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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② - 나도 몰랐던 비범한 재능 일깨운 3인의 위대한 스승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 

글·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 사진·김현동 기자
칭찬과 격려의 대가 캐서린 베스트, 친딸처럼 보살펴준 마리카 베소브라소바의 자상한 훈육, 슈투트가르트 통해 세계적 비상 도운 마르시아 하이데의 혜안과 통찰력

▎1986년 사상 최연소의 나이에 250년 전통의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오디션을 통과한 강수진은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세계 최고의 발레무대에서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시민들은 발레리나 강수진을 통해 한국이란 나라를 알았다. 1986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한 그는 ‘캄머탠저린(궁정무용수)’ 칭호를 받았을 정도로 독일인의 존경과 사랑을 얻었다. 면책과 불체포특권 등 ‘인간문화재’ 대우를 받는다. 혹독한 연습과 절제된 삶의 자세, 타고난 예술적 감성이 그를 세계 최고 발레리나로 만들었다. 그 성공의 배경에는 3인의 스승이 존재했다. 캐서린 베스트,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마르시아 하이데는 어떤 탁월한 가르침으로 그를 일깨웠는가?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의 예술적 DNA는 그의 외조부 구본웅(1906∼1953)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구본웅은 누구인가? 일제시대 대표적 잡지 <개벽>의 편집장을 지냈고, 출판사 창문사를 세운 언론인 구자혁의 아들이다. <개벽>은 천도교를 배경으로 한 잡지로, 필연적으로 일제에 대한 항쟁을 그 기본노선으로 삼았다. 가혹한 탄압을 받으며 1926년 끝내 폐간되고 말았다. 구자혁의 아들 구본웅은 세 살 때 불의의 사고를 당해 평생 ‘곱사등이’의 삶을 살아야 했던 장애인이었다. 그는 한국의 야수파, 표현주의의 대표적 작가로 인정받은 당대의 미술 천재였다.

그는 일제시대 최고의 서양미술교습소였던 ‘고려미술원’에서 회화수업을 받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니혼(日本) 대학 전문부미학과에서 수학한 후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 본과를 졸업했다. 이 천재가 ‘천재’에 그치지 않고, ‘따뜻한 인간’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시인 이상과의 ‘불멸의 우정’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1. 강수진이 예술적 DNA를 물려받은 외조부 구본웅(왼쪽)과 천재시인 이상. 두 사람은 평생에 걸쳐 우정을 나눴고, 구본웅은 불우했던 이상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그에게 헌신했다. 2.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화가 구본웅의 역작 ‘친구의 초상’. 거침 없는 필력과 바탕화면의 독창적인 질감이 돋보이며, 작품의 주인공은 시인 이상이다.
그는 이상에게 무한한 신뢰와 물심양면의 지원을 베풀었다. 생의 상당기간을 폐인처럼 살았던 오랜 친구 이상을 아버지의 회사 창문사 출판부장에 취직시켜 호구를 돌보았고, 수시로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상이 폐병으로 죽기 전 요양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했던 당사자가 바로 구본웅이었다. 그는 이상의 둘도 없는 친구로, 든든한 후원자로, 한없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며 그의 삶을 보듬었다. 불구의 몸으로 50세를 채 못 넘기고 죽을 때까지 불우한 동료 예술인들에게 무한히 베푼 ‘사랑 넘치는’ 삶을 살았다.

구본웅의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 중인 <친구의 초상>일 것이다. 그는 내면에 품고 있던 울분과 불안을 거침없는 필력과 바탕화면의 독창적인 질감 속으로 한꺼번에 쏟아냈다. 등단 후 ‘우리나라 최초의 야수파 화가’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바로 시인 이상이었다.

구본웅, 그 예술가의 피는 강수진의 어머니 구근모 여사를 거쳐 세 자매에게 그대로 대물림된 듯하다. 여진, 수진, 혜진. 각각 두 살 터울인 이들 중 발레리나 수진을 제외한 두 자매는 모두 하피스트다. 첫째인 여진은 서울대 음대와 네덜란드 왕립음악원을 졸업, 현재는 미국에서 연주생활을 하고 있다.

