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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에 불길한 마그마가 끓는다!  

티베트 봉기 50주년, 天安門 사태 20주년… 인터넷 통해 개인정보 폭로하는 ‘인육수색’ 활개…‘2008 헌장’ 등 反체제파 움직임 가시화
일본 Report 2009 중국 위기의 근원 

글■후지타 히로키(藤田洋毅) 저널리스트 번역■이용락
지난해 베이징올림픽을 치른 중국. 올해도 그 못지않은 중요한 해를 맞았다. 2009년은 중국 건국 60주년, 티베트 봉기 50주년, 톈안먼 사태 20주년의 해다. 벌써 불길한 조짐이 일고 있다는데…. 본사 특약 일본 <포어사이트>가 그 위기의 진원을 추적했다.

1989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시위대가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광장을 점거했다. 하지만 한 달 후 중국정부는 계엄을 선포하고 탱크 등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 알카에다는 최고간부회의를 열어 중국에 대한 테러 공격을 결정했다. 베이징(北京)에 잠입한 첫 번째 테러리스트는 렌터카를 이용해 공항에서 시내로 향했다.

그런데 제2 환상로에서 시 중심부로 이동하는 고가 로터리는 협소할 뿐 아니라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코스를 변경하려 해도 질주하며 측면에서 끼어드는 자동차가 무서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로터리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다 끝내 고가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두 번째 테러리스트는 버스로 자폭 테러를 계획했다. 하지만 앞다퉈 쇄도하는 승객의 물결에 밀려 버스에 승차조차 할 수 없었다.

세 번째 테러리스트는 슈퍼마켓에 폭탄을 장착했지만, 도주하는 도중 점 내에서 리모컨 기폭장치를 소매치기당하고 말았다. 베이징에서는 임무 달성이 어렵다고 판단한 알카에다 지도부는 지방으로 눈을 돌렸다.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시에 잠입한 네 번째 테러리스트는 폭탄을 들고 보행로를 서둘러 걷고 있었다.

그러나 2인조 오토바이 날치기 강도를 만나 폭탄을 도난당했다. 산시(陜西)성으로 향한 다섯 번째 테러리스트는 마침내 탄광을 무대로 한 대규모 폭탄 테러에 성공했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이 사건을 은폐했다. 따라서 아무도 모르게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 알카에다 본부는 ‘테러리스트가 거짓 보고를 했다’고 판단하고 실패로 결론지었다.

남성 테러리스트들의 거듭된 실패에 마침내 알 카에다는 중국어가 능숙한 미녀 테러리스트를 허난(河南)성에 투입했다. 열차 편으로 허난성 수도인 정저우(鄭州)) 역에 내린 미녀 테러리스트는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친절해 보이는 친구’를 알게 됐다. 임무 착수 직후 “현지 협력자를 확보했다”는 그의 첫 보고는 알카에다 간부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후 소식불통. ‘친절해 보이던 친구’는 인신매매업자였고, 미녀 테러리스트는 결혼할 여자가 부족한 농촌으로 팔려간 것이었다. 알카에다 최고간부회의는 결정했다.

“향후 중국으로의 침투·공격은 금지한다.”

서두가 길어졌지만, 2년쯤 전부터 중국에서 들을 수 있는 우스갯소리다. 오리지널은 더 길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는 명백하다. 엉터리 같은 수도(首都)의 도시설계, 공공 교통기관의 혼란, 그리고 큰 산탄지(産炭地)인 산시성에서 계속되는 탄광사고와 은폐, ‘사기꾼의 고향’이라고 불리며 유괴·인신매매업자가 득실득실한 허난성 등, 중국 각지의 특징적 현실을 열거해 “13억 명의 인민은 최강의 테러 조직 알카에다조차 꼬리를 내리고 도망갈 정도의 나라에 살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인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국가체제조차 유지하지 못한다”고 통렬히 비웃는 것이다.


지난 1월20일 중국 허난성 정저우 기차역 인근의 밍궁루 인력시장에서 일감이 없어 무료해진 농민공들이 마오쩌둥 사진을 펼쳐 놓고 한담하고 있다.

