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畵手 조영남 토크쇼 “무작정 만나러 갑니다” 23·끝 - 만화가 이원복 교수 

 

기획·정리 박미소 월간중앙 기자 [smile83@joongang.co.kr] 사진 최재영 월간중앙 사진부장 [presscom@hanmail.net]
다른 듯 닮은 두 사람, 조영남과 이원복 교수가 서울 강남 청담동의 레스토랑에서 마주앉았다. 묘하게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처음 출간한 책 <먼 나라 이웃나라>가 나온 지 벌써 20여 년이 지났지만 타고난 입담꾼인 이 교수는 지칠 줄 모른다. 유럽편 6권에 일본·미국·우리나라 이야기까지 덧붙인 이원복 교수가 이제는 중국 역사를 옮기려고 팔을 걷어붙였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 저편에 치열한 워커홀릭이 숨어 있는 모양이다.

<먼 나라 이웃나라>를 읽으며 바다 건너 미지의 대륙에 대한 꿈을 키우던 아이들이 이제는 성장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청장년이 됐다. 그 사이 강산이 두어 번 바뀌었고, 나라는 선진국 반열을 넘볼 정도로 성장했다. 그래도 작가는 펜을 놓지 못한다.

“이제 ‘강해진 대한민국’이 보는 세계 역사를 다시 써야죠.”

만화를 그릴 수 있어 행복한 남자, 이원복 교수의 이야기다. 방송국에서 스쳐 지나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는 처음이라는 조영남과 이 교수. 두 사람은 2학번 차이의 대학 선후배다.

조영남 왜 우리가 인연이 없었을까? 웬만하면 한 번쯤 인사했을 법도 한데. 나는 64학번인데.

이원복 저는 선배보다 한 살 어린데 재수해서 66학번이에요. 조 선배는 음대고 나는 공대니 학교에서는 한 번도 못 봤겠죠.

조영남 최근 나는 <먼 나라 이웃나라>를 다시 봤는데 처음에 못 느꼈던 것들이 보이더라고.

이원복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지금 그 책을 100% 다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조영남 수정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로?

이원복 네. 시각이 완전히 다르잖아요. 연재하던 당시는 1980년대로 후진국에서 간신히 중진국으로 들어왔을 때여서 지금 보면 너무 선망하는 시각이 많아요. 이제는 우리도 그들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봐야 한다는 거죠. 그들이 가진 것은 우리도 거의 가지고 있거든요.

조영남 통째로 바꾼다는 건가? 그림도?

이원복 네. 대작업이죠.

조영남 누구와 상의하며 집필했어요?

이원복 저 혼자 했죠. 1981년부터 1986년까지 <소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게 <먼 나라 이웃나라> 유럽 6권이에요. 독일로 유학 가서 연재하느라 만화를 그려 우편으로 보냈죠. 1984년 교수가 되어 귀국한 뒤 15년간은 세계사와 한국사를 학습만화로 그리는 작업에만 열중했어요.

그런데 1997년부터 일본 들락날락하다 보니 일본도 해야 할 것 같은 거예요. 일본편 완성 후에는 우리나라편을 만들었고요. 사실 <먼 나라 이웃나라> 자체가 우리를 우리 시각으로 보는 것보다 다른나라를 쭉 보면서 ‘이 나라는 이렇고, 저 나라는 저런데 우리는 왜 이런가’ 반추해보자는 의도였죠. 한국편 나온 후 제가 뉴욕으로 교환교수로 가있다 보니 이 나라는 또 다른 거예요.

그래서 미국편 3권을 내고 나서 앞으로 <먼 나라 이웃나라>는 만들지 않겠다 하고 손을 끊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중앙일보>에서 중국편을 하자고 제안하더라고요. 방대해서 손도 못 댈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이때 아니면 언제 하나’ 싶기도 하더군요. ‘체력이 아직 남아있을 때 하자’는 심정으로, 마치 유작 만들듯 하고 있어요. 청조 말기부터의 근·현대사를 다루죠.

조영남 그런데 유럽편이 느닷없이 네덜란드부터 시작되니까, 이거 완전 웃기는 순서야.

