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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자기 치유의 인문학’ - ‘고독’이라는 선물 

 

정여울 문학평론가
혼자일 때만이 콤플렉스, 트라우마 등 내 그림자와 대면…자신과의 전투에서 싸워 이기는 유일한 비결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는 고독한 도시인의 삶을 통해 인간 내면의 고독, 상실감, 단절을 표현해왔다. 대표작인 .



“너무 과도한 사교생활은 이제 막 꽃피기 시작한 재능에 자칫 크게 독이 될 수 있다. 집단이나 개인이 작가로서의 그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오로지 고독한 성찰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도로시아 브랜디 지음, <작가수업> 중에서)

지금 이 순간은 철저히 혼자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잠들기 직전 서서히 눈꺼풀이 감기며 힘겨웠던 오늘 하루를 ‘빨리감기’로 되새겨볼 때.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밖에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시간들. 오직 내 손과 내 감성과 내 힘에 의지해 홀로 내가 맡은 일들을 해내야 하는 모든 순간. 이렇듯 혼자 있는 시간을 떠올리면 기쁨보다도 슬픔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혼자’보다는 ‘함께’가 좋다는 선입견은 문화적으로 학습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들은 고독한 시간에 찾아온다. 인생의 문턱을 넘는 온갖 입학 및 면접시험의 순간들, 사랑하는 이를 잃은 뒤 ‘함께 있다가 혼자가 되는 일’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드는 소중한 시간들. 이런 고독한 순간들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내면의 성장을 꿈꿀 수 없을 것이다. 혼자있는 시간은 함께 있는 시간보다 덜 흥미로운 시간이거나 피해야 할 시간이 아니라 그 누구도 아닌 자신과 함께하는 진정한 자기대면의 시간이다.

심리학자 융이라면 이 고독한 시간의 가치를 ‘그림자와의 만남’이라 일컬었을 것 같다. 우리 내면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나는 첫 번째 담력 시험, 그것은 사람들 속에 무난하게 섞여 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다.

콤플렉스나 트라우마 같은 것들, 남들에게 보이기 싫은 나 자신의 그림자를 똑바로 대면하는 것.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는 데서 비롯되는 고통을 참고 견뎌낼 수 있다면, 무의식과의 진정한 만남에 이르는 첫 번째 문턱을 뛰어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쉽게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무의식과의 만남은 시작된다. 의식의 밑바닥에는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 차라리 잊고 싶은 상처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의 끔찍한 기억, 그리고 너무도 그립지만 차마 부를 수 없는 이름의 목록들이 가라앉아 있다.

의식은 바로 그렇게 수많은 상처를 꼭꼭 숨기고 있는 무의식의 그림자들을 억압하거나 회유한다. 의식은 무의식을 향해 이렇게 다독거린다. 지금 일해야 하니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그런 상처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남들이 알게 된다면 나를 싫어하겠지, 어차피 고민해봤자 풀리지도 않는 문제를 붙들고 있으면 뭘 하는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실수 인정할 때 성숙할 수 있어

하지만 무의식의 상처는 의식의 억압을 향하여 반드시 ‘조공’을 요구한다. 그렇게 네 진짜 문제를 덮고 잊고 봉합하려고만 한다면, 결국 네 진짜 모습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고독 속에서 우리 무의식의 그림자와 대면하는 것만이 자신과의 전투에서 싸워 이기는 유일한 비결이다.

알코올중독자 모임에서 치료를 위해 첫 번째로 넘어야 할 장벽도 바로 ‘나는 알코올중독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뼈아픈 자기 고백은 타인을 향한 것이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향한 선전포고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품고 있는 가장 멋진 이미지들, 그 이상적인 자기 이미지를 부정하는 강력한 장애물이 바로 나 자신의 ‘일부’임을 긍정하는 데서 자기 치유는 시작된다.