2008년 중국 내 각종 사고 잇따라…

거액의 투자를 쏟아부어 비원(悲願)의 베이징올림픽을 그럭저럭 달성해낸 2008년은 동시에 새로운 위기의 윤곽도 떠오르게 했다. 3월의 티베트 사태, 7,000여 개나 되는 학교 건물이 붕괴해 학생 2만여 명이 사망한 5월의 쓰촨(四川) 대지진과 지탄받은 날림공사. 또한 폭동·소란이 각지에서 빈발했고, 대규모 식품사고 및 생산현장의 사고도 잇따랐다.

이들 사건은 대부분 해결되지 않은 채 해를 넘겼다. 모든 불상사·사고의 근저에 숨어 있는 부패·무능·무책임한 간부에 대한 비난은 이전에 비해 더 증가되고 고조됐다. 후진타오(胡錦濤) 지도부가 호소하는 ‘집정(執政) 능력 건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1년이었다. 마침내 그 분노와 비난이 인터넷상에서 마그마처럼 분출되고 있다.

‘천가연(天캛烟·하늘을 찌를 듯 가격이 높은 담배).’

지난해 연말, 인터넷 상에서 새 유행어가 탄생했다.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시 장닝(江寧)구 정부의 저우주겅(周久耕) 부동산국장이 어느 의회에서 발언하는 영상이 비난의 대상으로 거론됐다. 보고서를 보며 발언하는 저우 국장의 오른손에서는 담배연기가 피어 오르고, 왼손에는 담뱃갑을 쥐고 있었다.

인터넷 상의 지적에 따르면 이 담배는 ‘95 지존(至尊)’이라는 것으로, 소비자가격이 자그마치 한 보루에 1,500∼1,800위안(약 30만~36만 원)이다. 게다가 그의 왼쪽 손목에서 빛나던 손목시계는 스위스제 최고급 ‘바셰론 콘스탄틴’으로 약 10만 위안(약 2,000만 원). 인터넷 여론에 밀려 매스컴이 움직인 결과 저우 국장은 관사 외에 호화 맨션을 보유하고 있었고, 미국제 고급 승용차 ‘캐딜락’으로 통근한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같은 성 내 유력 도시 한 국장의 말에 따르면 “당 경력이나 근속연수에 따라 달라지지만, 저우 국장 수준이라면 월급은 많아 봤자 5,000∼6,000위안(약 100만~120만 원) 정도일 것”이라고 한다. 단 1갑의 담배가 한 중견간부에 대한 ‘합리적 의혹’을 급부상시킨 셈이었다. 2년 전, 중국 최고인민검찰원(대검찰청에 해당)은 매스컴이 전하는 이런 ‘합리적 의혹’을 각지 검찰기관이 “확실히 파악해 조사에 주력해야 한다”고 통달한 바 있다.

장닝구 규율검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은 저우 국장은 결국 지난해 연말 국장에서 해임됐다. 이와 관련한 보도 중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의 현역 시절 사례를 실은 것이었다. 한 부하의 손목시계를 본 주 전 총리가 “당신 수입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한마디 던지자, 즉시 검찰이 해당 부하와 업자와의 유착관계 및 뇌물수수를 파헤쳐 해임한 내용이었다.

2008년 11월 말 현재 2억9,000만 명에 이르는 중국 누리꾼(네티즌)이 ‘철면무사(鐵面無私)’로 불리며 부패 간부들이 무서워했던 주 전 총리와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셈이다. 요즘 중국에서는 뉴스나 화제가 된 인물의 개인정보를 철저하게 폭로하는 ‘인육수색(人肉搜索·인터넷에서 신원을 밝혀내는 일)’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러한 인육수색은 출신지·경력·주소·가족구성은 물론 신분증명서나 휴대전화 번호, 승용차 번호, 심지어 결혼 전 친가 주소까지 인터넷에 올려 대상자를 사회적으로 말살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매우 외설적이고 매우 폭력적’이라고 평가돼온 중국 인터넷의 특성이 현실사회에 투영되기 시작한 것 같다.

