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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연구 - ‘문명의 전위부대’ 얼리어답터의 세계 

전문지식은 기본! 주관 있어야 ‘진짜’ 

글 이윤식 월간중앙 인턴기자 / 사진 전민규 기자
한 발짝 앞선 소비와 기발하고 독특한 아이디어로 제품 개발에 협력… 홍보용 리뷰어 넘어 최근에는 ‘프로슈머’로서의 역할 주목받기도 . 3 웨어러블 디바이스는 IT 얼리어답터들이 요즘

▎왼쪽부터 코카콜라캔 냉장고, 지폐 문양 지갑, 기하학적 디자인 달력, 피노키오 연필깎이, 마늘껍질 까는 도구, 사운드머신(효과음 기계), 전방위 파노라마 카메라, 정육면체 타이머, 방수 스마트폰, 딸기 꼭지 따개, 귀퉁이만 자를 수 있는 지우개, 에그타이머(색으로 계란 삶는 적정 온도를 알려준다).



얼리어답터는 한때 신제품을 내놓는 기업들이 가장 신뢰하는 마케팅 ‘척후병’이었다. 반짝이는 IT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절, 그들은 VIP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스타 연예인 얼리어답터와 파워블로거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전문적인 제품 분석과 상상력이 대중의 취향을 너무 앞질러나간다는 강점이 거꾸로 그들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그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슬로어답터’인지도 모른다. 일반 소비자보다 몇 발짝 앞서 기발한 제품들을 찾아나서는 아이디어 향유자들의 삶도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일본 도쿄의 아키하바라 전자상가. 일본인 점원이 한 손님에게 따끈따끈한 신제품을 내놓는다. 이 손님이 구매한 제품은 일본기업 리코의 전방위(全方位) 파노라마 카메라 ‘THETA’다. 아이폰과 연결해 사진을 찍으니 화면에 주변 동서남북과 천장, 바닥이 모두 찍힌다.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로드뷰(road view·거리를 지도 대신 사진으로 보여주는 서비스)처럼 화면을 움직여 살펴볼 수도 있다.

“손님이 이 제품의 두 번째 구매 고객입니다”라고 점원이 일러주자 손님은 “그럼 첫 번째 고객은 누구죠?”라고 되묻는다. 점원이 바로 대답한다. “접니다. 하도 신기해서 제가 샀어요.”

사실상 이 제품의 첫 번째 고객은 한국인 조현경(39) 씨였다. 2000년대 초반, 호기심 많은 기자였던 그는 국내 ‘얼리어답터 1호’인 최문규 씨를 취재하면서 얼리어답터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끼가 다분했던 그들은 의기투합해 아이디어 상품을 소개하는 책 <아이디어 퍼주는 스푼>(2002년)을 함께 펴내 얼리어답터의 존재를 국내에 알리는 데 일조했다.

국내에 ‘제품 리뷰’가 처음 등장한 것도 얼리어답터 덕분이다. 그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리뷰를 올려 자기들끼리 정보를 공유하던 게 일반화된 것이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요즘은 온라인 쇼핑 시 소비자의 90%가 리뷰를 보고 구매를 결정할 만큼 리뷰의 의존도가 높다. 때문에 얼리어답터는 마케팅업계에서도 최고의 VIP 대접을 받아왔다. 기업들은 이들에게 제품을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원고료를 주는 조건으로 리뷰를 청탁하는 것이 대세가 됐다.


▎얼리어답터들이 새로운 물건에 열광하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신선한 아이디어 때문이다. 1세대 원조 얼리어답터로 꼽히는 조현경 씨.
최근 부쩍 늘어난 ‘얼리어답터 연예인’도 기업들의 신제품 마케팅의 일환이다. 태블릿 PC업체 ‘레노버’는 아이돌 그룹 ‘엠블랙’의 승호와 미르, 듀엣 ‘다비치’의 강민경을 얼리어답터라고 홍보했다. 대중에 자주 노출돼야 하는 스타들의 입장에선 얼리어답터라는 이미지를 얻어서 좋고, 기업의 입장에선 제품의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파워블로거라고 얼리어답터는 아냐

얼리어답터라는 이미지가 기업뿐 아니라 연예인들에게도 홍보 수단이 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1세대 얼리어답터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그다지 달가운 상황은 아닌 듯하다.

준전문가 수준의 제품 평가능력을 가진 자신들을 홍보수단으로만 이용하려 들기 때문이다. 17년차 얼리어답터인 제품 디자이너 하만수(34) 씨는 “우리를 판촉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제품 개선에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밝혔다.

