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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윤고은의 호기심 취재파일 - ‘공항놀이’ 뭔가 했더니! 

해외여행이요? 우린 공항에 놀러 가죠 

글 윤고은 / 사진 지미연 월간중앙 기자
또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의 관문이 아닌 놀이터로서의 역할 주목… 유쾌한 일탈, 갈망과 노스탤지어를 꿈꾸려거든 그곳으로 떠나라!

▎공항은 이제 떠나는 곳에서 즐기는 곳이 되었다. 공항철도와 인천공항을 연결하는 무빙워크를 지나며 공항의 다양한 볼거리를 만끽하고 있는 20대 공항족 여성들.



한 도시의 첫인상, 그리고 마지막 여운. 항공권이 없어도, 떠나보내거나 기다릴 누군가가 없어도 우리에게 가끔 공항이 필요한 건 그곳이 주는 환기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공항에서 일주일을>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터미널에는 곧 하늘로 올라갈 비행기의 여행 일정을 알리는 스크린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다. 의도적으로 직공같은 느낌을 주는 글자체를 사용한 이 스크린처럼 공항의 매력이 집중된 곳은 없다. 이 스크린은 무한하고 직접적인 가능성의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충동적으로 매표구에 다가가, 몇 시간 안에 창에 셔터를 내린 하얀 회반죽 집들 위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외침이 울려퍼지는 나라, 우리가 전혀 모르는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 우리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는 나라로 떠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목적지의 세부정보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초점이 맞지 않은 노스탤지아와 갈망의 이미지들이 흔들리며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공간은 런던의 히드로공항이지만 지금 여기, 인천공항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말처럼 출국장의 스크린들은 몇 가지의 간단한 정보를 요약적으로 보여줄 뿐, 비행기가 성공적으로 이륙하면 저 스크린에서 흔적이 사라진다.

스크린이 끊임없이 갱신하는 이착륙 정보를 보고 있노라면 굳이 활주로가 보이는 곳으로 가지 않아도, 지금 이 시간 얼마나 많은 비행기가 모처를 향해 뻗어나가는지 알 수 있다. 그 스크린은 간단한 음식 재료가 적힌 거대한 메뉴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책의 목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공항 안에서 당신의 동선을 확인하라는 듯, 이 화면들은 출국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오래전 누군가는 가끔 충동적으로 공항버스에 올라탄다고 했다. 그때는 여행광(狂)인 그녀가 여행을 떠나지 못할 때 취하는 대리만족쯤으로 이해했다. 버스를 타고 공항에 갔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와야 한다면 더 우울해질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녀가 왜 공항에 가기를 즐겨 했는지를, 공항이 여행의 관문이 아닌 공간 그 자체로서 우리 일상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큰지를, 이해하게 된 건 한참 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공항놀이’ 란 말이 유행하기 전부터 공항놀이를 즐긴 셈이다.

한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에 ‘공항놀이’를 넣으면 연관검색어로 ‘은행놀이’와 ‘병원놀이’가 따라온다. ‘은행놀이’ 와 ‘병원놀이’는 어린이용 장난감의 한 종류다. 지금 내가 말하려는 것은 어른들이 더 좋아하는, 장난감이 아니지만 장난감일 수도 있는 그 공항 얘기다. 공항 자체를 목적으로 공항에 가는 것을 사람들은 ‘공항놀이’라고 부른다. 출국 일정과 함께 공항놀이를 계획할 수도 있지만, 여권이나 항공권 없이 단지 공항에 소풍을 가듯 떠날 수도 있다.


▎인천공항 내 정자 망경정 라운지에서 하루를 즐기고 있는 공항족. 4층에 위치한 망경정에 오르면 공항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주말이면 우린 공항으로 소풍 간다!

공항놀이의 시작은 일단 신용카드다. 공항놀이의 역사는 2013년 9월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데, 2013년 9월 이전까지만 해도 신용카드 한 장만 있으면(심지어 본인 명의의 카드가 아니어도) 공항에 가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심지어는 서울 시내로 가는 버스표까지 제공받을 수 있었다.

공항놀이의 완성은 역시 ‘나 이 코스로 공항에서 놀고 왔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무료혜택을 깨알같이 활용할수록 공항놀이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한 것으로 통했다. 주로 블로그나 카페, 페이스북 등을 통해 공항놀이 후기를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줄거리가 가능했다.