이에 대해 한 당 중견간부는 “흉폭한 인터넷사회가 급속히, 그리고 기형적으로 거대화하고 있다”면서 “우리 당은 인내를 갖고 인터넷 여론의 주류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인육수색의 희생양으로 부상한 대표적 사례가 앞서 말한 저우 국장 외에 세 건이 더 있다.

첫째는 미국 듀크대 여성 유학생 왕첸위안(王千源). 그는 지난해 4월 티베트 사태와 성화 릴레이를 둘러싸고 학내에서 충돌하던 중국인 유학생과 현지 학생의 양쪽 집단 사이에 서서 “쌍방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냉정하게 대화하자”고 제안했다. 이를 두고 중국 인터넷 여론은 “티베트 독립운동에 조력했다”며 그를 ‘민족 반역자’로 단정지었다.


2008년 3월 중국 무장경찰이 독립 시위가 일어난 티베트 수도 라싸의 주요 도로를 점거하고 있다.

중국 누리꾼은 그의 모든 개인정보를 폭로했다. 뿐만 아니었다. 산둥(山東)성에 있는 그의 친가까지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의 집은 욕지거리 등 온갖 낙서와 배설물 더미에 묻혔고, 양친은 도피해야 했다. 두장옌(都江堰)시의 고등학교 교사 판메이중(範美忠)은 쓰촨 대지진 때 학생들을 두고 가장 먼저 운동장으로 도망쳤다.

비난을 받은 판 선생이 자신의 블로그에 “생사의 기로에 있는 순간 나는 내 딸만을 위해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설령 내 어머니를 위해서도 생명을 희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써 논란이 일었다. 결국 그는 ‘달아난 판’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채 교사 직에서 쫓겨났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연말 베이징의 학교에 취직이 결정됐다고 알려지자 또 다시 공격받아 취직이 무기한 연기되는 등 궁지에 몰렸다.

마지막은 선전(深?)시 시정부 해사국 부국장이었던 린자샹(林嘉祥). 그의 사례는 저우주겅 국장과 같이 중국의 ‘현재’를 상징하는 인육수색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선전 시내의 한 해물 레스토랑에서 친구와 식사하던 린 부국장은 곁을 지나가려는 11살의 소녀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는다.

친절한 소녀는 린 부국장을 안내했지만, 수십 초 후 울면서 도망쳐 나왔다. 조금 후 화장실에서 나온 린 부국장에게 항의하는 소녀의 양친.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큰 소리로 양친에게 악담하는 린 부국장.

“(외설행위를) 분명히 했다.”

“그게 어떻다는 거야! 너희들 내가 누구인지 알아? 국무원 교통부에서 파견된 너희 시장과 동격의 고관이야. 돈을 원하면 주겠다. 불만이 있으면 혼내 주고 말 테야!”

이런 옥신각신을 레스토랑 안의 비디오카메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포착하고 있었다. 지방 파출소에서 달려온 관계자들은 “증거가 없고, 소녀의 증언도 모호하다”고 발뺌했으나 결국 인터넷에 이 영상이 유출됐다. 아직 최종 처분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린 부국장에게는 정직처분이 내려졌다. 저우주겅·린자샹 모두 인터넷에 의해 격추된 모양새다. 때문에 ‘인육수색’과 ‘반(反)부패’를 아우른 ‘인육반부’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후진타오 지도부도 매스컴 적극 활용

