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선비, 왕도를 말하다 - ‘육지의 이순신’ 정기룡(鄭起龍) 장군 

 

박종평 역사비평가, 이순신 연구가
60여 회 전승(全勝)의 상승(常勝) 장군…시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룬 단심(丹心)의 명장(名將)

▎경북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 소재 ‘충의사’. 정기룡 장군 사당이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역사 이래 등장할 수 있는 모든 유형의 영웅을 만날 수 있다. 읽는 사람도 성향에 따라 선호하는 영웅이 각기 다르다. 그러나 어떤 독자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영웅이 있다. 남자의 입장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부러운 남자다.

주군(主君)에 대한 무한한 순정을 본 리더들이라면, 관우(關羽)나 장비(張飛), 제갈공명(諸葛孔明) 그 세 사람보다 그를 더 소망할 것이다. “몸 전체가 담 덩어리(一身都是膽)”라고 불리는 용기의 화신(化身), 유비(劉備)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혜성처럼 등장해 구했고,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조조(曹操)의 대군 속을 휘젓고 다녔고 싸우면 무조건 이겼다.

그는 유비의 부하장수였던 상산(常山) 조자룡(趙子龍, ?~229)이다. 유비의 의형제로 오만했던 관우, 포악했던 장비와 달리 백성과 군사의 사랑도 한 몸에 받았던 그다. 장수였지만 지략도 넘쳤다. 전쟁터에서 평생을 보냈지만 관우와 장비와 달리 비극적으로 죽지도 않았고, 공명처럼 허무하게 병사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천수를 누렸다. 유비의 덕(德), 관우와 장비의 무예와 용기, 공명의 지혜가 합쳐진 결정체라 할 만하다.

조자룡을 꼭 닮은 인물이 우리 역사에도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 속의 조자룡처럼 과장되고 포장되지 않았을 뿐이다. 임진왜란의 영웅 정기룡(鄭起龍, 1562∼1622)이 바로 그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우암 송시열(宋時烈)은 전쟁 초기 경상우도방어사(慶尙右道防禦使) 조경(趙儆)이 전투 중 일본군에 포위되자 정기룡 장군이 단기(單騎)로 일본 진영에 들어가 구출한 모습을 일러 “옛날 조자룡의 그 싸움, 그 담력에 견줄 만하였으니 어찌 용맹스럽다 하지 않으리요(子龍昨戰其膽可肩 不寧其勇)”라고 했다.


▎‘충의사’ 안에 모셔진 정기룡 장군의 영정.
망해가는 나라 일으켜 세운 개천의 용(龍)

18세기를 대표하는 학자이며 문장가였던 홍량호(洪良浩, 1724~1802)가 1794년 저술한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은 우리 역사의 대표적 명장(名將)들의 삶을 다룬 첫 위인전이다. 이 책은 정기룡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6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전해 항상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적과 싸웠지만,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50명의 기병을 이끌고 수천 명의 일본군을 물리친 적도 있다. 일본군과 싸울 때는 반드시 선봉에 서서 싸웠지만, 한 번도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부대를 잘 통솔해 그의 부대가 이르는 곳의 백성은 모두 안심했고,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전해져 오는 말에 의하면, 일본 풍속에서는 아이들이 울 때 ‘정기룡이 온다’라고 말하면, 아이들이 울음을 뚝 그친다고 한다.”

이런 홍량호의 평가와 달리 임진왜란 당시 정기룡의 활약을 알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은 많지 않다. <해동명장전>이 저술된 이후에야 정기룡은 영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무명에 가까웠다. 특히 근현대를 거치며 시련 속에서도 부활에 부활을 거듭한 이순신과 달리 정기룡은 지금도 우리 역사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 생소한 인물이다.

야사와도 비슷한 홍량호의 <해동명장전>을 제외하고, 정기룡의 삶에 대해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은 <선조실록>과 송시열이 쓴 ‘통제사 정공 신도비명(統制使鄭公神道碑銘)’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정기룡의 삶에 대한 ‘신도비명’의 언급은 눈길을 끈다.

“공(公, 정기룡)이 무과(武科)에 급제해 창명(唱名, 과거 급제자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치는 일)할 무렵, 때마침 선조(宣祖)가 용(龍)이 종루가(鐘樓街, 지금의 서울 종각)에서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그런 뒤 선조가 공을 얻고 기이하게 여겨 ‘용이 일어나 하늘로 솟아올랐다’는 뜻의 ‘기룡(起龍)’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정기룡의 초명(初名)은 무수(茂樹)였는데, 선조가 무과 급제를 한 그를 만난 뒤 ‘기룡(起龍)’이란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정기룡의 출신도 한미(寒微)했지만 선조의 눈에도 정기룡은 ‘개천에서 난 용’으로 비친 것이다.

