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유적지를 걷다 보면, 무엇보다도 먼저 잘 구획되어 정돈되고 품위가 느껴지는 도시의 모습에 경외감을 갖게 된다. 건물들은 모두 폐허로 남아 있긴 하지만 풍요로웠던 도시의 옛 모습이 그대로 연상된다. 사실 폼페이는 로마제국에서 돈 많은 중산층이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혔을 뿐 아니라 가장 화려한 도시 중 하나로도 손꼽혔다.
▎대극장 유적. 여름에는 이곳에서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 사진: 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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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괴테는 폼페이 유적지를 둘러보고는 “세상에는 수많은 재앙이 있었지만 이토록 후세에 즐거움을 주는 재앙은 드물 것이다. 나는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을 본 적이 없다”라고 했다.이 재앙은 기원후 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서는 콜로세움이 거의 완성되어가던 중이었고, 폼페이에서는 사람들이 17년 전에 이 지역을 뒤흔들었던 대지진으로 무너진 공공건물들과 개인 주택들을 복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폼페이에 운명의 시간이 갑자기 찾아왔다. 폼페이의 수호신 같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버린 것이다. 그때 마침 강풍이 남동쪽으로 불어와 뜨거운 화산재와 화산석이 하늘로부터 폼페이 사람들 머리 위로 비 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이리하여 장구한 역사와 풍요한 삶을 자랑하던 폼페이는 불과 몇 시간만에 죽음의 도시로 변했고, 폼페이의 시간은 영원히 멈추어버렸다.
폼페이는 매몰된 후 완전히 잊혔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1700년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용암에 묻혀 굳어버린 에르콜라노 같은 해변 도시에 비해 폼페이를 덮은 화산재는 두께가 4m가 넘긴 했지만 다행히도 비교적 걷어내기가 쉬웠기 때문에 도시의 원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발굴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오늘날 폼페이에서는 고대 로마 도시의 모습뿐만 아니라, 풍요로웠던 당시 일상생활의 모습도 엿볼 수 있게 되었다.오늘날 폼페이 유적지를 걷다 보면, 잘 구획되어 있고 또 품위가 느껴지는 고대 도시의 모습에 경외심을 갖게 된다. 건물들은 모두 폐허로 남아 있긴 하지만 풍요로웠던 도시의 옛 모습이 그대로 연상된다.
세 개의 극장
▎오데온 입구. 관객석은 가파르다. / 사진: 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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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의 기원은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폴리를 비롯한 캄파니아 지방의 해변 도시들은 그리스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세웠지만 폼페이는 그리스 이주민이 아니라 이탈리아반도 토착 원주민 중 하나인 오스크족이 기원전 9~8세기경에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의 문화를 받아들여 크게 발전하던 폼페이는 로마공화정 시대인 기원전 80년에 로마에 흡수된 후 로마의 도시로서 발전을 거듭했다.
폼페이 중심인 포룸의 남쪽 비탈진 곳에는 대극장과 소극장 오데온으로 이루어진 ‘문화의 전당’이 자리잡고 있다. 놀라운 점은 폼페이가 로마에 흡수되기 오래전에 이미 대극장이 있었고, 로마에 흡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극장 오데온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곳은 폼페이 시민들이 모여 공연을 즐기고 지적인 담론을 하며 다양한 형태의 예술적 표현을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만남의 장소였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수도 로마에는 연극이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하여 이와 같은 상설 공연장은 아예 없었으니 당시 폼페이가 로마보다 문화적으로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부호의 저택. / 사진: 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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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전당’에서 대극장은 비탈진 지형을 이용한 그리스식의 반원형 극장으로, 폼페이가 로마에 귀속되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200년경에 처음 세워졌지만 폼페이가 로마화된 다음에는 반원통형인 로마식 극장으로 개축되었다. 여름에는 현재 이곳에서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대극장 남쪽 무대 너머에는 이오니아식 기둥의 주랑(柱廊)으로 둘러싸인 우아한 장방형의 중정(中庭)이 있어 막과 막 사이에 관중이 산책하고 담소를 나누던 휴게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75년경에는 대극장 바로 옆에 아담하고 우아한 소극장 오데온이 세워졌다. 오데온(Odeon, 또는 Odeion)은 ‘노래’, ‘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ode와 장소를 나타내는 접미사 -on으로 이루어진 말인데, 야외 공연장인 대극장과 달리 지붕이 있었으니 실내 극장인 셈이다. 하지만 넓은 공간을 지붕으로 덮는 데는 기술적인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오데온의 관중 수용 규모는 대극장에 비해 훨씬 작다. 또 관중석의 경사는 음향을 고려하여 대극장에 비해 상당히 가파르다. 즉, 오데온은 대극장과 달리 더 친밀하고, 더 조용하고, 더 통제된 환경이 필요한 공연을 위한 공간이었다.
