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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③ - “이중섭과 시인 백석에게 약동하는 삶의 행복, 예술적 영감 얻었다” 

화가 몽우 조셉 킴 

글·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 사진·오상민 기자
한국계 유대인 아브라함 차에게 배운 미술세계의 깊이… 콜렉터 토머스 마틴이 가르쳐준 엄정한 예술가의 길

몽우 조셉 킴이 천재인가 아닌가는 후세가 결정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그가 여전히 강력한 에너지로 의미심장한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는 점이다. 형식적으로는 독학의 길을 걸었지만 그는 많은 스승에게서 예술과 삶의 진리를 배웠다.

그가 사숙한 동서양의 거장, 숨은 교사와 수많은 후원자가 그의 스승이다. 천재, 또는 거장의 걸음걸이는 무겁다. 그러나 삶의 온갖 고통을 해탈한 모든 예술인의 초상은 위대하고, 그 행보는 가볍다. 몽우 조셉 킴은 고통 속에서도 순정하고 가볍고 겸손한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그의 독창적 화풍의 미술세계가 장차 어떤 예술적 기념비를 세울지 궁금하다.


몽우 조셉 킴(38·본명 김영진, 이하 몽우)은 2000년대 한국 화단의 가장 독특한 존재로 부상한 화가다. 그가 거장의 반열에 올랐는가에 대해서는 아마도 강력한 이견이 제시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또는 그의 그림이 언젠가 한국 현대미술에 중대한 족적을 남기게 되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전문가가 동의할 것이다. 몽우 예술의 강력한 옹호자 중 한 사람인 평론가 김호는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몽우는 주변의 미술사적 흐름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구상과 추상을 오가며 어느 화파에도 들지 않은 채, 독자적인 길을 추구합니다. 몽우는 그림을 통해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헤매고 그림에서 삶의 휴식을 얻고 있는 소년과도 같은 화가입니다. 수십 가지의 독창적인 화법 전개의 파노라마는 보는 이들에게 탄성과 함께 자부심을 갖게 하지요. 낙원에 대한 인류의 이상향이 그의 작품에서 살아있는 생명처럼 숨쉬고 있습니다.”

몽우의 학력은 제로에 가깝다. 명문대 미대 출신의 화가들이 포진하고 있는 화랑가에 초등학교도 변변히 졸업하지 못한 30대의 청년이 설 자리는 비좁다. 화려한 이력도 없고, 전시회 경험도 일천하다. 2005년 6월 부산에서 생애 첫 전시회를 가진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세 번의 개인전을 열었을 뿐이다.

몽우의 예술적 삶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요소는 그가 유년 시절부터 겪었던 혹독한 병마와 가난이다. 그는 최근 지병인 백혈병, 임파선암, 심장질환에 또 다른 병마에 신음하고 있다. 무릎에 난 악성 흑색종(피부암)이 다리와 척추에까지 전이된 상태다. 급기야 맥락막(눈)까지 전이가 의심되는 상황이다. 어렸을 때부터 앓았던 백혈병, 임파선암, 심장 질환 등의 지병도 여전해 앉기조차 힘들 때도 많다. 그가 10대 초반의 나이에 학교를 그만둔 이유기도 하다. 의사의 소견에 따르면 그가 지금까지 생존한 것 자체가 기적이다.

몽우의 가족은 추석과 설 명절에 모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곁에 없고 역시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형과 여동생이 있을 뿐이다. 몽우에게 생애 최초로 미술의 세계를 안내한 아버지는 6년 전 암으로 사망했다. 친어머니도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와 재혼했던 새어머니는 자식들의 권유로 새 반려자를 맞았다. 아직도 그의 인생을 뒤덮은 외로움의 그림자는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거리의 화가 시절 보였던 범상치 않은 재능


20대 초반, 몽우는 거리의 화가였다. 주말이면 인사동 한 귀퉁이에 ‘좌판’을 깔았다. 한쪽에는 옥으로 깎아 만든 거북이 목걸이를 펼쳐 놓고, 그 옆에서 연필화, 아크릴화, 유화로 그린 행인들의 초상화를 팔았다.