“그림자는 인격의 살아 있는 부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 함께 살아가려고 한다. 사람들은 그림자를 무시할 수도 없고 그것이 새롭지 않다고 꾸며댈 수도 없다. 이 문제는 극도로 어렵다. 그 이유는 그림자가 인간 전체를 불러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절망감과 무능력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 그러나 청구서는 언젠가는 지불되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수단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 사람들이 그러한 태도를 갖는다면 인간의 더 깊은 본성에 깃들어 있는 유용한 힘이 깨어나게 된다.”(칼 구스타프 융 지음, 한국융연구원 옮김, <원형과 무의식>, 솔, 2006, 127~128쪽)

내게 ‘혼자 있는 시간’이 공포만은 아니라는 것,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멋진 공상의 시간이자 새로운 삶을 향한 도약의 시간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이야기가 바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화 <라스무스와 방랑자>였다. <내 이름은 삐삐 스타킹>의 작가로도 유명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여사의 동화는 언제나 흥미진진했다. 그중에서도 노란 갱지로 인쇄된 동화책의 표지는 아직도 기억 속에서 생생한데, 당시의 제목은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였다.

책의 모서리가 헤지도록 여러 번 읽은 몇 권의 책 중 하나였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고아 소년 라스무스의 모험을 어찌나 동경했는지 오스카처럼 멋진 방랑자를 만나 ‘양아버지’로 삼는 상상을 하며 행복한 가출을 꿈꾸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내가 라스무스를 좋아했던 진짜 이유는 그의 인간적인 결점 때문이었다.

잘하려고 할수록 더 많은 실수를 하고,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는 더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덜렁이 라스무스는 자꾸만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어디론가 도망쳐버리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닮았던 것이다. 실수를 저지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이 부끄러움과 외로움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어 보일 때,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고독과 대면하게 된다. 내가 저지른 실수는 반드시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진실을 온몸으로 깨닫고 그 책임을 이행하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 아닐까.

실수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와 만나는 인식의 관문이다. 누구나 이상적인 자아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실수는 그 이상적 자아상을 위협하는 자기 안의 장애물이 된다. 하지만 실수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잘못을 바로잡고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실수투성이지만 천진무구하고 재기 넘치는 고아소년 라스무스에게는 ‘너는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고독 속에서 최고의 결정 내려

아직 어린 라스무스는 야단만 치는 고아원 원장님이 아니라 실수를 보듬어주고 “괜찮아, 다음엔 더 잘 할 수 있어”라고 격려해줄 수 있는 어른이 필요했지만, 라스무스는 그런 어른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입양하고 싶은 아이를 선택하러 온 멋진 부모들 앞에서 라스무스는 필사적으로 ‘내 안의 가장 멋진 모습’을 보이려 하다가 오히려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절친 군나르에게 물을 끼얹다가 실수로 고아원 원장 미스 하비히트에게 물벼락을 맞게 하기도 하고, 부유한 상인의 아름다운 부인 앞에서 그녀의 양산을 주워드린답시고 그레타와 힘을 겨루다가 양산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결국 그 멋진 커플은 곱슬머리 소녀 그레타를 입양하여 떠나버린다.

라스무스는 낙심한 고아원 아이들을 웃겨주려다가 미스 하비히트를 흉내 내던 와중에 바로 자기 뒤에 서 있는 하비히트를 발견하지 못한다. 라스무스는 하비히트를 향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급기야 고아원을 탈출하게 된다. 그때부터 피할 수 없는 모험이 시작된다. 배고픔과 외로움, 슬픔과 괴로움으로 가득 찰 것이라 예상했던 고아소년 라스무스의 고아원 탈출기는 뜻밖의 유머와 따스함, 상상을 뛰어넘는 사랑과 우정의 메시지들로 가득하다.

이 여정에서 가장 멋진 동반자는 바로 방랑자 오스카였다. 방랑자 오스카는 역마살을 이기지 못해 고향에 사랑하는 부인을 두고도 전국을 떠돌며 동가식서가숙한다. 하지만 라스무스에게 오스카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로 보인다. 언제 어디든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사람, 배가 고프거나 돈이 없어도 당황하지 않고 묵묵히 나그네의 윤리를 실천하는 사람.