동생 혜진 역시 서울대 음대와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음대에서 연주학 석사학위를, 프랑크푸르트 국립음대에서 전문연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석사학위를 수석으로 마치고 빈 국제하프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하는 등 높은 수준의 연주력을 보여줬다. 포르투갈 국립교향악단의 솔로 하피스트로 활약하다 지금은 독일에서 왕성한 연주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중1 시절 스승 캐서린 베스트가 준 영감

강수진은 초등학교 때 피아노와 한국무용을 공부했고, 발레를 시작한 때는 선화예중 입학 이후부터다. 발레는 뼈가 굳기 전, 초등학교 입학 전에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학 1학년 시절 강수진은 뼈가 굳어 몸이 힘들었고,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아 수업은 따분했다.

“연습실에서 바를 잡고 멍하게 서 있거나 스텝을 밟다 졸기까지 했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에 탈의실에 몰래 숨어 아이스크림같은 단 음식에 탐닉해서 체중도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많이 나갔어요. 입학 후 1년간의 발레 수업은 완벽한 실패였죠. 토슈즈만 신고 있었을 뿐, 발레와는 좀처럼 친해질 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역시 좋은 스승은 각성과 영감을 선물한다. 중학교 2학년 때 만난 외국인 교사 캐서린 베스트가 문득 그 앞에 나타났다. 그의 등장은 하나의 계시와 같았다. 날씬한 몸매에 가냘픈 팔과 다리, 하얀 얼굴에 눈부신 금발을 지닌 전형적인 서구 미인. 캐서린 베스트를 처음 본 순간, 강수진의 입에서는 신음소리와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제게는 좀 지독한 심미벽이 있었어요. 음식을 먹거나 옷을 입을 때도 예쁘고 아름답게 보이려고 노력했죠. 캐서린 베스트는 무용가 이전에 한 사람의 여인으로 제게 다가왔어요. 용모와 심성이 너무도 고운 분이었죠. 그는 학생들을 다스리고 가르치는 올바른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악착같이 매달려서 끝장을 내는 아이였어요.

반면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일은 어떤 강압이 있더라도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베스트 선생은 강압하지 않았어요. 칭찬이 그녀의 무기였습니다. 평상시보다 조금 더 열심히 연습해온 날에는 굉장한 칭찬과 격려가 쏟아졌지요. 선생님을 만난 후부터 아이스크림을 끊었고, 수업 시간에 조는 일이 사라졌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발레의 매력에 흠씬 빠져들기 시작했다. 밤에 잘 때도 토슈즈를 벗지 않았다. 다리 스트레칭을 하다 잠이 들어 다음날 근육을 푸느라 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발레를 한답시고 공부를 소홀히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밤 11시까지 혼자 발레 연습을 하고 집에 와서는 다시 책을 펴 들고 예습과 복습을 했다. 쏟아지는 졸음을 쫓기 위해 ‘호랑이 연고’를 눈가에 바르며 버티기도 했다. (호랑이 연고는 1920년대 장뇌와 박하유를 주원료로 중국에서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타박상에 바르는 자극성 강한 약이다.)

“발레 실력과 함께 성적도 급반등했습니다. 선화예고 1학년 때 모나코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모든 과목의 점수를 90점 이상으로 유지했고, 석차도 전교 20위를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발레리나가 무대 위에서 환하게 빛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양질의 기름과 맑은 산소’가 필요하죠. 베스트 선생님의 격려와 진심어린 칭찬은 제게 좋은 기름, 맑은 공기의 역할을 했습니다.”

발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레리나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안나 파블로바(1881∼1931). 발레리노 바슬라브 니진스키가 비운의 천재이자 발레계의 아버지라면,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는 천재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누리며 떠나간 발레계의 어머니다. 10세 때 러시아 황실 발레학교에 입학한 그는 유달리 긴 엄지발가락 때문에 푸앵트 동작(Pointe: 발레의 기본 동작인 까치발)을 할 때마다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약간 졸린 눈을 뜨고 있는 그녀의 외모 역시 평균 이상은 아니었다.

완벽한 체형과 외모의 발레리나 강수진


▎강수진의 발레 체형은 완벽하다. 가늘고 긴 팔다리와 군살없이 날렵하게 뻗은 몸매는 발레리나로서 최적의 체형으로 평가받는다.
안나 파블로바는 또 한가지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었다. 발레의 기본 동작 중에는 ‘턴 아웃(turn out)’이라는 자세가 있다. 흔히 말하는 ‘팔자걸음’처럼 보이는 이 자세는 온 몸을 곧게 편 상태에서 무릎을 최대한 붙인 채 발끝을 밖으로 돌린 자세를 말한다.