초상화를 그릴 때부터 몽우의 재능은 범상치 않았다. 외국인들이 특히 좋아했다. 한국인들은 연필화를 좋아했지만, 외국인들은 유화나 아크릴릭으로 그린 몽우의 초상화에 매료됐다. 통역 가이드가 10%의 수수료를 받고 외국인 관광객을 많이 소개했는데, 당시 무명이던 몽우의 초상화는 불과 1만∼2만원 대의 가격으로 소장할 수 있었다. 연필화 5분, 아크릴화 10분, 유화 30분. 이 천재화가의 현란한 붓놀림에 외국인 여행객의 탄성이 그치지 않았다.

몽우의 초상화는 인사동 거리의 이슈로 떠올랐다. 초상화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는 외국인들이 다른 사람을 그린 일종의 샘플 작품까지 모조리 사서 가방에 담았다. 여행객 중 일부는 한국에 오기 전 미리 여행사에 사진을 보내 초상화를 주문하기도 했다. 그가 소박한 ‘거리의 초상화 작가’로 입신했더라면 꽤 유족한 소시민의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초상화와 소품을 그려 팔아 전시회를 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1999년은 몽우에게 특별한 해다. 한 재미교포의 제안과 노력으로 몇 년간 그린 작품들이 미국에 판로를 열게 된 것이다. 그 해 12월 500점에 달했던 그의 작품이 이틀 만에 전부 팔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특히 독일과 유태계 콜렉터들이 수십 점씩 그의 작품을 소장했다.

피카소와 샤갈과 호안 미로의 작풍이 오묘하게 결합된 그림이란 평가를 받았다. 작품성에 비해 그림의 가격은 현저히 낮았다. 콜렉터에게는 생소한 한국인 화가의 그림이 다양한 화풍으로 마치 파노라마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심지어 소더비와 크리스티의 아트 딜러까지 그의 작품을 적극 구매했다. 몽우의 예술은 화려하게 개화하는 듯했다. 여기까지가 몽우 예술인생의 1막1장이다.

몽우는 독학의 화가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그는 역설적으로 동서양, 고금의 모든 화가를 사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불멸의 화가로부터 자신의 예술적 영감과 자양분을 맘껏 흡수했다. 그 최초의 스승은 사진과 전각 전문가이자 음악인이었던 아버지다. 그는 아버지를 이렇게 회상한다.

“아버님에게 초상화 그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진관을 운영하셨는데 흑백사진에 유화로 덧그려 칼라사진을 만드는 데 비상한 재주를 보이셨지요. 기미와 잡티를 다 없애고 어두운 얼굴을 밝게 만들었습니다. 예식장에서 사진 찍을 때 눈 감은 사람의 눈을 그려줬고, 증명 사진을 확대해달라면 아예 유화로 그림을 그려줬어요. 이렇게 새로 그린 유화를 모두 사진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그림은 사진처럼 정밀했지요.”


포토리얼리즘에 경도됐던 젊은 날의 미술적 편견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극사실화에 몰두했다. 추상화는 일종의 허위처럼 느껴졌다. 사실화를 그릴 능력이 부족한 화가가 걷는 길이 추상의 세계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가끔 그렸던 정밀한 초상화, 특히 사진과 조금도 구분할 수 없었던 눈동자의 모습에 감탄했다. 아버지는 사진을 찍은 뒤 얼굴 윤곽을 붓으로 보정했다.

필름에 연필로 잡티와 윤곽을 새로 잡았고, 그렇게 인화된 사진의 주인공은 모두 ‘얼짱’이 됐다. 그것은 분명 ‘윤색’이었지만 아버지의 철학은 달랐다. “모든 사람의 인상은 원래 선한 것이고, 나는 그 인상을 되돌려준다”면서 “티끌 같은 잡티 하나라도 없애는 작업은 사진 속 주인공이 타고난 얼굴을 온전하게 복원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몽우는 아버지의 유산인 극단적 리얼리즘을 이렇게 기억했다.

