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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영화 속 심리학 - 외로움 속에서 피어난 꽃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VS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낯선 곳에서 배우는 새로운 언어, 사랑은 묘하게도 고독이라는 가면에 감춰져 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중년 사내와 젊은 여성이 낯선 일본 땅에서 느끼는 비슷한 외로움을 다뤘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나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탕스 블루의 시 구절. 이어 파블로 네루다는 “나는 터널처럼 외롭다”고 고백할 것이다. 그러나 이 외로움조차 “나는 장님이 되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남은 눈동자처럼 외롭다”고 한 블라디미르 마아코프스키에 필적될 수 있을까. 서른여섯 나던 해에 이 소련 시인은 자신의 심장에 방아쇠를 당겨 스스로 생을 거두었다. 심연의 뿌리에 서리가 내린 것일까? 필경 외로움에 지친 심장에 시인은 구멍을 내고 싶었던 것 같다.

외로움은 인간이 혼자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쓸쓸하고 허전하고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잔상을 마음에 뿌린다. 태초에 호모사피엔스라는 종이 외로움이란 감정을 피하도록 진화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에 대한 통찰을 주고 있지 않은가. 즉 인간이란 동물 자체가 필연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갈망하게 만들어놓아야 생존에 더 유리한 동물일지도 모른다.

연애를 하고, 친구를 만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거미줄 같은 관계의 그물망이 지구를 뒤덮게 하기 위해, 신은 우리의 심장에 유리 가루를 섞어 서로의 생이란 양피지 속에 영원히 섞여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위스키 광고를 찍으러 온 중년사내 밥은 낯 모르는 언어가 가득한 도쿄란 신세계에 갇혀 있다. 샤워기도 등을 구부려야만 쓸 수 있고, 엘리베이터에선 자신만이 훌쩍 목이 나온 기린이 되어버리는 작고 낯선 동네. 사진 작가인 남편을 따라 일본에 온 샬롯 역시 혼자이기는 마찬가지다. 고향으로 전화를 걸어 친구와 통화하지만 그저 의례적인 인사만이 오가고, 늘 바쁜 남편은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다.

밥은 28년의 결혼생활을 했지만 자신의 안부보다 서재의 카펫 색깔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는 부인과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도쿄의 밥과 미국의 부인이 경험하는 물리적인 시차 또한 마음의 거리감으로 환원된다. 한편 대학을 갓 졸업한 후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샬롯은 앞날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중년의 위기를 등 뒤에 숨긴 남자와 청춘의 뒤안길에서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여자는 서로에게서 자신이 지나온 길과 자신이 지나야 할 길을 바라보게 된다.

감독 소피아 코폴라는 ‘뒷모습’과 ‘창가’라는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여 창 너머의 세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결코 섞일 수 없는 두 사람의 소외와 고독을 효과적으로 담았다. 영화의 시작 부분이 그렇다. 등과 엉덩이가 고즈넉하게 보이는 샬롯의 뒷모습, 위스키 광고를 위해 얼굴 화장을 진하게 했지만 등 쪽에는 주름 잡히지 말라고 핀을 주렁주렁 단 밥의 뒷 모습은 샬롯과 무척이나 닮았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2012)의 한 장면. 다카시(좌)와 아키코(우)는 지독한 외로움을 감춘 채 서툰 소통을 시작한다.
다른 듯 비슷한 사람들의 만남 다룬 닮은꼴 영화

낯선 땅에서 그들은 비로소 서로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밥이 위스키 광고 촬영 때와 달리, 실제로는 광고보다 더 리얼하고 고독하게 호텔 바에서 위스키를 마신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하다. 미국 감독이 일본에 가서 외로움과 소통에 관한 영화를 만든 것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면, 흥미롭게도 2012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주제로 또 다른 이방인 감독이 영화를 한편 만들었다. 바로 이란의 거장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프랑스의 자본으로 일본에 가서 말도 통하지 않는 배우들과 신작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만든 것이다.