이와 관련해 당 중견간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005년의 반일(反日) 시위를 경험하고 우리는 인터넷 여론의 영향력을 통감했다. 아무리 삭제해도 간부의 추문은 이제 숨길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2008년은 당·정부가 거센 인터넷 여론에 대해 ‘주도권 확보’를 시작한 해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 열쇠는 종이 매체를 중심으로 한 신속성이 뒤떨어지는 구태의연한 선전 전략의 전환이다. 중견간부와 마찬가지로 당 중앙선전부의 한 고위간부도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전격전의 시대가 왔다. 인터넷에는 최저·최악의 정보가 넘치는 동시에 많지는 않지만 <런민일보(人民日報)>의 평론원(논설위원)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이성적이고 수준 높은 글도 떠돌아 다닌다. 그 어느 쪽이든 우리 당은 우리의 관리 아래 두고자 한다. 특히 후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지난해 3월의 티베트 사태를 둘러싼 구미(歐美)와의 선전전에서 중국은 줄곧 “올림픽과 관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다 바로 다음 달, 프랑스 파리에서 휠체어 성화 운송자였던 진징(金晶)이 방해자로부터 성화를 지킨 모습이 전해졌다. 당 간부들이 말했듯 중국은 곧바로 전면공세로 돌아섰다.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방영하며 ‘인권의 조국’ 프랑스를 비난했고, 진징을 ‘휠체어를 탄 미소천사’라고 칭송했다. 애국심과 ‘천사를 향한 동정’을 부채질해 ‘13억 명 인민의 일치된 여론’을 만들어냈다. 한 당 고위간부에 따르면 대외적으로 프랑스를 집중공격해 티베트 문제와 올림픽을 분리하는 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고 한다.

그는 “아직 (중국) 국내용이라는 한계와 미숙함을 보였지만, 후진타오 지도부는 이번 전격 선전전을 통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뒀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평하면서 “앞으로 중국 언론의 해외 진출을 당이 전면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발행 부수 200만 부를 자랑하는 중국 최대 타블로이드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이미 영어판 창간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미디어 전략뿐만 아니다. 후진타오 지도부는 ‘단체시위사건’, 이른바 민중의 집단 항의에 대해서도 공안·무장경찰 등 물리적 강제력의 투입을 가능하면 억제하는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3일, 직할시인 충칭(重慶)에서 택시기사들의 파업이 발생했다. 파업 발생 3일 후, 당시 시 대표였던 보시라이(薄熙來) 서기(정치국원)는 택시기사 대표와 대화에 나섰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했는지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발언을 TV·인터넷 등에 생중계시켜 사태를 일단 진정시켰다. 이것은 후진타오 주석의 뜻을 참작한 새로운 방법이다. 택시기사들은 “무허가 택시의 횡행 및 행정당국과 결탁한 택시회사가 요구하는 법외 관리비” 등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만일 이때 사태를 방치하거나 강제로 진압했다면 그들은 결국 정치적 움직임을 보였을 것이다. 또 다른 지방에서도 똑같은 악순환에 빠졌을 것이다. 보 서기는 다른 지방 지도자들로부터 ‘인기영합적 퍼포먼스를 했다’는 심한 뒷공론을 들어야 했다.

<랴오왕> ‘2월·7월 사회 불안설’ 제기

하지만 후 주석 등 중앙의 지도자들은 다른 지방에서도 참고로 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언급한 당 중견간부는 “앞으로 충칭 방식을 시도하는 지방이 속출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덩샤오핑(鄧小平) 전 주석이 ‘모석과하(摸石過河·물밑의 돌을 신중하게 살피며 강을 건넘)’라고 말했듯 우리 당은 개혁개방이라는 실험에 도전하며 발전해 왔다.

장쩌민(江澤民) 시대에 잠시 시행착오를 해 그 의지가 약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 주석의 노력이 겨우 덩샤오핑 시대로 되돌렸다. 일찍이 덩 전 주석은 가난하고 뒤처진 중국을 직시하라고 인민을 질타하며 근대화 노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후 주석은 조화를 잃고 불안정성이 점점 커지는 중국의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지난해, 세계 인권의 날인 12월10일을 맞아 중국 내 민주 운동가와 시민파 변호사 등이 ‘2008헌장’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발표했다. 1당독재 해체, 3권분립 확립, 당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의 국가화 등을 호소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처럼 민중의 불만·분노에 편승한 반 체제파의 움직임이 활발해질 조짐도 지적되고 있다.

