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업계 레전드가 책방 주인으로 변신해 화제를 모았는데, 베스트셀러 책까지 펴냈다. 최인아 대표는 일과 시간 모두 자신이 주인공인 삶을 살고 있었다.
훌륭한 광고는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심지어 오랜 세월이 지나 광고 대상이 된 제품이나 브랜드를 더는 찾아볼 수 없지만, 광고 카피는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기억되는 경우도 많다.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처럼 주옥같은 광고 카피로 잘 알려진 최인아 대표(현 최인아책방 대표, 전 제일기획 부사장)는 한국 크리에이티브 업계 레전드 중 하나다. 그녀가 올해 출간한 책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가 불과 몇 달 만에 10쇄를 넘길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광고업계를 떠난 후 책방 마님으로 활동 중인 그녀의 책에 이토록 많은 이가 열광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상인: 반갑다. 책 출간하고 일정이 많이 바빴을 것 같다.
최인아: 나도 반갑다. 바쁘지만 기쁜 마음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출간 계약하고 7년 만에 나온 책이다 보니, 편집자들 속을 많이 썩이지 않았나 한다.
이: 책은 어떻게 쓰게 됐나?
최: 이 책은 일을 바라보는 관점, 시선, 태도에 관한 내용이다. 몇 년 전부터 일에 대한 바람이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데, ‘애쓰지 말자. 이대로도 모두 괜찮다’ 같은 내용 일색이다. 너무 하나로 휩쓸리니까 ‘조금 다른 목소리를 필요로 하는 타이밍이 된 것 같다’는 데 출판사와 공감했다. 일과 삶이 완벽히 다른 것이고, 이를 대척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팽배해져만 간다고 느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소수가 되는 분위기다. 내가 좀 반골 기질이 있는데, 일에 대한 요즘 사람들의 관점이 바람직하지는 않다 생각했다. 일을 바라보는 태도에 관해 어깃장을 놓고 싶었다.
이: 개인적으로도 책을 읽는 동안 뜨끔한 자극을 여러 차례 받을 수 있어 좋았다.
최: 나도 그렇다. ‘내가 썼으니 더 잘해야지’ 생각한다. 사회와 나라를 위해서가 아닌, 너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스스로는 나의 아이덴티티를 ‘선배’라 생각하는데, 선배로서 이런 이야기는 꼭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꼰대 소리 들을 각오하고 썼다.
이: 책 속에 많이 와닿은 키워드가 있었는데, 바로 ‘쓰임’이란 말이다. 책을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 중 하나인 것 같다.
최: 제일기획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가 임원까지 되었고, 거기서 퇴사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이 일이 내 일이구나를 깨닫기까지 십수 년이 걸렸다. 항상 발을 절반만 담가놓고 계속 도망갈 생각을 했다. 무언가를 자기 일로 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는 ‘재미’와 ‘의미’인데, 회사 일
이: 그저 재미있다는 것만으로 성이 안 찼다. ‘이것도 아닌 것 같고 저것도 아닌 것 같다’ 했던 게 십수 년이었다. 흔히 잘된 프로젝트라 하면 기업 광고를 찍거나 브랜딩 프로젝트를 했을 때 그들의 매출이 늘거나 브랜드 밸류가 높아졌을 때를 말한다. 그런데 이를 바꿔서 이야기해보자. 책을 쓰는 작가에게 “어떨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끼세요”라고 물으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라고 답하는 것과 같다. 그러다 15년쯤 되었을 때 ‘아하!’ 했던 순간이 찾아왔다. 나같이 못된 인간이 이 일을 관두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이 일
이: 나에게 천직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드디어 그걸 받아들이게 됐다. 애쓴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 발만 담그고 보낸 시간 동안 아예 두 발 다 담그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 법하지만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일의 의미를 찾아서 이건가 저건가 하던 시간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길을 열어줬다. 같은 회사, 같은 부서, 같은 업무를 하더라도 그 일에 대한 정의는 수없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일의 의미를 자기 언어로 정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 ‘광고란 이런 것인가 보다’를 정의할 수 있었다. 지금의 책방과 광고 일은 다른 일이지만, 근원적인 부분에서는 맞닿아 있다. ‘클라이언트나 공동체가 가진 문제에 새로운 생각으로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정의하니 책방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할 때 내가 가진 역량이 무엇에 쓰이는지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광고 회사부터 지금까지 지극히 연속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점이 중요하다.
이: 일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이 있어야 쓰임을 파악할 수 있는 것 같다.
▎최인아책방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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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그렇다. ‘나는 왜 두 번째 커리어로 책방을 했을까, 나는 어떻게 쓰이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많이 했다. 영어 보케이션(Vocation)은 직업을 뜻한다. 어원은 보카레(Vocare)인데 ‘부름을 받다’는 뜻이다. 옛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름으로 하는 것이 직업이었고 그것이 바로 그들의 소명이었다. 그래서 책방 상호가 ‘최인아책방’이긴 하지만 우리 사명은 보이스(Voice)다. 나는 몸을 움직이는 일이나 운전 같은 일엔 전혀 재주가 없다. 하지만 말을 하거나 써서 전하는 달란트는 받았다. 상대방이 이해하게끔 전달하고 쓰는 것은 내게 주어진 것이다. 이 달란트를 활용해 여기와 저기를 연결하는 쓰임이 있는 것 같다. 연결점이 없을 것 같던 책과 사람들을 연결해 접점을 제공해주는 게 내 역할이라 생각한다.