즉 발뒤꿈치가 안으로 향하고 발가락은 바깥을 향해야 하는 것이다. 안나 파블로바는 이 자세에서도 어려움을 겪어 기술적인 기준으로만 보자면 완벽한 발레리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풍부한 감수성과 표현력으로 탁월한 캐릭터 연기를 선보였고, 이는 당대의 까다로운 관객을 무서운 힘으로 매혹했다.

신체적 결함이 많았던 안나 파블로바와 달리 강수진의 발레 체형은 완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발레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타고난 신체조건이 담당교사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가늘고 긴 팔다리와 군살 없이 날렵하게 뻗은 몸매가 특히 아름다웠다. 몸이 가벼워야 한다는 건 발레리나의 필수요건이다.

몸이 무거우면 본인도 힘들지만 함께 춤을 춰야 할 파트너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수진은 그 완벽한 몸과 함께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맑은 미소와 크고 또렷한 눈을 지녔다. 볼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이 강력한 흡입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핸디캡은 있었다.

“전통 발레에는 기본적으로 그랑 파드되(Grand pas du deux)가 들어갑니다. 남녀 주역 무용수의 춤을 지칭하죠. 첫번째는 느린 음악에 맞춰 2인무인 파드되를 추는 아다지오(adagio), 이어 남자 무용수와 여자 무용수가 번갈아 선보이는 바리아시옹(variation),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녀 무용수가 함께 추는 빠르고 경쾌한 고난도 댄스인 코다(coda)로 구성됩니다. 발레리나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될 남자 무용수와 자연스럽게 또 적극적으로 스킨십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타고난 수줍음 때문에 남자 무용수와 과감한 스킨십 연기를 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는 ‘과거의 나를 잊어버려라’는 식의 해법으로 이 약점을 돌파하지 않으려 했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비범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는 무작정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기보다 단점을 보완할 장점을 찾아내거나, 약점 중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 강점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한국무용으로 시작해 경쟁자보다 늦게 발레를 시작한 단점을 부정하는 대신 한국무용만이 갖고 있는 섬세한 선과 독특한 감정, 고유의 분위기를 살리려 노력했습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강수진만의 유일함’을 갖추게 되었어요. 수줍음을 타는 성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안무가 존 크랑코(John Cranko)가 탄생시킨 오네긴(Onegin)의 경우 도시 청년 오네긴을 남몰래 사모하게 된 시골 처녀 타티아나(Tatyana)가 주인공입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수줍은 감정의 자연스런 표현이 필요해요. 제 원래의 성격인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반복적으로 훈련한 테크닉과 버무려 표현하니 그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나타났습니다.”

1998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난재배협회에서는 노란색 꽃이 피는 신품종 난초에 강수진의 이름을 따서 일명 ‘Kang suejin Ochideen Phalaenopsis’이라 이름을 붙여 판매했다. ‘오네긴’에서 보여줬던 강수진의 수줍고 함초롬한 자태에 착안한 신품종 비즈니스였다. 이 난초의 이름은 가냘픈 모습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배어 나온다는 뜻을 지녔다. 이 삽화가 바로 강수진이 자신의 약점을 어떻게 강점으로 승화시켰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첫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캐서린 베스트를 만난 후 강수진의 기량은 일취월장했다. 가히 ‘상전벽해의 도약’이라 할 만했다. 결국 그는 발레를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이화여대 주최로 열린 발레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탔다. 그리고 선화예고 1학년 때 유학생을 선발하러 내한한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의 교장인 마리카 베소브라소바(Marika Besobrasova)의 눈에 뜨이는 행운을 얻게 된다.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는 모나코의 왕비 그레이스 켈리가 세운 국제적인 발레 교육기관으로, 세계 각국의 출중한 발레 인재가 모여드는 명문이다.

