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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프로그래머·경영자는 모두 오타쿠 

화투에서 휴대용 게임기까지 끝없이 변신…창업 때부터 소비자 놀라게 하겠다는 정신 유지 

글■김동호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dongho@joongang.co.kr]

화면을 보고 음성안내를 들으며 요리법을 배울 수 있는 소프트웨어. 이러한 창의성이 닌텐도를 불황에 강한 기업으로 만든 경쟁력이다.

도쿄(東京) 신주쿠(新宿)구에 사는 40대 광고회사 직원인 이토 오사무는 주말이면 부인과 초등학생 자녀 두 명 등 모두 네 명이 함께 볼링을 즐기거나 테니스를 친다.

스키 시즌인 요즘에는 스키 훈련도 한다. 이 모든 스포츠는 7평 규모의 거실에서 이뤄진다. TV에 연결한 거치형 게임기 ‘Wii’를 이용하면 다양한 스포츠를 실내에서 생동감 있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토는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오사카(大阪) 네야가와(寢屋川)시 오사카전기통신대학. 이 대학은 2007년부터 휴대용 게임기로 인기가 높은 ‘닌텐도DS’를 수업도구로 활용해 큰 성과를 얻고 있다.

1, 2학년 필수과목 가운데 영어·물리·역학 과목 수업 때 수강자 전원에게 DS를 무료로 대여해주고 이를 통해 수업을 진행한다. 학생 감소로 고심하는 일본 사립대의 발상전환으로, 호기심을 유발해 실력도 높이고 신입생도 유치하자는 것이다.

그 성과는 2006년 7월부터 시험운용한 영어 수업에서 이미 확인됐다. DS를 수업에 활용하기 시작한 이후 학생들이 게임을 하는 분위기로 수업에 참여하면서 집중도가 높아져 성적이 대폭 향상됐기 때문이다.

여러 명을 한꺼번에 연결하는 기능도 있어 영어 받아쓰기의 경우 실시간으로 성적을 경쟁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이어폰으로 잘 들어야 영어 단어를 액정화면에 제대로 적어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열중할 수밖에 없다. 잡담을 하는 학생도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이 학교 측의 설명이다.

물리와 역학 시간에도 네트워크 연결 기능을 통해 학생들의 실험 결과 도출을 비교할 수 있다. 학교 측은 반응이 좋게 나타나자 수학 과목의 경우 소프트웨어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기로 했다. 올 2학기 디지털게임학과를 중심으로 수학·게임·애니메이션 분야의 교수진이 팀을 구성해 본격적인 개발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개발기간은 1년 정도로 잡고 있다. 이 학교 모토바 도시오 학장은 “개발되는 소프트웨어는 시판도 가능할 것”이라며 “학교재정의 새로운 수입원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로 대부분의 기업이 실적 악화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닌텐도는 지난해 5,300억 엔(약 8조 원 가량)에 달하는 연결영업이익을 내면서 ‘나홀로’ 호황을 구가했다.

이는 전년대비 9% 증가한 규모로, 매출액은 사상 최고 증가율인 9%가 늘어난 1조8,200억 엔(약 27조 원)에 달했다. 순이익은 사상 최고를 예상했으나 엔화강세의 영향으로 전년 대비 11% 줄어든 2,300억 엔(약 3조5,000억 원)으로 예측된다. 전 세계 대부분의 유명 기업이 인원을 줄이고 공적자금을 신청하는 등 구조조정에 나선 것과 대조적이다.