그 나그네의 윤리란 바로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타인에게 공짜로 신세지지 않는 것, 밥과 잠자리를 제공받는 대신 집주인들에게 필요한 노동을 해주거나 멋진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오스카가 억울하게 무장강도로 몰리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지만, 두 사람은 어느새 환상의 커플이 되어 기지와 재치를 발휘해 위험한 상황을 멋지게 모면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나그네의 우정’ 이상의 것, 공감과 배려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

경찰들은 라스무스를 고아원에 다시 데려다 주려하고, 선량한 닐손 부부는 라스무스를 입양하고 싶어한다. 이때 라스무스에게 절체절명의 순간이 찾아온다. 처음에 라스무스는 뛸 듯이 기뻤다. 지상에 집 한 칸 가져보는 것, 아니 집 한 칸을 가진 따뜻한 부모가 필요했던 라스무스는 처음으로 자신을 첫눈에 입양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라스무스는 이제야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오스카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본 순간, 라스무스는 이제 ‘진짜 혼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는 부유한 집안이라도, 처음으로 누워보는 보드라운 침구 속에서 늘어지게 잠을 잘 수 있다 하더라도, 오스카가 없다면 자신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혼자서 결정해야 하는 순간, 그 고독의 시간 속에서 라스무스는 인생을 뒤흔드는 최고의 결정을 한다.

“배스터하가 고아원에서 여러 번 꿈꾸었던 바로 그런 부모였다. 그랬다. 엄청난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었다. 라스무스도 집과 부모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왜 즐겁지 않고, 이렇게 슬프기만 한 걸까? 라스무스는 결국에는 배스터하가에서 도망쳐 나온 뒤로 가장 불행해졌다.

무언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너무나도 슬픈 기분이 들어서 꼭 죽을 것만 같았다. (…) 오스카! 가슴이 아플 정도로 라스무스가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오스카였고, 이런 아픔을 치료하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오스카를 붙잡아야 한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문성원 옮김, <라스무스와 방랑자>, 시공주니어, 283쪽)


▎호랑이들은 함께 있을 때에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지만 떠날 때는 부모, 자식 모두 ‘완벽한 독립’을 실천한다. 완벽한 고독 속에서 더 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게 호랑이의 특징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트위터, 문자메시지 등 ‘온라인’에 완전히 노출된 현대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고독할 수 있는 자유’라고 말한다.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다

라스무스는 ‘오스카가 없는 밤’,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쓸쓸한 밤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다.

라스무스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친구 군나르가 기다리고 있는 고아원도, 풍족한 생활과 안락한 가정이 보장된 닐손 부부도 거부한다. 라스무스는 언제 또 정처 없이 길을 떠날지 모르는 영원한 방랑자 오스카를 자신의 아버지로 선택한다.

라스무스는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다’라는 고립감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겨낼 수 있게 해준 최초의 친구, 오스카를 평생의 동반자로 결정한 것이다.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소외감은 라스무스로 하여금 고아원을 탈출하게 만들었지만, 그 고통의 시간을 함께 견뎌준 뜻밖의 타인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깨닫게 된다.

배고픔과 추위를 고독보다 두려워하며 살아왔던 고아원을 탈출했던 소년에게 최고의 인생 목표는 ‘부잣집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막상 그런 기회가 찾아오자 라스무스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아홉 살에 벌써부터 철이 들어버린 라스무스는 오스카에게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되는 많은 것은, 그 여행자의 숨겨져 있던 본성일 거라는 생각을 했어.” 라스무스는 오스카를 따라 방랑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숨겨진 본성’을 찾아냈던 것이다.

“미국 고등교육신문의 웹사이트(chronicle.com)에서 한 달에 무려 3천여 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10대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문자메시지를 많이 보냈다는 것은 그 소녀가 하루 평균 100여 건의 메시지를 보냈거나 깨어 있는 동안 매 10분마다 거의 한 번 꼴로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침이든 대낮이든 한밤중이든, 주중이든 주말이든, 수업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숙제시간이든, 심지어 양치하는 시간이든’ 가리지 않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결국 그 소녀는 10분 이상은 계속 누군가와 이야기한 셈이고, 이는 그 소녀가 혼자서만 지내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생각과 꿈·걱정·희망 같은 것들을 고민하면서 홀로 있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동녘, 2012, 24쪽)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중에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책이 바로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이다. 만주의 원시림이 아직 인간의 발길로 뒤덮이기 이전, 타이가(유라시아의 침염수림지역) 지방의 절대군주는 누가 뭐래도 만주 호랑이었다. 이 호랑이의 탄생과 성장, 사랑과 이별, 고난과 극복의 서사를 담은 이야기 <위대한 왕>은 ‘고독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데 있어 최고의 모범답안을 선사해준다.