1982년 설날, 강수진은 모나코행 비행기에 올랐다. 떠나는 날 공항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배웅을 나왔다. 당시 찍은 사진을 보면 그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다. 발레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 강했지만 가족과 이별은 참기 어려운 슬픔이었을 것이다. 모나코에 도착한 지 불과 한두 달 만에 그의 체중은 무려 8㎏이나 줄었다. 통통했던 얼굴에 광대뼈가 앙상하게 드러나고 뽀얗던 피부도 거칠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결론적으로 그는 모나코의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기숙사 생활이 편치 않았고, 우유와 치즈, 버터가 들어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언어도 문제였다. 모나코의 국어인 불어는커녕 영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상대가 천천히 말해야 겨우 알아듣고 더듬거리면서 아주 기초적인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에서 만난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시절의 은사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그는 강수진에게 발레의 기량 외에도 예술가의 다양한 자질과 덕목을 가르쳤다.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교장 선생님이 저를 눈여겨본 것은 테크닉보다 저의 감수성과 표현력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굉장히 눈물이 많은 편입니다. 뉴스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을 때, 또 대화를 나누다가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곤 하지요.

이런 감수성 때문에 한번 춤에 빠져들면 그 역할에 푹 빠져 저도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예술적 고양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아마 그 때 베소브라소바 선생님도 저의 그런 점을 높이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

당시 베소브라소바 선생은 주저하던 강수진의 부모를 이렇게 설득했다. “수진은 10만 명의 발레리나 중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을 가진 아이입니다. 더 큰 세상에서 발레를 배워야 합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며 조금만 갈고 닦으면 오래 지나지 않아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저를 믿고 보내주세요.”

부모님의 확답을 받고 모나코로 돌아간 베소브라소바 선생은 안도할 수 없었는지 “수진을 내게 보내주면 수양딸 삼아 조금 오래 데리고 있으면서 제대로 키워내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시작된 선생과의 만남은 강수진의 발레 인생을 완전하게 바꾸는 계기가 된다.

“선생님의 별명은 딕타퇴르(dictateur:독재자)였습니다. 까다롭고 엄격한 성격이 정말이지 굉장했죠. ‘재학 중 이성 교제를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세우고, 이를 어기는 학생들은 가차없이 퇴교 처분했습니다. 1985년부터 약 1년간 기숙사를 나와 선생님과 한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저는 선생님이 자신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도록 허락한 첫 번째 제자였습니다.

어머니처럼 가정교육을 했고, 저도 그 분을 어머니라 불렀습니다. 굉장히 열정적인 분으로 학생들이 오직 발레만을 생각하도록 온 신경을 집중했죠. 그래서 그는 집에 돌아올 때마다 어김없이 ‘오! 쥬 쉬 파티게(Oh! je suis fatigu´ee)’를 외쳤습니다. 피곤하다는 뜻이죠. 그 소리가 들리면 그가 돌아온 줄 알았으니까요.

그러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그는 정 많고 인자한 슬라브 여인이 되었습니다. 친딸처럼 가르치고 친손녀처럼 귀여워해주셨어요. 배가 아프다고 하면 저를 편안하게 눕히고, 수십 차례 손을 문질러 따뜻하게 한 뒤 저의 배를 살살 문질러주셨죠. 아! 그 따뜻한 손길이 제게 주었던 위안과 평화가 얼마나 달콤했던지.”

예의범절, 두터운 문화적 소양이 최고 무용수의 조건

베소브라소바 선생은 문화적 소양을 중시했다. 휴일이면 자신의 승용차에 강수진을 태우고 모나코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보석과 같은 문화 유산과 유적지를 돌아보게 했다. 이탈리아 피렌체나 오스트리아 빈 등 먼 곳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나 로댕 같은 예술가의 명작들을 감상케 하고, 자주 강수진의 감상을 물었다.

“기본적인 예의범절까지 가르치셨죠. 전 세계 최고 부자가 모여드는 것으로 유명하고 할리우드 영화의 촬영지로도 잘 알려진 모나코의 명소 ‘파리 호텔’에 데려가 파티 예절과 만찬 초대 시의 식사예절까지 가르치셨어요. 유럽 사교계에서 필요한 모든 예의범절은 그분에게서 배운 겁니다. 심지어 집에서 단 둘이 식사할 때도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었지요.

