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역사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도전과 혁신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글렌리벳의 고향 스코틀랜드로 24번째 위스키 여행을 떠났다.
![](/_data2/photo/2025/01/thumb_2041357502_lqGLTXK7_1.jpg)
▎프랑스계 회사의 건물 디자인에 감탄하게 되는 증류소 외관. |
|
‘Live Original’을 그대로 해석하면 ‘원래대로 살아가다’란 뜻이지만 이를 ‘끊임없이 나아가다’라고 해석하는 위스키 브랜드가 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통념을 깨는 새로운 기준을 세우고 계속 전진한다는 뜻이다. 바로 2024년에 200주년을 맞이한 유서 깊은 ‘더 글렌리벳(The Glenlivet)’ 증류소이다. 200년 역사가 거저 주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지금은 사라졌지만, 불과 6~7년 전까지만 해도 글렌리벳 위스키의 포장은 독특했다. 점잖은 브라운색 종이상자 안에 바스락거리는 베이지색 모조지에 감싸인 보물을 만나면 모두가 탄성을 내뱉었고, 그날 모임은 무조건 성공을 보장한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깨끗한 맛의 스펙트럼까지 갖추었으니 금상첨화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데, 그토록 정성 들여 싼 종이 포장을 보면 누구라도 한잔하고 싶다는 유혹이 생길 것이다. 비용 절감 탓인지 지금은 그렇게 정성껏 종이로 감싸 상자에 담은 위스키를 더는 볼 수 없다. 아, 옛날이여!글렌리벳은 기본적으로 버번 캐스크 숙성이라 요즘 인기 있는 다른 위스키처럼 짙고 풍미가 강한 셰리 캐스크로 향을 입히지 않는다. 이 방식은 일장일단이 있지만, 증류소가 지닌 고유한 위스키의 풍미를 셰리향으로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투명한 버번 캐스크의 크리스피한 질감과 바스락거리는 포장지의 감촉, 이 두 가지가 바로 내가 글렌리벳을 좋아하게 된 큰 이유였다. 내가 위스키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창조의 순수함과 외양의 격식을 모두 갖춘 것이니 딱 이 글렌리벳이다. 최근에는 글렌리벳에서도 버번 캐스크와 셰리 캐스크 숙성 원액을 섞어 맛을 더한다고는 하나, 나는 본디의 순수한 버번 캐스크를 더욱 사랑한다.
세계 최초의 공인 증류소가 된 글렌리벳![](/_data2/photo/2025/01/thumb_2041357502_jVwq2ly3_2.jpg)
▎버번 캐스크 숙성 특유의 크리미한 질감과 깔끔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싱글 몰트위스키 더 글렌리벳 |
|
글렌리벳은 원래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 인근에 있는 리벳강(river livet)을 뜻하는 지명으로 사용된 말이다. 리버 리벳은 글렌리벳 증류소를 감싸 흐른 후 리버아본에 합쳐지고 또다시 크라간모어 증류소에서 리버 스페이에 합류한다. 그래서 이 지역 전체는 스페이사이드로 불리운다.이곳도 다른 스코틀랜드 증류소와 마찬가지로 소규모 가내수공업식 밀주업자였으나, 대폭적인 주세인하를 계기로 최초의 공인 증류소가 되었다. 술과 세금이라는 질곡의 역사 때문에 글렌리벳의 최초 공인 면허 취득은 업계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되었고, 다른 증류소들은 글렌리벳 사장인 조지 스미스(참 흔한 이름이다)를 규탄하며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조지 스미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작은 데린저 권총을 늘 차고 다녔다. 데린저는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 총열과 약실이 일체형인 옛날 권총이다. 쉽게 말하자면 총알이 나가는 총열 바로 뒤에 뇌관을 때릴 공이가 붙어 있어, 따로 급탄 시스템이 없는 일자형 구조이다. 구조가 단순해 크기는 작지만, 총알 크기만 키운다면 위력도 강해지니 나름대로 당시의 혁신성과 필요성이 결합된 것이다. 어차피 가까운 데서 쏘니 명중률도 큰 상관이 없고, 한두 발만 장전해서 유사시에 쓰려는 목적이라 호신용으로 인기 있는 총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이유로 호신의 반대인 암살 목적으로도 꽤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링컨의 암살에도 이 데린저 권총이 사용되었고, 최근 아베 전 일본 총리의 암살에도 강력한 성능을 가진 데린저 사제 권총이 사용되었다.이렇게 모든 사물에는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이면이 존재하고,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거나 회피하여 우리의 유한한 인생을 좀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다면 사물의 이면을 살펴보는 것도 그리 손해 보는 일은 아닐 듯하다. 우연한 시도가 완전히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비아그라가 그렇고 아드벡의 세렌디피티위스키도 그러하다. 어찌되었건 조지 스미스가 계속해서 돈을 잘 버는 게 배가 아팠는지, 그 이후로는 다른 증류소들도 속속 면허 취득 대열에 합류했고 이로써 스카치위스키는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됐다.