게다가 2009년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한 1959년의 티베트 봉기로부터 50주년(3월10일)이 되는 해이고, 톈안먼(天安門) 사태로부터 20주년(6월4일) 되는 해다. 10월1일 건국 60주년에는 10년 만의 군사 퍼레이드가 예정돼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고비’에 맞춰 민중이나 반체제파의 움직임이 발생했을 때 중국정부가 물리적 강제력에만 의존한다면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의 여론이 쏟아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당 지도부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계경제 상황이 매우 안 좋다. 신화사(新華社)가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랴오왕(瞭望)> 1월5일자는 “2009년에 단체시위 사건이 더욱 다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농민공(農民工·시골 출신 도시근로자)이 춘절(설) 연휴 직후 다시 돈벌이에 나서는 2월과, 대학생이 졸업하는 7월 전후에 취업을 둘러싼 사회 불안이 고조될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위기가 만연한데, 대책은 적시에 가능할 것인가? 후 주석의 의향은 당·정부의 말단까지 침투할 것인가?”

이 질문에 한 중견간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해외유학 및 재외근무 시절 여러 중국 붕괴론을 접하고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믿지 않는다. 우리 당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당 외의 적에는 매우 강하다. ‘2008헌장’만 해도 후 주석의 새 방법을 이용해 인민의 경제 요구를 빠른 단계에서 적절하게 처리, 정치적 움직임으로 바뀌지 않도록 하면 확대될 일은 없다. 무엇보다 반체제운동의 실제 주동자인 대학생들은 취직활동으로 매우 분주하다. 또 (톈안먼 사태가 있었던) 20년 전과 똑같은 말만 늘어놓아 신선함이 떨어진 ‘헌장’에는 눈도 돌리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모순된 상황이 분출할 것이고, 단체시위 사건이 빈발할 것이다. 그래도 당의 근간은 흔들리지 않는다. 중국공산당을 타도할 수 있는 것은 중국공산당밖에 없다. 지도부가 단결을 유지하고 당이 시대의 변화에 맞춰 자기변혁을 할 수 있는 한 괜찮다.”

이처럼 그는 조건을 붙이면서도 당 독재 견지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인 후 “세대교체(接班·지에반) 문제만 극복하면…”이라며 말을 흐렸다.

세대교체. 이 간부는 중국공산당이 봉착한 최대 난제는 ‘평화적 세대교체의 제도화’라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덩샤오핑에서 장쩌민으로,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의 정권이양은 ‘평화적’이기는 했지만 제도화되기까지는 아직 멀었던 것이다. 장쩌민·후진타오 모두 덩샤오핑이라고 하는 절대적 권위가 결정한 후계자였기 때문에 결과상 평화적으로 이양된 것에 불과했다.

“베이징올림픽 9년 후 주목해야…”

“차기 대표로 가장 유력한 후보인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든 누구든 2012년으로 예정된 제18회 당대회에서 후 주석이 바통을 이어주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후 주석은 덩샤오핑의 권위를 대변할 수 있는 최후의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진핑 세대는 우리 당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절대권위나 그 직접적 계승자가 없는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이르면 시진핑 시대의 1기째가 끝나는 2017년의 제19회 당대회 전에 차차기 세대의 지도자를 둘러싼 당내 권력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그때까지 새로운 지도자 선출법이 제도화돼 있지 않으면 중국공산당은 미증유의 대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앞 세대의 절대권위 아래에서 반복적으로 펼쳐졌던 지금까지의 권력투쟁과는 사정이 다를 것이다. 따라서 ‘당내 민주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후 주석이 시도하는 새로운 방법의 대부분은 ‘당내 민주화를 위한 기반 다지기’라는 역사적 임무를 띠고 있다.”

필자가 그에게 “당내 민주화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면…”이라고 묻자 그는 한마디로 “끝이다”라고 대답하며 운수를 따지는 중국인다운 ‘예언’으로 말을 마쳤다.

“베를린올림픽(1936) 9년 후 나치 독일은 붕괴했다. 모스크바올림픽(1980) 9년 후에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고 소련이 쇠락했다. 문제의 2017년은 베이징올림픽으로부터 정확히 9년 후가 되는 시기다.”

200903호 (200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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