이: 사회 초년생들은 일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가 더 쉽지 않은 것 같다. 경험이 아직 많지 않고 일에 파묻히다 보면 나를 되돌아볼 시간도 충분치 않다. 어떻게 하면 이들도 자신의 쓰임을 정의할 수 있을까? 그리고 반드시 이 쓰임을 찾거나 찾는 방법을 알아내야 하나?
최: 반드시 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개인의 시대라고 이야기한다. 많은 젊은 친구가 ‘나는 나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부모 세대는 이런 욕구가 크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에 급급했다. 부모가 돼야 하니까 애를 낳았고, 직장에 가야 하니 취업하고 직장을 다녔다. 여기에 ‘나’라는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요즘 시대 청년들에게 기회가 줄었다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은 국민소득 1000달러가 국가적 캐치프레이즈였던 후진국이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친구들은 중진국에서 태어나 선진국에서 사는 경험을 하고 있다. 소득 수준이 차이 나니 그들이 지닌 욕구의 레벨이 다르다. 부모 세대는 나를 자각할 시간 없이 살았지만 요즘 세대에겐 내가 가장 중요하다. 자라는 과정도 형제 없이 혼자가 많고, 내 방 같은 나만의 공간이 보장된 상태로 산다. ‘나’라는 경계가 확실하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내가 여기 왜 와 있지? 이게 아니면 내가 뭘 하고 싶은 거지?’ 같은 질문이 부모 세대에 비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처음 사회에 나와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내가 누구인가’,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 흔히 통념이라는 게,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또 널리 받아들여지는 듯하지만 허술할 때도 많다. 그래서 누가 작정하고 질문을 던지면 생각보다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길이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구나’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래서 책 제목인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앞에 ‘무조건 맞추려 하지 않아도 돼’를 숨겨놓았다. 바쁘게 살다가도, 이걸 끄집어내는 게 어려운 환경은 아니다. 이제 개인의 시대가 되었고, 나를 자각할 수 있는 기회도 많다. 안테나를 밖으로 뻗어서 세상의 변화나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안테나를 안으로 뻗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드웨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하드웨어를 돌리는 것이 바로 소프트웨어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생각한다. 평소에도 기업 강연을 종종 하는 편이지만, 이번에 책을 출간하고 주중 저녁 시간에 350명이나 신청한 대형 강연을 오프라인으로 연 적이 있다. 큰 강연이라 반응이 좋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강연이 끝나고 무려 200여 명이 사인을 받고 가셨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생각해보니 누가 떠밀어서 온 분들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오신 분들이라 더 열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한 단계 발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으신 분들이라 그랬던 것 같다.
▎베스트셀러에 오른 최인아 대표의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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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누구에게나 약간의 결핍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게 주어지면 뭘 해야겠다는 욕망이 잘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기업가들이 대단하다. 사실 돈을 불리는 건 그냥 투자회사에 맡겨도 된다. 그런데 기업가들은 그 일을 직접 찾아서 한다.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의 끝판왕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그런 자발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범인들은 일반적으로 나한테 뭔가 부족할 때 움직인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갖추고도 한 발 더 움직이는 사람들이 기업가다. 무언가를 하려는 의욕 자체가 정말 큰 자산이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의 숙제는 많은 것이 갖춰진 상태에서 ‘나는 그 의욕을 어떻게 현실로 만들어낼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중요한 포인트 같다. 일을 하다 보면 업앤드다운도 참 많지 않은가?
최: 세상에 좋기만 한 일도, 나쁘기만 한 일도 없다. 처음에는 좋은 일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다른 기회를 막는 일이기도 하고, 또 안 좋은 일인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니 내게 이렇게 근육을 붙여줬네 하는 일인 경우도 있다.
이: 그런 면을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다.
최: 얼마 전 종영한 [낭만 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를 참 좋아하는데, 겉으로 드러난 소재는 병원 의사들 이야기다. 하지만 알고 보면 성장 드라마에 가깝다. 천방지축이던 젊은 의사가 여러 일을 겪고 선배들을 만나며 괜찮은 의사이자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일만 하고 쉬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향점을 말하는 거다. 사람들은 회사 ‘법카’ 쓰는 걸 좋아한다.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아니니 그렇다. 그렇다면 시간은? 회사 나가서 쓰는 시간은 남의 시간이 아니라 내 인생의 시간을 쓰는 거다.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어차피 월급은 정해져 있는데 왜 더 열심히 해? 그런 생각이 정작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소중한 한때에 회사 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 시간이 회사의 시간에서 빠져나가는 게 아니다. 자기 인생을 쓰는 거다. 내 인생을 잘 살고 싶다고? 그렇다면 충만하지 않게 사는 것이 과연 내게 유익할까? 이처럼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회사나 환경이 아니다.
※ 이상인 - 이상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현재 Google 본사에서 YouTube 광고 디자인 시스템을 리드(Staff designer)하고 있다. Microsoft 본사, 클라우드 인공지능 그룹의 플루언트 디자인 스튜디오를 총괄했고, Deloitte Digital 뉴욕 오피스의 창립 멤버로 근무했다. 디지털 에이전시인 R/GA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저서로는 『디자이너의 생각법; 시프트』 외 세 권의 베스트셀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