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지상 전시회 - ‘설경(說經)’의 세상 나들이 

 

글·이윤식 월간중앙 인턴기자 사진·지미연 기자
전통 굿에 쓰이는 종이 오리기 작품… 계룡산설위설경보존회, 11월 30일까지 서울 장충동 종이나라박물관서 전시

▎전시장 위쪽으로 12지신 문양을 담은 설경이 나란히 걸려 있다. 지신(支神)을 담은 설경은 그 띠에 해당하는 사람의 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우리나라 설‘ 경’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전시회가 서울 장충동 종이나라박물관에서 열린다. 미리 알아둬야 할 점은 겨울의 설경(雪景)이 아니라 아름다운 종이공예 작품인 ‘설경(說經)’이라는 점이다.

‘설경’은 예부터 전통 굿에 쓰여온 종이 오리기 공예물을 일컫는다. 굿을 할 때 읊는 경(經)의 주요내용을 종이에 문양으로 오려 넣어 시각적으로 표현한 예술작품이다. 설경은 우리 전통의 종이 오리기 공예에서 시작됐다. 종이를 접은 뒤 가위나 칼로 오려내 문양을 내는 공예예술로 기원은 중국 한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에서는 ‘지엔즈(剪紙)’라는 종이 오리기 공예가 복을 기원할 때 애용되고 있고, 일본에서도 ‘키리가미(切紙)’라는 이름으로 활성화돼 있다. 우리나라 역시 민속놀이로 종이 오리기가 이어져왔지만 설경은 급속한 현대화로 사라져 현재는 굿에 쓰이는 제의도구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창작설경에는 상징성이 강한 동물 문양이 많이 등장한다. 호랑이는 용맹함을 상징해 귀신을 쫓아주고, 나비는 망자의 영혼을 저승에 인도해주며, 새는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의미를 갖는다.
귀신 쫓아내고 복을 기원하는 역할

지금도 굿을 하는 장소에 가면 설경이 세워져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전통 굿에서 설경은 귀신을 쫓아내고 복을 기원하는 역할을 한다. 전국의 굿판 중에서도 특히 충청도 ‘앉은굿’에서 널리 쓰여왔다. 충청도 지역에서는 이 앉은굿을 ‘설위설경(設位說經)’이라고 하는데, 악귀를 몰아내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경문을 낭송하는 설경과, 종이를 접고 오려서 여러 신의 그림이나 글씨를 새겨 굿판 주변에 걸어두는 설위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이번 전시회 역시 설경을 잘하는 충청도의 법사들이 참여했는데 ‘계룡산설위설경보존회 회원전’으로 열리고 있다.

전시회에서는 국내에 몇 안 되는 설경 전문가 4명이 만든 설경작품 3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이재선·강창미·이관하·박동식 법사다. 대부분의 작품은 굿과 관련된 종교색이 완전히 배제된 순수 창작품들이다.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대중 친화적인 문양들을 담았다. 화려한 나비와 새 등 작품마다 대칭을 이루는 문양들이 반복적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낸다.

박동식 법사는 충청도 앉은굿에서 설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앉은굿은 설경만 설치해도 굿덕의 반은 본다고 여길 정도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앉은굿은 설경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설경을 태우는 것으로 끝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설경 만들기는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기술을 요한다. 먼저 두 장의 전지를 구한 뒤 각각 끝 면을 칼로 잘라내고 밥풀로 붙여 한 폭으로 만든다. 이것을 양면이 꼭 맞게 접은 후 칼로 문양을 새겨 넣는다. 그리고는 접은 부위를 다시 펴서 먹이나 물감으로 문양에 글씨를 쓰거나 색을 칠하면 설경이 완성된다. 그렇게 고생해서 만들어진 설경을 굿하는 장소에 세워놓아야 비로소 굿이 시작된다. 경을 다 읊고 굿을 마치면 공들여 만든 설경을 태운다.

10년 동안 만들어야 설경전문가 돼

이관화 법사는 “설경을 태우는 것은, 헛되고 잡스러운 것들을 가둔 설위설경을 태움으로써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하는 의식”이라고 말했다.

설경은 이처럼 굿 의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만큼 아무나 만들 수 없고, 제작과정에서도 많은 공력이 들어간다. 박동식 법사는 “하나의 굿을 주관하기 위한 설경을 제대로 만들려면 족히 10년의 세월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며 설경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수련의 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설경을 만드는 법사는 이 기간 동안 한자와 경문 공부를 병행하면서, 각 문양이 가지고 있는 뜻을 제대로 익혀야 한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의미 있는 문양을 아름답게 새겨넣을 수 있는 섬세한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설경 전문가들에게도 제대로 된 설경을 만드는 것은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한 장의 작품에 제대로 된 문양을 새기는데 보통 40분이 소요되는데, 굿을 할 때마다 한쪽 벽을 설경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적어도 50장의 설경이 필요하다. 그런데 경을 읽을 때는 보통 3개 면에 설위를 둘러치기 때문에 설위설경을 한 번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하는 셈이다.

