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설립된 중견 제조기업 유풍은 세계 모자 시장에서 생산량, 매출액 기준으로 1위 기업이다. 2022년 추정 매출은 5210억원으로 전년 대비 61% 늘었다. 영업이익(900억원)도 79% 증가했고, 영업이익률은 무려 17%다. 섬유업이 사양산업이라는 말은 적어도 유풍엔 어울리지 않는다. 창업 후 48년간 한 번도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았던 창업주 조병우 회장은 48년간 이어온 침묵을 깨고 포브스코리아 인터뷰에 응했다.
48년 만의 인터뷰다. 조병우(82) 유풍 회장이 회사를 설립한 것은 1974년이다. 48년이 지난 지금 유풍은 2위와의 격차가 현격한, 부동의 세계 1위 모자 기업이다. 세계 시장에서는 조 회장을 ‘모자왕’으로 부르지만 국내에서는 잘 모른다. 48년간 단 한 번도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조 회장은 “자랑하는 것 같아서”라며 얼버무린다. 그러던 그가 무려 48년 만에 포브스코리아 인터뷰에 응한 이유로 “젊은 기업가들의 인식을 좀 바꿔놓고 싶었다”고 귀띔했다. 특히 “제조업 종사자들이 ‘제조업은 사양산업이라서 더는 미래가 없다’며 제조업 포기론이 퍼져나가는 것에 대한 우려에서 인터뷰에 나섰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첨단산업과 사양산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잘하면 블루오션이고, 못하면 레드오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48년간 오직 모자 생산과 유통에만 집중하며 세계 1위 반열에 오른 조 회장으로서는 자신의 경험이 젊은 기업가들에게 의미 있는 조언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듯 보인다.조 회장은 사람에 대한 신뢰와 섬유산업 성장성에 대한 믿음으로 창업 이래 모자 한 길만 걸어왔다. 그 결과 유풍은 휴고보스, 핑, 푸마 등 글로벌 브랜드 500여 곳과 거래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무엇보다도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ODM(제조자개발생산) 기업을 뛰어넘어 국내에서 처음으로 모자 제조 기술을 브랜드화한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1994년 유풍은 모자 뒷고리를 없애고 탄성 있는 원단을 사용해 누구나 머리 크기에 상관없이 모자를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는 기술을 선보였다. 이후 이 제조 기술은 ‘FLEXFIT’이란 이름으로 브랜딩되었다.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 출신인 조 회장은 유풍 설립 11년 만에 1000만불 수출의 탑과 함께 무역의 날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92년에는 은탑 산업훈장, 2006년엔 한국의류산업협회장 신규시장 개척상을 수상했으며, 2009년에는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2010년대 중반 조선, 철강 등 한국 경제 성장을 주도해온 제조업이 도미노처럼 위기에 빠지면서, ‘제조업 중심 산업구조는 더는 안 된다’거나 ‘서비스와 금융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해야 한다’는 제조업 위기론이 업계 전반에 팽배했다. 조 회장은 이러한 패배주의가 직원 개개인에게, 더 나아가 회사 전체에 번지지 않도록 자신의 소신을 견고하게 지켜나갔다. 그는 “모자 제조업은 유풍만이 가진, 대체 불가능한 특기라는 확신이 있었다”며 “업계에서 독보적인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단 한순간도 잃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조 회장의 또 다른 믿음은 바로 사람에 있었다. 그에게 회사의 가치는 직원 개개인 가치의 총합이다. 그는 직원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일이 기업경영에서 핵심이라고 봤다.신뢰는 더 큰 신뢰로 돌아왔다. 유풍의 지난해 모자 총생산량은 1억2000만 개에 달한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인이 외출을 자제했던 2021년에도 유풍은 전년과 비교해 매출 성장률 40%, 영업이익 신장률 206%를 달성했다. 2022년에는 전년 대비 매출 성장률 61%를 기록할 전망이다. 유풍이 위기 속에서 빛났던 이유는 평소에 확고한 경쟁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려워지면 믿음이 가는 회사로 쏠림현상이 생기기 마련이다”라며 “다른 기업의 공장이 하나둘 문을 닫을 때 오히려 유풍은 교대작업을 하며 생산량을 늘렸다”고 회상했다. 현재 베트남과 방글라데시에 공장 8곳을 가동 중인 유풍은 중남미에 공장을 신설하고 있다.