닌텐도는 올해 연간 배당액을 전년보다 110엔 늘린 1,370엔으로 결정했다. 올 들어서도 닌텐도 게임기의 판매 호조가 이어지는 덕분이다. 특히 미국·유럽을 중심으로 DS와 Wii가 폭발적으로 팔리고 있다. 창립 초기부터 미국·유럽시장을 공략한 효과를 톡톡히 보는 것이다. 우리는 못 만드느냐는 발언이 이 대통령으로부터 나왔지만, 닌텐도의 성공신화는 로마가 하루에 이뤄지지 않은 것처럼 게임기 한 개를 뚝딱 만들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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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 DS - 일본의 게임 전문기업인 닌텐도가 개발한 휴대용 게임기. 전자사전만 한 크기의 게임기에 지하철표만 한 크기의 게임 소프트웨어를 삽입해 작동한다. 영어회화 받아쓰기, 두뇌 개발 놀이, 자동차 경주 같은 다양한 게임이 잇따라 출시되면서 닌텐도를 게임기업계의 강자로 끌어올린 상품이다.

◇닌텐도 Wii - TV에 연결해 집안에서 가상화면을 보면서 볼링·테니스·골프 등을 즐기는 가정용 게임기. ‘슈퍼마리오’ 등 기존의 오락성 게임도 즐길 수 있지만, 혼자 또는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스포츠 게임이 계속 발매되고 있다. 소프트웨어를 돌리는 본체 가격은 22만 원 수준, 소프트웨어는 4만~5만 원에 이른다.



닌텐도의 제1 가치는 ‘재미에 충실한 게임’이다.

닌텐도는 원래 교토(京都)에서 화투를 만드는 회사로 출발해 완구 제조사로 발전한 기업이다. 사명 ‘닌텐도(任天堂)’는 ‘하늘(天)에 맡긴다(任)’는 의미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과 일맥상통한다. 이 사명은 닌텐도 성공신화와 무관하지 않다. 일본인은 원래 운명적 만남을 중시하고, 소명을 중시한다.

그래서 ‘잇쇼겐메이(一所懸命)’라는 말을 자주 쓴다. 한 자리에서 목숨을 걸고 열심히 노력한다는 의미다. 닌텐도는 이런 일본인의 정신처럼 화투 제조에서 출발해 오락기구와 완구만 만들어왔다.

120년 전 화투 제조로 출발

올해로 딱 120년 전, 닌텐도의 창업제품은 화투였다. 1889년 닌텐도를 창업한 야마우치 후사지로(房治郞)의 작품이었다. 현재의 오너 겸 경영고문 히로시의 증조부다. 한 자리에서 목숨 걸고 열심히 한다는 것은 대를 이어 가업을 이어가는 것도 포괄한다. 120년 전 증조부가 하던 일을 증손자가 이어받아 유지하고 번창시키기 때문이다.

닌텐도는 언제나 세상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창업 3년 뒤 일본에서 처음 내놓은 트럼프는 화투에 익숙했던 일본인들에게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일본은 당시 이미 국제화돼 도쿄 한복판에는 자동차가 달리고 있었고, 도쿄와 지방에는 이미 거미줄처럼 철도가 깔려 있었다. 서양에 뒤진 산업화를 따라가려는 지적 호기심도 있었지만, 서양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는 속성 때문에 놀이문화도 상당히 도입돼 있었다.

닌텐도의 DNA에는 처음부터 국제감각이 배 있었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닌텐도의 DNA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53년에는 플라스틱 소재를 사용한 트럼프를 만들어냈다. 어떻게 하면 소비자를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할지 궁리한 결과였다. 이 무렵 닌텐도는 미국에도 이름이 알려지면서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과 인연을 맺는다.

디즈니 캐릭터가 들어간 트럼프를 납품하게 된 것이었다. 1960년대 들어 트럼프가 한 물 가면서 닌텐도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도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닌텐도는 1970년대 들어 다시 팔색조처럼 변신했다. 1973년 아케이드게임(동전을 넣고 오락장에서 하는 게임)을 개발한 데 이어 경마 동영상을 사용한 메달 게임 ‘EVR 레이스’를 내놓으며 당시 붐을 이루던 경마 팬들을 열광시킨다.

