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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속, 울컥이는 비경을 만나다 Kerala 

해외기행 인도 남서부 케랄라주를 가다 

글·사진■서영진 여행칼럼니스트
코치항에 노을이 내린다. 중국식 어망의 한가로운 자맥질을 몇 시간째 우두커니 지켜보고 서 있다. 가끔 이런 풍경과 맞닥뜨리면 탁한 바람과 더운 열기는 순간 망각된다. 인도 남서부의 케랄라 주가 보여주는 낯선 단면들은 몇 번씩 가슴을 울컥이게 만든다. 인도로 떠나기 전, 한 편의 인도영화가 화제였다. 퀴즈쇼에서 억만장자가 된 빈민가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아카데미상을 8개 부문이나 휩쓸었다. 때마침 인도로 향하는 기내에서는 영화가 상영 중이다. 인도의 빈민가를 담았지만, 화면은 예쁘고 탐스럽다. 숨가쁘게 전개되는 장면만큼 호기심은 빠르게 전이된다.

콜람 수로의 하우스 보트는 웅크린 벌레를 닮았다. 쌀 수송선을 개조한 것들로 신혼여행객들을 위해 최고급 시설을 갖춘 배도 있다.

인도 남서부, 깊고 외딴 곳에 뭐 이런 항구가 있나 싶다. 도심을 채우는 명물은 죄다 이국적인 것이다. 눈을 자극하는 장면은 고풍스러운 힌두교 사원도 아니고, 영화 속 빈민가도 아니다. ‘중국식 어망’. 오랜 기간 이 도시의 상징이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식 어망이다.

중국식 어망의 코치항


1 코치 항 뒷골목의 유럽풍 골목과 클래식 카. 2 코치 유대인 거리의 향신료 가게. 3 온몸에 기름을 듬뿍 바르는 아유르베다 마사지 체험.
인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항구로 알려진 케랄라(Kerala)주 코치(Koch)는 BC 3세기부터 향신료 무역의 중개지였다. 중국과 아라비아 상인들이 끊임없이 드나들며 흔적을 남겼고,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등 열강의 각축지이기도 했다. 중국식 어망이 남아 있는 것도, 인도에서 유일하게 유대인 마을이 보존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독특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코치항에서 맞는 하루는 이질적이다. 중국식 어망의 자맥질에는 눈을 뗄 수 없다. 고깃배가 드나드는 포구에 집채만 한 어망 20여 개가 줄지어 늘어서 있고, 검은 근육의 장정들이 줄을 당겨 고기를 낚는다.

“헤이, 맨. 컴 온!”

길 가는 이방인에 대한 짧은 고함에도 당황할 필요는 없다. 돌덩이가 성기게 매달려 있는 줄을 당기려면 힘 좋은 구경꾼의 손길은 오히려 반갑다. 구성진 노래에 맞춰 어망을 들어 올리면 날렵하게 생긴 뱃사람 한 명이 어망 끝으로 기어오른다. 그 어망에는 두서너 마리의 생선만 달랑 담겨 있을 뿐이다.

드넓은 아라비아해에서 건져 올린 수확치고는 너무 앙증맞고 단출하다. 중국식 어망은 중국 광둥(廣東)성에서 행하던 낚시 방식으로, 1400년대에 이곳까지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식 어망의 자맥질은 해질녘까지 계속된다. 노을에 비낀 어망과 나무틀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는 어부들의 모습은 평화롭고 달콤하다.

바다로 나섰던 고깃배들은 해질녘이면 제법 큼지막한 생선을 코치 포구에 쏟아 놓는다. ‘카나바’라고 불리는 대형 오징어도 있고, 바다메기도 있다. 생선은 현장에서 저울에 달아 거래되고, 즉석에서 구워먹기도 한다. 구시대적인 중국식 어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분명 관광지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두건을 둘러맨 채 로티(인도남자들의 치마 같은 하의)를 입고 생선을 나르는 뱃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거나 말을 건네면 가슴이 찡하다. 걸리적거리고 귀찮을 텐데도 싫은 내색 없이 웃음으로 화답한다. “웰컴”이라며 짧은 영어 뒤 오히려 성기고 누런 이를 드러낸다.