이원복 (웃음)그게 왜 그렇게 됐느냐 하면, 쭉 연재하다 보니 네덜란드편 분량이 적어 100쪽밖에 안 됐어요. 책 한 권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마침 프랑스편을 시작하면서 앞에 100쪽 정도 개괄이 들어갔거든요. 미술사부터 시작해서 프랑스문화 전반을 이야기하는 부분, 그것까지 합치니 딱 1권이 되더라고. 그래서 네덜란드가 1권이 된 거예요.

조영남 이원복이 제일 처음 만든 만화가 뭐였지? 차례대로 이야기해 보자고.

이원복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신문사 주간인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와 같이 신문사에 놀러 갔어요. 친구가 “아버지, 얘가 신문반에서 만화 그려요” 하고 소개했죠. 그러자 친구 아버님이 대뜸 “너 아르바이트 해봐라” 하면서 미군부대에 돌아다니는 명작만화를 베껴오라고 하시더군요.

얇은 종이 대고 그대로 그려오라는 거였죠. 만화는 필요한데 작가한테 맡기면 원고료가 많이 드니까 그랬어요. 제가 그려오면 번역한 말풍선을 붙이는 식이었죠.


네덜란드편이 1권 된 사연, “분량이 모자라서…”

조영남 그러니까 데뷔한 작품은 뭐였지?

이원복 <아이반호>. 월터 스코트의 소설을 명작만화로 만든 미국 작품인데, 제가 그걸 전부 베껴 신문에 낸 거죠. <두 도시 이야기> 같은 미국 작품들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일본만화도 베껴오라는 거예요. 일본만화는 대고 그리는 게 아니라 보고 그렸어요. 그렇게 한 3~4년 했죠.

1966년에 대학교 들어가서는 자존심도 있으니 제가 직접 창작했고요. 대학생이다 보니 원고료가 싸서 신문만화 전체를 제가 다 그렸어요. 하루에 3~4개씩 연재했죠. 하나는 이원복, 하나는 이상권, 하나는 성창경, 뭐 이런 식으로 친구들 이름을 필명으로 써가면서요.

조영남 그 밖에 이름을 댈 수 있는 것으로는 어떤 게 있지?

이원복 순정만화·공상만화·명랑만화 등 별 걸 다 했어요. 혼자 방송국 프로그램을 다 만든 셈이지. 그러다 1975년 독일에 가서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이라는 유럽여행기를 <새소년>이라는 잡지에 연재했죠. 그 이름도 제 동창생들 이름이에요. 나중에 그 작품을 읽어보니 오류투성이더군요.(웃음)

그 다음 1981년에 시작한 게 <먼 나라 이웃나라>고, 귀국 후에는 <학습만화 한국사>와 <학습만화 세계사>를 만들었는데, 이 두 작품은 그림은 안 그리고 ‘콘티’만 썼어요. 만화에서는 콘티가 거의 90%를 차지하거든요.

그 뒤 1987년 6·29 민주화선언으로 좌파·우파 난리가 나자 두산의 박용성 회장이 “자본주의·공산주의가 뭔지 가르쳐 달라”고 해서 송병락 교수와 같이 이데올로기를 만화로 만들었어요. 1990년에 만든 <자본주의 공산주의>, 이게 최초로 베스트셀러 종합 1위가 된 거예요.

그러다 다시 <먼 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를 미국편까지 만들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 책 시리즈는 선진국 중심이잖아요? 내가 보기에는 우리나라도 선진국 반열에 들어왔는데, 진정한 선진국민은 세계를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동안 내가 만든 책이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 위주로 편협하게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 들자 지역의 이야기도 만화로 만들고 싶어져 <가로세로 세계사>를 쓴 겁니다. 발칸반도편·중동편·동남아시아편으로 구성돼 있죠. 또 중국편을 시작하면서 <먼 나라 이웃나라>도 뒤집어엎자는 생각에 다시 만들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아직 ‘오프 더 레코드’예요.(웃음)

조영남 고등학교 시절부터 합하면 거의 50년이구먼.

이원복 반 세기죠.

조영남 역사를 한눈에 관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교육 시스템도 보편적 역사를 최소한만 가르치는데, 사실 우리도 학교 다녀봤지만 건성건성이잖아? 역사만화를 그리면서 이원복 개인의 삶을 개척했을 거 아니오. 당신은 나보다 어떤 점에서 위대하지?