20대의 대학생 아키코(타카나시 린 분)는 젊음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의 첫 장면부터 주인공 아키코는 카메라에서 소외돼 있다. 주인공 목소리는 들리지만 카메라는 마치 다른 사람들을 주인공처럼 비춘다. 게다가 첫 대사는 “아니야, 거짓말이 아니야”이다. 그런데 사실 아키코는 남자 친구인 노리아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키코는 모순적이다. 여대생이지만 가난하고 싶지도 않다. 아키코는 오늘만큼은 일을 나가고 싶지않다며 카페 주인과 설왕설래를 하다 택시를 타고 또 다른 인물인 다카시 교수의 집으로 이동한다. 이때 아키코의 할머니가 이른 아침부터 도쿄 역에서 아키코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는 그곳에 도착할 수 없다.

그저 택시 안에서 도쿄 역 주변을 빙빙 돌며 먼 발치에서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를 바라 볼 뿐이다. 창문으로 도쿄의 풍경이 펼쳐지며, 헤드폰을 낀 아키코에게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전송된다. 목소리를 듣는 아키코의 얼굴엔 슬픔이 넘친다. 그러나 그 메시지들은 모두 ‘전송’될 뿐 진심으로 아키코에게 ‘전달’되지는 못한다.

여기에서 영화의 주제는 반복된다. 택시운전기사와 아키코는 한 공간에 있지만 기능적인 관계일 뿐이고, 할머니와 아키코는 존재론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한 공간에 있을 수 없다. 즉 이 인물들 간에는 기호의 합이 없다. 존재–공간–마음으로 이어지는 소통이 누구와도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할머니를 먼발치에서 떠나 보내며 아키코는 울음을 터뜨리고, 태연히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에서의 주인공들 내면에는 모두 지독한 외로움이 도사린다. 아키코를 불러들인 교수 다카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돈과 명예를 모두 지녔지만 전화로만 외부와 접촉을 할 뿐 혼자 생활을 한다. 아키코를 부른 것도 육체적 욕망이라기보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외로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인 듯 보인다.


▎외로운 남녀의 교감을 다룬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왜 사랑에 빠지지 못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행동할까?’란 질문을 남긴다.



단절된 내면에는 교감의 욕구가 있다

그러나 다카시와 아키코는 서로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들의 소통불가의 처지는 영화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지요지 야자키의 <교무>, 즉 ‘앵무새 길들이기’라는 그림에서도 잘 드러난다. 1900년대 일본의 근대 회화를 연 작품 중 하나인 유화에서 여자는 앵무새에게 말을 가르친다.

여자가 앵무새에게 말을 가르친다고 말하자 아키코는 오히려 앵무새가 여자에게 말을 가르치려 한다고 다른 해석을 한다. 흰 앵무새가 왠지 반백의 머리를 가진 다카시처럼 보인다. 앵무새는 말을 따라 할 뿐이지 자신의 말을 하지는 못한다. 아키코는 심지어 머리를 올리고 앵무새 앞에서 포즈까지 취한다. 아키코는 누군가의 흉내를 낼 뿐이다. 둘 다 일종의 가짜인 것이다.

두 사람의 상태는 아침이 되자 반전을 맞이한다. 아키코가 편안하게 잠이 들게 둔 다카시는 이윽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키코의 보호자가 되기로 한 듯 운전을 해서 아키코의 학교로 데려다 준다. 비로소 두 사람은 차 안이라는 한 공간에서 처음으로 이름도 불러본다.

그런데 여기서 다카시는 아키코의 남자친구 노리아키를 만난다. 노리아키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자동차 정비공이다. 아는 것도 없고 배려심도 부족하지만 그는 언제나 솔직하고 거침없다. 상황을 회피하고 벗어나려는 아키코와는 반대다. 그런 그가 어느날 다카시를 만나고, 엉겁결에 둘러 댄 다카시의 말로 인해 다카시를 아키코의 할아버지로 오해한다.

노리아키는 아키코와 결혼하고 싶은데 아키코가 거짓말을 했다며 분개한다. “경험이 많으면 거짓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나요, 다 참을 수 있습니까?”라며 다그치듯 묻자 다카시는 대답한다. “거짓 대답이 돌아올 줄 안다면 애초에 질문하지 않지. 이런 건 경험이 가르쳐주는 거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밥과 샬롯처럼 <사랑에 빠진 것처럼>의 주인공들도 단절과 소외를 경험한다. 커다란 창에 둘러싸인 다카시는 전화로만 외부와 소통하고, 노리아키는 끊임없이 집이나 차를 벗어난 ‘밖’의 공간에 머문다. 상징적으로 다카시가 몰고 있는 자동차의 팬벨트는 곧 끊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소리를 낸다.

