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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선주 센터장의 메타버스 로드맵 짚어보기 | SXSW 2024 

세계 최대 신기술융합콘텐트 축제를 가다 

1987년에 시작된 세계 최대 규모의 콘텐트 축제인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outh by Southwest, 이하 SXSW)는 100개국 이상, 30만 명 넘는 참가자가 모여 음악, 영화, 코미디, 교육 등 다양한 전시회와 패널, 페스티벌 행사들이 10일에 걸쳐 열리며 3억 달러 이상의 경제효과를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3월 8~16일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개최된 세계 최대 규모의 콘텐트 축제 SXSW 2024에서 한 참석자가 새처럼 나는 가상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 사진: 안선주
올해는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3월 8일부터 16일까지 열렸다. 올해 패널 세션의 메인 테마를 메타에서 후원한 만큼 확장현실(eXtended Reality: XR)이 화두였다. 엑스포, 패널, 시연회 등 어디를 가도 XR이 빠지는 경우가 없을 만큼 메타버스 전반에 관심이 뜨거웠다.

역지사지에서 동반자적 접근으로

기존의 메타버스에 대한 논의는 디지털트윈, 헤드셋 개발 등 기술, 공학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SXSW 2024는 콘텐트 축제답게 XR 기술을 이용한 스토리텔링이 핵심이다. XR 스토리텔링이라면 지난 20년간 지겹게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엑스포를 둘러보면서 3차원 스토리텔링 기법이 또다시 진화했다는 걸 깨달았다. 스토리텔링은 결국 내 경험을 타인과 나눌 때 그 사람이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최대한 실감할 수 있게 이야기로 전달하여 내 생각과 느낌들을 공유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관계맺음 기술이다. 내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전하는 것은 결국 나를 좀 더 이해해달라는 요청이며, 또 나를 좀 더 이해함으로써 나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되기를 원하는 소망이기도 하다.

3차원 실감형 미디어가 스토리텔링 도구로 활용됐던 초창기에 많은 학자를 비롯해 콘텐트 제작자들이 XR에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유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의 눈과 귀로 세상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영화에서도 1인칭 시점 기법을 종종 사용해왔지만, XR이 유저에게 전달하는 몰입감은 차원이 달랐다. 초기에 제작된 스토리텔링은 대부분 1인칭 시점에서 정신분열, ADHD, 자폐 등 정신적인 병력 혹은 가정폭력이나 전쟁 등 사회적 이슈들을 겪을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이와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면서 1인칭 시점에만 집중하는 스토리텔링의 한계를 지적하는 학자와 감독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무리 몰입형 미디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내가 온전히 타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0~15분의 매개 경험을 토대로 한 사람이 살아나가는 인생의 굴곡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XR은 오히려 높은 몰입감으로 그런 착각을 더 불러일으켜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 SXSW에 출품된 대부분의 작품은 XR 스토리텔링의 진화를 반영하듯, 1인칭 시점으로 화자의 삶을 겪는 것에서 벗어나 화자와 전혀 다른 캐릭터로서 능동적으로 스토리에 개입되어 있는 상태, 혹은 화자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 인생의 굴곡을 따라 같이 걷는 형태의 스토리텔링이 많았다. 다만, 인터랙션이 용이한 매체인 만큼,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기보다 화자가 해주는 이야기의 조각들을 실제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3차원 개체로 만들어나가는 기법이 주목할 만했다.

XR 엑스포 오픈런

세계 각국의 참가자들이 들고 온 XR 콘텐트 시연회인 XR 엑스포에 대한 열기는 실로 대단했다. 엑스포 첫날 둘러보다 관심이 가는 몇몇 부스에 문의했더니, 시연을 하려면 반드시 사전 예약이 필요한데 당일 예약은 전부 마감되어 다음 날 오전 11시부터 다시 예약을 받는다고 했다. 이튿날 오전 10시 45분쯤 도착했더니 이미 예약하려는 참가자들의 줄이 복도를 한 바퀴 감고 있었다. 11시에 행사 진행 요원이 “자, 오늘의 엑스포가 시작됩니다!”라며 문을 열자 백화점 명품 매장 오픈런을 방불케 하는 예약 경쟁이 시작됐고, 정신없이 엑스포장에 들어선 지 15분도 지나지 않아 점찍어두었던 부스들은 이미 예약이 마감됐다.

조금 더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 같아, 셋째 날에는 같이 가기로 한 토론토대학 교수 친구와 부스를 분담하기로 했다. 더욱 일찍 오전 10시 30분쯤 의기양양하게 엑스포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줄은 복도를 한 바퀴 감고 에스컬레이터까지 내려가 있었다. 11시가 되자 어김없이 진행 요원의 우렁찬 방송과 함께 문이 열렸다. 나름대로 친구와 함께 세웠던 전략 덕분인지 보고 싶었던 부스 2개에 예약을 잡는 건 성공했지만 희망 1순위였던 부스는 결국 실패했다. 허망한 마음을 안고 친구와 함께, “아니 30분이나 일찍 왔는데 웬 줄이 이렇게 길어!” 투덜대고 있는데 마침 옆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일행이 역시나 허망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엿듣고 인사를 드렸다. 성남문화재단, XR 콘텐트를 제작하는 한국 회사에서 오신 분들이라고 한다. 듣자 하니 그분들은 무려 아침 9시도 되기 전부터 기다렸는데도 예약 잡는 데 실패하셨다고 했다. 세계적인 행사에서 예약을 잡기 위해 30분 일찍 도착하는 것은 너무 안이한 대처였음을 깨달았다. 스스로의 게으름을 반성하고 다른 참석자들의 부지런함에 경의를 표하며 그나마 (운 좋게) 예약에 성공한 XR 경험을 하러 갔다.