그는 1562년 지금의 경남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서 태어났다. 호(號)는 매헌(梅軒)이다. 7세 혹은 8세부터 활을 익히기 시작했다. 활쏘기와 말타기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다. 청소년기에는 집안의 반대로 숨어서 무예를 수련했다. 19세인 1580년에 고성 향시(鄕試) 무과에 합격했다. 시험길을 동행했던 둘째 형이 급서하자 3년상을 치루며 무과 공부를 포기했다. 그러나 비범한 재능을 인정한 어머니와 가문의 권유로 1586년, 25세에 다시 무예 공부를 시작했다. 몇 달 후인 그해 10월 무과 별시에 1등으로 합격했다.

32세에 12등으로 급제한 이순신 및 이순신의 무과 급제 동료들을 비교해 보면, 정기룡이 얼마나 천재였는지 확실히 들어난다. 이순신과 함께 합격한 사람들 중 거의 대부분은 현직 군인이었고, 평균연령도 34세였다. 이순신은 22세부터 공부를 시작해 10년만인 32세에야 합격했다. 그런데도 경상도 시골 출신의 25세 청년 정무수가 무과 장원을 했다는 것은 선조가 용꿈을 꾸고 이름을 지어줬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기적 같은 일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정기룡이 군관(軍官) 신분이었던 것을 보면, 일찍 급제를 했음에도 지방의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고, 중앙의 인맥도 없었기에 변변한 관직을 얻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나 천부적인 실력이 있었던 그에게 전쟁은 기회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각종 전투에서 눈부신 공적을 쌓았다.


1 선조가 정기룡 장군에게 내린 정4품 봉정대부 상주목사 임명 교지. 2 정기룡 장군이 쓰던 옥대(옥으로 장식한 띠)와 홀(관복을 입을 때손에 쥐는 물건). 보물 669호로 지정돼 있다. 3 정기룡 장군이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칼.



명나라 관직 받은 유일한 조선 장수

정기룡은 전쟁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의 막하에서 군관으로 출발했다. 1592년 5월에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활약해 현지에서 훈련원 봉사(종8품)로 임명된 듯하다. 10월, 상주의 임시판관(假判官)으로 상주 용화동에 피난해 있던 백성들을 구출했다. 11월에는 화공(火攻)으로 상주성을 회복했다.

12월, 상주 북쪽의 당교에서 연패를 당하던 관군과 의병들을 지원해 일본군에게 승리했다. 이때 노획한 전리품은 물론이고, 참획한 일본군의 수급까지 부자들에게 팔아 군량을 확보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진휼해 상주를 안정시켰다. 1593년에 정식 상주 판관(종5품) 겸 감사군 대장(敢死軍大將)이 되었다. ‘감사군(敢死軍)’은 죽기를 맹세하고 싸우겠다는 뜻을 담은 부대 명칭이다.

그러나 그도 전쟁의 비극을 피하지는 못했다. 부인 강씨가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의 함락과 함께 남강에 투신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경상우도의 방어에 진력했다. 전쟁 소강기였던 1594년에는 전쟁 중에 생겨난 도적떼의 진압을 담당한 토포사(討捕使), 상주목사(정3품)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정기룡은 노새 등에 죽을 싣고 논밭을 왕래하며 굶주려 일할 수 없는 농민들을 구휼하면서 둔전(屯田)을 개간했고, 스스로도 들판에서 노숙하면서 농사를 장려했다. 삼(麻)씨를 구해 관청 폐허지에 심어 백성들의 옷감으로 공급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방어 시설을 보수하기도 했다.