잠시나마 가진 오해와 편견을 반성하며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대부분 드라비다계 형색이다. 인도 북부는 희고 훤칠한 아리안계, 남부는 짤막하고 검은 피부의 드라비다계라던데, 토종 인도인들의 살가운 표정에 더욱 정감이 간다.
중국식 어망이 있는 해변의 뒷골목은 유럽풍 거리다.

포르투갈의 항해왕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1469~1524)가 묻혔었다는 성프란시스성당 뒤로는 바스코 책방과 바스코 호텔도 있다. 그 길을 따라 여행자를 위한 숙소와 카페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꽃으로 단장한 흰색 담장 앞에는 앰배세더라고 불리는 1960년대식 클래식 차가 오간다.

석양이 지면 100년 역사의 레스토랑에도 하나둘 불이 켜진다. 모든 것이 더디게 흘러가는 코치항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없다. 조물조물 들려오는 뱃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찻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전부일 뿐이다. 코치항에서 남쪽으로 향하면 유대인 마을과 마탄체리(Mattancheri) 궁전이다.


노을진 코치항의 중국식 어망들은 인도 속 또 하나의 이국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향신료 무역을 하던 유대인이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 모퉁이에는 유대인 회당이 있다. 한때 500여 가구였던 유대인 마을은 현재 10여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을 뿐이다. 골목에는 향신료 가게와 페르시아 골동품 상점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의 손길이 닿은 마탄체리 궁전은 17세기에 제작한 벽화로 그 멋을 뽐낸다.

코치가 이국적인 것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코치에 가서 꼭 봐야 할 공연이 전통 마임극인 ‘카타칼리 (Kathakali)’다. 힌두 신화를 소재로 배우는 표정·손짓·몸짓을 이용해 내용을 전달한다. 재미있는 것은 공연 시작 1시간 전부터 배우들의 분장 과정을 적나라하게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분장에 들어가면 배우들은 가끔 ‘씩~’ 미소만 지을 뿐 무표정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희로애락을 과격한 표정과 손짓으로 표현하는 카타칼리는 흡사 중국의 경극을 닮았다. 케랄라주만의 독특한 공연으로 주도인 트리반드룸(Trivandrum)에는 카타칼리를 가르치는 무용대학이 들어서 있을 정도다.

이국적인 코치항을 뒤로 하고 알라푸자(Alappuzha)로 향한다. 이곳에서 남쪽 콜람(Kollam)까지의 여정은 수로 체험이다. 알라푸자 선착장에 들어서니 강변 가득 집들이 물 위에 둥둥 떠 있다. 케랄라주의 또 하나의 명물인 하우스보트들로, 덩치 큰 배들이 수로를 오가는 정경은 ‘남국의 베네치아’를 연상시킨다.

배들은 날렵하기보다 웅크린 풍뎅이 같은 모습이다. 하우스보트는 원래 물길을 오가던 쌀 수송선을 개조한 것으로, 대나무로 지붕을 이어 우아한 멋을 전한다. 보트에 올라서니 없는 게 없다. 수로 유람의 최고급 결정판이다. 위성 수신 안테나와 DVD, 방에는 에어컨도 갖춰져 있다. 원주민 스태프들은 정중하게 저녁식사를 마련하고, 아침이 밝으면 인도식 차 ‘짜이’를 내오기도 한다.

배를 타고 지나면 수로에 기대 사는 남부인도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베일을 벗는다. 아낙네들은 빨래를 두들기고 설거지를 한 뒤 천연덕스럽게 목욕을 한다. 그 물에 양치질하는 남자들도 있다. 호수같이 넓던 물줄기는 배 두 척이 간신히 오갈 정도로 좁아진다. 강둑으로는 한가롭게 소들이 손에 잡힐 듯 지나친다.