원조 얼리어답터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이들은 자신들이 ‘홍보용’ 리뷰어(reviewer)나 ‘판촉용’ 파워블로거와 같은 반열로 평가 받는 것을 꺼려한다.

조현경 씨는 “얼리어답터는 전문성과 주관성을 모두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얼리어답터는 파워블로거가 될 수 있지만, 파워블로거가 꼭 얼리어답터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들 1세대와는 달리 얼리어답터라는 개념이 널리 알려진 이후에 활동을 시작한 얼리어답터들은 엄격한 ‘얼리어답터론(論)’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2005년부터 취미 겸 부업으로 제품 리뷰 블로그를 운영해오고 있는 조미정(50) 씨는 자신을 얼리어답터가 아닌 프로슈머(prosumer·생산자와 소비자의 합성어)라고 소개한다.

그는 “1세대 얼리어답터는 새로운 제품을 남들보다 먼저 사용해본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활동했기 때문에 개인적 차원 외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고 평했다. “지금은 기업과 일반 소비자 간의 쌍방 커뮤니케이션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는 생산적 의미의 프로슈머로 발전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흔히 얼리어답터라 하면 ‘남들보다 제품을 먼저 사는 사람’쯤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 정도만 맞는 얘기다. 그들은 단순히 일찍 일어나는 ‘얼리버드’ 그 이상이다. ‘왕성한 호기심과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란 것이 정답에 더 가깝다. 새로운 물건을 구입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독특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피노키오 동화를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Monkey Business’社의 제페토 연필깎이.



제품보다는 ‘아이디어’를 구매

피노키오 모양의 연필깎이는 작은 아이디어로 사용자에게 웃음을 주는 제품이다. 피노키오 얼굴 모양의 연필깎이에서 코는 연필이다.

연필을 깎을수록 코가 줄어든다. 거짓말을 할수록 코가 늘어난다는 피노키오 이야기를 거꾸로 생각해보면 ‘쓸수록 착해지는 피노키오’라는 제품 콘셉트가 쉽게 와 닿는다.


▎요즘은 스마트폰과 관계된 독특한 제품이 많다. 다양한 효과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Holga’社의 렌즈 필터 키트.
코카콜라 냉장고는 디자인만으로 사람들의 감성을 사로잡은 제품이다. 냉장고는 코카콜라 캔이 딱 10개 들어가는 크기다. 냉장고와 온장고 두 기능이 모두 가능하지만 음료 외 다른 식품을 보관하기는 어렵다. 기능성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좁은 공간에서 사용하기 그만이다.

얼리어답터들의 블로그를 보면 뚜렷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들의 관심 분야가 IT 제품, 차, 여행, 음식 등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호기심이 많은 특유의 기질 때문이다.

조현경씨는 “얼리어답터는 항상 궁금증이 넘치는 사람들이라서 ‘전자제품 얼리어답터’, ‘화장품 얼리어답터’ 등 각기 전문 분야가 있지만 다른 분야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얼리어답터 1세대가 유독 전자제품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당시 IT 산업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넘쳐났기 때문이다.


▎일상용품에 아이디어가 더해지면 효율성이 높아질 뿐 아니라 생활에 활력이 생긴다. 잘라서 쓰는 접착식 메모 노트.
MP3 플레이어가 나오고, 휴대용멀티미디어재생기(PMP)가 출시되고, PDA가 처음 세상에 선보이던 시절의 일이다. 기술의 진보는 이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그들은 제품 리뷰를 통해 개선에 도움될 만한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기업들은 이들과의 소통을 통해 신제품 개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협력관계가 어느 순간에 끊기고 말았다. 기