▎오데온 객석 상부에서 북쪽을 바라본 풍경. 유적 너머 멀리 베수비오 화산이 보인다. / 사진: 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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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장 오데온이 세워질 무렵 시가지의 남동쪽 외곽 부근에 여태까지 그리스나 이탈리아반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아주 색다른 형태의 공연장이 세워졌다. 즉, 두 개의 반원형 극장이 마주 보고 붙어 있는 형태의 원형극장인 암피테아트룸(amphitheatrum)이 세워진 것이다. 암피(amphi-)는 ‘양쪽’, ‘둘’이란 뜻이다. 이 원형극장은 네로 황제가 재위하던 63년부터 네로 황제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68년 중반까지 5년에 걸쳐 개축되고 증축되었다.
이 세 극장에서 다루던 공연물은 서로 달랐다. 예를 들면, 대극장에서는 사회를 풍자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는 그리스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이 많이 상연된 반면에 소극장 오데온에서는 사회 엘리트들이 즐기던 시 낭송, 음악연주, 강연 등 행사가 많았으며, 원형극장에서는 피 튀기는 잔인한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검투사 시합과 맹수사냥 시합이 주종을 이루었다.
▎연극 무대를 그린 프레스코 벽화. 가운데에 배우가 쓰던 마스크가 그려져 있다. / 사진: 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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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로 보면 대극장은 5000명, 소극장 오데온은 1300명, 원형극장은 대략 2만 명 정도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매몰 당시 폼페이의 인구가 8000명, 노예까지 합쳐서 2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이 세 개 공연장은 폼페이 인구를 한꺼번에 모두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였던 셈이다. 또 이 정도 규모의 공연장이 세 개나 있었다는 것은 폼페이가 경제적·문화적으로 번영을 누리던 소도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폼페이는 어떻게 해서 번영하는 도시가 되었을까?
부유한 소도시
▎세련된 유리 제품. / 사진: 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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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먼저 이곳은 태고에 화산이 폭발하여 흘러나온 용암이 굳어져 이루어진 넓은 지대로, 외부에서 침입해도 방어하기에 매우 좋았을 뿐 아니라 화산 지대이기 때문에 땅도 매우 비옥했다. 따라서 애초부터 폼페이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곳의 토양은 포도와 올리브 재배에 적합해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은 이곳 주민들에게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폼페이에는 도자기, 유리 제품, 직물, 금속 세공품을 포함한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는 장인과 숙련된 노동력이 있었다. 이들은 지역 시장과 수출 시장에 품질이 좋은 상품을 공급함으로써 폼페이의 경제적 번영에 기여했을 것이다. 당시 폼페이는 나폴리만에 위치한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지중해 전역과 교역하면서 번창했다.이런 사실을 보여주듯 폼페이에는 정교한 프레스코화, 모자이크, 정원 등으로 꾸며진 고급스러운 저택을 소유한 부자가 적지 않았다. 사실 폼페이는 당시 로마제국에서 돈 많은 중산층이 가장 많은 도시 중의 하나로 손꼽혔을 뿐 아니라 가장 화려한 도시 중 하나로도 손꼽혔다. 이곳에서 발굴된 엄청난 양의 유물 대부분은 현재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만약 괴테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눈여겨봤더라면 얼마나 더 감탄했을지 궁금해진다.2024년 한국-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맞아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이 소장한 폼페이 유물 일부가 현재 서울에서 전시 중이다.
※ 정태남 -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분야 외에도 미술, 음악, 역사, 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로마를 중심으로 30년 이상 유럽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에 여러 권이 있다.(culturebo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