설경에 새겨 넣는 문양도 다양하다. 자세히 보면 우리 고유의 무속신앙 전통과 도교·불교가 혼합된 가운데 발전되어온 민족의 역사가 잘 드러난다. 문양의 종류도 인물에서부터 동·식물, 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인물 문양에는 부처·관세음보살·염라대왕·관운장·동자·귀신 등이 있는데, 각 신체 부분의 특징을 강조한 인물 묘사가 재미있다. 예를 들면 부처는 머리카락이 없고 귀가 크며, 관세음보살은 머리 장식을 화려하게 하는 식이다.


▎설경과 함께 전통굿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무구들. 사진 앞쪽의 서리꽃 모양의 ‘서리화대’는 신과 인간의 가교역할을 하고, 가운데의 ‘넋당삭’은 사람의 혼을 달래 실어 보내는 가마를 형상화한 것이다. 뒤쪽 벽면에 있는 부채 모양의 ‘우선설경’은 복을 일으키거나 잡스러운 것을 쫓아내는 역할을 한다.



종이 공예의 전통 발전시킨 예술작품

동물과 식물 문양에서도 강한 상징성이 돋보인다. 호랑이는 용맹함을 상징해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의미를, 나비와 새는 내세를 상징하는 하늘과 연결되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낸다. 식물 중에서는 꽃 문양이 유독 많은데 꽃은 죽은 이의 영혼이 꽃이 만발한 저승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한편, 설경에 들어가는 글 문양도 인류보편적 욕구가 잘 나타나 있다. 복(福)이나 수(壽)처럼 한 글자만으로 자신의 지향하는 바를 나타내기도 하고, 귀불침신(鬼不浸身:귀신이 사람 몸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과 같이 사자성어로 나타내기도 한다.

이번 전시회에는 설경뿐만 아니라 설경과 함께 쓰이는 재미있는 소품들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실제로 굿을 할 때엔 설경뿐 아니라 종이철망, 팔문금쇄진(八門金鎖陳), 호리병 등의 종이 공예품이 함께 설치되기 때문이다. 설경은 굿을 지내는 무당의 정면과 양 옆에 세우고, 그 정면에는 철망을 설치한다.

생선을 잡는 그물 모양의 종이철망은 귀신을 잡는다는 의미다. 또 천장에 동서남북과 그 사이 방향으로 뻗게 설치하는 팔문금쇄진은 원래 전쟁에서 적의 침입을 막을 때 사용하는 진법인데, 팔방에서 오는 귀신을 막는다는 의미로 설치한다. 설경과 팔문금쇄진 끝부분에 놓는 호리병은 잡은 귀신을 가두기 위해서 놓아둔다. 종이나라박물관 전시장 한쪽에 있는 설위에는 철망과 쇠줄에 자물쇠까지 설치돼 있다.


▎출품된 설경 작품 중에는 전통 문양을 창의적으로 변형한 것이 많아 눈길을 끌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달마도사, 천우신조(天佑神助)와 개비, 태극12지지를 담은 설경.
그런데 이런 예술성 높은 설경이 어쩌다 전통굿에만 남게 됐을까? 설경은 우리 고유의 종이공예전통을 이어받았지만 일제시대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고유의 민속놀이가 아니라 미신으로 취급 받기에 이르렀다. 이재선 법사는 이번 전시회를 갖게 된데 대해 “더 이상 무속이란 이름 때문에 우리 전통의 종이공예가 평가절하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며 “음지에 있는 우리의 예술을 양지로 끌어올리고 싶었다”고 취지를 밝혔다.

그를 포함한 4명의 설경 전문가들은 실제로 굿을 하는 법사들이지만 이번 전시를 위해 종교색보다는 예술성에 치중해 설경을 제작했다. 사람들이 종이 오리기 공예를 아무런 부담없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설경제작에 들어간 섬세한 기술과 그 안에 담긴 아름다운 정신은 그대로다. 이재선 법사는 “설경은 기본적으로 접어 오리는 행위다. 접는 것은 반드시 다음 과정을 고려해야 하는 작업인데, 이는 상대에 대한 배려로 발전된다”며 설경에 담긴 정신을 강조한다.

전시회에 참여한 다연 강창미 법사도 “설경은 종교를 떠나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며 “설경을 단순히 굿청에서 사용하여 귀신을 잡아 가두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전통민속공예로 발전시켜 우리의 실제 생활에 이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와 이재선 법사는 이미 국립미술박물관과 인사동 유카리 화랑에서 설경전을 개최한 바 있다. 이번 전시회는 관습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변화에 발맞추어 우리 종이공예 전통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자 하는 설경 전문가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민속학 전문가인 호정 김명자 안동대 명예교수는 “그동안 설경 하면 외경스러움으로 인해 가까이할 수 없는 부담이 있었는데, 이번 전시는 그 부담에서 벗어나 설경을 ‘음지를 벗어나 양지로 활짝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번 종이나라박물관의 설경전시회는 11월 30일까지 열린다.

201312호 (2013.1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