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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이경돈 서울디자인재단 대표 × 패트리샤 무어 서울디자인어워드 심사위원 

세상을 바꾸는 기술? 세상을 바꾸는 디자인 

신윤애 기자
서울디자인재단은 디자인으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불어넣는 전 세계 디자이너를 발굴하고 조명하기 위해 매년 ‘서울디자인어워드’를 개최한다. 올해는 ‘사람과 사회, 환경의 조화로운 관계를 지향하는 지속가능한 일상을 위한 디자인’을 주제로 프로젝트를 선정했다. 지난 10월 25일, 수상작을 발표하는 시상식에 앞서 이경돈 서울디자인재단 대표와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가 만나 디자인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고민과 철학을 공유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경돈 서울디자인 재단 대표(오른쪽) 서울시 디자인서울 총괄본부 부본부장, 한국공공디자인학회 회장, 한국디자인단체총연합회장, 신구대 공간디자인학과 교수 등을 역임한 이 대표는 이론·현장 경험을 갖춘 공간디자인 전문가 / 패트리샤 무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인학자이자 산업디자이너. 1979년부터 1982년까지 80대 노인으로 변장하고 다니며 노인들이 겪는 불편함을 몸소 체험했다. 제너럴일렉트닉(GE), 존슨앤드존슨, 킴벌리클라크 등 많은 제품 디자인에 노인의 신체 특성을 녹여냈다.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어렵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특별한 기술이나 장치 없이도 창의적인 디자인 하나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불편함이 편리함으로 바뀔 수 있다. 이처럼 단순히 미적인 영역을 넘어 사회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디자인을 공공디자인이라고 부른다.

서울은 2000년대 후반부터 ‘디자인서울’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공공디자인을 도심 곳곳에 적용해왔다. 시설물을 만들거나 경관을 가꾸는 등 디자인을 도구로 도심 환경을 개선했다. 덕수궁 돌담길, 서울로7017, 서울역 셸터가 대표적인 예다.

2019년부터는 서울의 디자인산업을 이끄는 서울디자인재단이 ‘서울디자인어워드’를 매년 개최해 디자인으로 일상의 문제를 해결한 프로젝트를 발굴하고 있다. 올해 4회째를 맞이한 이 어워드는 그동안 도시문제 해결을 위한 공간 이슈를 주로 다뤘다면, 올해부터는 전 세계인의 조화로운 일상을 위해 만들어진 유니버설 디자인을 포함한 디자인의 전 분야로 대상을 대폭 확대했다. 그 결과 응모작 수는 전년 대비 3.5배 증가했고 참여국도 46개국으로 2배 늘었다. 서울디자인재단의 중장기적인 목표는 ‘서울디자인어워드’를 공공디자인 영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세계적인 어워드로 만드는 것이다.

7월부터 세 달간 심사를 거친 올해의 ‘서울디자인어워드’는 지난 10월 25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시상식을 열었다. 이날 대상을 수상한 작품은 튀니지 디자이너 주하이르 벤 재닛의 ‘암포라(Amphora)’다. 특별한 장치 없이 태양열과 공기 중 습기를 이용해 안전한 식수를 만드는 항아리 모양의 제품으로, 자연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하다는 부분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날 열린 시상식에는 올해 ‘서울디자인어워드’의 심사를 맡은 노인학자이자 산업디자이너인 패트리샤 무어가 특별히 참석했다. 그는 물이 끓으면 소리 나는 주전자, 출입문에 계단이 없는 저상버스, 손 다칠 위험을 줄인 일자형 감자칼 등을 고안해 약자, 노인, 모든 사람이 편리하고 안전하게 제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꾸어온 주역이다. 그녀를 심사위원으로 초대한 이경돈 대표가 방한한 패트리샤 무어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경돈(이하 이): 만나게 돼 영광이다. 20대 시절, 노인으로 변장해 이들이 겪는 생활 속 어려움을 파악하고 디자인으로 문제점을 해결한 당신의 업적은 디자인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성별, 장애 유무, 연령에 상관없이 모두가 안전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오늘날의 유니버설 디자인을 선도한 주인공이지 않나. 서울디자인어워드의 심사위원 일을 흔쾌히 수락하고, 먼 한국까지 방문해주어 감사하다는 마음을 이 자리를 빌려 전하고 싶다.