모두 평화롭고 정겨운 모습이다. 갑판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주민들이 낯선 동양인을 힐끗거리며 쳐다본다. 누가 구경꾼이고 대상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남서부 최대의 휴양지 코발람. 한때 히피들의 안식처였던 해변에는 배들이 도열해 있다.

콜람 수로의 하우스보트

알라푸자를 떠난 하우스보트는 해가 저물면 프나카루 마을에 닿는다. 몇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염소와 닭을 키우는 마당 너머로 지평선이 아득한 곳이다. 이 외딴 마을 옆 강변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부레옥잠이 가득한 물길은 요동이 없다. 물침대 위에 누워 있는 듯한 편안한 기분이다. 일과를 마친 강변 촌락 꼬마들에게 인기 높은 것은 필기도구다.

이들은 배를 향해 웃으며 “볼펜, 볼펜”을 외치기도 한다. 여행객에게는 수로 체험이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다. 낯선 벌레가 날아다니고 사위는 고요해 새소리만 가득하니 말이다. 하지만 하우스보트 체험의 가장 큰 압권은 배 위에서 새벽을 맞는 일이다.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 오르는 강물 위에 배가 홀연히 정박해 있고, 새벽 고기잡이를 나서는 쪽배들이 그 옆을 가로지른다.

나룻배 위로는 백로가 한가롭게 날아다닌다. 편한 숙소를 마다하고 케랄라의 물길에 몸을 맡기는 것은 생애 단 한 번 겪는 독특한 체험이 이곳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긴 밤을 넘어 아침을 맞은 하우스보트는 토탈팔리를 지난다. 이곳 수문에서 아라비아해의 바다와 강물이 나뉘었다 만나기를 반복한다.

최종 목적지인 콜람 스필웨이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배 위에서 세 끼의 식사를 하고 밤을 지새우고 달콤한 낮잠을 즐기는 데 꼬박 20여 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신이 축복한 해변 코발람


코치항은 순박한 어부들의 오랜 터전이다. 바다로 나섰던 고깃배들은 해질녘이면 큼지막한 생선들을 포구에 쏟아 놓는다.
하우스보트의 여유는 남쪽 코발람(Kovalam)의 휴식으로 이어진다. 인도의 땅끝으로 치달을수록 몸은 나른해지고 눈은 신기루를 만난 듯 어지럽다. 코발람은 케랄라주 제일의 해변 휴양지로 인도인에게는 ‘신이 축복한 땅’으로 불린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코발람 해변의 전경은 아득하다. 1,000여 척의 어선이 빼곡하게 도열해 있는데, 해변과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꼭지점까지 끝이 없다.

초승달 같은 해변, 낭만적인 등대 등이 고즈넉한 코발람은 30년 전만 해도 히피들의 아지트였다. ‘토디(코코넛 술)’에 적당하게 기분이 오른 히피들이 해변에서 낭만을 향유했다. 이곳 코발람에서 인도의 남쪽 땅끝마을인 칸야쿠마리(Kanyakumari)까지는 차로 불과 1시간 거리. 인도양과 아라비아해가 만나는 성스러운 땅에서 해와 달이 뜨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곳 코발람 해변에서 석양의 바람을 맞았다.

그 자유로운 땅에 최근에는 고급 리조트가 차곡차곡 들어서고 있다. 코발람이 유럽인에게 인기를 끄는 것은 자연친화적 체험과 아유르베다(Ayurveda) 마사지 때문이다. 소마테람·마날테람 리조트 등은 몸을 치유하는 아유르베다 마사지를 테마로 한 리조트다. 이곳 리조트의 숙소에는 에어컨도 텔레비전도 냉장고도 없다.

열쇠 역시 전통 자물쇠다. 리조트 마당 가득 허브 식물이 심어져 있고 식단은 대부분 채식으로 꾸며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요가를 배우고 허브향 나는 마당에서 낮잠을 즐긴 뒤 저녁이면 온 몸에 기름을 듬뿍 바르는 아유르베다 마사지에 몸을 맡긴다. 유러피언들은 그렇게 몇 주를 머무르다 돌아가고는 한다.