노리아키는 이 벨트를 새 것으로 교환해주고 직설의 힘, 누구와도 접촉을 하려는 힘으로 마침내 아키코와 다카시의 관계를 알게 되자 그의 집 창문에 커다란 돌을 투척한다. 그렇게 다카시의 유리창, 세상에 대해 관음증적인 태도만을 취하던 그의 세상이 깨어져버린다.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말이다.

이 영화를 보고 이렇게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왜 사랑에 빠지지 못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행동할까?’ 사랑을 한다는 것은 존재·공간·시간이 합치되는 일이다. 한 존재의 육체와 마음이 다른 존재와 같은 시간, 공간에서 서로를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들의 진정한 만남은 영화 속 농담처럼, ‘발이 여러 개 달린 지네 커플이 다리가 너무 많아서 어떤 다리를 합해 첫날밤을 보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와 같은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예술영화라기보다 정말 지독하게 슬픈 멜로영화다.

통역이 불가능한 낯선 나라라는 장소가 위에 소개한 두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은유인지 모른다. 우리는 이 낯선 세상에서 서로에 대해 오해와 오인을 반복하며, 진실의 가면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결국 외로움을 이기는 한 가지 방법은 외로운 가운데 소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묘미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영화 설정 안에 이미 사랑과 외로움에 관한 어떤 진실이 들어가 있는 것. 사랑이야 말로 누군가와 말도 안 통하고 모든 사람이 낯설어 보이는 우주에서 통역이 필요 없이 자신과 같은 말을 하는 ‘바로 그 사람’을 찾아 내는 것은 아닐까?

현실이 광고 같고 광고가 현실 같은 불모의 신기루를 낯설어 하면서도 밥은 놀랍게도 샬롯에게 “이 도시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다던 이방의 도시가 그 혹은 그녀가 있기에 떠나고 싶지 않은 곳이 되는 곳.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육체적인 관계를 떠나 사랑이란 결국 소통하는 일임을 조용히 가르쳐준다. 우리는 찾아야 한다. 별다른 통역 없이도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살짝 발만 잡아주어도 위로가 될 것 같은 그 사람을.

혼자 있을 수 있는 힘, ‘고독력’

만약 이러한 행운이 찾아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생을 살다 보면 가족과 친구만으로 부족할 때가 찾아온다. 결국 우리는 혼자다. 정신분석가인 안소니 스토가 제안하듯이, 외로움을 ‘혼자 있을 수 있는 힘’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누군가를 찾아 이 도시의 뒷골목을 헤매고 다닐 것이다. 마침내 혼자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로움이라기보다 고독할 자유이다.

‘고독력’은 고독에 대한 능동적인 마음 상태, 스스로 혼자 할 수 있는 힘이다. 고독력이 있는 사람은 인간이 신‘ 앞에 선 벌거숭이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맥락조차 없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 그 외로움이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더 밝게 해주는 그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너무 많은 기대나 판타지에 취하지 않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마음으로 상호간의 협력관계

를 만들어나가는 능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을까? <혼자 사는 즐거움>의 저자 사라 밴브레스낙은 스스로 하루에 하나씩 자신만의 작은 모험을 떠나라고 충고를 해준다. 여름에 다시 꺼낼때 커다란 즐거움을 줄 1만원짜리 지폐를 옷 주머니에 넣어둔다든가, 아름다운 꽃을 사서 책상 위에 올려 놓고 행복한 상상에 빠진다든가, 자기가 살았던 옛집을 방문할 수도 있다.

초콜릿이나 매니큐어 같은 사소한 물건과 예쁜 클립을 모아 놓은 나만의 놀이상자를 만들 수도 있다. 아이들을 위해, 타인들을 위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면,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도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 그러니 오늘밤 다 써버린 배터리를 충전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잠깐 잊고, 그저 온전한 자기자신으로 돌아가보자. 파스칼은 일찍이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한 가지, 고요한 밤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것에 있다”라고 말했다. 인간관계에 완전한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혼자 있을 때 마음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스멀거리는 이 감정. 상처를 치유하는 고독, 상실을 극복하는 고독, 나와의 대화를 이끄는 고독 등. 다양한 고독을 기꺼이 껴안아 보자. 고독을 자양분 삼은 영혼의 잎사귀들은 이 밤, 더욱 푸르게 빛이 난다.

201312호 (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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