이원복 없죠. 그래서 가끔 선배가 부러울 때가 많아요. 조 선배님이나 저나 소위 ‘딴따라’ 기질이 강해요. 비슷한 게 많아요. 선배도 화수(畵手)라고 해서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하는데, 사람들도 저한테 꼭 물어봐요. 왜 그렇게 이 분야 저 분야 왔다갔다 하느냐고. 그런데 사실 저는 만화나 건축이나 디자인이나 똑같다고 생각해요.

종이에 없던 것을 그리는 거잖아요? 내 아이디어, 내 꿈을 그리는 거죠. 다만 건축은 제한이 많아요. 무너지면 사람이 죽으니까. 만화는 그럴 염려가 없으니 자유롭잖아. 그래서 친구들이 부러워해요.

조영남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하필 역사냐’ 바로 이거야. 왜 그 역사의 흐름을 탔느냐는 거지.

이원복 문화충격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1975년 독일에 갔어요. 1974년 서대문에서 구파발 가는 일직선 도로를 건설하는데 그 위에 독립문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옮기라”고 지시해 이 문화유적을 들어 옮긴 거죠. 역사의식이 겨우 그 정도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맞는 것이었어요. 덕분에 오늘이 있는 것이고요.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희생되는 부분도 생기니까요. 우리나라가 발전하니 청계천도 복원하고 옛 모습이 다시 살아나잖아요?


독립문 옮기는 한국과 돌길도 남겨두는 독일


조영남 나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한강변을 지나는데 모든 집이 한강 쪽에 부엌을 만들었더라고. 한강이 북향으로 보이니 전부 다 창문 작게 만들고 부엌을 내 버린 거야. ‘뷰(view)’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거야. 그래서 나는 동작동 현대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창문을 크게 만들었어.

이원복 그 점도 저와 똑같네요. 1988년 장미아파트 56평짜리를 샀는데 그걸 고른 이유가 딱 하나였어요. 강변이 보이거든요. 한강다리 10개가 보이는 서울 시내 유일한 장소였어요.

조영남 아니, 이 교수. 강 경관이 중요하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 배웠어?

이원복 외국 가보면 집값 제일 비싼 곳은 경관이 좋은 집이잖아요? 정말 그때는 강북이든 강남이든 강바람 춥다고 창을 조그맣게 냈죠. 내가 장미아파트에 이사가서 다 헐어버리고 통 유리창을 만들었어요.

조영남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를 배우지 않으면 안 돼.(웃음) 내가 미국 가서 안 봤다면 지금같이 강변의 좋은 집을 고를 수 있었겠느냐고.

이원복 그렇죠. 아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그런 1970년대에 제가 독일에 갔는데 동네마다 역사가 보이더라고요. 마차가 타고 지나간 돌로 된 길 위로 사람이 다니고, 괴테가 시를 쓴 방이 여태껏 남아 있어요. 우리는 식민지 잔재부터 시작해 역사란 잊어버리고 없애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유럽에 가보니 그게 아닌 거예요. 역사를 재발견한 거죠.

조영남 오랜만에 말귀 알아듣는 사람을 만났네. 최근에 와인 관련 책도 냈던데, 왜 관심을 갖게 됐지?

이원복 원래 책 쓸 생각은 없었고, 마시는 것만 좋아했어요. 어느 날 보니 와인을 다룬 일본만화가 들어와 이 문화를 왜곡하고 있더라고요. 일본사람들은 사실 알게 모르게 뼛속 깊이 사무친 서양 콤플렉스가 있어요. 프랑스·독일이라면 껌뻑 죽어. 자기 돈 내며 사는 와인을 완전히 경배하면서 마시더군요.

고급문화의 상징처럼 미화하는데, 그거 아니거든요. 술은 술이지. 독일 유학시절 돈이 없어 맥주만 마셨어요. 나중에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면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죠. 미국에 가니 술만 따로 파는 가게가 있는데, 그 넓은 데가 와인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아, 와인이 이렇게 대단한 거구나” 싶었어요. 10달러, 20달러짜리 홀짝홀짝 마시면서 와인을 익힌 거죠.