닌텐도의 이 같은 끝없는 변신은 1980년대 들어 미국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더욱 속도를 냈다. 전자게임 붐이 일어나자 1980년 뉴욕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미국 게임시장 공략에 첫발을 내디뎠다. 지난해 미국 게임시장을 석권한 것도 변신의 결과다. 닌텐도는 1982년 뉴욕 현지법인을 워싱턴주 시애틀로 옮겼다.

연구개발(R&D) 시설을 더 키운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닌텐도는 첫 가정용 게임기 ‘패미콤’을 시판해 ‘대박’을 터뜨렸다. 게임기와 소프트웨어를 별도로 구입하는 구조를 본격화하면서 게임기를 한 대 팔면서 여러 가지 소프트웨어를 지속적으로 팔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5년에 내놓은 패미콤용 소프트웨어인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는 패미콤 게임기의 전성기였다.

발판 위에 올라서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Wii fit’. 높은 접근성은 게임을 모르던 장년층까지 거실로 이끌었다.

폐업 직전의 위기를 넘어

그러나 아케이드 게임기는 이때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회사를 지탱해줬던 아케이드 게임에서 닌텐도는 1986년 아예 철수했다. 화투 붐이 사라지자 트럼프를 내세운 것처럼, 닌텐도는 새로운 제품 개발에 도전했다. 1999년에는 인터넷에 접속하는 ‘랜드넷’을 개시했지만 미국·한국의 온라인게임에 밀려 불과 2년 만에 시장에서 짐을 싸야 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변신해온 닌텐도였지만, 인터넷의 속도는 따라갈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닌텐도에 위기가 본격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닌텐도는 다시 ‘기본에 충실하라(Go back to the basic)’ 정신으로 돌아갔다. 본사를 도쿄에서 다시 닌텐도의 발상지인 오사카로 옮겼다. 창업 3세인 야마우치 히로시(山內溥·82)는 자신이 물러날 때를 알았다.

새 시대에는 새로운 발상의 경영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평소 게임업계에서 눈여겨봐두었던 이와타 사토루(岩田聰·49)를 영입한다. 창업 한 세기가 지난 기업이자 창업가 3대째를 이어온 경영자 자리를 젊은 프로그래머 출신 벤처기업인에게 넘겨준 것이다. 닌텐도는 젊은 경영진 체제로 전환해 내부적으로는 빠르게 체질을 바꿔갔지만, 위기는 이 때부터 본격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2002년 이와타가 사장에 취임하자 유럽위원회가 닌텐도 등 일본 업체들의 거래 관행을 문제 삼아 1억6,780만 유로의 과징금을 부과했기 때문이다. 닌텐도는 이 같은 위기를 내부 혁신을 통해 극복해 나갔다. 우선 닌텐도의 주력 상품이던 패미콤·슈퍼패미콤 생산을 중단했다. 화투에서 출발해 트럼프를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한 것처럼, 닌텐도는 2004년 드디어 DS를 내놓았다.

2006년에는 ‘DS라이트’와 Wii를 잇따라 내놓으면서 다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난해에는 인터넷과 연결되는 ‘DSi’를 내놓으며 본격적으로 인터넷 시대에 적합한 진화를 시작했다. 창업 3세인 히로시가 사장에 취임한 것은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인 1949년이었다. 2대 사장인 조부가 갑자기 사망하고 아버지도 가업을 이을 사정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00여 명의 사원은 파업을 하는 등 나이 어린 사장을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경영자의 자질을 타고난 히로시는 수완을 발휘하면서 사원들에게 능력을 인정받는 오너가 됐다. 그는 발상의 전환으로 플라스틱제 트럼프를 일본에서 최초로 만드는 등 이후에도 일제 카드게임과 보드게임을 잇달아 개발했다.