‘무료발레파킹→ 4층 워커힐 식당가에서 무료식사→ 만경정 앞 파스쿠치에서 무료커피→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트 타기→ CGV에서 무료팝콘 받아 영화보기→ 스타벅스에서 무료커피 한잔→ 면세구역 밖 라운지 무료 입장’.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이 무료혜택을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공항에서 사용하기에 좋았던 W카드사에서는 2013년 9월부터 무료 혜택을 받으려면 본인 명의의 당일 항공권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을 바꿨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입출국 때 주로 공항놀이를 이용하기도 한다. 2013년 12월을 끝으로 공항의 H카드 라운지도 문을 닫았다. 면세구역이 아닌 곳에 있었기 때문에 꼭 출국을 하지 않아도 해당카드를 갖고 있다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구두수선집으로 찾아간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구두 뒷굽이 사라져서 걸을 때마다 쇳소리를 냈던 것이다. 지하 1층, 사우나 ‘스파 온 에어’ 내에 구두수선집이 있다. 언젠가 결혼식이 끝나고 밤 비행기로 신혼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던 나는 이 사우나를 이용했었다. 카운터의 직원이 능숙하게 내 머리에서 실핀들을 뽑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누군가는 내게 첫날밤 신부 머리의 실핀을 뽑다가 날 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는데, 이곳에선 단 20초 만에 내 머리의 실핀을 모두 제거했던 것이다.

지금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손님들을 보자 기분이 묘하다. 그 사우나 옆 구두수선집에서 나는 뒷굽을 장착한다. 단지 구두의 굽이 아니라 내 동력의 한 축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다시 출국장으로 올라가 저 스크린을 조용히 읽어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관찰할 것이다. 미용실과 치과업무도 보는 의료센터, 네일아트숍이 서 있는 길을 지나 다시 출국장으로.


▎공항 내 모든 시설은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겸비한다. 무빙워크 벽면의 네온사인 광고판도 그 현란한 색채감으로 방문객의 눈을 즐겁게 한다.



떠남과 머무름을 구별하는 즐거움

약국에서는 기압차의 감소에 따른 통증을 막아주는 귀마개를 판다. <꽃보다 누나>의 이승기가 약국에서 지퍼백을 구입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액체류 기내 반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적정 사이즈의 지퍼백도 급하면 약국 등에서 구입 가능하다. 약 값이 시내보다 비싸다고 해도 인천공항에서 약을 구입하는 사람이 꼭 있다.

약국에 들러서 슬쩍 물어보니 감기약이나 소화제와 같은 아주 평범한 약을 구입하는 사람도 많지만 의외로 숙취해소제를 구입하는 사람도 많다. 불현듯 몇 년 전에 여행을 함께했던 친구가 떠올라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항에 너 같은 사람이 많더라. 숙취해소제가 그렇게 잘 팔린대.”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친구가 조금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나 그때 숙취 아니었거든! 인후염이었던 거 기억 안나?” 그랬던가? 그 인후염이 출발 당일 새벽 4시까지 술을 먹었기 때문이란 걸 떠올리면 사실은 거기서 거기다. 지하 1층의 응급의료센터에서는 시차적응 클리닉도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사람들 틈에서 떠나는 이와 머무는 이를 구별해내는 것은 정답률과 관계없이 흥미로운 게임이다. 하지만 공항놀이를 하러 온 사람 중에 떠남과 머무름을 완벽하게 구별해내기가 쉽지 않다. 남편과 함께 종종 공항놀이를 즐긴다는 서른네 살 박정심 씨에게서는 떠나는 이의 느낌과 머무르는 이의 느낌이 혼재했다. 그가 공항놀이라는 말을 알게 된 건 2년 전. 인천에 거주하긴 해도 공항에 가기 위해서는 인천대교를 통과해야 한다. 그 과정부터가 그에게는 즐거움이라고 한다.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고 때때로 강렬한 해풍이 불어 차가 흔들리는 느낌이 좋아요. 양 옆으로 활짝 바다가 팔을 펼치고 있는 것도요. 지금은 공항까지 가기 위해 톨게이트 비용과 기름값, 주차료까지 꽤 많은 비용이 들잖아요. 만약 이런 비용이 대폭 감소된다면 공항은 꽤 그럴듯한 외식 장소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공항 내 무료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팅을 즐기고 있는 아버지와 딸.
세계에서 노숙하기 가장 좋은 공항은 어디?

