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XR-메타버스 학회에 참석할 기회가 생겨 유럽, 미국,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각지에서 모인 메타버스 관련 전문가들이 요즘 골몰하고 있는 이슈들에 대한 논의를 듣고 왔다. 이번 칼럼에서는 그중 주목할 만한 내용 몇 가지를 추려볼까 한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메타버스 학자들과 기업인들은 어떤 화두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까?
흔히 메타버스에 대해 논의할 때 그 중심에 은행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은행이 맡은 수많은 역할을 생각해보면, 메타버스에서도 (그 형태와 구조는 다를 수 있겠지만) 은행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미국의 은행들은 양자컴퓨팅(quantum computing) 같은 메타버스 기반 기술은 물론,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이용하여 은행 직원들과 고객들이 이용하게 될 메타버스 환경과 세부 기능들을 개발해 실험하고 있다. 가령, 메타버스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여 전 세계에 흩어진 은행 직원들이 미팅과 비즈니스를 진행할 수 있는지,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원격근무의 모습은 어떨지 연구하는 중이다.나아가 고객들의 입장에서 제공되는 은행 서비스의 편리성, 편리한 만큼 역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가령, 매번 예금 예치, 이체, 투자 등 다양한 은행 서비스를 이용할 때마다 고객만 알고 있는 정보(예: 복잡한 형태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게 하는 기존 시스템보다 헤드셋을 이용한 홍채나 얼굴 인식, 혹은 컨트롤러를 이용한 지문 인식 등이 훨씬 편리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런 편리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다양한 나라를 오갈 때 여권이라는 전 세계적으로 통합된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처럼, 여러 가상 세계를 누빌 수 있는 메타버스상에서도 일정 정도의 표준화 작업이 이루어져야 메타버스 내에서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진다. 다만, 이는 현재 메타버스 내에서 각광받고 있는 표현의 자유나 탈중앙화 움직임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 양상이 될 것이다. 이용의 편리성을 위해 더 많은 개인정보를 데이터로 제공하면서 역으로 보안의 취약성과 개인정보가 보호되지 않는 현실 세계의 시스템적 모순에서 메타버스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유저 입장에서는 메타버스 진입장벽이 한층 더 높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은행들도 인지하고 있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또 다른 이슈는 메타버스의 제한적인 접근성이다. 은행 서비스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현실 세계와 달리, 메타버스는 아직 관련 하드웨어를 사용하기 위한 진입장벽이 제법 높은 편이다. 현재 헤드셋을 아무 문제 없이 사용하는 건강한 유저는 인지조차 하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시각이나 청각에 작은 문제라도 있으면 헤드셋 사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진다. 가령, 안경을 쓰는 사용자라면 여전히 헤드셋은 자주 이용하기 힘들 정도로 불편하다. 미래에는 1인 1헤드셋 구조가 될 전망으로, 헤드셋 렌즈 자체를 맞춤형 도수로 제작해 안경을 따로 쓸 필요가 없겠지만, 아직까지 시각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헤드셋 사용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음성 언어를 컴퓨터가 해석한 후에 그 내용을 문자 데이터로 전환하여 청각이 좋지 않은 사람들의 소통에 도움을 주는 speech-to-text 기능도 옷깃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체온처럼 세밀한 감각 정보를 느낄 수 없는 메타버스에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아직 도입되지 않은 기능이다. 이처럼 메타버스 내에서는 다양한 고객의 니즈를 충족해주고 접근성을 높여야 은행들이 현실 세계와 비슷한 형태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메타버스를 활용한 다양한 헬스케어미국, 유럽, 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관심을 갖고 여러 세션에서 발표했던 내용은 메타버스를 헬스케어에 응용한 연구와 사례였다. 특히 과거에는 360도 영상 촬영을 통해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나 나이 많은 환자들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사례가 대부분이었다면, 이번 학회에서는 훨씬 다양한 콘텐트와 그 콘텐트에 대한 유저의 통제권이 높아진 메타버스 사례들이 소개돼 흥미로웠다.일례로, 실제 상황과 거의 흡사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응급실 의료진이 압박 상황에서 정확한 판단력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훈련을 하는 가상 환경이 발표됐다. 프로젝터 화면상의 2차원 비디오로 상영된 콘텐트만 봐도 동시에 알람 여러 개가 울리고, 옆에서 우는 보호자들, 쉴 틈 없이 밀려 들어오는 환자들 틈바구니에서 심박수가 나도 모르게 치솟고 호흡까지 가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헤드셋을 쓰고 경험하게 되면 거의 실제 상황과 흡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참석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또 다른 발표에서는 증강현실을 통해 간호사들에게 소아 환자의 수술 후 케어를 교육하는 사례를 다뤘고, 혼합현실과 생성형 인공지능을 이용해 자칫 이해하기 어렵거나 불투명할 수 있는 헬스케어 과정을 환자들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맞춤 설명을 제공하는 프로그램도 선보였다. 콘텐트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해 메타버스를 이용한 디지털 헬스케어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고 있고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의 의료 환경에 맞게 현지화한 메타버스 환경을 개발, 테스트 중에 있다. 한국에서는 국립암센터에서 환자 케어와 의료진 교육을 위해 개발한 메타버스 환경을 선보여, 한국 역시 메타버스를 활용한 헬스케어에 박차를 가하고 있음을 알렸다.이런 메타버스 사례들이 일상의 더 많은 부분에 유기적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유저의 안전성이 중요하다는 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번 학회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 안전성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논의였다. 기존에는 유저들이 자유롭게 위해요소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기능들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면, 요즘에는 국가가 국민의 기본적인 안전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메타버스상에서도 적용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단, 유저에게 보호장치를 건네는 것은 피해 상황이 발생했을 때 안전에 대한 책임을 유저에게 전가하겠다는 의미로도 보일 수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도 교육이나 훈련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설령 무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일반인이 범죄 상황에서 스스로를 완전하게 지켜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유저에게 안전장치를 맡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나 국가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메타버스 환경 내의 안전장치를 강화하여 유저들의 안전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여러 가상 세계뿐 아니라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는 상호운용성이 메타버스라는 개념의 핵심임을 고려할 때, 현실 세계에서 설립되어 있는 제도들이 어떤 형식으로 가상 세계로 확장 및 재해석되어야 하는지, 지금부터 함께 고민해봐야 할 과제다.
※ 안선주 - 조지아대 첨단 컴퓨터-인간 생태계 센터 (Center for Advanced Computer-Human ecosystems) 센터장이며 광고홍보학과 교수다. 가상현실, 증강현실 등 뉴미디어와 이용자 행동 변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특히 의료, 소비자심리학, 교육과 연계한 가상현실 응용프로그램을 개발해 대화형 디지털 미디어에 의사소통 및 사회적 상호작용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집중 연구하고 있다. 2022년 초 TED talks에서 ‘일상생활에 가상현실 통합’이란 주제로 발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