늘 깨끗하게 식탁보를 깔고, 포크는 먹는 음식에 따라 순서에 맞춰 두고, 냅킨은 깔끔하게 접어서 항상 제자리에 두어야 했어요. 저는 치즈만 먹으면 속이 울렁거려 먹지 못했는데, 편식을 그 어느 것보다 싫어하는 선생님의 성격 때문에 치즈를 먹는 법까지 울면서 배우게 되었어요.”

모나코 유학 생활 초반의 고전은 베소브라소바 선생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극복해나가기 시작했다. 육체의 한계를 넘나드는 혹독한 연습을 거듭했음은 물론이다. ‘외로움과 그리움을 극복하기 위한 연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숙사 시절 강수진은 ‘달밤의 도둑 훈련’을 2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계속했다.

“춤출 수 있는 공간인 스튜디오, 그리고 조명을 대신할 달빛이었습니다. 밤 8시 50분이 되면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죠. 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발레복을 입습니다. 9시 30분이 되어 아이들이 다 잠들면 살금살금 침실을 빠져 나와 건물 제일 위층에 있는 스튜디오로 향했습니다.

당시 학교에는 두 개의 스튜디오가 있었어요. 한 곳은 수십 명의 학생이 동시에 연습할 수 있는 곳, 그리고 다른 한 곳은 그보다는 훨씬 아담하고 작은 공간이었죠. 그

혹독했던 슈투트가르트 시절, 자연 속에서 위안 찾아

고대 서양인들은 구체적인 형태와 질량을 갖지 않은 것은 실체가 아니라고 했다. 당연히 안개와 구름은 만질 수도 없고,무게를 잴 수도 없었기 때문에 ‘무(無)’라고 여겼다. 반대로 동양인들은 그것을 만물을 잉태하는 우주적 에너지, 기(氣)의 덩어리인 ‘유(有)’라고 파악했다. 강수진은 독일 남부 슈바르츠발트의 안개 자욱한 풍경을 바라보며 새삼 동양과 서양 사이에 가로놓인 사고의 심연을 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마음을 위무하는 무한한 소재와 대상을 찾았다.

강수진의 기량이 눈에 띄게 늘자 당시 예술감독 마르시아 하이데가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서 솔로 역할을 맡겼다. 비록 주인공인 오로라 역이 아니라 요정 역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그는 슬럼프 탈출에 성공했다. 1994년 마침내 솔리스트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역을 맡을 때까지 8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최고의 자리인 수석무용수가 될 때까지 무려 11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슈투트가르트에서의 성공 배경에는 또 한 명의 스승 마르시아 하이데의 높은 감식안이 존재했다.

마르시아 하이데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살아 있는 역사요, 전설이다. 1961년 존 크랑코가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함께 입단했던 발레리나로, 드라마틱 발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존 크랑코의 작품을 통해 주역 발레리나로 인기와 명성을 얻었다.

1960년대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 바로 존 크랑코다. 그의 족적은 뚜렷하다. 춤이 드라마를 압도하던 발레의 전통을 딛고 연극적인 표현을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그 기념비적 작품들이 <로미오와 줄리엣> <오네긴> <말괄량이 길들이기>인데, 그중에서도 <로미오와 줄리엣>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으니 존 크랑코 안무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1958년에 초연되었고 1962년에 슈투트가르트 발레를 위해 전면 개정되는데, 그 표현이 프로코피에프의 같은 곡을 사용한 러시아의 오리지널 안무들을 압도했다. 그의 안무는 대단한 호평과 함께 서유럽 발레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케네스 맥밀란, 유리 그리가로비치, 루돌프 누레예프, 안줄랭 프렐조카쥬, 장-크리스트프 마이요 등도 이 발레의 새로운 안무에 가담했다. 그들의 목표는 고전이 된 존 크랑코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1976년 존 크랑코가 미국 순회 공연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마르시아 하이데는 바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예술감독직을 물려받았다. 특유의 집념과 카리스마는 트레이드마크였고, 그는 1999년 감독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강수진과 마르시아 하이데와의 관계는 마리카 베소브라소바에 비해 다소 공적인 성격이 강하다. 베소브라소바 선생이 강수진을 딸로 여겼다면 마르시아 하이데는 강수진을 후계자로 여긴 측면이 있다. 강수진의 성실성과 능력을 알아본 그는 1993년 존 프랑코 안무의 <로미오과 줄리엣> 초연 30주년 기념무대에서 마침내 강수진을 주역으로 발탁했다.