“당시 저는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사진처럼 그리는 것을 목표로 생각했습니다. 하이퍼 리얼리즘, 포토 리얼리즘에 경도된 시절이었지요. 피카소의 작품은 스무 살 나이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진처럼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화가로서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진 같은 그림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왜곡된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백혈병을 앓았던 몽우는 밤이 싫었다. 몸이 염증으로 붓고 열이 나면 한껏 날카로워진 정신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밤이 오면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으로 어린 몽우는 몸서리쳤다. 하지만 새벽이 가까워지면 하늘색은 푸르름을 띤다. 까만 밤이 청색으로 변하면서 마침내 찬란하고 따스한 아침이 온다. 이렇게 새벽이 오는 것을 몽우는 좋아했다. 어릴 때 그런 경험으로 몽우의 그림에는 청색의 기운이 강하다. 희망이 가득한 새벽이나 아침을 떠올리는 그림이 많다.

미술세계의 깊이 일깨운 아브라함 차와의 만남

몽우의 형이 생계를 위해 동대문에 공방을 차렸을 때 아버지를 제외한 생애 첫 스승 아브라함 차를 만났다. 조셉이라는 이름도 ‘꿈꾸는 자’라는 의미로 그가 지어줬다. 스스로 붙인 ‘몽우(夢友)’라는 이름도 비슷한 의미다. 아브라함 차는 몽우 형의 미술적 재능을 높이 사 그를 뉴욕으로 데려가기 위해 공방을 자주 찾았다. 당시 몽우는 아브라함 차 선생이나 가족에게나 말썽꾸러기, 걸림돌이었다. 책상과 집기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불이 붙어 활활 타는 모습을 정밀하게 그려보고 싶어서였다.

“아브라함 차 선생은 랍비 과정을 밟고 탈무드 연구에 집중했던 분이었어요. 유대인의 피가 섞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분은 자신의 전생이 유대인이었다는 확신이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동서양 회화에 정통했고, 서예, 돌조각, 전각,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항상 특정 예술 분야의 1인자를 만나 그들과 교유했습니다. 그 분에게 예술의 모든 장르, 특히 문학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치열한 독서를 제게 권했고, 사물의 특성을 공부하라 하셨지요. 동식물의 특성을 생물학적으로, 또 물리학적으로 파악해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죠. 예컨대 사과를 잘 그리기 위해서는 사과나무와 사과의 생육과정을 알아야 하고, 소나무를 잘 그리기 위해서는 솔잎을 따서 그 맛을 봐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대상의 본질은 그 생성·발육·만개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섭렵해야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인데, 본질주의자의 철저한 대상 인식을 그분한테 배운 겁니다. 예술의 모든 장르, 동서양의 회화와 서예와 전각과 보석세공 등이 사실은 하나의 가지에서 출발한다는 점도 그분에게 배운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아브라함 차를 처음 만났던 10대 후반, 몽우는 이중섭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중섭은 그가 홀로 사숙한 첫 번째 화가라 할만했다. 아브라함 차가 권유한대로 이중섭의 그림과 함께 이중섭을 다룬 평전과 평론집을 모두 사서 섭렵했다. 이중섭을 좋아하는 몽우의 정신적 흐름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렬해졌다.

“17세 때 처음으로 이중섭의 그림을 실물로 보게 되었는데, 그 기회도 아브라함 차 선생이 마련해주셨지요. 사진으로 보는 그림과 실물로 보는 그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레코드로 듣는 최고의 연주보다 2류 음악가의 실황연주를 듣는 것이 더 낫다는 음악인들의 생각과 비슷한 것이겠죠.

갤러리 기획 중에 이중섭의 그림이 나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전시장에 동행해 이중섭과 피카소 그림의 차이를 설명해주셨습니다. 선생은 제게 화가의 ‘비즈니스 감각’을 강조했습니다.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의 소유자 피카소와 그 방면에 문외한이었던 이중섭의, 화가 인생을 극명하게 구분한 그 비극적 차이를 일깨워주셨습니다.”