코발람에서 케랄라의 주도인 인근 트리반드룸으로 나서면 살가운 풍경과 만난다. 흰 탑이 웅장한 ‘스리 파드마나바스와미(Sri Padmanabhaswamy)’ 힌두사원 앞으로는 재래시장이 펼쳐져 있다. 이곳 재래시장에서는 유독 ‘마살라’라는 향료가게가 눈길을 끈다. 무더운 날씨의 남부 인도인에게 향신료는 없어서는 안 될 보물 같은 존재다.

어느 집에 들어서든 군침을 돌게 하는 화려한 향에 취하게 된다. 좁은 도심의 골목 사이로는 세 발 달린 모터사이클인 노란색 오토 릭샤가 달린다. 오토 릭샤 외에도 버스·트럭·손수레·소·사람이 좁은 도로를 공유한다. 변두리로 나서면 코끼리도 다닌다. 평소에는 여유로운 인도인도 운전대만 잡으면 용감해진다.


(왼쪽부터)유대인 마을에서 엽서를 파는 노인, 코치 에르나쿨람의 재래시장 풍경, 트리반드룸의 스리 파드마나바스와미 힌두사원.

아슬아슬하게 끼어드는 차량과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롭게 보행하는 사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그 거리를 지나치는 남자들의 의상이 흥미롭다. 치마처럼 생긴 인도 남자들의 하의인 ‘로티’는 신분에 따라 구별된다. 흰 옷인 ‘문두’는 중간계급 이상의 남자들이 외출할 때 입으며, 색깔 있는 ‘룬키’는 하층민이 착용하는 옷이다.

계급적 차이에 상관없이 이들은 아침이면 ‘짜이’를 마시며 일상의 평화를 함께 나눈다. 인도 케발라의 감동은 구식 슬라이드를 넘기다 몇 개의 숨막히는 광경과 맞닥뜨리는 기분이다. 눈에 익은 풍경이 반복되다가도 우연히 발견한 장면에 넋을 빼앗기고는 한다. 늘 상상했던 인도의 모습 외에 또 다른 낯선 단면들이 그토록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다.

여행팁
가는 길 케랄라주까지는 직항편이 없다. 인도 민영 항공사인 제트에어웨이스(www.jetairways.com)는 홍콩 또는 방콕을 거쳐 뭄바이를 경유한 뒤 케랄라주 코치·트리반드룸까지 운행하는 항공편을 운항 중이다. 뭄바이에서 코치까지는 하루 2편 비행기가 뜬다. 이 항공사의 비행기는 비즈니스석이 수평하게 펴지는 시스템으로, 서비스도 정성스럽다.

대한항공·캐세이퍼시픽과는 항공협정이 돼 있어 서울~방콕, 홍콩~뭄바이~코치 구간 표를 함께 끊을 수 있다. 먹을거리 인도 북부 사람은 밀이 주식인 것과 달리 남부 케랄라 사람들은 쌀이 주식이다. 빵인 ‘로티’도 쌀로 만들어 먹는다. 쌀 부침개 위에 향이 약한 커리를 올리는 ‘아팜’은 케랄라주의 대표 음식으로 우리 입맛에도 맞다. 야채인 ‘썹지’나 시큼한 인도 조미료인 ‘처트니’와 곁들여 먹으면 맛있다.

기타 정보 인도관광청(www.incredibleindia.co.kr)과 케랄라관광청(www.keralatourism.org)을 통해 숙소 및 자세한 현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코치의 여행자 숙소는 코치항 뒷골목에 밀집해 있다. 신시가지인 에르나쿨람의 드림 호텔 등은 새로 개장한 부티크 호텔이다. 콜람의 하우스보트는 1박(2인1실)에 5,000~8,000루피 정도. 환율은 1루피=약 30원.

현지 호텔이나 거리 환전상에게 1달러를 약 50루피에 환전할 수 있다. 물은 반드시 생수를 사 마셔야 하며, 최근에는 천연 재료를 쓰는 ‘히말라야’ 화장품이 인도에서 인기가 높다.


200904호 (200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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