상상 속 친구

여러 부스를 둘러보니, 지난번 칼럼에서 다뤘던 대로 유럽 XR 콘텐트 제작사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그중 네덜란드의 스튜디오 비아리츠(Studio Biarritz)는 8살 소년 다니엘의 이야기를 [상상 속 친구(The Imaginary Friend)]라는 30분 분량의 XR 스토리로 전한다. 부스에 들어가 날개가 달린 의자에 앉아 VR 헤드셋과 이어폰을 장착하면 이야기가 시작되고, 다니엘이 엄마가 돌아가신 직후 계속 시달리는 악몽과 그 악몽에 등장하는 괴물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다니엘은 괴물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상상 속 친구(유저)를 만들어낸다.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다니엘은 유저를 보고 ‘너 같은 친구가 생겨서 정말 든든해’라며 같이 싸워주길 청하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일단 다니엘을 해치려는 악몽 속 괴물들에게 칼을 휘두른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다니엘이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학교에 있는 실제 친구들은 그런 아픔을 안고 사는 다니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따돌린다. 다니엘은 항상 겁에 질려 있거나 화가 나 있는 상태지만, 상상 속 친구인 나와 있을 때만 속내를 드러내며 자기가 개발한 ‘생각을 조종하는 리모컨’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준다.

이야기가 정점으로 향해가면서 다니엘은 점점 현실을 놓고 싶어 한다. 현실을 외면하는 아들의 모습이 걱정돼 다니엘 아빠는 다니엘을 정신병원에 데려가려고 하는데 바로 이때, 다니엘은 상상 속에서 엄마를 만난다. 엄마는 다니엘에게 “아가, 슬퍼해도 괜찮아. 슬프면 잠시 상상력에 기대도 돼. 모든 건 네 마음먹기에 달려 있단다”라며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준다. 엄마의 위로를 듣고 비로소 다니엘은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들과 현실을 분리하는 법을 배우며 성장한다.

XR 스토리텔링에서는 보기 드물게 다니엘과 유저가 직접 대화하도록 유도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유저는 분명 상상 속 친구지만 다니엘에게는 진짜 친구처럼 느껴지는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유저가 육성으로 대화에 동참해야만 프로그램이 진행되게 디자인했다. 가령, 다니엘이 뭔가를 보여주며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어보면 유저가 반드시 육성으로 대답해야 이야기가 진행되는 형식이다. 이야기가 정점에 다다를 때는 유저와 다니엘이 함께 “난 두렵지 않아!”를 크게 외치도록 하는데, 이 부스에서 헤드셋을 끼고 ‘상상 속 친구’를 경험하고 있는 유저 여러 명이 “난 두렵지 않아!”를 크게 외치는 것을 목격하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었다.

청자와 화자 사이, 불분명해지는 제4의 벽

기존 미디어 콘텐트에서는 청자와 화자 사이의 경계선이 분명한 편이고, 등장인물들은 마치 카메라 뷰파인더가 만들어낸 버블 안 세상에서 사는 듯, 밖에 분명히 존재하는 카메라 감독이나 집에서 보고 있을 시청자들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척 연기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18세기 철학자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가 제안한 ‘제4의 벽’(the fourth wall - 연극 무대에서 연기자들이 관객이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연기하며 관객을 인식하지 않는 것)과 같은 선상의 개념인데,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 벽이 깨지고 있다. 리얼리티 쇼에서 예능인들은 자연스럽게 카메라 감독이나 PD들과 소소한 담소를 나누고,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에서는 대놓고 시청자를 인식하며 대화하듯 영상을 찍는다. SXSW 2024에서 선보인 XR 스토리텔링은 연기자와 관객이 단순히 서로를 인식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객의 반응에 따라 스토리의 흐름이나 속도가 바뀌는 작품들이 주를 이뤘다.

특히 전방위 볼류메트릭(volumetric, 카메라 수십 대가 실제 인물 움직임을 3D데이터로 캡처해 CG화)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기존의 만화나 픽셀로 이루어진 아바타나 배경이 아니라 실제 사람과 그 사람이 있는 환경에서 상호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문득, XR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알파세대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우리가 지금 감동받으며 보는 영화를 두고 ‘어떻게 저렇게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했지?’라는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 안선주 - 조지아대 첨단 컴퓨터-인간 생태계 센터(Center for Advanced Computer-Human ecosystems) 센터장이며 광고홍보학과 교수다. 가상현실, 증강현실 등 뉴미디어와 이용자 행동 변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특히 의료, 소비자심리학, 교육과 연계한 가상현실 응용프로그램을 개발해 대화형 디지털 미디어에 의사소통 및 사회적 상호작용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집중 연구하고 있다. 2022년 초 TED talks에서 ‘일상생활에 가상현실 통합’이란 주제로 발표한 바 있다.

202404호 (20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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