호랑이들은 함께 있을 때에는 사랑과 보살핌으로 서로를 결속하지만, 떠날 때는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은 채 부모나 자식 모두 ‘완전한 독립’을 실천한다. 호랑이들의 짝짓기 시즌인 ‘맹수들의 밤’ 이외는 수컷과 암컷 사이의 유대관계도 지속적이지 않다. 심지어 암컷은 수컷을 떠나 홀로 새끼들을 낳고, 홀로 은신처를 찾아 아이들을 키우며, 새끼들에게 사냥을 가르치는 것조차 암컷 혼자서 담당한다.

그리고 새끼들이 숲의 험난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을 갖출 때쯤, 미련 없이 ‘맹수들의 밤’이 이끄는 본능의 속삭임 속으로 몸을 던진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어미’가 ‘암컷’을 이기지만, 아이들을 떠날 때는 거침없이 ‘모성’을 버리고 ‘암컷’의 본능을 따르는 것이다. 호랑이들은 ‘무리’를 통해 자신의 결핍을 보충하려 하지 않는다. 무리를 이루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고독 속에서 더 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것이 호랑이의 일생이다.

<위대한 왕>에는 생태계의 신비를 증언하는 갖가지 흥미로운 장면이 그득하다. 그중에서도 스스로가 절대군주임을 잘 알고 있는 ‘위대한 왕’이 처음으로 엄마 품에서 벗어나 독립에 성공할 때쯤, 고독한 산책 속에서 발견하는 흥미로운 풍경이 있다. 검은 담비가 다람쥐를 맹렬하게 추격하는 사냥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벨벳 외투’라 불리는 검은 담비는 다람쥐를 추격하느라 잔뜩 흥분해 있었는데 그 순간 다람쥐를 쫓느라 다른 쪽은 볼 겨를이 없었던 검은 담비는 숲의 주인인 호랑이와 딱 마주치고 만다.


▎커크 더글라스 주연의 <율리시스>의 한 장면. 고대 영웅 율리시스는 ‘가장 자신다운 모습’을 찾기 위해 세월과 운명에 굴복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검은 담비의 반응이다. 호랑이의 한 끼 식사거리도 안 되는 작은 몸집의 검은 담비가 자신의 사냥게임에 ‘진로방해’를 한 호랑이에게 정면으로 대든 것이다. 게다가 그 검은 담비는 암컷이었다. ‘나는 다람쥐를 사냥하고 있다’는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힌 담비는 앞에 호랑이가 나타나도 도망칠 생각을 안 한 채 호랑이가 자신의 장애물이라 판단한 것이다.

‘고독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현대인

“예기치 못한 사태에 놀란 검은 담비 암컷은 격렬한 추격으로 여전히 열에 들떠, 온몸을 떨면서 거대한 호랑이와 마주보았다. 자신의 기세를 주체하지 못하는 암컷의 눈에 왕은 장애물이자 사냥의 방해물일뿐이었다.

암컷의 작은 두 눈은 광포한 분노의 빛을 내뿜었다. 검은 담비 암컷은 언제라도 맹수에게 뛰어들 기세로 위협적인 이빨을 내보이며 뱀처럼 쌕쌕거렸다.

암컷의 몸은 증오를 가누지 못하고 마구 흔들렸다. 위대한 왕이 다람쥐 사냥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자그마한 육식동물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왕은 이 꼬마 짐승의 용맹함과 필사적인 용기에 충격을 받았다. 왕은 이 모든 상황이 재미있었다. 타이가의 모든 신하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퍼뜨리는 군주가 이 작은 짐승 앞에서 뒤로 물러선단 말인가?” (니콜라이 바이코프 지음, 김소라 옮김, <위대한 왕>, 아모르문디, 98쪽)

“호랑이는 이 거대한 원시림 속에서 ‘내가 왕이다’라는 것을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작은 생명체의 필사적인 용기 앞에서 문득 긴장한다. 검은 담비 따위는 쉽게 잡아먹을 수도 있지만, 왕은 그런 비겁한 행동에 자신을 낭비하지 않는다. 대신 이 고독한 성찰의 순간에서 무언가를 배우려 한다.

