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소울의 삶과 미술심리(49) 

유디트의 딜레마 – 편견을 점검하는 시간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작품에 함축된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자신의 경험에만 근거한다면 자칫 편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작품이 숨겨둔 진실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면 끊임없이 작품과 소통하며 편견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599
미술관에 들어가 작품을 감상할 때, 어떤 그림은 무엇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그림도 있다. 이미지를 알아볼 수 있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이 그림이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과 얼마나 부합하는가에서 비롯된다. 그림이 오래전에 그려졌다고 하여 소통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림이 추상적으로 변했을 때 관람자들은 그림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천 년도 더 된 오래된 그림 속에 그려진 요소를 하나하나 질문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합의된 이미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자신이 알고 있는 대상과 닮아 있거나, 삶의 경험과 미술관에서의 경험이 쌓이면서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부분들을 유추하여 이해하기도 한다.

관람객이 작가의 그림을 보았을 때 자동적으로 추정되는 이미지는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밤하늘에 떠 있는 동그란 것은 달이라 추정되고, 낮에 떠 있는 동그란 것은 해라고 추정된다. 또 아무리 사실적이지 않더라도 동그란 무엇에 기다란 막대기를 그리고 추가로 막대기 4개가 더해지면 사람이나 동물을 그린 것이라고 추측된다. 자신의 마음속에 합의된 무언가가 그림을 이해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림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보이는 표정, 언어, 행동 등은 굳이 ‘지금 어떤 의도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라고 묻지 않아 이해된다. 때론 ‘관상은 과학이다’라는 전제하에 외모만 보고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평가하기도 한다. 그동안 자신이 경험했던 대인관계나 잘 알려진 사람들의 외모를 평균적으로 추려 추측한 것이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편견을 지나치게 신뢰할 경우, 새로운 도전이나 좋은 인연의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목이 잘린 두 남성


▎귀스타브 모로 [환영] 1876
서양미술사에서 목이 잘린 남성의 상징은 크게 둘로 구분되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와 [환영] 모두 약속된 상징물들을 가지고 있다. 젊은 여성이 등장하고, 머리가 잘린 남성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그림에 등장하는 추가적인 상징으로 인해 차이가 발생한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자신의 나라를 침략한 적장에게 술을 마시게 한 후 목을 베어 나라를 구한 여성 영웅이다. 아름다운 과부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논개와 비교되기도 한다.

[환영]에 나오는 여성은 세례자 요한의 참수에 등장하는 살로메이다. 이스라엘의 왕비 헤로디아는 처음에는 자신의 삼촌 빌립보 1세와 결혼하여 딸 살로메를 낳았으나, 이혼 후 왕이었던 시동생 안티파스와 결혼하여 왕비가 된 인물이다. 왕비의 불륜에 대해 세례 요한은 도덕적 비난을 서슴지 않았고,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게 된다. 안티파스가 생일을 맞이해 연회를 연 자리에서 살로메가 나와 춤을 추었고, 왕은 부인의 딸이 추는 춤사위에 넋이 나갔다. 왕은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겠다”고 말했는데, 살로메가 어머니에게 의견을 묻자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소원으로 청하라고 했다. 왕은 경비병을 보내 요한의 목을 베어 왔고, 소녀는 그것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가져다주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에서는 살로메가 세례 요한을 사모했으나 더러운 여자의 딸이라 거절당하자 치솟은 분노로 양아버지를 이용한 것으로 묘사되어 악녀의 이미지는 더욱 굳어졌다.