사후약방문…유풍 성장의 공식아무리 전공을 살려 창업에 도전했다 해도 경영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가 창업 후 약 40년 동안 출장 간 횟수는 뉴욕만 1년에 7~8번꼴이었다. 회사 대표이자 영업부장으로서 직접 발로 뛰었다. 잦은 출장으로 대표가 사무실을 비우는 날이 많았지만 유풍은 나날이 발전했다. 유풍의 미션은 ‘끊임없는 완벽 추구(excelsior·더욱 더 높이)’다. 고객에게 최고의 가치를 제공하겠다는 사명 아래 유풍은 FLEXFIT을 거듭 고도화해나갔다. 박시한 느낌을 주는 FLEXFIT 210, 모든 사이즈를 커버할 수 있는 FLEXFIT 110, 기능성 프리미엄 모자 FLEXFIT DELTA 등 제품군을 지속적으로 확장했다. 1994년 개발한 제조 기술에 트렌디한 디자인과 새로운 기능성을 추가해 잠재시장을 능동적으로 개척해나갔다. 덕분에 글로벌 시장에서 제조업체 유풍의 브랜드 인지도는 급상승했다.유풍의 성장 비결에 대해 조 회장은 ‘사후약방문’이란 다소 엉뚱한 답을 내놨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은 사람이 죽은 뒤에야 약을 구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로, 이미 사건이 발생한 후에 대책을 세운들 소용이 없다는 의미다. 조 회장은 사후약방문에서 죽을 ‘사’(死)자를 일 ‘사’(事) 자로 바꿨다.“유풍은 사후약방문(事後藥方文)하는 회사입니다. 직원이 잘못을 했어도, 좋은 기회를 놓쳤어도, 거래에서 손해를 봤더라도 회사가 책임을 지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떻게 책임을 질까요? 더 좋은 방법을 마련해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거예요. 새로운 지식이 만들어지고 이를 체계화해 매뉴얼을 구축하는 것이죠. 실패는 곧 새로운 시작입니다.”소위 ‘사후약방문 경영방식’은 직원을 신뢰하고 실수를 용인하는 문화에서 비롯됐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이 경영의 효율적 잣대로 쓰이는 오늘날, 조 회장은 “실수를 해서 이미 위축돼 있는 직원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회사가 얻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실력에 고하(高下)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장점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조 회장은 직원의 실수를 추궁해 그를 패배주의에 빠뜨리기보다 실수에서 교훈을 얻는 방향을 택했다. 그 결과물이 전 직원 의사소통 인트라넷 ‘오픈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다.유풍 전 직원은 오픈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에서 모든 의사소통 과정을 공유한다. 회사 중요 결정사항이 담겨 있는 사내 보고서뿐 아니라 직원 개개인의 업무일지 등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공유된다. 조 회장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투명성이 확보돼야 회사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며 “사내 기밀이 새어나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는데, 직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덕분인지 지금껏 그런 사고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오픈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또 다른 기능은 집단지성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회사 문제에 대해 말단 직원부터 임원까지 모두가 관심을 갖고 문제해결에 참여하는 방식이다.“유풍 직원은 업무상 고민거리를 공론화해 최적의 답을 찾습니다. 누구나 실수를 하면 이를 숨기기 급급하죠. 하지만 유풍에서는 다 함께 당면한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모색합니다. 오픈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에 조언을 구하면 무수히 많은 아이디어가 답글로 달립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종합한 뒤 가공·정리하면 모든 직원에게 훌륭한 참고 자료이자 새로운 지식이 됩니다. 이런 지식이 쌓이면 회사는 점차 발전할 수밖에 없어요. 실수가 잦을수록 회사에 공을 많이 세운 직원입니다.”조 회장의 ‘지식 경영’ 철학은 연구과제 프로그램에도 반영됐다. 유풍 직원들은 업무 개선, 시스템 구축, 시장조사, R&D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유롭게 주제를 선정해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1년 동안 연구한 뒤 그 결과물을 인트라넷에서 공유한다. 직원 단독으로 과제를 수행할 수도 있고 CoP(Community of Practice·학습 조직)를 구성하는 경우도 있다. 10년째를 맞은 이 프로그램에 등록된 연구과제는 무려 1000여 건에 달한다.조 회장은 “지식을 공유해야 협동할 수 있고 종합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며 “독단을 멀리하고 다 함께 토론해 좋은 답을 도출하다 보면 직원 전체의 실력이 높아지게 된다”고 단언했다. 또 “이러면 회사는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밖에 없다”며 “기업경영은 실수를 통해 발전하려는 도전정신과 함께 지식 공유 문화에 달려 있다. 