공항까지 가는데 비용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공항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이유를 그녀는 “공항에 가면 일상이 제거되어 있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 특히 ‘비행장이 보이는 라운지’에서 머무는 시간이 최고의 순간이다.

“무척이나 정교하고 첨단의 기술이 집약된 비행기가 단지 커다란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주차되어 있거나 천천히 비행장을 달리는 모습을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인천공항 1층 밀레니엄홀의 문화공연장. 공항에서 매일 열리는 모든 문화공연이 무료로 제공된다는 것에 대해 외국인들은 놀라워한다.
인천공항 컨세션기획팀에서 일하는 김지숙 씨는 공항으로 출근한지가 올해로 7년째다. 처음에는 공항 출근이 설랬지만 요즘은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이 느껴진다고 한다. 이곳이 일터이긴 하지만, 그 역시 공항놀이를 하러 공항에 오는 일도 있다. 그만의 정석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의 공항놀이는 주로 공항 내에서 영화구경을 즐기는 것이다.

“영종도 내의 유일한 극장이어서 자주 갑니다. 동료들과 심야영화도 보고 한가한 주말에는 조조영화도 가끔 봐요. 어느새 VIP 고객이 되어 있던데요?

아이스링크는 공항놀이 때 추천하고 싶은 장소예요. 입장료도 없고 장비 대여만 하면 되거든요. 저도 친구들이랑 한 번 가서 타봤어요. 주로 청소년들이 많아서 조금 부끄러워하며 탔던 기억이 나네요.”

그에게 공항에서 가장 즐겨 찾는 장소가 어디냐고 묻자 ‘교통센터’를 손꼽는다. 인천공항에서 가장 미래지향적인 건축미를 뽐내는 곳이기 때문이란다.

사람이 적어 분위기가 여유로운 것도 좋다. 피곤하고 머리가 복잡할 때는 교통센터를 한 바퀴 산책하기를 특히 좋아한다.

공항에서 일하는 동안 김씨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탑승동 오픈을 준비하던 때를 꼽는다. 오픈 몇 개월 전부터 시험운영을 하면서 밤샘근무를 하다시피 했고, 수백 명의 사람이 매달렸다고 한다. 그 사전 테스트 기간은 공항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시간이었다.

운영총괄팀 사원 임승윤 씨는 공항에서 일하는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로 연예인을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을 꼽는다. “공항에 스타가 뜰 때, 어김없이 카메라를 든 젊은이들이 3층 커브사이드 도로 또는 1층 입국장 입구에 많이 모여 있는 경우가 자주 목격됩니다. 카메라를 든 친구들이 모여 있으면, 또 누가 오나 보다, 하고 궁금해져요.”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인파에 몸을 맡기면 된다. 소녀 팬들이 모인 곳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아이돌 스타들이 와 있다.

세계의 여행객들이 합심해서 공유하는 정보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그 공항에서 노숙하기 괜찮을까요?” 이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일단 분위기(치안 상태를 포함한)가 편안해야 하고, 난방상태가 중요하며(더운 나라일수록 에어컨 때문에 너무 추운 경우도 있다), 시설물들이 눕기에 편안한 구조여야 한다. 이를테면 의자에 누울 수 없도록 팔걸이가 좌석마다 붙어있다든지 하면 노숙하기에 불편한, 공항이 된다.

인천공항은 싱가폴의 창이공항과 더불어 세계에서 노숙하기 가장 좋은 공항 1, 2위를 다툴 정도로 모든 시설이 적합하다. 무료샤워실이라든지 무료안마기, S자 형태로 유연하게 뻗은 1인용 소파들, 아이들을 위한 시설물도 잘 갖춰져 있다. 공항 어디서나 와이파이가 가능하고, 다양한 체험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물론 ‘노숙하기 좋은 공항’ 이라는 익살스러운 영예 말고도 좀 더 공신력 있는 평가결과도 있다. 인천공항이 8년 연속 세계공항 서비스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공항에서 ‘놀이’ 가 가능한 건 단지 큰 규모만으로는 불가능한 무엇일 터, 볼거리가 많다는 것도 인천공항의 매력이다.