재주가 넘치면 반드시 실수도 따르는 법이라고 했던가? 문제는 그의 넘치는 사업 수완이었다. 사업은 카드게임이나 마작·바둑·장기 용구와 같은 전공 과목에서 서서히 벗어나 주특기가 아닌 분야로 다각화했다. 육아 관련 용품 제조와 문구 판매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택시사업, 호텔 경영으로 사업을 확장했지만 어느 것 하나 성공하는 것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채무를 떠안게 됐고, 경영은 좌초 위기에 빠졌다. 히로시는 1970년대 들어 사업을 정리하고 다시 완구사업으로 돌아갔다.

좋은 라이벌과 경쟁

이렇게 닌텐도는 값비싼 교훈을 얻고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왔다. 적잖은 수업료를 치렀지만, 이후 더욱 게임기 개발에 전념하게 됐다. 주특기에 집중하자 시너지가 폭발했다. 1980년에 개발한 ‘게임 & 워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1983년에 내놓은 패미콤은 게임 소프트웨어 제조·판매에 대해 로열티를 받으면서 돈 버는 사업 모델로 떠올랐다.

이것은 닌텐도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제조·판매하는 대형 게임기 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1990년대 무렵 닌텐도는 가상현실의 세계로 소비자들을 이끌었다. 걸프만전쟁 때 비디오 카메라를 탑재한 미사일이 표적을 명중시키는 장면이 닌텐도의 비디오게임처럼 보였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걸프전을 ‘닌텐도 워(War)’라고 불렀다.

물론 닌텐도는 유쾌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상의 세계에서 오락을 제공하는 닌텐도의 소프트웨어 내용을 전쟁에 빗댔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닌텐도의 이런 기술력을 긍정적으로 표현해, 병원 내시경 수술을 ‘닌텐도 오퍼레이션(수술)’으로 부르기도 한다. 닌텐도는 한때 가정용 게임기의 세계 챔피언 자리를 일본 최강의 가전업체였던 소니에 내준 적이 있었다.

한 번 내준 1등 자리를 되찾는 데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1994년 게임기시장에 신규 진입한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선풍이 불었다. 소니가 각광받자 해외 제휴사들은 닌텐도를 떠났다. 닌텐도 게임기는 아무래도 어린이용 게임기라는 인상이 있던 차에 독자적인 길을 찾아나선 것이었다. 일본정부도 게임기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규제를 완화하고 소니의 시장 진입을 도왔다.


마케팅에도 문제가 있었다. 저질 게임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휴사를 엄선하고 판매 소프트웨어 수를 제한하는 등 양보다 질 경영을 고집한 것도 닌텐도를 외톨이로 만들어갔다. 경쟁업체들은 1990년대 들어 게임 소프트웨어의 기록매체를 생산성이 높은 CD-ROM 형식으로 빠르게 옮겨갔지만, 닌텐도는 로딩의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롬카트리지를 고집했다.

그 결과 소프트웨어 가격은 비싸질 수밖에 없었다. 질 못지않게 마케팅이 중요하고, 경쟁자들이 변신해가는 시장환경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슈퍼패미콤은 가장 싼 것도 7,000엔에 달했고, 비싼 것은 1만5,000엔까지 치솟았다. 소니의 시대는 2000년 들어서도 지속됐다. 닌텐도는 1996년 ‘슈퍼마리오64’ ‘젤다의 전설’ 등을 잇달아 내놓고 관심을 끌었지만 소니의 아성을 깨지는 못했다.

2001년에는 마쓰시타(2008년 10월부터 파나소닉)의 기술제휴를 받아 차세대 게임기인 ‘닌텐도 게임큐브’를 독자 사양의 광디스크를 채용해 개발했지만 플레이스테이션과 1년6개월가량 벌어진 게임기시장의 기술격차는 좁히지 못했다. 더구나 ‘플레이스테이션2’가 출시됐지만, 대응할 후속 모델이 없는 것도 닌텐도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소프트웨어 개발이 부족했던 것도 플레이스테이션에 계속 밀리는 원인이 됐다. 게임기를 돌릴 때 필요한 프로세서를 IBM에서 아웃소싱해 조달하는 것도 본체 가격을 낮추면서 성능을 향상하려는 노력을 가로막았다. 설계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것도 단점이었다. 반면 소니는 프로세서를 자체개발하고, 그룹 반도체 공장에서 대량생산해 원가를 줄이며 닌텐도를 압박했다. 오늘날 닌텐도를 성공시킨 것은 이처럼 강력한 경쟁자 소니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발상의 전환으로 시장 탈환

