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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 우리 외할머니는 ‘열공 중’ 

 

사진·지미연 기자
맞벌이부부 늘어나면서 조부모 ‘손주 돌보기’가 대세인 시대…‘육아일기’ 쓰는 할아버지, 영어학원 다니는 할머니 등 ‘육아공부 열풍’

▎맞벌이 가구가 늘면서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들이 늘고 있다. 이창식 씨는 3년 동안 손주를 돌보며 기록한 육아일기를 책으로 펴냈다. 이씨는 손자가 커가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어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한다.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에 사는 최영숙(58·가명) 씨는 매일 아침 7시가 되면 딸네 집으로 출근을 한다. 이제 갓 돌을 넘긴 손녀를 돌보는 일이 그의 하루 일과다. 최씨는 처음부터 손주의 양육을 맡아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딸이 결혼하기 전부터 “나중에 애를 낳아도 나한테는 절대 부탁하지 말라”며 “힘에 부쳐 아기 돌보는 일은 할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직장에 다니는 딸이 아기를 낳자 상황이 달라졌다. 처음엔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며 모른 체 했지만 남편의 설득에 마음을 달리 먹게 된 것이다.

“남편이 그러는 거예요. 딸이 어렵게 직장을 들어갔는데, 그만두면 아쉽지 않느냐고요. 또 요새 젊은 사람들은 맞벌이를 해야 살 수 있는데 우리가 좀 도와주자라고 설득하더라고요. 처음엔 그 말이 야속하게 들렸죠. 이제 애들 다 키워놓고 여행도 다니고, 친구도 만나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갖게 됐는데 또 애를 돌보라니 속이 상했죠. 그래도 어떡하겠어요. 결국 남편 말대로 손녀를 돌보기로 했어요. 조금 힘이 들긴 해도 손녀 재롱을 보는 재미도 쏠쏠해졌어요.”


▎권호숙 씨는 자식을 키울 때는 여유가 없어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육아의 기쁨’을 오히려 손주를 돌보며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최씨에겐 고민이 생겼다. 손주를 키우는 방식을 두고, 딸 내외와 의견충돌이 생기는 날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딸이 야속하기까지 해 찔끔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는 “예전에 아이를 키우는 것과 요새 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많이 다른 것 같다”며 “손녀가 커가면서 더 많은 갈등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됐다”고 말했다.

맞벌이 늘면서 황혼육아도 늘어

최씨처럼 손주들을 돌보면서 육아 문제로 고민하는 조부모들이 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조부모들을 대상으로 ‘손주 육아’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육아강사인 유주희(48) 씨는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들이 많아지면서 육아법을 배우려고 강의를 찾아 다니는 ‘열성파’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유씨는 2년 전부터 전국적으로 이들 할머니·할아버지를 대상으로 70여 차례 강의를 해왔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아이 키우는 데 공부까지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았어요. 그런데 요새는 강의를 가보면 정말 열기가 뜨거운 걸 실감해요. 어린이집에서도 강의 요청이 들어오는데, 아이를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는 분들의 절반가량이 조부모들이든요.”

젊은 세대일수록 맞벌이부부가 늘어나면서 할머니·할아버지가 손주들의 육아를 책임지는 가구가 크게 증가한다. 일각에서는 이를 일컬어 ‘황혼육아’라고 부른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말 기준으로 맞벌이 가구는 510만 가구인데, 이 중 절반가량인 250만여 가구가 육아를 조부모에게 맡기는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 사는 이정숙(59) 씨는 손주 육아 교육법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열혈 할머니’다. 그는 지난해 5월 강남 육아지원센터에서 유주희 강사의 육아법 강의를 들었다. 1년째 친손주를 돌보는 이씨는 남편에게도 이 강의를 함께 듣게 했다. 이씨는 “남편도 손주 교육법에 관심을 많아 아이를 키우는 데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은 아무래도 젊은 엄마들에 비하면 육아법 정보가 부족할 수밖에 없잖아요. 아이를 돌보면서 늘 ‘어떻게 하면 이 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죠. 그러다가 조부모들을 대상으로 하는 ‘손주 돌봄 강의’가 있다는 걸 알고 듣게 됐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육아 강의에서 좋은 정보를 얻게 된 이씨는 내친김에 한 사설기관이 개설해놓은 ‘손주 육아 전문가 과정’을 듣고 있다. 그는 “손주를 더 잘 키우기 위해 영양·놀이·학습 등 다양한 분야와 관련해 심층적인 교육을 받고 있다”며 “앞으로 이 과정을 통해 육아 지식도 늘리고, 조부모들을 대상으로 직접 강의도 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손주 도훈(2) 군을 맡아 키우면서 살고 있는 집의 거실이나 방 구조도 바꾸었다. 먼저 집 안 거실에 놓여 있던 소파를 과감히 치워버렸다. 혹시 손주가 다치는 사고를 미연에 막기 위해서다. 거실 마루 바닥에는 푹신푹신한 매트도 깔아놓았다. 거실 곳곳에 장난감 차, 소꿉놀이 세트 등 장난감들이 잔뜩 널려 있다. 이씨는 “손주가 집에 오고 나서 먹는 것부터 시작해 집안 생활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씨 부부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손주와 함께 지낸다. 아들 내외는 수요일에 찾아와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도훈군을 데리고 집에 갔다가 일요일에 다시 이씨 부부의 집에 와서 하룻밤을 보내고, 월요일에 이곳에서 출근을 한다.

