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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스페인 세비야(SEVILLA) 

과달키비르강 따라가는 산책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세비야주의 주도 세비야(Sevilla)는 유구한 역사와 다양한 문화가 중첩된 곳으로, 한때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들 중 하나로 손꼽혔다. 이 도시를 남북으로 흐르는 과달키비르강을 따라 산책로를 걷다 보면 과거 세비야의 황금기를 엿볼 수 있다.

▎트리아나에서 본 강 건너편의 세비야 중심지. 투우사 조각상 사이로 대성당의 탑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항구 도시 세비야(Sevilla)는 스페인에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다음으로 큰 도시로, 유구한 역사와 다양한 문화가 중첩된 곳이다. 안달루시아에는 세비야 외에 코르도바와 그라나다 같은 매력적인 도시들이 있어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끌어들인다.


세비야에는 과달키비르(Guadalquivir)강이 흐른다. 길이 657km에 달하는 이 강은 안달루시아 지방 북쪽 산맥에서 발원하여 깊은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흐르다가 코르도바와 세비야를 거쳐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과달키비르’라는 이름은 ‘커다란 계곡’이란 뜻의 아랍어 알-와디 알-카비르(al-wadi al-kabir)에서 유래한다. 과달키비르는 스페인에서 배로 항해할 수 있는 유일한 강으로, 고대 로마 시대에는 바다에서 이 강을 따라 코르도바까지 항해가 가능했으나 지금은 세비야까지만 갈 수 있다. 그러니까 세비야는 과달키비르강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인 셈이다.

과달키비르의 유서 깊은 항구


▎이슬람 사원 자리에 세워진 웅대한 세비야 대성당. / 사진:정태남
이베리아반도는 오랫동안 히스파니아(Hispania)라고 하는 로마제국의 속주였다. 이곳은 로마제국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5세기에 고트족의 침공을 받았고 이곳에 자리 잡은 고트 왕국은 711년에 북부 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 무어인들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무어인들은 불과 몇 해 만에 이베리아반도 북부를 제외한 영토에 이슬람 왕조를 건설했다. 이에 이베리아반도 북쪽의 작은 왕국들은 기독교 깃발을 내걸고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길고 긴 ‘레콩키스타(Reconquista)’, 즉 ‘국토회복 전쟁’에 돌입했다. 카스티야 왕국이 주축이 된 기독교 세력이 남진함에 따라 이슬람 세력의 영역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점점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기독교 세력은 1236년에는 코르도바를, 12년 후인 1248년에는 세비야를 탈환했다.

세비야 시가지는 과달키비르강을 기준으로 크게 동서 지역으로 나뉜다. 동쪽은 대성당이 있는 세비야의 중심이고 서쪽은 토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트리아나 지역이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선원, 도자기공, 건설 노동자, 수공예 종사자, 투우사, 집시와 무용수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세비야의 중심 지역과 트리아나 지역은 19세기에 세워진 이사벨 2세 다리로 연결되는데, 이 다리는 보통 ‘트리아나 다리’라고도 한다. ‘트리아나(Triana)’라는 지명은 로마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트라야누스 황제(Traianus, 53~117)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왜냐면 그가 이 지역을 세웠다는 전설 때문이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세비야 근교 이탈리카(Italica)에서 출생했으니 이런 전설이 그럴듯하게 들린다. 이탈리카는 한니발의 세력을 꺾은 제2차 포에니전쟁의 영웅 스키피오 장군이 기원전 206년에 세운 식민도시로, 현재 이곳에서는 고대 로마 도시의 유적을 볼 수 있다. 한편 고대 로마인들은 과달키비르강을 바이티스(Baetis)라고 불렀고 현재 스페인에서는 이를 간단히 베티스(Betis)라고 한다. 트리아나 지역 강변 산책로의 이름이 카예 베티스(Calle Betis), 즉 ‘베티스 거리’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세비야 시가지를 남북으로 흐르는 강은 과달키비르강의 본류가 아니고 샛강이다. 본류는 시가지 서쪽 외곽을 스치며 흐른다. 18세기에는 본류에서 갈라져 나온 지류의 북쪽 부분을 막아 운하를 만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수면이 고요하고 잔잔하다. 그 명칭은 알폰소 13세 운하(Canal de Alfonso XIII)이다. 이 운하에는 오늘날 관광객들을 위한 유람선이 떠다니지만 운하로 바뀌기 전에는 수많은 상선으로 넘쳐났다.