닌텐도는 자신의 한계를 알았다. 고성능 노선으로는 플레이스테이션을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냉정하게 판단했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고속도로에서 앞차를 추월하려면 차선을 바꾸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닌텐도는 이런 판단에 따라 아예 획기적인 방안을 강구했다.

새로운 게임기의 개념은 누구나 가볍게 놀 수 있는 게임이었다. 사실 세계 게임시장 규모는 199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축소됐다. 성능이 너무 복잡해지면서 게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신규로 들어갈 틈새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닌텐도가 알기 쉬운 게임을 만들기로 한 것은 이런 상황을 역발상으로 활용하자는 번득임도 작용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 DS다. DS는 상하 2개의 화면과 터치스크린을 채용해 게임의 표현과 재미를 느끼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DS는 같은 시기 닌텐도를 게임시장에서 완전히 내몰기 위해 출시된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PSP)’을 크게 압도했다. 마침 일본에서는 뇌(腦)과학 바람이 불었다. 닌텐도가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는 의미라고 했던 것처럼 노력을 다한 뒤 기다리자 행운이 따른 것이다.

DS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면서 화투와 트럼프를 처음 내놓았을 때처럼 일부 지역에서 품귀 현상이 계속됐다. DS의 판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휴대 게임기 판매는 거치형 게임기의 시장점유율을 뛰어넘었다. 기술력을 토대로 부활에 성공한 닌텐도는 마케팅에도 자신이 붙으면서 이를 역으로 이용했다.

유행은 돌고 도는 법이라고 했던가? 닌텐도는 소니가 허덕이는 사이 거치형 게임기인 Wii를 시장에 투입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발상의 거치형 게임기였다. 레버로 작동하는 기존의 컨트롤러 버튼식 조작 방식뿐만 아니라 보이스(목소리)와 가속도 센서를 탑재해 직감적 조작이 가능한 Wii 리모컨을 채용한 것이었다.

이는 게임의 즐거움을 크게 확산시키면서 같은 시기 등장한 ‘플레이스테이션3’를 완전히 압도하는 결과를 낳았다. 코어 게이머들로부터의 비판도 있다. 게임기를 너무 쉽게 만들면서 대중에게는 환영받고 있지만 전문 게이머들은 도외시한다는 평가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닌텐도가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숙제가 생긴 셈이다.


1985년 탄생한 이래 24년간 닌텐도를 대표하는 마스코트인 게임 캐릭터 ‘마리오’.

닌텐도의 성공 요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 우물만 파는 전문가들의 영입과 육성이었다. 1960~80년대 닌텐도를 중흥한 히로시는 외도에서 돌아온 뒤 게임 개발에만 집중했다.

게임 개발과 관련한 인재들을 끌어모으고 발상의 전환을 독려했다. ‘돈키콩’과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젤다의 전설 등을 만들어낸 미야모토 시게루(宮本茂)를 비롯해 가정용 게임기에 최초로 스틱이 아닌 십자형 조작키를 도입하는 한편 세계 최초의 액정화면을 사용한 휴대용 게임기 ‘게임 & 워치’와 최초의 카트리지 교환형 휴대용 게임기 ‘게임보이’를 만든 요코이 군페이(橫井軍平)를 발굴한 것도 히로시의 업적이다.

닌텐도의 부활을 주도한 이와타 사장을 한눈에 알아본 것도 역시 히로시였다. 이와타는 홋카이도(北海道)의 삿포로(札幌) 출신으로 도쿄공업대 정보공학과를 졸업한 공학도다.