조영남 역사를 배우면 그만큼 써먹을 데가 있어. ‘왜 인간이 저렇게 사느냐’면서 관조할 수도 있고 말이야. 내가 이 늘그막에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왜 우리는 역사가 증명한 것들을 잊어버리고 꼭 다시 반복하는 거지?

이원복 잊어버려서 그런 게 아닙니다. ‘나이니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조영남 캬~ 내가 역사의 주인공이니까?

이원복 나폴레옹도 그렇고, 히틀러도 그렇고… 역사의 실패가 항상 반복된 것은 ‘나이니까’라는 생각 때문이죠. 이 억겁을 통해 딱 한 번 사는 인생, 남들은 몰라도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 즉 자기에 대한 확신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그래요. 저도 제일 충격을 받았던 것이 대학교 떨어져 재수한 일이었어요.

조영남 당시 경기고 나와서 대학교 떨어진다는 것은 무지하게 콤플렉스 아니에요?

이원복 사람 취급 못 받았지. 그때 경기고등학교를 480명이 졸업했는데 360명이 서울대에 갔어요. 그때 받은 느낌이 그거에요. ‘나인데도?’ 남도 아니고 내가 떨어지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죠. 물론 재수하며 얻은 것도 아주 많아요.

조영남 그런데 왜 하필 건축과예요?

이원복 사실 내가 문과 기질이나 딴따라 기질이 많아요. 시도 좋아하고 별별 것을 다했지. 그런데 우리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공주의라고 해서 경기고 나와 서울대 공대 못 가면 사람 취급을 안 하는 분위기가 많더라고. 나는 대학 떨어졌으니 3수를 해서라도 서울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갈 데가 없어. 건축과 학생 하면 화이트 칼라에 머리에는 포마드 쫙 바르고, 언덕 위의 하얀 집 그릴 줄 알고, 그래서 건축과를 선택했지. 한데 웬걸, 물리·화학·방정식·미적분만 시키는 거예요. 초반부터 F학점으로 쫙 깔았죠.

조영남 내가 보기에는 시인 이상도 건축과를 갔던 게 당시 다른 선택권이 없어서 그랬던 거야. 수학에 또 천재였으니까. 내가 이원복을 위해 변호해야 해. 통찰력이 없으면 만화를 못 그려. 전체를 다 볼 수 있어야 해. 역사만화를 그리려면 역사를 축약해 그려야 하잖아?

머리 나쁜 사람은 그걸 못해. 만화가가 위대한 것은 같은 축약이라도 재미를 넣는다는 점 때문이야. 아주 창의적이지. “너 만화 그리냐”는 말이 “너 웃기냐”는 말과 같게 쓰이잖아? 잘못된 편견이야.

이원복 그래도 많이 좋아졌어요. 1984년도에 교수로 부임했는데 동료교수가 “교수가 만화 그리는데, 괜찮아요?” 그러더라고. 사실 엄청나게 많은 미대 교수들이 먹고살려고 만화를 그렸어. 절대 비밀로 했지. 저는 반대로 오자마자 만화 그린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더니 딴죽 거는 사람이 없어요.


배고프던 시절, 만화로 인해 자유로울 수 있었다

조영남 만화 그리던 시절로 돌아가보자고. 초등학교는 어디서 다녔어?

이원복 세 군데를 옮겨 다녔어요. 대전에서 2년, 마포에서 2년, 동대문초등학교에 2년 다녔죠. 집이 못사니 단칸 셋방으로 이사를 다닌 거지. 저는 가난이 뭔지 진짜 알아요. 다만 원한으로 안 삼았다뿐이지.

조영남 그래서 고등학교 때 만화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로군. 나도 고 3때 미술부장 하면서 교지 표지부터 삽화까지 다 그렸어.

이원복 저도 중학교 때 미술부 하다 집어치웠어요. 다른 애들은 일제 도구 들고 다니는데, 나는 도구 살 돈조차 없는 거야. ‘쪽 팔려서’ 못 나갔지.

조영남 고등학교 때 신문사 만화 아르바이트를 했으면 돈맛을 알았겠다, 그렇지?