패트리샤 무어(이하 무어): 훌륭하고 의미 있는 어워드에 심사위원으로 기여할 수 있어서 나 또한 감사하고 기쁘다. 전 세계적으로 디자인 업계는 개발과 혁신을 위해 몰두하고 있다. 한국도 이미 그런 추세이지만 서울디자인어워드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기업이 책임감을 갖고 디자인하는 문화를 장착하길 바란다.

이: 서울디자인어워드를 심사하면서 어떤 점을 느꼈는지 궁금하다.

무어: 우선 훌륭한 디자이너들이 한데 모여 경쟁을 펼쳤다는 데서 서울디자인어워드의 힘과 경쟁력을 알 수 있었다. 전 세계에서 출품작이 모였다고 들었는데 ‘레드닷’이나 ‘국제디자인어워드(IDA)’에서보다 더 다양한 디자인을 본 것 같다. 그중 소수의 작품만 골라야 하는게 아쉬울 정도로 수준도 상당히 높았다. 입상하지 못한 디자이너들에게 “당신이 진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계속 꿈꾸고 계속 일하라”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어워드의 콘셉트와 취지가 인상적이었다. ‘혁신’에 초점을 맞추는 여느 글로벌 디자인어워드와 달리 서울디자인어워드는 유니버설 디자인, 즉 선한 영향력을 실천하는 디자인을 발굴하고자 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주제다.

이: 디자인은 단순히 보기 좋은 것 그 이상의 의미와 기능이 있지 않나. 디자인으로 위험한 것을 안전하게, 불편한 것을 편리하게 개선할 수 있다. 이를 널리 알리고 싶었다.

무어: 디자인이 ‘뷰티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원더풀’할 수 있다는 점을 많은 사람이 알면 좋겠다. 나는 1970년대에 디자인학교를 졸업한 이후 어떻게 하면 디자인을 통해 인류의 삶에 기여할 수 있을지 연구하고 실천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어느 누군가가 살 집이 없고 먹을 음식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면 디자이너들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그의 삶을 나아지게 할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이들의 삶을 바꾸는 건 꼭 정치인이나 기업인이 아니어도 된다. 디자이너가 물꼬를 트고 정부와 의료회사가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울 수 있다. 서울디자인어워드에 세상을 바꿀 만한 훌륭한 디자인과 작품이 많이 나왔다. 출품 작품 모두가 좋았지만 특히 디자인을 통해 안전하고 깨끗한 물과 음식을 만들어보려는 창의적인 도전들이 심금을 울렸다.

이: 나 또한 작품들을 보며 크게 감동했다. 아프리카 어린이가 제리캔(물통)을 안전하게 옮길 수 있도록 돕는 운반 가방 ‘제리캔 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는 한국의 박중열 디자이너가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해 만든 작품으로, 현지의 생활방식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느껴졌다. 디자인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즐거운 일상을 선물했다는 점이 우리 어워드 취지와도 잘 맞았다.


▎지난 10월 25일 DDP에서 만난 이경돈 대표와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가 공공디자인, 유니버설 디자인에 대한 고견을 나누었다.
무어: 동의한다. 서울디자인어워드와 출품작들에서 ‘디자인의 보편성(Universality)’, 즉 유니버설 디자인이 더 나은 삶을 만드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국제적인 디자인 어워드를 주최했다는 점에서 서울 시민들의 자부심이 클 것 같다. 실제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환경이 큰 폭으로 발전한다고 느낀다. 여기에 디자인의 역할이 크다는 걸 알기에 기쁜 마음으로 눈여겨보고 있다.