아브라함 차의 소위 ‘78대 22’ 법칙도 그때에 들었던 이론이다. 화가의 능력치를 100이라고 한다면 한국 화가들의 실력이 78 이상이지만 연출력은 22 이하라는 것이다. 반면 해외 유명화가들의 실력은 22 이하라도 연출력은 78 이상이라는 것이 아브라함 차의 관찰이었다.

“당시 저는 화가의 삶이란 ‘외롭고 쓸쓸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치와 향락을 거부하고 의도적으로라도 가난하고 괴로워야만 진정한 예술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때 스승의 말씀은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행복한 환경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워주셨지만 저는 여전히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중섭을 이해하기 위한 몽우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비밀리에 이뤄진 이중섭 그림의 복원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다. 박락한 부분과 변색된 부분, 갈라진 부분을 보수했고, 캔버스의 이상 상태 점검, 곰팡이균의 제거와 같은 작업에 몰두했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도 했는데, 잠시 미술품 복원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작업은 매력적이었다.


이중섭을 이해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전체 작업 과정에서 몽우가 맡은 파트는 색칠이었다. 그 작업을 수행하는 것만 해도 이중섭의 그림과 화법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했다. 몽우는 이중섭의 훼손된 그림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가 다른 화가와는 현격히 다르게 사물을 묘사했다는 점을 알게 됐다.

“이중섭은 빛과 어둠을 표현하는 방법이 달랐어요. 일반적으로 화가들은 어두운 색을 통해 깊이 있는 색을 만들고, 점진적으로 밝은 색을 표현하죠. 이중섭은 밝음과 어둠의 음영을 확실하고 급격하게 표현합니다. 붓 자국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 충격적이었어요. 그의 기법과 양식은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감성을 집약한 것이었는데, 그 방식은 마치 일기를 쓰듯 개인적인 삶 속에서 느낀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1999년의 성공으로 몽우의 통장에는 수억 원의 거금이 쌓였지만 앤티크 가구 사업에 한 투자가 부도를 맞으면서 그는 최악의 시기를 맞게 된다. 사업실패와 빚보증으로 인한 채무로 맞은 몇 년간의 침체기는 혹독한 것이었다. 이 시기 몽우는 자신의 화풍에 경멸을 느껴 소중한 왼손을 망치로 내려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간 콜렉터들에게 받았던 모든 애정을 일거에 단절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행위였다. 몽우 그림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평론가 김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화풍이 바뀌면서 콜렉터들의 조롱과 야유, 평론가들의 혹독한 비평과 무시가 뒤따랐습니다. 오른손으로 그린 초기 그림은 마치 유치원 아동이 그린 작품처럼 유치했으니까요. <바람의 화원>이란 드라마가 떠올랐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신윤복은 자신의 손을 내리쳐 화가로서의 인생을 마무리하려 했죠. 마치 몽우의 인생사를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당시 몽우의 콜렉터 중엔 그의 그림뿐만 아니라 볼펜과 구두 등 그의 사물까지 수집하는 사람도 있었다. 몽우가 왼손을 망치로 내려친 것은 예술적 죽음을 넘어 그간 그를 후원했던 여러 인맥에 대한 예술적 절연선언과 다름없었다. 그러는 사이 몽우는 가업인 전각을 다시 하게 되었고, 그림은 동양화 중심으로 변화하게 된다. 한동안 그의 손에는 유화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몽우는 오른손으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한 별의별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몽우의 현재 유화작품에는 동양화의 터치와 같은 붓놀림을 간간히 목격할 수 있다. 초서와 예서의 필획이 그림의 한 획을 이루는가 하면, 전서의 장중하면서도 오묘한 곧은 선이 서양화구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예술가의 고통은 일거에 구원되지 않는다

