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항공우주 기술 발전을 이끌어온 1세대 공학자는 “달뿐만 아니라 더 먼 우주를 탐사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데 매진했다”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항공우주 연구개발에 평생을 바친 이상률 한국항공우주원 원장의 이야기다. 한국의 올드스페이스 시대를 지켜본 그는 뉴스페이스 시대를 어떻게 전망할까.
▎한국 항공우주 개발 1세대인 이상률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원장은 “임기 내 누리호와 다누리를 성공적으로 발사해 기쁘다”며 소회를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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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를 이끌 ‘Aerospace’ 산업은 항공우주 또는 우주항공 사이에서 어떻게 불려야 할까. 이르면 5월 경상남도 사천에 개청하는 우주항공청은 한국판 NASA(미국 항공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으로 언급되지만 ‘항공’보다 ‘우주’라는 단어를 앞세웠다. 하늘을 넘어서 우주로 향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방침이 보이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1989년 설립된 한국항공우주연구원(Korea Aerospace Research Institute·이하 항우연)은 2024년 창설 예정인 우주항공청 산하 기관으로 개편됐다.그렇다면 항우연도 정부 정책에 맞게 명칭이 바뀌는 것일까. 지난 2월 16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빌딩에서 만난 이상률(64) 항우연 원장은 이 같은 질문에 “우주산업과 항공산업은 뗄 수 없는 관계”라며 “우선순위를 논하기보다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답했다. 그야말로 우문현답이었다. “한국은 글로벌 7대 우주 강국 아닌가”라는 기자의 질문에는 “기술 역량만 놓고 보면 7대 강국일지 몰라도 산업 경쟁력 측면에서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이 원장은 항우연이 문을 열 때부터 함께해왔다. 서울대에서 항공공학을 공부한 그는 학사 졸업 후 항공우주산업 본고장인 프랑스로 건너가 국립항공우주대학(ISAE-SUPAERO)에서 발사체·인공위성 전문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 폴사바티에대학에서 우주응용학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당시 항공우주산업이 태동하던 한국에서 그는 귀한 인재였다. 그는 항우연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다목적위성체계그룹 그룹장과 위성연구본부 본부장, 항공우주시스템연구소 소장 등을 거쳐 2021년 항우연 원장직을 맡았다.그는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와 달 탐사선 다누리의 발사 성공에도 불구하고 한국 항공우주산업의 경쟁력을 낮게 평가했다. 그는 “한국 기술 역량의 자립성과 잠재력을 보여준 건 사실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한다”며 “기술력과 산업 경쟁력을 구분해 현실을 직시하고 달성 가능한 목표와 정교한 로드맵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직계열화가 깨져야 비로소 ‘뉴스페이스’
▎지난해 5월 3차 발사에 성공한 누리호 이송 장면 / 사진:한국항공우주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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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항공우주산업의 경쟁력이 낮은 이유는 무엇인가.크게 두 가지다. 국내적으로는 우주항공산업 생태계가 구축되지 못한 데다 대외적으로는 가격경쟁력이 낮기 때문이다. 아직 국산화하지 못한 부품과 장비가 적지 않은데 이들의 수입 가격이 만만치 않다. 정부는 항공우주 기술의 활용적 측면을 강조하지만 기술 응용이나 활용은 나중 문제다. 현재는 아직 확보하지 못한 기술을 개발하고 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주력할 때다. 단기적으로 개발비를 아끼다간 장기적인 경제성을 놓치고 만다. 기반 기술의 자립도를 높인 다음에 이러한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서비스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합리적인 순서다.
게임체인저가 아닌 패스트팔로어를 말하는 건가.아니다. 우주항공 분야는 아직 어떤 국가도 확보하지 못한 최첨단 기술이 무궁무진하다. 향후 글로벌 경쟁력을 결정지을 핵심 전략 기술을 개발해 선점효과를 누려야 한다. 그래야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다. 항공우주 기술은 경제적 이점뿐만 아니라 국방과 외교 분야를 아우르기 때문에 이번 패권 경쟁에서 한국은 반드시 기회를 잡아야 한다. 이는 속도전이다. 우주항공청 개청도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기술개발을 서둘러야 한다.