1596년에는 무인이었고, 전쟁 중임에도 상주에 석문서당(石門書堂)을 설립해 학문을 장려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토왜대장(討倭大將)으로 임명되어 28개 군(郡)의 군사를 총괄 지휘해 고령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1만2천명의 일본군을 대파했다. 그의 수많은 승리 중에서도 최대 전과였다. 그 공로로 36세의 나이에 경상우 도병마사(종2품)로 승진했다. 1597년 11월에는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상좌도까지 진출해 조명연합작전에 참가했다. 경주성 수복에 기여했고, 울산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37세인 1598년 초에는 조명 연합군의 일원으로 함양 사척 전투에 참전했다. 명나라 부총병 이예(李棁)가 전사하자 명나라에서는 그를 명나라 군직인 어왜총병관(御倭總兵官)으로 임명하고, 자국 군사를 지휘케 했다. 정기룡은 임란 기간 동안 명의 관직을 받은 유일한 조선 장수가 되었다. 그 후 진주성을 수복했고, 사천성의 일본군을 대파했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부장(副將) 이선도(李先道)를 참살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당대에 높은 평가와 최초의 공신 선정 때의 평가, 즉 이순신·원균·권율 등과 함께 26명의 선무공신(宣武功臣)의 한 명으로 선정될 정도였으나, 1604년 6월에 공표된 최종 선무공신(宣武功臣)에서 제외되었고, 1605년 4월에 선정한 정공신(正功臣) 이외의 작은 공이 있는 공신이라는 원종공신(原從功臣) 중의 한 부분인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선정되었다. 공신 선정과 관계없이 그는 계속 현직에서 활약했다.

경상도방어사, 김해부사, 밀양부사, 중도방어사(中道防禦使), 44세에는 오위도총부 총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다. 1622년 56세에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겸 경상우수사로 재직하던 중 통제영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 후 역사 속에서도 점차 잊혀지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200년 가까이 된 1773년에야 영조에 의해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기룡의 다재다능한 능력이 가져온 결과를 압축하면, 1746년에 쓰여진 <매헌사적(梅軒事蹟)>의 서문에 써 있는 “無公則無嶺南 無嶺南則無國家(무공즉무영남, 무영남즉무국가)”, 즉 “공이 없었다면 영남이 없고, 영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가 어떻게 그와 같은 활약을 했을까. 정기룡은 조자룡처럼 단기필마로 적진을 누비는 용장(勇將), 제갈량과 이순신과 같이 지혜로 승리하는 지장(智將), 몸을 낮추고 군사들과 동고동락하는 덕장(德將)의 모습 모두를 갖춘 장수였기 때문이다.

불패의 기적 만든 유격전(遊擊戰)의 천재

용장(勇將) 정기룡은 온몸이 담력 덩어리라는 조자룡을 닮았다. <오자병법>에서는 용기 있는 장수의 힘에 대해 “한 명이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하면 천 명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다(一人投命 足懼千夫, 일인투명 족구천부)”라고 했다. 1597년 9월의 보은전투는 정기룡의 담력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그는 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대군과 대치했다. 엄청난 규모의 일본군에게 부하들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는 마치 뒤에 엄청난 아군을 배경으로 당당히 서 있는 듯한 자세로 말을 세우고 여유롭게 일본군에게 활을 쏘아 수십 명을 쓰러뜨렸다.

그의 태산 같은 기세에 오히려 일본군이 겁을 먹고 눈치를 보느라 이틀 동안이나 꼼짝하지 못했다. 정기룡은 그 사이 일본군의 이동 경로에 있는 백성들에게 연락해 피난할 수 있게 했다. 그런 뒤 야음을 틈타 후퇴했다가 가토 부대의 후미를 기습하며 계속 괴롭혔다. 용기 하나로 버티며 만든 보은 전투는 정유재란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정기룡을 처음 역사의 무대로 등장시킨 1592년 4월의 거창의 신창전투에서는 10기(騎)의 기병을 이끌고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선봉대 속으로 돌입해 100여 명을 참살하며 격퇴했다. 그는 언제나 장수로서 부대의 맨 앞에서 적진으로 돌격해 싸웠고, 겁에 질린 부하들의 사기를 높여 승리했다.

지장(智將)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사례도 그가 병법에 아주 밝았던 인물임을 보여준다. 조경 막하에서 처음 활동할 때, 조경이 일본군을 물리칠 계책을 묻자 정기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적은 전쟁 준비를 오래했고, 군사들도 정예하고 좋은 무기를 갖고 있다. 반면 우리는 태평세월에 훈련을 하지 않았기에 이런 군사로는 정면 대결을 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 좋은 말과 기마술에 뛰어난 군사를 선발해 이들이 선봉으로 공격하고, 그 틈을 노려 보병이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다. 그렇게 한 번 승리하면 우리는 적들의 장단점을 알 수 있고, 적들은 우리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닐 것이다.”

정기룡의 병법은 태공망의 병법서인 <육도(六韜)>에서 말한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칠 경우에는 반드시 해가 질 무렵을 이용하여 초목이 우거진 곳에 깊숙이 잠복하였다가 좁은 길목에서 적을 요격해야 한다(以少擊衆者必以日之暮 伏以深草 要之隘路, 이소격중자 필이일지모 복이심초 요지애로)”는 것과 일치한다. 정기룡은 전쟁 초기부터 현실과 조건에 맞는 병법의 핵심을 활용했던 것이다.