몽우의 예술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엔 독일인 콜렉터 토머스 마틴을 빼놓을 수 없다. 인사동 초상화가 시절부터 그림을 정기적으로 사줬던 인물이다. 그는 서양화, 특히 독일화에 정통한 미술 전문가이기도 했다. 인사동에 올 때마다 독일 현대미술, 특히 동서독 화풍의 차이, 그리고 유럽 명화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과 흐름을 소상히 설명했다. 그는 구상화에 치중됐던 몽우의 화풍에 추상의 요소를 배어들게 한 조언자이기도 했다. 요컨대 추상과 구상은 동전의 양면일 뿐 결국 하나의 길로 통한다는 점을 일깨웠다.

“인물 중심의 그림에서 탈피해 다양한 주제로 한국적인 깊이를 담아야 한다고 조언하셨습니다. 놀라운 그림이 나올 것이라며 용기를 주셨던 분입니다. 이후 유럽 명화를 작게 축소해 그리거나, 인물화를 그리더라도 추상적인 느낌이 들도록 노력했습니다. 마틴 선생이 데려온 독일 분들은 특히 독수리 그림을 선호해 제가 그릴 때마다 전량을 구매해갔던 기억이 납니다.

미헬 바우라는 독일 시인은 제 독수리 그림에 붙이는 시까지 보내주셨고요. 독일 지인들에게 우리 가문의 가업인 전각도 소개했습니다. 전각에 조예가 깊은 독일인 페터 회쇨레 선생을 만나야 한다며 독일문화원에서의 전시도 주선해주시려 했죠. 페터 회쇨레 선생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분의 책을 사서 어떤 방식으로 작품을 새기고 보관하고 분류해야 하는지를 알게 돼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토머스 마틴은 몽우의 어려운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재력도 있었지만 결코 그를 ‘한번에’ 도와주지 않았다. 화가의 작품은 시장에서 평가받고, 시장에서 매겨지는 가격으로 존재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경제적 궁핍에 시달린다면 그 고뇌와 어려움이 작품에 배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이외의 방식으로 성취된 그림은 가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콜렉터가 일거에 도움을 주는 것은 작가의 화풍에 부당히 간섭하는 것이므로, 해서는 안될 일로 치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2001년부터 2004년 사이 몽우에게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의료와 건강 관리, 재정 관리를 도맡았다. 마틴 선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몽우는 2005년 초부터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잦아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했을 때 필사적으로 그의 구원에 나섰던 사람이 바로 평론가 김호다. 그의 회상이다.

“극도로 피폐한 상황에서 저는 그를 알려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작가와 작품을 알리기 시작했지요. 젊은 작가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노력이 미술시장과 평론가에게는 불쾌감을 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에게 독수리 그림을 계속 그리게 하고 싶었습니다. 깊은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그림이었기 때문이지요. 당시 제 블로그 아이디도 몽우 조셉 킴이었을 정도로 그의 불운한 인생을 슬퍼했고, 그의 심오한 예술세계에 깊이 매료돼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백석 연구가이자 문화비평가인 송준 씨가 커피숍에 걸린 몽우의 그림을 보고 한눈에 반해 여러 차례 몽우를 찾아갔고, 죽음에 직면했던 몽우는 그의 도움으로 생애 첫 전시회를 열 수 있게 됐다. 그 전시 이후 몽우는 강력한 후원에 힘 입어 건강과 재정 상태가 좋아지고 다시 그 아름다운 독수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송준과의 만남, 그리고 시인 백석과의 만남은 특히 몽우의 예술적 상상력과 감성을 충만하게 했다. 몽우의 놀라운 유화들은 2005년부터 백석의 시를 접하면서 쏟아져나온 것이다. 건강도 크게 호전됐다. 백석에 대한 치열한 예술적 탐구 끝에 나온 책이 그가 2011년 1월 펴낸 <백석 평전>이다. 몽우는 백석 시인과의 운명적 만남 후 변화한 자신의 예술세계를 이렇게 말한다.