일 평균 공연횟수만 21회라니 안 보기가 더 힘들다. 내가 머무는 동안에도 밀레니엄홀에서 국악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객서비스팀의 대리 전소영 씨는 외국인 여객들이 공항에서 문화행사를 모두 무료로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워한다고 말한다. 언젠가 한쪽 팔이 불편한 외국 어린이 여객이 있었는데, 공예체험담당자가 그 어린아이의 전통공예 체험을 도왔다. 그날 공예체험담당자가 아이에게서 받은 감사카드에는 “당신은 내가 여행 중 만난 최고의 사람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외에도 A/S 작은음악회의 경우 현장에서 악기를 갖고 있는 여객과 즉석 협연을 한다든지, 음악에 맞춰 여객이 춤을 춘다든지 하는 경우가 많다. 2013년에 밀레니엄홀에서는 한 말레이시아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프로포즈를 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인천공항은 프로포즈의 추억이 된 것이다. 그 말레이시아 남자는 꽃을 준비했겠지?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밀레니엄홀 바로 옆에 있는 꽃집 때문이었다. 꽃이 필요한 순간은 공항에도 차고 넘칠 것이다. 더군다나 입국장이라면. 한국에 들어오는 누군가를 위해 꽃을 사 들고 마중해야 할 누군가가 있을 법하지 않은가. 아니면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꽃을 사 들고 어디론가 달려가야 할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1 인천공항 개장 때부터 문을 연 꽃집 ‘Floport’. 꽃에 관한한 인천공항 방문객의 수많은 추억을 간직한 명소다. 2 인천공항 지하 1층 사우나 내 구두수선집. 구두 외에도 고장 난 캐리어도 수선한다.



전 세계의 모든 신발 고치는 구두수선공

꽃집 ‘Floport’는 인천공항이 개장할 때부터 함께 해온 곳이다. 예전에는 1층 5번 출구에 있던 가게를 2년 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Floport에서 일하는 정혜숙 씨는 공항에서 있었던 많은 꽃의 역사를 기억한다. 마지막 비행을 한 기장을 위해 동료들이 꽃을 준비했던 기억, 손님을 위해 대사 부인들이 꽃을 준비했던 기억, 자주 방문하던 외국인 손님, 공항의 크고 작은 행사들까지.

공항의 꽃집은 시내의 꽃집과 다른 시즌을 살아간다. 발렌타인데이니 졸업시즌이니 스승의 날이니 하는 행사들과는 조금 무관하게 느껴질 만큼, 공항의 꽃집은 그런 시즌 때 붐비지 않는다. 그보다는 공항에 스타가 온다거나, 하는 경우가 더 큰 행사다. “누구죠? 그 욘사마. 배용준 씨 공항에 뜨면 난리였어요. 일본 팬들이 꽃을 하나씩 사서 공항이 북적북적했죠. 몇 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요.”

꽃집 주인 정혜숙 씨는 “중국과 한국팬들은 일본팬들만큼 꽃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며 빙그레 웃었다. 최근에 기억나는 스타는 단연코 김연아다. 김연아의 이미지에 맞는 꽃을 미리 만들어놓았고, 그녀의 팬들이 꽃을 많이 준비해갔다. 물론 스타가 없어도 꽃을 사는 사람은 있다. 서울 시내에 직장과 집이 있는데도 굳이 이곳 공항의 꽃집까지 찾아와 꽃을 사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는 여기가 공항인 걸 가끔은 잊고 산다. 그에겐 아침 6시 10분까지 출근해서 밤 9시까지 머물러야 하는 일터인 것이다. 항상 떠나는 사람들 속에서 10년째 그녀의 삶이 정지돼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 각국의 사람이 드나든다는 건 흥미롭지만, 가끔 어떤 바이러스가 유행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더럭 겁이 나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물었다. 10년 동안 혹시 여행객으로 인천공항을 찾아온 적은 있느냐고. 기회가 있었지만 상황 상 그럴 수 없어서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예전에 떠나기 위해서 김포공항을 이용한 적은 있는데 그때 그곳이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거든요. 나는 인천공항에서 일하는데 말이에요. 이곳에서 출국하게 된다면 기분이 참 이상할 것 같아요. 올해는 한 번쯤 떠나보고 싶어요.”

하루가 저물 무렵, 나는 그 구 두수선집을 찾아간다. ‘ASEM 닥터 컴퍼니’. 공항에서는 만 6년째, 이 분야에서 일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이의열 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는 여기 앉아 있으면 전 세계의 신발이 다 몰려온다고 했다. 얼핏 들었던 그 말에 매료되어 나는 다시 그곳을 찾아간 것이다.