“초연 이후 자신이 입었던 무대의상과, 존 크랑코에게 선물받았던 반지를 제게 물려주셨지요. 발레리나에게 의상을 물려준다는 것은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요. 날카롭고 정확한 안목으로 제 가능성을 꿰뚫어 보고 미래를 열어준 분이죠.”

최초 주역 무대였던 1993년 1월29일 밤 슈투트가르트 국립극장에서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은 완벽한 성공으로 기록됐다. 그날 파트너였던 이탈리아 태생 이반 카발라리와 함께 흠결을 거의 찾을 수 없는 호흡과 조화를 보여줬다. 강수진은 고난도의 테크닉을 깔끔하게 처리했고, 그의 감성적인 연기는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치밀하게 교직해 관객을 사로잡았다.

존 크랑코가 50여 년 전에 선보였던 안무는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구한다. 남성 무용수가 여성 무용수를 어깨 위에서 회전시켜 곧바로 다음 모션으로 연결시키는 등 빠르고 회전이 많은 동작을 연속적으로 사용했다. 크랑코는 테크닉을 뛰어넘어 연기력을 요구하는 스타일이었고, 주역 데뷔 무대의 강수진이야말로 그의 소망에 가장 부합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1993년은 강수진 최고의 해로 기억될 만하다. 그해 9월 모던발레 형식을 갖춘 <마술피리>의 주인공 파미나 역을 따냈고, 12월에는 <마타하리>의 주역으로 발탁됐다. 두 작품에서도 그의 걸출한 표현력은 관객의 탄성을 자아냈다. 비극적인 사랑의 격정을 표현해야 하는 줄리엣 역을 탁월하게 소화한 것처럼, 성격이 전혀 판이한 두 작품의 주인공 역도 거뜬하게 춤추어냈다. 1996년 마침내 그는 프리마 발레리나, 즉 솔로 발레리나 중에서도 최고라 간주되는 슈투트가르트의 수석 발레리나가 되었다.

“1993년 이후에야 비로소 발레가 무엇이라는 것을 제 안목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태도, 남을 의식하거나 자기 기분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경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마르시아 하이데를 만나 제 발레 인생에 또 한번의 비약이 찾아온 것이지요.”

강수진은 2007년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무용 장인(匠人)’이 됐다.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가 최고의 무용수에게 수여하는 ‘캄머탠저린’(Kammertanzerin)에 선정된 것이다. ‘캄머탠저린’은 세계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예술가를 장인으로 지정하는 제도로, 영국의 작위제도와 동일한 영예로 여겨진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시행되는데 자격에 맞은 적임자가 있을 때에만 수여하기 때문에 의미가 특별하다. 그동안 무용계에서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예술감독을 지낸 마르시아 하이데와 남성 무용수 리처드 크레이건, 발레리나 비르기트 카일 등이 캄머 탠저린으로 인정받았다.

소통과 배려의 스승 남편 툰치 소크맨


▎터키 태생의 남편이자 매니저인 툰치 소크맨과의 행복한 여가. 툰치 소크맨은 강수진이 부상을 입어 절망에 빠졌을 때 혼신을 다한 보살핌으로 성공적인 재활과 재기를 일궈냈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옆에는 1년 365일 한 남자가 지키고 있다. 바로 그의 터키 태생 남편이자 매니저, 또 한 명의 인생 스승 툰치 소크멘(53)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였다. 툰치는 창단 이래 최연소인 19세의 나이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한 강수진의 선배였다.

툰치의 눈에 비친 강수진은 수줍은 얼굴에 내성적인 동양 여자아이였지만 그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1996년 허리 디스크로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발레 지도자 과정을 이수하고 강수진의 매니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1999년 정강이뼈 스트레스성 골절로 발레를 쉬어야만 하는 절망의 시기에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툰치의 변함없는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재활 지도 덕분이었어요. 제게 발레를 계속할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을 주고 빠른 복귀를 위해 요가를 응용한 특별 스트레칭을 고안해 냈습니다. 2001년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역으로 화려하게 재기하는 데 성공한 것도 그 사람의 힘 때문이었으니, 제 발레 인생의 네 번째 스승은 바로 남편일지도 모르겠어요.”

201305호 (201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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