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진호의 ‘음악과 삶’ 

오자와 세이지와 헝그리 정신 

오자와 세이지(小澤征爾, 1935~2006)는 국제적 명성을 얻은 일본인 지휘자다. 지난 2월 6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73년부터 2002년까지 보스턴 심포니 음악감독을 역임하는 등 국제 무대에서 크게 인정받았다. 그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와 캐릭터, 지향점 등에 관해 여러 사람과 대담했다.

▎1963년의 오자와 세이지 / 사진:위키피디아
필자가 젊었을 때는 세이지 오자와라고 알려졌다. 세이지가 이름이고 오자와가 성씨다. 서양식으로 불렸던 지휘자를 21세기 어느 시점부터 서양인들도 오자와 세이지라고 불렀다. 존중의 의미일 것이다. 오자와는 1935년 중국의 랴오닝성 선양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지역을 포함한 만주 일대에 일본은 1932년부터 만주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일본의 뜻을 따르는 괴뢰국이었다. 어떤 일본인들의 관점에서는 지방일 수 있다. 오자와는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이 변방에서 태어났다는 식으로 말했다.

치과의사 부친을 둔 오자와 가족은 -오자와에 따르면- 가난했다고 한다.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막내를 위해 피아노를 장만해야겠다고 한 부친과 형들이 요코하마의 친척 집에 있는 중고 피아노를 손수레에 싣고 도쿄로 끌고 왔다고 한다. 요코하마에서 도쿄는 오늘날의 기차나 전차 등을 이용하면 대략 25~45분 거리다. 부친은 중간에 대중교통 편으로 집에 왔는데 형들은 중간 어딘가에 있는 여관에서 하루를 자고 왔다(오에 겐자부로 & 오자와 세이지, 문학과 음악이 이야기한다, 포노, 2018). 형제간 우의가 돋보이는 이야기다.

오자와는 1948년에 설립된 도호가쿠엔 음악학교(Toho Gakuen School of Music, 桐朋学園大学)에서 지휘를 배웠다. 이 학교는 처음에는 초등학생을 위해 개설되었다가 이후 중고등학생을 위한 과정을 열었다. 1955년, 이 학교 관계자는 대학교 수준의 학위과정을 개설했다. 오자와가 졸업했던 1950년, 이 학교는 대학교가 아니었다. 한국으로 치면 예술계 고등학교였던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서울예고와 선화예고가 그렇듯이 중급음악대학의 수준을 웃돈다. 어쨌든 졸업장과 관련된 오자와의 공식 학력은 여기서 끝났다. 이후 그는 일본이나 유럽에서 대학교나 음악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

도호가쿠엔 음악학교에서 그를 지도했던 선생님은 그에게 가혹한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베토벤의 [교향곡 1번]을 3시간 이내에 전부 외우라고 하고는 방을 나갔다가 돌아왔던 사이토 히데오 선생 앞에서 오자와는 그 교향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악보에 써야 했다. 음 하나가 틀려도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오에 겐자부로 & 오자와 세이지, 같은 책).

놀라운 이야기다. 필자가 대학교에 다닐 무렵인 1980년대에만 해도 한국의 어떤 대학교 학부에도 지휘과나 지휘 전공이 없었다. 선화예고나 서울예고에서도 지휘를 공부하는 학생이 없었다. 1990년대 초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작곡과에 지휘 전공이 생겼는데, 오자와가 경험했던 것과 같은 가혹하며 다소 무식하게(?) 보이는 교육 방식은 통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한국인 지휘자 중에서 연주 시간이 30분쯤 되는 베토벤의 [교향곡 1번]을 악보에 다 적을 수 있거나, 그걸 피아노로 다 외워서 칠 수 있는 이는 없다. 이런 교육 방식은 지금도 한국의 작곡과나 지휘과에서 볼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세계 어디에서도 진행되지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척 훌륭한 교수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교수법이 진행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교수의 영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지도교수가 사이토 히데오 같은 이가 아니라면 학생 스스로 이런 식의 공부를 하면 아주 좋을 것이다.

스승의 교수법을 받아들였던 오자와도 훌륭하다. 그는 꽤 많은 연주회에서 악보를 보지 않고 지휘했다. 스승에게 배웠던 단순한 방식을 한평생 써먹었다. 카라얀 같은 과거의 일부 마에스트로가 악보를 보지 않고 지휘했는데, 카라얀과 비교하면 오자와는 암보 차원에서만 보면 더 훌륭하다. 카라얀은 연주 시간이 1시간이 넘지 않는 곡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곡을 주로 외워서 지휘했다. 사람들은 검은색 터틀넥을 입은 채 눈을 감고 지휘하는 카라얀의 멋진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눈을 감고 지휘하려면 암보해야만 하는데 잘 기억해보면 그는 대부분 30~40분 정도의 고전 시대 교향곡들을 그렇게 지휘했다. 반면 오자와는 2시간에 육박하는 말러의 교향곡들을 외워서 지휘했다. 말러의 교향곡들은 고전 시대 교향곡들보다 더 복잡해서 외우기가 더 어렵다. 가장 놀라운 것이 올리비에 메시앙이라는 프랑스 현대 작곡가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çois d’ Assise)의 암보였다. 1983년 파리에서 초연된 이 현대 오페라는 연주 시간이 4시간이나 되며 그 연주를 담아 낸 CD가 무려 4장이었다! 오페라의 총보, 즉 전체 악보는 900쪽에 이른다.