‘천재 프로그래머’로 불렸던 이와타는 고교 시절 전자계산기의 제한된 기능을 개조해 독자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였다. 이와타는 대학 시절 늘 컴퓨터를 끼고 살았다.

대학 선배의 주도로 1980년 창업한 게임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회사인 HAL연구소에 입사한 것도 컴퓨터와 프로그래밍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닌텐도의 게임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을 담당했다.

프로그래머였던 그가 경영자로 변신한 것은 HAL연구소에 위기가 찾아오면서부터다. 1992년 HAL연구소는 거액의 부채를 지고 화의를 신청했다. 이와타는 경영 재건을 위해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당시 이와타를 사장으로 추천한 사람이 바로 히로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닌텐도의 소프트웨어 개발 담당자인 이와타의 끈질긴 기질을 지켜보았던 히로시는 그의 능력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타는 대표이사가 된 뒤에도 프로그래밍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휴일에 출근해 프로그래밍에 손을 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의 천재적 프로그래밍 능력은 경영에서도 빛났다.

‘별의 카비’ ‘스매시 브라더스’ 등의 히트 작품을 내놓으면서 경영 상황도 재건했다. 한 게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던 중 기술적 문제로 좌초 위기를 맞자 이와타는 “지금의 프로그램을 살리려면 2년이 걸린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 출발하면 1년 이내에 만들 수 있다”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새 소프트웨어를 1년 만에 완성했다. 그는 사내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한다. 사원들과 “말하고 싶은 것을 서로 말하자”며 6개월에 한 번씩 대화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일류 프로그래머 출신인 이와타 사토루 닌텐도 사장. 투명한 경영과 혁신적 제품을 통해 닌텐도의 제2 중흥기를 이끈 주인공이다.

세계가 주목하는 ‘이와타 리더십’

닌텐도의 창업 3세인 히로시는 2000년 중대한 결정을 한다. 3대째 이어받은 닌텐도의 경영권을 이와타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일선에서 물러나는 작업을 시작했다. 히로시는 우선 자신이 오랫동안 눈여겨본 이와타를 영입해 경영기획실장에 앉혔다. 2002년에는 42세의 이와타를 전격적으로 사장에 임명했다.

3대째 이어진 야마우치의 가족경영을 중단하고 다른 고참 중역을 건너뛰고 전격적으로 단행한 이례적 인사였다. 이와타는 즉시 닌텐도의 부활에 나섰다. 경영 방침은 이미 HAL연구소 시대부터 확립돼 있었다. “게임을 호화롭고 복잡하게 만들면 게임 숙련자(코어 게이머)들이 쉽게 싫증을 낸다. 더구나 지금까지 게임을 해보지 않았던 초심자들은 게임을 시작하기조차 어렵다. 게임시장이 서서히 죽어가지 않을까 염려된다.”

이와타의 분석대로 게임인구는 1997년을 정점으로 조금씩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와타가 이끄는 신생 닌텐도는 2004년 12월 ‘게임인구의 확대’를 기치로 내걸고 제1탄으로 휴대 게임기 닌텐도 DS를 내놓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초심자에게는 직감적으로 알기 쉬운 조작을, 숙련자에게는 신선한 감각을 제공했다.

마침 이 게임기는 크리스마스 선물 시즌에 투입되면서 연말연시에만 150만 대를 판매했다. 이와타는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겠다며 ‘Touch Generation’을 새로운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이것이 게임인구의 확대로 연결되면서 DS 매출을 크게 견인했다. 실제로 일본에서 지하철을 타보면 6~7세 어린이는 물론 50~60대 여성까지 저마다 닌텐도 게임에 열중해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이와타는 2006년 11월 차기 작품으로 신세대 게임기 Wii를 바로 투입했다. 이와타는 Wii의 투입을 두고 “나의 존재 이유를 내건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이와타는 자신의 존재는 물론 경영도 투명하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5년부터 경영방침설명회나 결산설명회에서 사용한 모든 텍스트는 웹사이트에 공개할 뿐 아니라 영상까지 내보냈다.

