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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발굴 - “중간에 잠깐 실례했습니다” 

50년간 잠들어 있던 43세 젊은 박정희의 육성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5·16 직후 첫 방미 때 기자회견 음성파일 공개…연설 도중 원고 잘못 읽어나가자 두 번의 사과, “군인으로서 솔직담백하게 얘기하고 싶다”

▎1961년 11월 16일 미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뒷짐을 진 채 답변하는 박정희 의장.



“당초에 잠정적으로 군… 군인들을…. 실례했습니다. 무엇보다 긴급한 것은 우리 민족을 괴롭히던 구태와 부정을 뿌리뽑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중간에 잠깐 실례했습니다.” 50여 년 전 목숨을 걸고 국가 권력을 쟁취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도 미국의 베테랑 기자들 앞에서는 긴장했던 걸까?

1961년 11월 16일 자신의 첫 방미 도중 미국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NPC)에서 행한 40분 남짓한 연설 도중 박 의장은 두 차례나 “실례했습니다”라는 사과의 말을 한다. 미리 준비한 원고를 잘못 읽어 내려간 까닭이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또 이후 18년간의 장기 집권 동안 그가 이렇게 ‘실례’라는 단어를 연거푸 입에 올린 경우는 없었을 듯하다.

역사의 대부분은 문자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때로는 영상과 음성기록으로도 남는다. 문자가 전하지 못하는 현장의 생생함을 이번에 <월간중앙>이 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으로부터 확보한 육성 자료는 오롯이 전해준다.

<월간중앙>은 박근혜 대통령 첫 미국 방문을 앞두고 50여 년 전 부친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11월 16일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방미했을 당시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행한 연설과 기자회견 내용이 담긴 음성파일을 입수해 처음으로 공개한다.[음성파일은 월간중앙 홈페이지(http://jmagazine.joins.com/monthly) 에서 직접 들을 수 있다.]

박 의장의 방미 당시 한국은 가난에 찌든 변방의 나라였다. 실업률 40%에 1인당 국민소득은 100 달러가 채 안 됐다. 궁벽한 나라살림을 반영하듯 그는 외국의 민항기와 군용기를 번갈아 타며 네 번의 기착 끝에 워싱턴에 입성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43세의 군인이었던 박 의장의 육성에서는 피곤에 지킨 기색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설시간 40분, 기자회견 20분 정도에 걸친 NPC 행사에서 어떤 질문에도 흔들림 없는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군인다운 풍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도 ‘군사정변’을 벌인 군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더구나 그 자리는 세계 최강 미국의 수도에서, 그것도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기자들의 모임인 내셔널프레스클럽(NPC)이다. 기자들은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착용한 작고 깡마른 체구의 동양의 사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뜯어보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후진국을 대하는 강대국의 오만과 편견이 행사장을 가득 채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긴장한 탓인지 연설 중간에 일부 원고를 건너뛰는 바람에 문맥이 꼬였다. 그때마다 박 의장은 반사적으로 “실례합니다”라면서 청중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실 그런 태도는 나중에도 그가 자주 보여준 스타일이었다. 박정희 의장의 대화법은 직설적이고 숨김이 없다. 상대방의 진심에 호소해 자기가 원하는 답변을 이끌어내는 설득력 있는 화법을 구사했다. 연설에 앞서 그는 “군인으로서 야전에서 부대 장병들에게 하듯이 솔직담백하게 여러분과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고 친근하게 다가섰다.

‘혁명’의 배경과 미국 원조의 필요성을 강조

박 의장은 이 연설에서 자신의 ‘혁명’의 배경을 설명하고, 미국의 원조 필요성을 역설했다. 연설 모두에 그는 부패가 나라를 좀먹고 정치권과 정부는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현실에서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음을 설명한다. 또 국가 경제가 쇠퇴하고 공산주의는 날로 확산하는 상황이 그 결단을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인들은 일본 점령하의 무자비한 군정의 뼈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고 전우들과 본인도 군사혁명을 원치 않았다”고 전제하면서도 “우리들은 쿠데타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군사정변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자신들이 ‘군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도 두 차례에 걸쳐 했다. 그러면서 1963년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 군으로 복귀할 계획임을 거듭 천명했다.

그는 또 한국이 추진 중인 5개년 경제개발계획 등 산업화·근대화 플랜을 설명하면서 미국의 경제적 지원이 시급함을 일깨웠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동북아 군사동맹(한·미·일) 체결 가능성에 관한 질문도 나왔다. 이에 대해 박 의장은 “현 단계에서 동북아에서 군사동맹 체결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한국, 일본, 자유중국 등 국가들이 미국과 개별적인 방위동맹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나라들이 별도의 군사동맹기구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경제적인 제휴는 필요하다”며 경제와 군사 협력을 분리시키는 입장을 취했다.

나아가 박 의장은 이 연설에서 “미국의 성의 있는 경제 및 군사 원조가 한 푼도 결코 낭비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방미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마침 당시는 베트남전쟁 초기로 미국은 우방국의 참전을 목말라 했다. 박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한국이 강력한 반공국가로서 아시아 안보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의향이 있음을 내비쳤다. 더불어 한국의 당면과제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군사력 유지와 경제 재건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베트남전 파병을 미국의 경제 원조를 이끌어내는 지렛대로 활용했다.

케네디 대통령과의 고단한 담판을 거쳐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낸 한국은 지금 세계 15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국가로 성장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유일한 나라로 발돋움했으며, 세계 질서를 짜는 데도 참여한다.

50여 년 전에 아버지가 갔던 길을 5월이면 그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뒤따른다. 이번 방미에서는 과거와 같은 경제 원조나 파병이 이슈가 아니다. 북한 핵 위협에 맞선 한미 공조 강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등 대북정책 조율, 대선 공약인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협상 등의 현안이 논의된다. 아버지가 빈손으로 나선 방미길에서 산업화의 밑천을 챙겨왔다면 그 딸은 어떤 과실을 안고 돌아올까.

201305호 (201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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