![](/_data2/photo/2025/01/thumb_2041357502_CMk4IT7u_3.jpg)
▎위스키 애호가들에게 ‘싱글 몰트위스키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스페이사이드의 풍경. |
|
글렌리벳에 정관사 ‘The’가 붙은 사연도 재미있다. 1호 위스키 제조업자로서 글렌리벳이 잘나가니 다른 증류소들이 이 글렌리벳을 지명으로 차용하여, 자신들의 위스키 이름 앞에 ‘글렌리벳 아무개 위스키’라는 식으로 이름을 붙여 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따지자면 글렌리벳이 그 지역의 지명이 맞긴 하니 별달리 할 말이 없긴 하다. 하지만 목숨 걸고 등록한 글렌리벳의 이름이 이렇게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글렌리벳은 모두에게 소송을 제기함과 동시에 그 이름 앞에 유일하다는 의미로 ‘The’를 붙였다.그런데 꼭 글렌리벳이 아니더라도 스코틀랜드의 다른 유서 깊은 위스키 증류소들이라면 자신들도 그 이름 앞에 ‘The’를 붙일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살펴보니 최근에 ‘The’를 붙이기 시작한 곳이 몇 개 있다. 그중에서는 ‘더 글렌그란트(The Glen Grant)’ 정도가 충분한 역사와 명성을 지녀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어에 조예가 깊지 않지만, 이는 언어 자체보다도 스코틀랜드식 정통성에 대한 존중의 의미라고 생각된다. 일본에는 ‘더 닛카(The Nikka)’라는 위스키가 있긴 하지만 어차피 스카치위스키의 본진이 아니기에 열외로 치기로 한다.
거대한 외관에 압도되다![](/_data2/photo/2025/01/thumb_2041357502_aUKrIl43_4.jpg)
▎증류된 위스키 원액을 넣어 숙성하는 오크통으로 가득한 숙성실. |
|
런던에서부터 비행기와 기차, 버스와 택시까지 영국의 모든 교통수단을 동원하여 도착한 글렌리벳은 역시 예상처럼 거대하고 멋있는 증류소였다. 글렌리벳은 지금은 프랑스의 다국적 주류 기업인 페르노리카 소속인데, 프랑스계 회사들의 건물 디자인이나 인테리어는 참 대단한 것 같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프랑스인은 영국 위스키를 전 세계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그동안 전 세계 위스키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블렌디드 위스키의 소비량은 프랑스가 압도적인 1위이고 전체 위스키 소비량 또한 항상 프랑스가 1위를 차지한다. 물론 최근에는 인도 위스키의 막대한 물량 공세로 프랑스의 순위가 밀렸지만 여전히 인구 대비 압도적으로 스카치를 사랑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반대로 영국의 와인 소비량도 늘 전 세계 Top 5에 든다. 마치 한류와 일류를 보는 듯 서로를 지극히 좋아하지만, 또 싫어하는 복잡미묘한 관계를 보인다. 많은 스카치위스키나 아이리시위스키의 소유주가 프랑스 회사인 것도 그들의 위스키 사랑을 보여준다. 럭셔리 기업인 LVMH가 소유한 아드벡 증류소에서도 몰트 창고를 카페테리아로 근사하게 리노베이션하여 증류소의 품격을 확 높였는데, 역시 디자인은 프랑스였다.이곳에 도착하면 전면에 거대한 글렌리벳 사인이 있는 벽 앞에서 인증 숏 하나 남겨주는 절차는 밟아야 한다. 신성한 인증 숏 의식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니 글렌리벳 병으로 만든, 엄청나게 큰 나선형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 나선을 따라 글렌리벳이 가야 할 길이 영원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크고 멋지긴 했지만 사실 이건 좀 감흥이 없었는데, 그만큼 의미를 부여하는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_data2/photo/2025/01/thumb_2041357502_mu4Wap1Y_5.jpg)
▎몸통이 넓고 목이 긴 증류기를 사용해 깨끗하고 가벼운 위스키 원액을 생산한다. |
|