자신이 직접 개발자와 인터뷰해 웹사이트에 공개하는 ‘사장에게 묻다’도 다른 기업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적극적인 PR·IR 활동은 자신감으로부터 나온다. 그는 지금도 시간이 나면 게임 개발 현장에 참가한다. 세계게임개발자회의(GDC)에서 이와타는 “입장은 사장이지만 머리는 게임 개발자, 마음은 게이머”라고 말해 갈채를 받기도 했다.

한국은 정보기술(IT) 강국이니까 닌텐도 게임기 같은 것은 쉽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 대통령이 던진 화두는 간단했지만, 닌텐도의 역사를 보면 답은 나와 있다. 닌텐도의 성공신화는 제조기술이 아니라 창의력과 도전정신, ‘오타쿠(御宅)’ 정신이 있어야 가능하다. 오타쿠는 한 분야를 평생 취미로 삼거나 연구하는 사람을 말한다.

닌텐도를 이끌어온 프로그래머나 경영자들은 모두 오타쿠였다. 이처럼 오로지 자신의 분야에만 매달려 최고의 물건을 만들어 내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세계 최고의 제품이 나오는 것이다. 시중에 시판되는 닌텐도 게임기를 만드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창의성이다.

한국에도 영세한 중소기업들이 게임기를 만들지만 소프트웨어가 풍부하지 못해 상업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게임기 성공의 관건은 풍부한 소프트웨어이지만 한국에서는 소프트웨어 개발사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이런 이유 때문에 레인콤은 개발 중이던 휴대용 게임기의 출시를 포기한 적도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에 대한 처우도 문제다. 한 개발자는 “기업은 고급 개발자를 구하지 못하고, 개발자는 찬밥 신세에 시달린다”며 “한국에서는 IT 개발 분야 지망자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획기적 아이디어 상품보다 기존 게임을 베끼는 관행도 문제다. 한국은 닌텐도를 추격하기는커녕 앞으로는 중국·인도 기업에도 뒤처질 수도 있다는 것이 게임업계의 분석이다.

한국도 ‘오타쿠 정신’ 키워야

닌텐도의 게임기는 하드웨어 성능에서는 경쟁 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나 소니의 게임기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특정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DS는 기존 게임과 달리 하드웨어 경쟁 대신 창의성 있는 게임 방식과 내용으로 승부를 걸어 게임의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게임에 무관심했던 여성은 물론 가족 단위의 고객도 새로운 시장으로 개척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위기관리 능력과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력, 과감한 리더십, 창의적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결합이 대성공의 비결이었다. 이와타는 “중요한 것은 세계경기가 아니라 소비자를 놀라게 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닌텐도는 늘 소비자의 동향과 시장의 변화를 주시한다.

다른 강자가 나타나면 DS를 접고 다른 상품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타는 시장 포화 우려에 대해 “미국·유럽은 포화되려면 아직 멀었다. 일본보다 2.5배의 잠재력이 있는 시장”이라고 말했다. 한동안은 게임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한 것이다. 실제로 DS의 지배력은 더욱 강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부터는 교육현장에도 더욱 활발하게 진출한다. 교토부 야와타(八幡) 시립중앙초등학교는 오는 4월부터 DS를 활용한 영어 학습을 시작한다. 영어 단어 600개와 150개의 예문이 들어 있고 학생들은 암기는 물론 발음을 듣고 따라 하는 방식으로 영어를 공부하게 된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가지고 놀면서 익숙한 만큼 놀이하는 기분으로 영어를 공부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다. 최근 DS를 활용한 공개수업에서 학생들은 “게임 하는 것 같아 재미있다”고 말했다.

200903호 (200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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