궁극적으로 사람을 키우는 일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조 회장은 창업 초반 “수차례 해외 출장을 다녔지만 관광은 꿈도 꾸지 못했다”며 “그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도 가보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관광할 시간에 지식과 경험을 체계화하고 매뉴얼화하는 데 전념했다. 이른바 ‘창업가의 DNA’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 끝에 1999년 『유풍경영헌장』을 완성했다. 이후 2005년과 2014년, 두 차례 개정된 『유풍경영헌장』에는 유풍의 핵심가치와 인재상을 비롯해 경영책무, 행동지침 등이 담겨 있다.학창 시절 판사를 꿈꿨던 조 회장은 특유의 꼼꼼함으로 자신의 경영 철학을 조목조목 집대성했다. 협력업체 선정 방법, 구매 예절, 현장 중시 영업 노하우, 주재원 육성방침 등 세세한 행동지침도 담았다. 특히 4대 책무는 조 회장이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는 “고객에 대한 책무와 임직원에 대한 책무, 주주에 대한 책무,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무 등 네 가지 책무는 유풍이 반드시 지키는 사항”이라며 “네 가지 책무가 편중되지 않고 조화를 이뤄야 경영활동의 선순환이 이뤄진다”고 당부했다. 고객을 최우선시하고 임직원의 창의성을 촉진하며 주주가치를 극대화하고 국가·사회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그는 “영문판으로도 제작해 현지 해외 공장에서 직원 교육에 활용하고 있다”며 “이걸 복사해간 해외 업체 관계자는 사내 문화 개선에 큰 도움이 됐다고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모자뿐만 아니라 K-기업가정신도 수출하고 있는 셈이다.
‘신의 한 수’였던 제조업체 브랜딩 전략첨단산업이 각광받는 시대지만, 유풍은 묵묵히 자리를 지켜왔다. 하루 3시간씩 신문 4개를 정독하는 조 회장이 경제면에 유행어처럼 번진 ‘제조업 위기론’을 몰랐을 리 없다. 그는 어떻게 이를 외면한 채 모자 외길을 걸어왔을까. 그는 “절대적인 사양산업은 없다”며 “업종마다 축적된 고유의 기술력과 경험은 엄청난 자산이다. 기존의 자리를 지키면서 이 자산을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강조했다.“첨단산업으로 우르르 몰려가면 위기가 해결될까요? 첨단산업에도 경쟁이 있고 거기서도 도태될 수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갈 것이 아니라 소신을 지켜야 해요. 물론 제조업은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대규모 생산방식은 이제 통하지 않죠. 사회문화적 변화에 맞게 제품을 개선해나가야 해요. 유풍은 한국이 저개발 국가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더 나아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면밀하게 연구하면서 그에 맞는 전략을 세워왔습니다.”그러면서 조 회장은 모자 하나를 꺼내 보이며 “이것이 유풍의 전략”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자 완제품에 달린 유풍 라벨을 가리켰다. 그는 “이 라벨이 유풍을 하나의 브랜드로서 소비자에게 널리 알리게 될 것”이라며 “모든 신제품에 유풍 라벨이 달리는 데 15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유풍은 제조업체가 완제품 판매업체의 유통망을 통해 자신의 브랜드를 홍보하는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찾아낸 셈이다. 기술력과 신뢰도, 시장성 모두를 갖췄기에 가능한 전략이다.
“라벨을 본 소비자는 궁금해할 겁니다. 유풍은 여기에 품질로 답해야 해요. 유풍이 ‘좋은 모자의 대명사’로 알려지기 위해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바로 명품 제조 장인기업으로의 도약입니다. 명품 브랜드가 믿고 협업할 수 있는 기업으로 거듭나는 거예요. 글로벌 최고 브랜드가 기꺼이 유풍을 선택해 함께 걸어나가는 시대를 열 계획입니다.”조 회장은 “전 세계적으로 명품 장인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다”며 “장인을 지속적으로 육성하고 지켜나가는 일 또한 업계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유풍이 이 역할을 도맡아 명품 브랜드와 협업을 확대하면서 모자 제조업체로서 새로운 한 획을 그을 것”이라며 “한국이 세계 모자의 중심지가 되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소신과 끈기로 모자 제조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유풍은 이제 해외 공장에 들어가는 기계도 개발하고 있다. 전 제품을 100% 무공해 원자재로 제작하기 위한 노력도 현재진행형이다. 환경오염을 방지하고자 원단과 라벨, 스티커 등을 친환경 제품으로 설계·개발하고 있다. 그는 모자 수요 감소와 함께 전체 시장규모도 줄어들 것으로 보는 비관적 전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가 발전하고 경제가 나아질수록 사람들은 더 멋있게 차려입으려 한다”며 “문화에 맞게, 생활에 맞게, 재미있게 다양한 모자를 만든다면 모자 산업은 꾸준히 성장할 것”이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사진 최영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