이: 칭찬 감사하다. 실제로 서울시는 유니버설 디자인과 관련된 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한다. ‘동행·매력 특별시 서울’로 도약하기 위해 사회적약자에게 늘 관심을 갖고 있다. 우선 서울시 유니버설 디자인 가이드라인에는 다양한 보행자(보행보조기를 사용하는 노인, 시각장애인 등)의 유형에 따른 적절한 설계 가이드와 참고 사례를 제시한다. 공공시설은 물론 건축물을 설계할 때 이 가이드를 실제로 적용할 수 있도록 기준을 수립했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한다. 우리 재단은 ‘유니버설 디자인팀’을 운영한다. 당신의 주요 활동 분야가 유니버설 디자인이지 않나. 당신이 생각하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변하는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묻고 싶다.

무어: 유니버설 디자인은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 혹은 ‘보편적 디자인’으로 불리며 연령, 성별, 국적, 장애의 유무 등에 관계없이 누구나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건축, 환경, 서비스 등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것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요소이고 디자인 업계의 대의이자 글로벌 과제다. 미래에 새로운 재료, 새로운 수단, 새로운 기회가 제시될 때마다 디자인도 그 곁에서 삶을 개선하고 향상하는 역할을 해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웃음)

이: 한 가지 자랑하자면, 서울은 디자인을 활용해 시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잘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재단도 공기관이 해야 할 임무, 구체적으로는 공공성을 가지고 정확한 대상자에게 혜택이 가도록 설계하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나아가 디자인으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버스 정류장을 예로 들어 설명드리겠다. 버스 정류장은 누구나 버스를 쉽고 편리하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잘 설계된 것을 넘어 늘 불을 밝혀놓음으로써 어두운 밤에는 안전한 장소, 궂은 날씨에는 잠시 몸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 역할을 한다. 게다가 버스정류장에 설치된 광고판에 유익한 광고를 전시하여 사람들에게 웃음과 행복감을 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기능적이면서도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디자인의 올바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무어: 훌륭한 스토리다. 버스 정류장 이야기를 들으니 나 또한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른다. 대학교 재학 시절 버스를 타고 가던 중 한 정류장에서 허름한 차림의 장년 남성이 종이와 천으로 꽁꽁 싸맨 짐덩어리를 힘겹게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을 봤다. 당시 나는 부유한 동네로 꼽히는 뉴욕 로체스터에 살았는데 동네를 조금만 벗어나도 불우한 환경에 놓인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학교로 돌아가 친구들에게 ‘우리가 디자이너로서 저소득층을 돕는 방법을 생각해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이후 친구들과 그 동네를 무작정 찾아가 동네 모임에 참석했고 ‘우리가 뭔가 해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뭔가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감동한 동네 사람들이 우리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지저분하고 낙서가 많아 우범지역으로 보이던 길가를 깔끔히 치우고 꽃을 심어 경관을 아름답게 바꾸었다. 단순히 청소를 하려는 취지가 아니라 거리를 정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범죄율을 낮추고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보려는 시도였다. 꽤 오래전 이야기지만 디자인으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 최초의 뜻깊은 경험이었다.

이: 대학생 때 그런 일을 하다니 대단하다. 우리도 당신처럼 훌륭한 학생 디자이너를 지원하고 육성하기 위해 디자이너와 소상공인을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소비재의 경우 디자인에 따라 구매력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디자인이 좋지 못하면 소비자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 결국 디자이너는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필요하고, 기업은 훌륭한 디자이너가 필요하다. 이들이 서로를 찾는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우리가 매칭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만들어진 결과물이 스토어에서 판매되는 과정까지 관여하고 잘 판매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도 함께 검토한다. 대학생들이 취업에 매달리기보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회의 디자인에 기여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디자인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사업이다. 최근에 상을 받은 팀의 아이디어는 ‘앞머리만 세척하는 미용기구’였고, 아모레퍼시픽과 연결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

무어: 앞으로도 디자이너를 위해서, 서울과 이 세상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지금처럼 힘써주길 바란다.

이: 좋은 말씀 감사하다. 내년부터는 디자인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신사업을 실현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서울 시정과 서울 시민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업을 해나갈 생각이다. 더불어 서울디자인어워드를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시상으로 만들고 여기에서 수집된 우수 사례들을 널리 확산해 훌륭한 디자인적 사고와 우수 창의 아이디어를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기회로 삼겠다. 잘 지켜봐달라.

- 신윤애 기자 shin.yunae@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202312호 (20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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