“한국인들은 전 세계에서도 유일하게 신발에 광을 내서 신는 민족이에요. 유럽 사람도, 일본 사람도 신발을 닦기는 하지만 광을 내는 것에 의미를 두진 않죠. 그렇지만 한국 사람들은 구두에 광이 나지 않으면 잘못 닦았다고 생각을 할 정도로 신경을 써요. 한국 사람들에게 구두 닦는 일은 그냥 구두를 닦는 것 이상의 의미인 겁니다.”

마치 여자들이 미용실에서 머리가 잘나오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남자들에게 광 나는 구두는 하루의 기분을 좌우하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범근 감독을 비롯한 많은 스타가 공항에 오면 꼭 이곳에 들러 구두를 닦고 가는 것일지도. 사우나에 들렀다가 이곳에 구두를 맡긴 외국인들도 반짝반짝 광이 나는 구두를 받으면, 잘 수선된 구두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기는 마찬가지다.

둥근 시계가 별처럼 총총 박혀 있는 나라?

공항이라는 특성상 사람들이 급하게 캐리어 수선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은데, 캐리어의 경우는 이의열 씨가 독학으로 연구한 분야다. 공항이다 보니 고장 난 캐리어를 곳곳의 쓰레기통에 버리고 간 사람이 많았다. 그걸 주워서 분해하고 수리하면서 배웠던 것이 지금은 어떤 캐리어든 그의 손을 거치면 새로운 캐리어로 거듭난다고 한다.

갑작스레 캐리어 바퀴나 손잡이, 지퍼 등 고장 나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은 대부분 마음이 바쁘다. 비행기를 놓칠까 봐 발을 동동 구르는 그들을 위해 20∼30분 만에 뚝딱 가방을 고쳐내는 이씨는 이곳에서 ‘수호천사’로 통한다. 공항의 안내데스크에서도 캐리어 고장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이씨를 소개해줄 정도라고 한다.

부품이 맞는 게 없어 곧바로 고칠 수 없는 경우에는 캐리어 수선비만 받고, 여행 중에 사용할 캐리어를 무상 대여해주기도 한다. 그의 창고에는 20개 정도의 캐리어가 늘 대기중이다. 그가 수리해놓은 것, 혹은 주인이 없는 것들인데, 그 캐리어가 낯선 사람과 함께 세계 각지를 돌고 나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캐리어 잠금장치 번호를 잊어버린다든지, 열쇠를 가방 안에 넣은 채로 가방이 잠겨버린 경우도 많아요. 사우나 하러왔다가 캐리어 잠금번호를 잊어버려 티격태격하는 신혼부부도 많이 봤어요. 물론 저한테는 어떤 잠금장치든 5분이면 오케이죠. 웃으면서 떠나는 그들을 보면 저도 기분이 좋아지는 걸요. 공항이란 공간이 참 재미있어요. 하루에 한 명 꼴로 정말 재미있는 손님들을 만날 수가 있거든요. 뭔가 특이하고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져요. 오늘도 이렇게 구두 굽 갈러 왔다가 또다시 오셔서 취재하는 분을 만나고.”

특이한 손님들의 이야기에 한참 심취해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되묻는다. “그럼 제가 오늘의 제일 특이한 손님이에요?” 나는 그렇게 ‘오늘의 손님’ 이 되었다. 그는 매일 ‘오늘의 손님’에 대해 일기를 쓴다고 한다. 미국에서 엄청난 부자인 것처럼 자랑했는데 알고 보니 사실과 달랐던 허풍쟁이 손님이라든지, 캘리포니아에서 온 가족의 구두 스무 켤레를 싸 들고온 손님이라든지, 그들과 같이 나도 오늘 그의 일기 한 줄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구두 굽 갈러 왔다가 다시 또 찾아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던, 그런 손님으로.

공항에 가보면 유독 둥근 모양의 아날로그 시계가 많다. 한 지인의 네 살 난 아들이 그 둥근 시계를 유별나게 좋아한다. 네 살 아이의 세계에서 공항은 또 하나의 국가로 통한다. “일본, 태국, 중국, 공항” 하면서 자신의 방문국가를 읊어대는데, 그중에 어딜 또 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단연코 “공항!”이라고 외친다고 한다. 이 아이에게 공항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인천이니 대한민국이니 하는 사실적인 지명을 초월한 미지의 국가가 되었다. 아이의 시선이긴 하지만 그럴싸한 이야기이지 않은가! 그 둥근 시계가 별처럼 총총 박혀 있는 세계를 나와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201403호 (201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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