“백석 시를 읽고 느끼며 그리고 쓰기를 거듭하면서 시 안에 들어 있는 눈물과 행복과 사랑과 가족에 대한 마음이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와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의 시와 삶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제 삶과 작품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란 그의 시를 통해, 살면서 힘들고 외로운 일을 저만 겪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시에 나오는 ‘갈매나무’에 들어 있는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지를 배웠어요. 슬픔을 정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예술가는 슬픔도 예술적으로 겪어야 하고 삶도 예술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몽우는 감흥이 없으면 1년이고 2년이고 전혀 그림을 그릴 수 없는 화가다. 그러다 감정이 충만해지면 50호짜리 유화 7점을 하루에 그리기도 하는 괴력의 작가다. 자신의 자랑이었던 왼손을 망치로 내려친 것도 그의 섬세한 감성과 타고난 양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사진 전시회에서 받은 회화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그 시기에 초상화를 그려달라며 돈뭉치를 던지듯이 주고 간 한 중소기업 사장의 행위도 그 신체 훼손을 촉발했다. 그 제안을 받고 몽우는 왼손을 망치로 내려치고 그림 값으로 받았던 수백만 원의 돈도 태워버렸다. 평론가 김호는 몽우에 대한 솔직한 기억을 이렇게 털어놨다.

“몽우는 자신의 작품에 깊이가 없거나 감정이 깊게 투영되지 않았다고 느낄 경우 작품을 불태우기도 하고, 자신이 돈의 노예라는 비참한 느낌을 받을 때면 돈이고 작품이고 다 불태우고 혼자 잠적하는 이상한 화가였습니다. 그에게는 늘 금전적인 고통이 있었지만 그의 이상한 성향이 그를 도와주려던 많은 지인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의 스승이자 콜렉터였던 토머스 마틴 선생과 결별한 것도 금전적인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몽우가 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헤어진 것이 아니라 마틴 선생이 몽우에게 돈을 주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더 정확하게는 돈을 주는 ‘방식’ 때문에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 것이다.


왼손 불구로 만들어 예술적 사망선고 받은 이유

몽우는 2003년 중동의 한 거상으로부터 몽우 그림 한 점을 크게 확대해달라는 조건으로 상상하기 힘든 거금을 제안받았다. 몽우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작품을 똑같이 복사하기 싫어서였다. 이미 그 중동 거상을 한국에 모셔오기 위해 상당한 금전적 지출을 감행한 토머스 마틴은 그림을 더 크게 그리는 일은 ‘카피’가 아니라고 설득했지만 몽우는 그 행위를 자신의 예술인생의 ‘사망선고’라고 생각했다.

몽우의 예술적 스승, 그가 직접 보지 못했지만 밤낮으로 그리며 사숙했던 화가들이 있다. 한국 화가로는 이중섭·김환기·박수근·장욱진·김흥수·조동화 화백이 그들이다. 외국 화가 중엔 호안 미로와 앙리 마티스, 피카소·샤갈·고흐를 스승으로 삼는다. 호안 미로를 스승으로 꼽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그의 상징적이고 시적인 은유를 좋아합니다. 몇 개의 선과 점들로 여인을 그리기도 하고 아이들 같이 순수한 열정을 그림으로 분출하는 작품 세계가 좋습니다. 그 순수성은 어른이 되면 잊기 쉽지만 호안 미로는 그 세계를 작품 속에서 영원히 지니고 있는 작가입니다.”

앙리 마티스는 어떤가? 여인의 인체에 대한 마티스 특유의 해법을 좋아한다. 여인의 인체를 주관적인 시각으로 변형하는 자유로운 누드. 몽우가 누드 작품으로는 드물게 좋아하는 작품과 작가이기도 하다. 해부학과 같이 명료한 피카소의 구성 능력, 낭만에 넘치는 꿈과 같은 그림을 그렸던 샤갈, 한 남자의 희망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게 한 해바라기 그림의 고흐도 몽우가 ‘섬기는’ 예술적 스승이다.