이씨는 34년 동안 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2년 전에 은퇴했다. 은퇴하기 전만 해도 그 역시 손주를 돌보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평생 일했으니 은퇴 후에는 조용히 쉬면서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씨가 일을 그만두기 몇 개월 전 아들이 장가를 들자 그의 머릿속에 ‘곧 손주가 생길텐데 어떻게 해야지? 며느리도 직장 다니는 걸 좋아하는데’라는 생각이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며느리가 출산 후 1년 육아 휴직을 마치게 되자 이씨에게 책임감이 발동했다.

“저도 일할 때 시어머니께서 남매를 봐주셨거든요. 저도 그 혜택을 누렸으니 베풀 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즐겁게 직장생활을 하는 며느리에게 집에 눌러앉으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자진해서 손주 양육을 떠맡은 이씨는 소위 ‘열공(열심히 공부하다는 말의 준말)’에 돌입했다. 주변에서는 오랫동안 간호사 생활을 했으니 육아지식도 남다를 것이라고 여겼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사실 제가 병원에 있을 때 기피했던 과목 1순위가 소아과였어요. ‘소아과가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정도였어요.(웃음) 아이들이 울고 떼쓰는 것이 굉장한 스트레스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소아과에 근무한 적이 전혀 없었어요.”


▎1년째 손자 양육을 도맡아 하고 있는 이정숙·김백수 부부는 ‘손주 육아 돌봄 강의’를 들으러 다닐 정도로 적극적이다. 이씨는 최근 한 사설기관이 마련한 ‘손주 육아 전문가 과정’에도 등록해 공부하고 있다.



손주 낯가림 없애기 위해 ‘열공’

하지만 그런 그에게 손주 키우는 일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책을 읽어도 육아 서적에 먼저 손이 가고, 텔레비전을 볼 때도 육아 프로그램에 눈이 먼저 갔다.

“제 아이들이 자랄 때랑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잖아요. 시대가 변했으니 육아법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요즘 아이들은 굉장히 영리해요. 아이들의 발달 과정에 따라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대처해야지 안 그러면 제대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 저절로 공부에 매달리게 됐죠.”

이씨가 손주를 키우면서 가장 애를 먹었던 것은 ‘심한 낯가림’이었다. 손주는 낯가림이 심해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는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이씨는 손주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묻고, 육아서적도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가 그는 아이에게 악수하는 연습을 시키다 보면 낯가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손주를 데리고 다니면서 누구를 만나도 먼저 악수를 하게끔 했어요. 자연스럽게 인사도 시키고요. 그렇게 했더니 아이가 조금씩 달라지더라고요. 지금은 동네 주민, 경비아저씨를 보면 아이가 먼저 인사를 해요. 집에 못 보던 얼굴이 와도 놀라지 않고요.”(웃음)

서점가에서도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육아서적이 인기를 끈다. 온라인서점 인터파크가 발표한 60대 이상이 구입한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면 지난해 하반기 내내 육아서적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11월에는 60대 이상 베스트셀러 10권 중 1, 2위를 포함해 모두 3권이 육아 서적이었다. 특히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손주를 키우며 쓴 육아일기나, 자신들의 교육방법을 정리한 책도 출간이 이어진다.

‘황혼육아’가 늘어나면서 조부모 입장에서 육아 일기를 쓰는 사람도 생겨났다. 경기도 용인에 사는 이창식(64) 씨가 그런 경우다. 그는 아내와 함께 외손주 재영(4) 군을 돌본다. 경기도 분당에 사는 딸 내외는 매일 아침 8시에 아이를 이씨 집에 맡긴 뒤 출근을 한다. 재영 군이 집에 오면 그때부터 이씨와 아내 권호숙(61) 씨의 긴장된(?) 하루가 시작된다. 이 씨는 3년째 손주를 키우면서 이씨는 하루하루 기록한 육아일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제 원래 직업이 번역가여서 글쓰기가 몸에 배 있다 보니 손주를 돌보면서 벌어지는 일들과 느낌들을 일기 쓰듯이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딸 아이를 키울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육아일기를 손주를 키우면서 쓰게 될 줄을 정말 몰랐어요.”(웃음)

처음에 손자를 키우기 시작할 때 주변 사람들이 “몸도 힘든데 왜 사서 고생하느냐”는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씨는 외손자의 재롱을 보면서 사는 것을 ‘만년의 흉복’이라고 여긴다.