모든 기업과 조직은 그런 스토리텔링을 비전과 미션에 담아 내부 구성원과 외부 이해관계자의 공감을 얻어내야 성공할 수 있다. 내 첫 직장이었던 IBM은 기계와 인간의 차이를 ‘Think!’라고 생각하고 이를 모토로 삼았다. 이런 IBM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나온 게 바로 애플이었고 그들의 슬로건은 ‘Think Different!’였으니 과히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기업다운 슬로건이다. 더구나 이 슬로건은 스티브 잡스가 자기 회사에서 쫓겨난 이후 절치부심하며 복귀했을 때 내세운 것이니 그 진정성은 더욱 컸다. 사실 문법적으로 이는 부족한 말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다른 것을 생각하라’인데 ‘다르게 생각하라’는 의도였다. 이러려면 ‘Think Differently’처럼 동사 다음엔 부사가 와야 맞는데 동사 다음에 형용사를 썼다. 그러나 이를 ‘다른 것을 생각하라’고 해석한다면 갑자기 슬로건의 품격이 확 떨어진다. 우리나라의 슬로건을 하나 비교해본다면 바로 웅진그룹의 ‘Think Big’이다. 늘 새로운 꿈과 열정이 넘치는 창업주의 의지가 반영되어, 큰 것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크게 생각하라’는 뜻이다. Big은 부사이자 형용사이니, 영어가 모국어인 잡스보다 한국의 웅진이 더 문법적으로 맞는 슬로건을 만든 셈이다.
전통과 혁신의 상호작용![](/_data2/photo/2025/01/thumb_2041357502_Fb3GzmdZ_6.jpg)
▎증류소 입구로 들어서면 글렌리벳 병으로 만든 커다란 나선형의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
|
‘Live Original’을 모토로 하는 글렌리벳의 독창성은 몇 년 전 열린 런던 칵테일 위크에서 빛을 발했다. 위스키를 마시는데 잔이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해결책은 바로 위스키 캡슐이다. 해조류로 만든 캡슐 안에 위스키 칵테일을 넣어 마치 젤리를 먹듯 위스키를 즐기게 한 것이다. 위스키를 유리잔이 아닌 해조류로 감싸 지속가능성이라는 화두까지 제시한 셈이다. 당시 수많은 논란을 낳았지만, 현재의 위스키를 재정의하고 시장에 새로운 화두를 던진 것은 분명히 업계 리더로서 해야 할 소임이다. 전통적인 위스키를 선호하는 보수층의 반발도 컸다. 하지만 글렌리벳은 그들의 DNA대로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방식으로 위스키를 정의하고 창의적으로 즐기는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물론 이것이 정답은 아닐 것이고, 완벽한 것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 자체를 즐기게 된다면 인생이 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남들이 인정하는 주어진 정답 속에서만 사는 인생이 과연 행복할까?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그들의 시도는 분명히 대단했다. 또 전통과 혁신은 결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그 전통과 혁신의 상호작용이 멋진 결과를 이루어낸다면 우리의 미래는 얼마나 다채롭고 흥미로울 수 있을까? Live Original, 글렌리벳!
※ 박병진 - 30여 년간 IBM, SAP, SK 등 국내 및 외국계 기업,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망라하여 임원 및 CEO로서 대한민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에 기여해왔다. 포브스와 동아일보에 ‘박병진의 위스키 기행’, ‘박병진의 광화문살롱’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동아일보사의 최고위과정인 ‘광화문 살롱’의 주임교수를 맡고 있다. 현재 요리, 여행 사람들의 이야기를 펴내는 출판사 ‘북스 레브쿠헨’ 대표와 어린이 창의력 플랫폼인 ‘테일트리 코리아’의 대표이사로서 유쾌한 N잡러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