▎악보를 외워 눈을 감고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 / 사진:1982년 연주 실황을 담은 유튜브 영상
암보하는 이유에 대해 오자와는 두 가지를 말했다(오에 겐자부로 외, 같은 책). 지휘자에게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연주자와의 아이콘택트(eye contact)인데 악보를 봐가며 지휘하면 이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다음으로, 악보를 보며 지휘하는 일은 악보를 넘기는 일을 요한다. 지휘자의 일반적 모습은 주로 왼손으로 악보를 넘기고 오른손으로 지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왼손이 자유롭지 못하다. 지휘자는 한 손으로만 지휘하는 이들과 양손으로 지휘하는 이들로 나뉘는데 오자와는 후자의 범주에 속하는 지휘자로서 양손을 자유롭게 쓰기 위해 악보를 넘기는 일을 관둔 셈이다. 양손을 다 쓰면 더 많은 정보를 발할 수 있다.

그런데 오자와의 암보는 이 두 가지를 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암보는 자신이 지휘하는 곡들을 완벽히 이해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암보는 “태정태세문단세…”와 같은 단순 요소들 혹은 무의미한 요소들을 기억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햄릿] 같은 연극이나 영화의 대사를 전부 외우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햄릿] 속 햄릿을 맡은 배우는 햄릿의 대사만 외운다. 물론 상대의 대사 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상대의 대사가 어떻게 끝나는지 알아야 자기 대사를 언제 시작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햄릿]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의 대사와 그 의미, 맥락 등을 다 외우는 연출가가 있을까? 그 모든 걸 다 잘 외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암기력? 그것은 기본이다. 이해력도 필요할 것 같다. 어떤 대사를 어떤 의미로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외우는 것보다는 아는 상태에서 외우는 것이 쉬울 것이다.

음악을 비롯한 예술 작품의 ‘완벽한 이해’가 어떤 심리 상태인지 관련 연구자들이 온전히 밝혀내진 못한 것 같다. 다만 오자와 같은 이들을 포함해 어떤 이들이 어떤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주관적으로 느낄 수는 있다. 그 느낌이 실체에 부합하지 않는 근거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 어느 정도 실체에 부합하는 느낌이라면, 그런 느낌은 자신감을 줄 것이다. 외국인 전문 연주자 수십 명을 앞에 두고 까다로운 외국인 청중 수백 명을 뒤에 둔, 언어의 장벽에 노출된 동양인 지휘자가 자신감이 없으면 안 된다. 오자와가 지휘했던 곡들을 자기 말대로 완벽히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자신감만큼은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자신감이나 사물과 대상을 움켜쥐었다는 그립(grip)감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음 단계를 위해서도.

다음 단계란 그 작품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이다. 오자와는 ‘해석상의 개성’을 강조했고, 그것이 없는 학생들에게 그걸 가지라고 당부했다. “요즘 어떤 아이를 가르치는데 … 그 아이는 연주는 제법 잘하지만 디렉션이 없더군요. 뭐랄까, 의욕적인 디렉션이 없어요. 누군가에게 연주를 들려줄 의지가 없는 거예요. 음악은 표현하는 거라는 근본적인 개념이 없는 데다가 자기만 만족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오에 겐자부로 외, 같은 책). 디렉션(direction)은 사업가나 운동선수에게서 볼 수 있는 승부 근성이나 정치인의 권력욕과 비슷해 보인다. 아이디어가 뛰어나고 기량이 탁월해도 골을 넣겠다는 의지가 없거나 사업을 꼭 성공시키겠다는 의지가 없는 이들, 매우 위대한 정치적 이념을 따르고 있어도 권력을 얻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없는 정치인들은 현실에서 성공하지 못한다.


▎올리비에 메시앙의 현대 오페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악보의 일부분. 매우 복잡해 보인다. 오자와 세이지는 이 복잡한 악보를 다 외워 지휘했다고 전해진다. / 사진:올리비에 메시앙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유튜브 영상 캡처
어쨌든 암보는 어렵고, 최고 수준의 지휘자 모두가 다 하지 않거나 못하는 일인데 오자와는 그걸 했다. 특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같은 현대음악의 암보는 경이로운 일이다. 현대음악은 고전음악이나 대중음악이 따르는 관습적 문법이나 스타일에서 벗어나 있어서 외우기가 무척 어렵다. 다음의 문장을 외우기가 쉬울까?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알베르 카뮈, 이방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현대소설 이방인보다도 더 실험적이다.

오자와가 암기력이 뛰어났을까? 어쩌면 그는 암기함으로써 여러 이점을 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점을 줄 수 있는 암기는 암기력이 있는 음악가들은 누구나 다할 수 있을까? 오자와는 자기가 왜 암기했는지보다는 살아오면서 어떻게 성공에 이르렀는지를 말했다. 헝그리(hungry) 의식을 갖고 살아왔고 성공했다. “저는 아주 절박한, 벼랑 끝에 내몰려 앞이 보이지 않는 헝그리 상태에 빠져서 지냈어요”(오에 겐자부로 외, 같은 책). 이런 상태에서 자신이 뭘 해야 성공할까를 절박하게 고민했을 것이고 그 와중에 암보하기로 했을 것이다.

절박함과 헝그리 정신은 성공하기 전의 심리일 것이다. 성공한 오자와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성공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이룬 이들의 성공 요인은 한둘이 아니며, 21세기에는 하면 된다는 의지 혹은 헝그리 의식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중요함을 잃지 않는 것이 그런 의지나 투지일 것이다. 오자와 세이지는 그런 정신상태로 아시아인이 오르기 어려운 위치에 올랐다.

※ 김진호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

202403호 (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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