이원복 그렇죠. 고등학교 때부터 누구한테 1원 한 장 받아본 적이 없어요. 내가 금전적으로 자유로우니 가족 누구도 내게 간섭을 못하는 거죠. 그래서 정말 자유롭게 살았어요. 마누라한테만 빼고.

조영남 지금은 사람들이 당신을 역사만화 그리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만화가라고 하기에도 좀 그래.

이원복 많이들 물어봐요. 교수로 불리기를 원하느냐, 만화가로 불리기를 원하느냐? 나한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사실 직업적으로는 만화가가 훨씬 좋아요. 정력적이고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직업이거든. 나는 원래 태생이 만화쟁이고.

조영남 다시 역사 이야기로 돌아가자고. 문화적 충격 때문에 역사에 주목했다는 거지?

이원복 독일에서의 경험도 그렇고 제가 하는 만화는 소위 교양만화라고 해요. 그림만 보면 나보다 잘 그리는 사람이 엄청 많은 거야. 콘텐츠로 ‘맞짱’을 뜰 수밖에. 그러다 보니 제일 무궁무진한 소재가 역사예요. 파고 파도 끝이 없거든. 중국의 청조 역사만 가지고 500쪽짜리 책이 4권이 나와요.

조영남 유럽문화를 보고 역사공부를 시작한 건가?

이원복 공부했다기보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다 공부가 됐어요. 유럽에서 공부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온 아이들과 맥주를 마시며 놀다 보면 내가 전혀 모르던 그들의 역사 이야기가 나와요. 정권 치하에서의 저항운동, 스탈린 이야기 등. 당시 유럽에 간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여행을 했어요.

지금 아니면 못 간다 그러면서요. 가난한 학생이니 차 한 대 가지고 유럽을 돌며 못 가는 나라 빼고 다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종합적인 역사가 보이더군요. 스페인이 유럽 제일 서쪽인데 동양적 분위기가 많아요. 왜? 이슬람이 700년이나 지배했으니까. 궁금한 것은 찾아보고 물어보면서 산발적인 지식이 꿰어져 목걸이가 되더군요.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유럽 역사의 특징이에요.

조영남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지구상에서 가장 독특한 민족이 되도록 만든 걸까?

이원복 순혈주의. 우리나라 책을 쓰면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고 생각했는데, 지리적 위치 때문인 것 같아요. 왜적 침입이 3000번 이상이었는데 왜구·몽골·여진족·말갈족 등이 우리나라를 짓밟았죠. 만약 이들에게 흡수됐다면 우리나라의 정체성 자체가 사라졌겠죠. 살아남기 위해 가능하면 외국인을 막고, 다른 핏줄을 배제한 것입니다.

조영남 당신과 나는 지금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요순시대를 살고 있는 거야. 그거 알고 있었어요?

이원복 그럼요. 제일 행복하죠. 인류 역사 5000년 과정을 한 인생에 한꺼번에 겪는 세대예요. 원시시대부터 농경·산업사회까지. 우리나라 50, 60대들은 짚신부터 발리 구두까지 신어본 세대예요. 조금만 노력해도 쑥쑥 빨리 크는 시대였지. 요즘 아이들은 이미 파이가 작아졌기 때문에 우리만큼 행복을 누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조영남 내가 잠시이기는 해도 통일 조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더라고. 내가 태어난 후 6년 동안은 38선이 없는 통일 조국 삼천리 강산이었어. 나 자신이 기막힌 역사적 인물인 거지.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들어섰다고 했는데, 그 느낌은 언제 받은 거야?

이원복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요. 다만 정치수준이나 몇 가지는 빼고요.


“앞으로는 동양의 가치가 평가받는 시대 올 것”

조영남 나와 참 생각이 비슷하다. 정치판에는 예의도 없고 배려도 없어. 정치인들이 총리를 다그치면서 희희낙락한다는 것이 선진국 수준이냐고? 어떻게 우리가 이만큼 성장했는지 모르겠어.

이원복 제가 볼 때는 기업들 덕분이에요. 제가 1989년에 처음 소련에 가서 놀랐던 게 있어요. 당시 안보문제 이런 것 때문에 못 가던 시절이었는데 “공산주의 국가 현실을 안 보고 어떻게 비판하느냐”고 주장해서 가게 됐죠.