혁신적 기술개발의 전제 조건은 무엇인가.단연 인재 확보다. 항공우주 기술은 시행착오를 수없이 겪으며 지난한 과정을 견뎌야 하는 분야다. 압도적이고 우월적인 기술로 전 세계를 선도하려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재를 영입해야 한다. 반드시 항공우주산업계에서 인재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미지의 세계 아닌가. 세계시장 경험이 많은 인재와 기업도 항공우주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관건은 ‘우주항공복합도시’로 개발 예정인 경남 사천이 인재의 눈에 살기 좋고 매력적인 도시로 보이겠냐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교통 편의성과 정주 여건, 상업 시설, 교육 환경 등 전반적인 인프라를 개선하는 일이 시급하다. 사천을 오가는 항공편을 늘리거나 도심항공모빌리티(UAM)를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한국이 뉴스페이스 시대에 진입했다고 보는가.출발선은 끊었다고 본다. 그런데 우선 뉴스페이스(New Space) 시대를 제대로 정의해야 한다. 산업의 수직계열화가 깨져야 비로소 뉴스페이스 시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이 먼저 아이디어를 가져와야 한다. 정부 지원금에 기대고 정부가 주는 프로젝트만 기다리며 손 벌리고 있으면 올드스페이스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직접 아이디어를 내서 민간 펀드를 활용하는 자생적 스타트업이 현재보다 더 많이 탄생하길 바란다. 이를 위해선 정부가 과감하게 역량 있는 기업에 프로젝트를 주도할 기회를 주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항공우주산업을 둘러싸고 활발한 분위기가 조성돼야 더 많은 인재와 기업이 생태계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조건적 벤치마킹은 지양해야
▎2022년 발사된 달 탐사 궤도선 다누리의 상상도. / 사진:한국항공우주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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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NASA와 스페이스X의 협력을 본보기로 삼겠다는 입장이다.NASA도 초반에는 전통적인 산업화 정책으로 항공우주산업을 이끌어왔다. 기술개발에 뛰어든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틀에 박힌 방식이었다. 하지만 NASA는 혁신적으로 정책을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대표적인 예로 ‘상업용 궤도운송서비스 프로그램(COTS)’을 들 수 있다. NASA는 참여 기업을 여러 곳 선정한 후 단계별 평가를 거쳐 기준 미달인 기업을 과감하게 제외했다. 대신 기준을 충족한 기업에는 매우 적극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국 우주항공청도 NASA와 똑같이 정책을 이행하라는 것은 아니다. 국내 현황에 맞는 정책을 수립하는 게 중요하다.항공우주 생태계가 형성되고 산업의 시장성이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정부는 기업별 맞춤형 지원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정부 주도하에 대형 프로젝트를 설계·기획해서 민간기업에 맡기는 방식이 나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초기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이에 더해 기업 맞춤형 전략을 마련한다면 생태계는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가령 아이디어는 좋은데 기술력이 부족한 기업에는 기술 지도를, 초기 기술력을 확보한 기업에는 기술 검증을, 사업 경험이 부족한 기업에는 경영 컨설팅을 제공하는 등 지원 방법을 다양하게 기획할 수 있다. 이후 산업 생태계가 충분히 성숙해지면 정부가 민간기업의 서비스를 구매하는 형태도 가능해지리라 본다.
그런데 정부는 위성 R&D 예산을 삭감했다.항공우주산업은 장기적인 시간과 지속적인 투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회성 예산 삭감이 반드시 치명적인 타격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번 예산 조정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면 문제가 있다. 만일 항공우주산업을 국가 전략상 후순위로 결정한 결과라면 국가 생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미래를 대비하는 관점에서 항공우주 기술을 개발한다’는 정책적 판단에 변함이 없길 바란다.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일관된 정책 추진은 안정적인 투자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끝으로 우주항공청에 조언을 남긴다면.정부는 2045년 항공우주산업에서 글로벌 시장점유율 10%를 달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는 약 420조원 규모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글로벌 시장점유율은 1% 수준이다. 21년 만에 10배로 성장할 수 있을까. 먼저 10%라는 수치가 얼마나 타당성 있는지 검증해야 한다. 실제 상황에 부합하는 정책을 수립하려면 현실적이고 냉철한 판단 능력이 요구된다. 또 구체적으로 시장점유율 5% 달성 시점과 7% 돌파 시점을 각각 제시해야 한다. 로드맵이 세밀할수록 실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항공우주산업에 국가의 생존이 달려 있다. 항공우주산업은 미래 국가 성장 동력이자 미래 세대의 활동 영역이다. 앞으로 이 기술을 응용·활용하는 서비스 시장이 수없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정부의 선언적 정책이 아닌 정제된 정책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려면 현재의 위원회식 의견 수렴에서 벗어나 현장의 피드백을 반영하는 시스템을 운영해야 한다. 항공우주산업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정책에 접근하길 기대해본다. 전문가 풀을 돌려 컨센서스를 만든 이후 우주항공청을 개청한다면 졸속 개청이란 비난도 받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국제협력은 하나의 수단일 뿐 항공우주산업의 전부가 아님을 전하고 싶다.-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 _ 사진 최기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