▎유람선이 지나는 과달키비르강. 건너편이 트리아나 지역이다. / 사진:정태남
현재 선착장이 있는 동쪽 강변 산책로에서는 12각형의 토레 델 오로(Torre del Oro)가 눈길을 끈다. ‘황금의 탑’이라는 뜻이다. ‘황금’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탑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금과 은을 보관하던 곳이라는 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이슬람 세력은 712년부터 1248년까지 세비야 항구의 방어를 강화했는데, 황금의 탑은 이 지역을 드나드는 배들을 감시하기 위해 1220년에서 1221년 사이에 세운 군사용 탑이다. 이들은 기독교 함대가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고 이 탑과 트리아나 지역에 세운 탑을 쇠사슬로 연결했다. 하지만 1248년 라몬 데 보니파스(Ramón de Bonifaz, 1196~1252) 장군이 이끄는 카스티야 함대가 이를 뚫는 데 성공하여 세비야의 중심부를 트리아나 지역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켰다. 이슬람 세력은 외부 보급망이 완전히 차단되자 곧 항복하고 말았다.

부유한 무역 중심지


▎강변 산책로에 세워진 황금의 탑. / 사진:정태남
세비야를 탈환한 기독교 세력은 이곳에 있던 이슬람 사원 알모하드 모스크를 기독교 성전으로 개축하기 시작했다. 또 조선소를 확장하여 이곳 항구에서 곡물, 기름, 와인, 양모, 가죽, 치즈, 꿀, 견과, 금속, 비단 등을 전 유럽으로 수출하면서 세비야를 부유한 도시로 발전시켰다. 세비야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되찾은 지 약 150년이 지난 1492년 1월 초,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은 이슬람 세력의 최후의 보루였던 그라나다를 함락함으로써 마침내 길고 길었던 국토회복 전쟁을 끝냈다. 이리하여 스페인 땅은 완전히 통일되었고 라틴 명칭 히스파니아(Hispania)에서 변형된 ‘에스파냐(España)’가 공식 국호가 되었다. 곧 이어서 스페인 역사에서 또 하나의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그해 10월 12일에 신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이에 따라 세비야는 몇 세기 동안 방대한 스페인 제국의 해상무역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1519년 마젤란의 첫 번째 세계일주가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또 16~17세기에 스페인 함대는 신세계에서 약탈한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일 년에 두 번씩 세비야에 입항했다. 당시 세비야는 스페인 본국과 식민지 사이의 독점적인 교역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 떠올랐다. 한편 기존의 모스크를 개축했던 성당은 세비야의 엄청난 부를 만천하에 과시할 웅장하고 아름답고 화려한 고딕식 대성당으로 증축되어 1528년에 완공되었다. 대성당은 규모로 보면 당시 세계 최대였고 오늘날에는 세계 네 번째이다. 이곳에는 콜럼버스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대성당에서 남쪽으로 약 500m 정도 가면 18세기에 세운 왕립 담배공장 건물과 마주치게 된다. 이 건물은 당시 단일 산업용 건축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고, 1만 명 넘는 여직공이 이곳에서 일했다. 쿠바에서 생산된 잎담배는 모두 이곳으로 운송되어 가공되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작가인 메리메(P. Mérimée,1803~1870)는 이곳에서 일하는 집시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카르멘』을 썼고, 프랑스 작곡가 비제(G. Bizet, 1838~1875)는 이를 각색하여 오페라화했다. 만약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현대로 바꾸어서 다시 쓴다면 주인공 카르멘은 여공이 아니라 여대생이 되지 않을까?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 건물은 1954년 이래로 세비야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세비야대학 건물. 원래 왕립 담배공장으로 『카르멘』의 무대가 되었다. / 사진:정태남


※ 정태남 -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분야 외에도 미술, 음악, 역사, 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로마를 중심으로 30년 이상 유럽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에 여러 권이 있다.(culturebox@naver.com)

202310호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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