업들은 여전히 이들에게 제품 평가를 맡기지만, 의견 반영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기술에 대한 관심과 전문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이들과 일반 소비자의 기호가 늘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초소형·초경량을 내세운 소니의 제품군은 얼리어답터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지만 일반 소비자에게는 외면받았다. 초경량화는 스마트기기로 이어지고 있지만, 초소형 제품은 작은 화면의 한계 때문에 유행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 나노’의 6세대 제품도 배터리 용량의 한계와 블루투스(bluetooth·근거리무선통신망)가 제공되지 않는 점 등으로 인해 애플 마니아들 말고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웨어러블 디바이스는 IT 얼리어답터들이 요즘 가장 관심 갖는 품목이다. 나이키의 건강 관리 기기 ‘퓨얼밴드’.
이익 창출이 목적인 기업 입장에선 대중성이 충족돼야 제품을 개발하기 때문에 소수 마니아만을 위한 제품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 현재 제품 개발의 주축 소비자는 얼리어답터가 아니라 오히려 ‘슬로어답터(slow adopter)’다. 처음엔 얼리어답터는 혁신성이 뛰어난 개발자와 일반 소비자 사이에서 그 간극을 메워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감각이 개발자 수준에 이르면서 오히려 그들의 역할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전자제품 업계는 IT 마니아들에게만 인기가 있는 고성능의 복잡한 제품보다는 다수의 일반 소비자가 조작하기 용이한 제품 생산에 주력하는 추세다. 이런 마케팅 아래 키패드 대신 기기를 흔들어 조작하는 MP3 플레이어, 터치스크린이 적용된 PC와 노트북 등 슬로어답터형 제품이 등장했다. 그러나 슬로어답터형 제품 개발만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슬로어답터가 원하는 편리함에 혁신이 더해졌을 때라야 시너지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애플의 아이폰이 대표적인 경우다. 조현경 씨는 “미국 첫 출시 당시, 아이폰이 놀라웠던 점은 기능이 아니라 직관적 조작방식이었다”고 돌이켰다. 스마트폰 등장 이전에도 피처폰으로 모바일용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고, 작은 컴퓨터 기능을 하는 휴대용단말기(PDA)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폰의 조작방식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조씨는 “아이폰 이전까지만 해도 기기를 조작하기 위해선 버튼을 눌러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화면을 만지고 확대하는 방식은 생각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얼리어답터의 만물상? 크라우드펀딩

아이폰은 여전히 IT 얼리어답터의 필수품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스마트폰은 그들에게 재앙을 몰고 왔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전자제품이 필요로 하는 기술 수준과 생산 비용이 상향됐고, 기업들은 이를 감당하기 위해 슬로어답터형 제품 개발을 더욱 강화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요즘 얼리어답터들이 최신 아이디어와 제품을 접하는 통로는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다. 크라우드펀딩은 온라인을 통해 불특정 다수로부터 돈을 모금하는 시스템이다. 사이트는 모금자가 자신이 앞으로 벌이고자 하는 사업 계획과 목표 모금액을 올리면, 방문자들이 모금자의 아이디어를 보고 일정 금액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미국의 킥스타터(kickstarter.com)가 대표적이며, 국내에도 텀블벅(tumblbug.com), 유캔펀딩(ucanfunding.com) 등의 사이트가 있다.

이 사이트들에는 예술·만화·무용·디자인·패션·영화·출판·기술 등 거의 모든 창조적 활동이 사업계획을 소개하며 돈을 끌어모은다. 지금까지 얼리어답터들이 출시를 앞두거나 얼마 되지 않은 제품을 한 발 앞서 접했다면, 이들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를 통해서는 아직 제품 제작에 들어가지도 않은 따끈따끈한 아이디어를 미리 만나볼 수 있다.

운영방식은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와 모금자에 따라 다른데, 모금자는 후원자들에게 후원에 대한 일정한 보상을 약속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영화 동아리가 단편 영화 제작을 위한 제작비를 모금을 하면서 ‘작품이 제작되면 5만 원 이상 후원하신 분들께 시사회 티켓 2장을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약속하는 식이다.

조현경 씨가 쓴 <아이디어 퍼주는 스푼 2>(2013)에는 킥스타터를 통해 만들어진 ‘공중부양 머그컵’이 소개돼 있다. 티저 치리가(Tigere Chiriga)라는 디자이너는 머그컵에 뜨거운 음료를 붓고 나무 테이블 위에 놓으면 열 때문에 컵 자국이 남는 것을 보고 해결방법을 찾았다.

그가 손잡이를 연장해 컵을 바닥에서 띄우는 지지대가 되도록 컵을 디자인했다. 컵 바닥과 테이블 사이에 공간이 생기니 테이블 바닥이 변색되지 않았고 컵이 공중에 떠 보이는 시각적 효과도 얻었다. 그는 아이디어를 제품화하기 위해 자신이 고안한 아이디어를 킥스타터에 올리고, 제품 제작 후 배송을 조건으로 후원금을 모았다. 방문자들의 반응이 뜨거워 목표 금액은 몇 시간 만에 모았고, 모금액으로 ‘공중부양 머그컵’이 제작됐다.

이처럼 크라우드펀딩은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직접 만들 수 있는 ‘기회의 땅’이기도 하다. 특히 대중지향의 기존 기업들에서 만족할 만한 제품을 얻을 수 없었던 얼리어답터들에게 이 공간이 갖는 잠재력은 더욱 커졌다. 이강석 씨는 “미국이나 일본에선 얼리어답터들이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사업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얼리어답터들의 입장에서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후원을 통해 제작을 지원하고 모금을 통해 직접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됐다.

201403호 (201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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