“육체적으로는 힘든 게 사실이죠. 아이가 점점 커가면서 힘에 부친 것도 맞고요. 그렇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아이가 점점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훨씬 컸어요. 그렇게 신기할 수 없거든요. 아이가 숫자를 알게 되고, 글을 깨우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생명이란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창식 씨는 ‘황혼육아’의 강점을 ‘넉넉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정작 제 자식을 키울 때는 한창 사회생활에 바빠 아이가 커나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아내가 육아를 맡아서 했죠. 하지만 아내도 젊은 나이에 엄마가 되다 보니 육아의 기쁨을 다 누리지는 못한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 두 사람 다 여유가 많이 생겼습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고요. 할머니·할아버지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지 않습니까.(웃음) 그러다 보니 손자가 커나가는 모습을 아주 가까이에서 다 지켜볼 수가 있죠. 그렇게 긴 시간을 아이와 함께 생활하다 보니 손주가 더 예쁘고, 신기하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아마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것 같습니다.”

그는 맞벌이부부들은 시간이 없기 때문에 자녀에게 ‘시간’ 대신 ‘돈’으로 보상하려는 경향이 크다고도 말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없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뭔가를 사주고, 물질로 해결하려고 할 수밖에 없지만 조부모들은 충분한 시간을 아이에게 쏟을 수 있다는 게 좋다.”

손녀 가르치다가 교원자격증 따

경상북도 경주에 사는 김신숙(62) 씨는 황혼육아를 하는 이들에게는 유명인사로 통한다. 인터넷에서 ‘송이 할머니’로 통하는 김씨는 회원수가 1만 명이 넘는 인터넷 카페를 운영한다. 자녀들의 영어교육에 관심이 있는 엄마들이라면 한 번쯤 그가 운영하는 카페에 들러봤을 정도로 입소문이 자자하다.

김씨는 “저처럼 손주 키우는 할머니들로부터 육아에 관한 자주 질문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특히 손주를 키울 때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다는 걸 안타까워 하더란다. 그는 “손녀와 관련된 일은 무엇을 하든 딸과 의논해서 결정했다는 제 경험담을 들려준다”며 “손주의 부모, 즉 내 자식과 좋은 관계를 맺을 때 모두가 만족하는 육아를 해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외손녀 최은송(15) 양을 돌보면서부터 영어공부에 도전했다. “송이를 갓난아기 때부터 키우다 보니 영어교육에 점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처음엔 ‘아이들 영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르치려고 하니 기본 단어조차 읽지 못하겠더군요. ‘영어 잘하는 할머니면 좋겠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김씨의 ‘영어공부 도전’이 시작됐다. 밤을 새워가며 영어사전을 펼쳐놓고 발음기호를 적어가며, 영어단어 카드를 만들었다. 아이가 잠자리에 들면 영어동화를 들려주고, 우유팩을 잘라 단어카드를 만들어 아이 손에 쥐어주었다. 손녀와 함께 영어 동화책을 읽고, 때로는 인터넷으로 영어 동영상을 보기도 했다.

동화 속 캐릭터들을 직접 그려 코팅한 후 영어로 대화하며 손녀와 역할놀이를 하기도 했다. 김씨는 “그런 과정이 힘들기는커녕 너무나 행복했다”고 말했다. 마치 35년 전의 여고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기도 했다. “처음엔 손녀를 위해 공부를 시작했죠. ‘시골 할머니’가 영어를 쓸 일이 없잖아요.(웃음) 하지만 나중에는 저 자신을 위한 공부가 됐어요. 뒤늦게 영어를 배우는 재미가 정말 쏠쏠했어요.”

김씨의 정성이 통한 덕분인지 은송 양은 영어를 잘하는 학생으로 유명하다. 외국인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건네고 대화를 건넬 정도로 영어회화 수준도 높고, 영어로 시를 쓴다.

“평범한 주부로 수십 년을 살았어요. 송이를 돌보지 않았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죠. 손녀 송이를 키우겠다고 나설 때에도 내 딸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마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자식의 재롱을 보고, 자식이 성장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건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과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왕이면 우리 송이에게 꼭 필요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여러 일에 도전할 수 있었어요. 나중에 송이가 더 크면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겠죠? 상상만해도 벌써부터 신바람 나네요!”

201403호 (201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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