이중섭에 대한 그의 사랑은 책으로도 쓸 만큼 절절하고, 그 깊이가 도저하다. 2011년 그가 발간한 <이중섭을 훔치다>는 이중섭의 삶과 예술세계에 대한 그의 치열한 탐구가 잘 녹아 있다. ‘아이들과 물고기와 게’와 같은 군동화 (群童畵)에서 보여지는 순수한 가족애, 무수히 남긴 ‘소’ 그림에서 보여주는 남자다운 기백을 그는 예술의 스승으로 삼는다. 특히 이중섭의 행복을 향한 염원에 그는 주목한다.

생사 경계 넘나드는 ‘예술적 투쟁’의 길

“이중섭의 작품 속에는 나무와 돌과 구름과 새, 그리고 소가 사람처럼 감정을 가진 존재로 묘사됩니다. 저는 그 점이 신기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화가들은 주제가 되는 주인공 외에는 모두 ‘기물’로서 그리기 때문이죠. 이중섭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행복을 얼마나 중요시했던 사람인가를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저도 이중섭과 같이 기물에도 감정을 넣어 저의 진짜 모습을 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김환기는 사슴과 별을 통해 한국적인 미의 극치를 표현했고, 창신동 달동네 화가 박수근에게는 화강암과 같이 단단한 그림 속에서 그의 소박한 꿈과 희망을 느낀다고 했다. 단순한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일깨운 장욱진. 유난히 닭과 돼지와 소 그림이 많은 그의 그림은 백석 시인의 시 ‘연자간’에서 받은 영감에서 비롯됐다고 굳게 믿는다. 한 세미나에서 만난 김흥수 화백에게서는 ‘세월을 녹여 그림에 투영한’ 노 거장의 체취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몽우는 아직도 지독한 병마와 씨름하고 있다. 인터뷰가 이뤄진 지난 5월 7일 경기도 안산의 좁고 허름한 그의 거처 겸 화실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이렇게 인사했다. “암투병 환자 김영진입니다.” 척추까지 파고든 흑색종 암세포가 그에게 짙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몽우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머리는 2대 8 가르마를 가른 뒤에야 그림을 그리는 습성이 있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제가 죽을 때 마지막 모습이 불쌍한 느낌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만큼 몽우는 지금도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적 투쟁’의 길을 걷고 있다.

몽우가 시달렸던 10대 초반부터의 병마는 그의 예술과 인생에 심각한 핸디캡으로, 또 깊은 통찰과 자각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백혈병에 걸려 자주 쓰러졌고, 피가 나면 좀처럼 멎지 않았다. 편도선이 붓고, 입도 헐고, 목에 염증도 심해 음식을 삼키지 못했다. 잇몸에 구멍이 뚫려 고름과 피가 매일 한 컵씩 쏟아졌다. 30대까지 계속 그랬고, 어른이 됐지만 몸이 아파 운 적도 많다.

병이 심한 탓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오랫동안 짝사랑한 이가 있었지만 스스로 단념했다. 도무지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었다. 병세가 나아지나 싶었지만 최근엔 악성 흑색종이 다시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얼마 전까지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방안에 누워 작품을 구상하다 요즘엔 조금씩 걷고, 다시 화필을 잡을 만큼 병세가 나아진 상태다.

그는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은 천재, 기인, 불행한 화가, 호당 1억원짜리 그림을 그린 자, 2000년대 한국 화단의 최고 작가와 같은 수식어를 몹시 싫어한다. 모두 언론에서 붙여준 허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미술사의 전체 맥락 안에서 평가받고 싶어한다.

“과거로 갈 수만 있다면 제 실수와 어리석음을 지우고 앞으로는 사람들에게 행복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과도한 사랑과 관심, 후원을 받았으니까요. 그분들은 슬픔의 터널에서 저를 환한 빛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각골난망(刻骨難忘)의 마음뿐으로, 남은 제 인생 캄캄한 어둠 속 별처럼 빛나는 작품들을 남기고 싶습니다.

201306호 (201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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