운 비용을 제안받았다. 개인적으로 큰돈을 들여 외부에 개발을 맡긴다고 해도 우리의 입맛에 맞는 시스템이 개발되진 않을 것 같았다. AWS와 상의해보니 일정 부분만 SaaS를 활용하고 정말 필요한 부분은 직접 개발하면 된다는 조언을 해줬다. 직원들이 자주 사용하는 기능, 예를 들어 이메일, 게시판, 휴가 결재 등의 기능만 갖춘 SaaS를 도입했다. 나머지는 우리가 원하는 기능을 직접 개발한 다음 클라우드에서 사용하고 있다. 비용도 적게 들고 수정 작업도 간편해 좋다. 또 얼마 전엔 AWS와 GS E&R의 산학협력 건인 풍력에너지 예측 모델을 함께 작업했다. 연구실 서버에 있던 것들을 AWS로 마이그레이션하고 성능을 끌어올렸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결국 클라우드로 옮겨갈 계획이라고 들었다.GS홈쇼핑의 경우 초기부터 IT 시스템을 도입하고 이를 기반으로 사업했기 때문에 디지털전환이 빨랐고 상당 부분 진행됐다. 다른 계열사는 업종 특성상 한계가 있다. 정보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가이드가 있는 곳도 있다. 이런 곳은 ERP, HR만 SaaS를 활용하고 나머지 부분은 외부 솔루션을 도입하는 방식을 구상 중이다. 회사마다 진행 속도는 다르지만 차례대로 진행하고 있다.
GS홈쇼핑에서 디지털 도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주역이다.여성 속옷 판매방송을 할 때의 일이다. 대개 상의와 하의 사이즈가 정해진 세트 상품으로 판매하는데, 사람마다 사이즈에 편차가 있으니 고객들의 불만이 꽤 있었다. 사이즈가 다른 두 세트를 사서 맞지 않는 건 버린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내부 개발자에게 부탁해 설문조사 시스템을 만들어봤다. 구매한 고객에게 ‘주문한 세트 중 상의 사이즈가 작다, 크다, 잘 맞는다’라는 간단한 선택지를 보내고 응답을 받았다. 응답자 중약 20%가 사이즈 변경을 원했다. 데이터에 맞게 세트를 재구성해 팔았더니 완판됐고 고객 만족도도 올라갔다. 이 외에도 MD들이 트렌드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다이어트 식품, 옷, 가방 등 카테고리만 입력하면 포털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검색되는 키워드와 데이터가 추출된다. 판매량을 예측하는 데서도 좋은 사례가 있었다. 보통 MD들은 수요를 예측하기 위해 과거의 판매 데이터를 분석한다. 여기에 허점이 있다. 1시간 방송인데 45분 만에 완판을 기록했다면 오히려 물량이 부족했다는 뜻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다른 방식으로 데이터를 추출해 과거보다 더 많되 적절한 물량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완판은 되지 못해도 총판매량은 올라갔다.
관심 있는 신기술은.GS리테일은 챗GPT 같은 신기술에 관심이 많다. 요즘은 디지털 마케팅이 중요하지 않겠나. 몰로코라는 AI 마케팅 회사를 투자하기도 했다. 신기술을 가진 외부 회사와 협력하는 것에 관심이 많지만 투자 또는 인수를 해서 그 기술을 내재화하는 일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미 20여 년 전에 디지털 관련 회사를 창업했다.CAE(Computer Aided Engineering) 회사였다. 신차 출시 전 안전성을 테스트하는 시뮬레이션과 관련한 기술이다. 예전엔 직접 만든 차를 충돌시켜가며 실험을 했는데,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지금의 ‘디지털 트윈’과 같다고 보면 된다. 6년 정도 했다. 그때에 비하면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 이젠 소수 전문가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디지털 트윈 기술을 활용하고, 기술도 진일보했다. 다만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는 회사마다 편차가 있다고 본다.
디지털전환을 이룬 GS그룹의 모습은.지금은 디지털을 원래 하던 일을 좀 더 쉽게 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 활용하고 있다. 조금씩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디지털로 사업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EV 충전이나 VPP(Virtual Power Plant, 가상 발전소) 같은 분야를 염두에 두 고 있다. 조금씩 그 목표에 다가갈 계획이다.- 신윤애 기자 shin.yuna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