유디트와 살로메의 공식


▎3 루카스 엘더 [세례자 요한과 살로메] 1530 4 루카스 엘더 [유디트의 승리] 1530
[세례자 요한과 살로메]와 [유디트의 승리]는 같은 작가가 같은 해에 그렸다. 얼굴과 의복이 거의 유사하여 마치 같은 인물을 그린 듯 보이지만, 왼쪽 인물은 살로메이며, 오른쪽 인물은 유디트이다. 이 둘의 차이는 상징물인 접시와 칼에 있다. ‘젊은 여성 + 잘린 남자 머리 + 칼 = 유디트’, ‘젊은 여성 + 잘린 남자 머리 + 접시 = 살로메’라는 공식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거의 비슷하게 닮은 사람이지만, 이 사람이 무엇을 들고 있는가에 따라 인물의 성격이 달라진다. 한 사람은 악녀가 되고, 한 사람은 영웅이 된다.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슈퍼카를 소유할 때와 경차를 소유할 때 사람들의 대우는 달라진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에 신경을 쓰게 된다. 혹자는 본질 그 자체가 중요하므로 무엇을 걸치거나 들고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들과 산에 사는 짐승이 아니며 강자와 약자는 단순히 몸집의 크기와 공격력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실용성만 중요했다면 수없이 다양한 의복 디자인의 존재를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몸을 가득 채운 문신, 단아하게 차려입은 옷, 찢어진 바지와 체인들, 화려한 화장과 네일아트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는 인간의 표식들이다.

유디트의 딜레마


▎프란체스코 마페이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들고 가는 유디트] 1660
그런데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들고 가는 유디트]는 보는 이에게 혼란을 준다. 그림에는 젊은 여자와 잘린 남자 머리, 접시와 칼이 등장한다. 그럼 이 사람은 살로메일까, 유디트일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이라 믿은 어떤 표식들이 반드시 참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면접관이 ‘눈이 처진 사람들은 게으르다’는 편견을 가졌을 경우, 유능한 인재를 놓칠 위험성이 있다. ‘여자들은 감정적이라 대표가 여성인 곳과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편견 때문에 좋은 거래처를 놓칠 수도 있다.

때론 이런 현상이 아이에게 적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자유화를 그리도록 했는데, 한 여자아이가 공주 옷을 입은 여자아이를 그리고 ‘백설공주’라고 지칭했다고 가정해보자. 유치원 교사의 머릿속에는 백설공주의 스토리에 담겨 있는 상징들이 암기한 내용처럼 줄줄이 떠오를 것이다. 아이가 엄마를 그리고 사과까지 그릴 경우, 자동적으로 이 사과는 독사과라고 인식될 것이고, 아이가 가진 어머니에 대한 적대감, 혹은 학대나 방임을 의심할 수도 있다. 만약 아이가 거울까지 그려낸다면 확신을 가지고 ‘엄마한테 미움받는구나’라는 생각이 굳어질 것이다. 아이가 단순하게 어젯밤 자기 전에 백설공주 애니메이션을 보았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는 참 자상해 보였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게다가 왜 난쟁이들은 안 그리지? 유디트의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백설공주인데 난쟁이들은 없을까?” 미술치료사는 자신이 믿고 있는 내용에 내담자의 그림을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엄마가 나를 화나게 하거나 섭섭하게 하는 때는 언제일까?” 좋은 부모가 사랑으로 키운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순간순간 불만족스럽고, 서럽고, 엄마와 떨어지는 게 두렵기도 하다. 이제부터 아이가 말하는 ‘엄마가 날 섭섭하게 한 순간’은 미술치료사의 귀에는 계모의 학대로 들리게 될 것이다.

편견을 점검하는 시간

인간이 보이는 표식들은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으나, 고정된 불변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체라고 믿고 우주의 질서라고 믿는 이 세계의 존재들은 모두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허구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편견은 자신을 보호하며, 확률적으로 좋은 선택을 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무언가를 읽으려는 시도를 할 때, 자신의 상식과 편견이 합리적인지 한 번쯤 의심할 필요는 있다. 물리학자 존 휠러는 블랙홀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우주의 모든 물체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no-hair theorem’을 언급한 적이 있다. ‘블랙홀 안에는 무엇이 있고, 블랙홀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라는 사람들에 질문에 그는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 이 머리카락이 누구에게 귀속된 것인지 끝을 따라가면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블랙홀은 머리카락이 없기에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라온 환경과 문화에 따라 무수히 많은 표현을 하고 표식을 남긴다. 이 중 우리가 분명하게 아는 영역은 얼마나 될까.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오해가 단 한 번의 확인이 없었기에 발생한다. 그렇기에 사람을 대하고 읽어나가는 관계에서 상대에게 질문하고, 확인하며, 소통하면서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진실과 언제든지 새롭게 만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 김소울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미술치료전공 겸임교수이자 플로리다마음연구소 대표다. 치유미술관 외 19권의 저역서가 있다.

202403호 (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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