‘강하다’는 것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한없이 약해 보이는 검은 담비가 호랑이에게 겁 없이 공격의 자세를 취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의 또 다른 묘미임을, 왕은 알아차린 것이다. ‘강하다’는 것은 ‘자기보다 약한 대상’을 전제로 할 때 성립하는 개념이다.

검은 담비와 다람쥐의 추격전을 통해 ‘숲의 제왕’조차 끼어들어서는 안될 ‘작은 동물들의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 왕은 조용히 그들의 싸움을 계속하도록 길을 비켜준다. 그는 호랑이의 힘을 믿고 모두를 괴롭히는 압제자가 아니라 숲의 생태계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인간의 무분별한 침입을 저지하는 수문장의 역할도 해낸다.

위대한 왕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깨닫는 순간은 바로 자신의 첫사랑을 교활한 사냥꾼의 덫에 참혹하게 잃은 후, 상심한 나머지 10년이나 타이가를 떠나 있다가 고향으로 되돌아왔을 때다. 그는 자신이 가족 다음으로 처음으로 사랑했던 대상을 인간에게 잃은 후, 인간에 대한 분노로 몸부림치며 10년 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다.

그런데 왕이 되돌아와보니 그 무성하던 타이가의 원시림은 벌목꾼들의 횡포로 산산이 조각나 있었고, ‘무쇠괴물’이라 불리는 증기기관차가 숲의 평화를 깨뜨려버렸으며, 인간이 설치한 온갖 문명의 이기들로 인해 동물들의 서식지는 위협당하고 있었다. 왕은 절망과 탄식 속에서, 지금까지 맛본 가장 깊은 고독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다.

그는 ‘숲의 제왕’ 자리도 버리고 10년이나 타이가를 떠나 있었지만, 그가 끝내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고향, 타이가였던 것이다. 뱀같이 생긴 흉측한 금속 괴물(기차)은 분명 인간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밝은 창이 달린데다 내장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내뱉고 연기와 불을 토해내는 거대한 건물들 역시 이 두발짐승들의 창조물이었다. 상자처럼 생긴 집을 짓고 조용한 타이가를 가로질러 철도를 놓은 것도, 왕이 태어난 덤불 숲을 없애버린 것도 바로 두발짐승들이었다.

그 두발짐승들은 야생동물과 새들의 집이나 생존의 근원인 숲마저 불태우고 파괴했다. 왕의 가슴에는 이 새로운 인간들에 대한 잠재울 수 없는 분노와 복수심이 차 올랐다. (…) 왕은 15년 동안 타이가의 산과 숲을 지배했고, 타이가에는 왕에게 걸맞은 적수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군주로서 왕의 권리는 효력을 다했으며 야생 오지 속에서의 특권도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대한 왕>, 179~180쪽)

왕은 인간의 폭력에 굴종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가장 자신답게 만드는 것은 단지 강력한 힘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타이가의 원시림과 산맥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수놓았던 수많은 추억이 우거진 숲 속의 구석구석임을 알게 된다. 왕은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인간들과의 결전을 준비한다. 아니, 이 결전에는 실패도 승리도 없다. ‘가장 나다운 것’을 찾는 길 위에서는 뼈아픈 희생과 고통조차도 바로 자기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문자메시지로 항상 ‘온라인’ 상태에 노출된 현대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고독할 수 있는 자유’라고 말한다. 고독한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잠재된 창조성이 만개하는 시간, 우리 안의 잃어버린 모든 가능성이 아름다운 날개를 펴는 시간이다.

비록 많은 것을 잃었지만/ 또한 많은 것이 남아 있으니,/ 예전처럼 천지를 뒤흔들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다./ 영웅의 용맹함이란 단 하나의 기개./ 세월과 운명 앞에 쇠약해졌다 하여도/ 의지만은 강대하니/ 싸우고, 찾고, 발견하며/ 굴복하지 않겠노라 -알프레드 테니슨의 ‘율리시스’ 전문

201403호 (201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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