한국 국민은 그 나라 발도 못 들이던 시절인데 모스크바 공항 카트마다 ‘삼성’ 이름이 다 박혀 있더라고요. 기업은 국민이든 정부든 훨씬 앞서 나가게 되어 있어요. 생존해야 하니까. 요즘에는 세계 어디를 가든 현대·삼성·LG 브랜드를 볼 수 있죠. 그런 것을 보면 기업들이 참 고마워요.

조영남 그거 한마디 이야기해줘. 우리나라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나라가 있을까?

이원복 우리가 특정 나라를 롤 모델로 하는 시기는 이미 지난 것 같아요. 이미 강력한 국가가 됐지만 선진국이라고 보기 힘든 부분 중 하나가 예의 없는 국민이라는 점. 이건 상대방에 대한 배려거든요. 술에 취해 경찰에 덤비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조영남 미국에서는 경찰이 눈 내리깔라고 하면 그대로 해야 해. 덤비지 못해.

이원복 공권력에 권위가 있는 거죠. 우리가 반드시 갖춰야 할 부분이에요. 앞으로 10년, 20년 이내에 나타날 가장 중요한 화두가 ‘동양의 재발견’이에요. 동양적 가치가 각광받는 시대가 온다는 거예요. 서양이 동양을 추월한 것은 1776년이라고 봅니다. 그 전에는 세계경제의 3분의 1을 중국이 차지했고, 모든 부가 동양과 중동권에서 나왔어요.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오고 미국의 독립선언이 나와요. 서구식 자본주의가 본 궤도에 오르고 시민민주주의가 제 자리를 잡았다는 거죠. 그런데 그게 200년 남짓밖에 안 돼요. 실제로 150년 동안 대영제국이 등장하며 세계를 완전히 재편해 버리잖아요. 요즘에는 미국 발 경제위기로 인해 서구식 가치가 다시 무너지고 있어요. 그것을 대체할 가치가 남을 배려하고 공동체 의식을 중시하는 동양적 가치라는 거죠.

조영남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 역사학적 시각에서 보아도 개인에게 행복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까?

이원복 글쎄…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 아닌가? 저는 굉장히 낙천적이에요. 어떤 일이 생겨도 ‘그럴 수 있지 뭐. 재수 없네’ 이런 식.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고 하는데, 낙천적으로 생각하면 편해요.

조영남 오늘 이야기하면서 생각해 보니 대한민국, 정말 재미있는 나라야.

이원복 세계에 유례가 없는 나라예요.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것 20가지’ 이걸 주제로 강의한 적도 있어요. 서양 사람들이 처음 한국에 오면 입국하는 순간부터 놀라워 입을 딱 벌리고 나온다는 거야. 유명하지도 않은 나라 공항에 프로펠러기 한두 대쯤 있는 줄 알았는데 세계 최고의 공항인 거지.

서울에 진입해서는 한강 보고 또 놀라지. 도심을 흐르는 강 중 가장 넓은 강 중 하나가 한강이거든요. 또 그 강변도로를 가득 채운 자동차를 보면 기절한다고. 게다가 그 차의 95%가 국산 차, 게다가 더러운 차가 하나도 없이 다 깨끗하니까.

조영남 내가 운전면허를 잃어버려서 경찰서에 갔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경찰서에 갔는데, 글쎄 “조영남 님, 맞으시죠?” 확인하고 따닥따닥 치더니 5분 만에 모든 게 다 처리돼.

이원복 독일 대학에서 증명서 하나 떼려면 며칠이 걸려요. 담당자가 없다느니 휴가 갔다느니…. 그런데 독일 애들이 한국에서 증명서 떼려고 보면 아예 자판기처럼 자동화 설비가 되어 있어. 대단해요.

조영남 마지막 회를 진행하는 마당에 마침 정말 코드가 잘 맞는 친구를 만났어. 나와 생각이 너무 잘 맞아. 나도 밑바닥부터 지금의 대한민국까지 다 살아봤잖아?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 예쁜 여자들 두고 떠나가는 것은 좀 서운하지만.

200912호 (200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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