유격전의 천재라는 마오쩌둥(毛澤東)이 2년 여의 유격전 경험을 종합해 만들었다는 ‘16자결(訣)’ 즉, ‘敵進我退(적진아퇴·공격해오면 물러난다), 敵駐我擾(적주아요·주둔하면 교란시킨다), 敵疲我打(적피아타·피로하면 공격한다), 敵退我追(적퇴아추·물러가면 추격한다)’를 전쟁 경험이 전혀 없던 정기룡은 전쟁 발발 직후부터 핵심 전술로 삼아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60여 차례의 전투를 전승으로 이끈 것이다. 마오쩌둥이 실전의 경험으로 깨우친 병법을 일찍이 정기룡이 전쟁에서 활용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궁지에 몰린 적을 압박하지 말라(窮寇勿迫, 궁구물박)’는 병법의 지혜를 활용한 사례도 있다. 상주성 탈환 전투가 그것이다. 포위된 일본군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서문·남문·북문을 공격했지만, 동문은 일본군이 퇴로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공격하지 않았다. 그 대신 동문 밖에 복병을 뒀다. 일본군은 퇴로가 있었기에 방어의지가 약했고, 정기룡의 예상대로 동문을 이용해 탈출했다. 정기룡은 큰 피해 없이 상주성을 탈환했고, 동문으로 빠져나갔던 일본군은 정기룡의 복병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 매년 5월 26일 ‘충의사’에서 정기룡 장군 탄신제가 열린다. 2 ‘충의사’에서 800여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정기룡 장군 묘역을 방문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공로도 권력에도 무심한 참 군인

덕장(德將) 정기룡은 중국 전국시대에 60여 년의 생애 동안 76전 64승 12무를 기록하고, <오자병법>을 남긴 오자(吳子)가 “상하가 동고동락하면 그 군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 흩어지는 일이 없으며 지칠 줄을 몰라 어디에나 투입해도 천하에 당할 자가 없다. 이를 일컬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은 군대(父子之兵)라고 한다”고 한 말을 몸소 실천했다.

그는 매 전투에서 일본군의 수급을 확보하면 부하들에게 나눠줬고, 심지어 함께 전투를 했던 명나라 장병에게도 나눠주기도 했다. 부하의 전공에 대해서는 빠짐없이 상을 받도록 보고했고, 누명을 쓴 부하 군관의 신원을 적극 구제하기도 했다. 전투를 할때도 백성의 생명을 고려한 전술을 펼쳤다. 그가 상주 가판관에 임명되었을 때 상주는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점령하고 있었다.

상주목사 김해(金澥)를 비롯한 주민들은 상주 서쪽의 용화동 계곡에 피난해 있었다. 일본군이 용화동을 공격할 즈음 정기룡은 말을 타고 휘파람을 불며, 말 위에서 일어섰다 누웠다 하거나, 숨었다가 나타났다가 하면서 일본군을 용화동 벌판으로 끌어내 섬멸했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 1월 투항해 온 일본군의 모반을 염려해 불가피하게 처형한 뒤로는 전투 중인 일본군이 아닌 항복한 일본인을 죽인 것을 평생 한탄한 인간미를 풍기기도 했다.

전란 중 많은 영웅이 나타났지만, 정기룡만큼이나 지속적으로, 또 단 한 번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 않은 인물도 없을 듯하다. 김성일은 “충의와 무용을 겸비한 사람”이라며 “뒷날 국가에서 어떤 힘을 얻어야 할 때는 반드시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했던 류성룡도 두 차례나 선조에게 정기룡의 재략(才略)과 목민(牧民)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천거했다.

체찰사로 활약했던 이원익은 원균에 대해서는 “전공(戰功)이 있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고 혹평하면서도 정기룡에 대해서는 “식견은 기용할 만한 듯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일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며 높게 평가했다. 명나라 장수인 도독(都督) 마귀(麻貴), 유격(遊擊) 모국기(茅國器)도 정기룡을 지극히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정기룡은 전란 후 <해동명장전>이나 야사와 민담을 통해 전해지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잊혀진 영웅이었다. 정기룡이 이렇게 기억에서 멀어진 원인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이순신의 경우는 <난중일기>와 전란 중에 쓴 각종 장계가 81편이나 현재까지 남아 있다. 원균도 그의 활약을 알 수 있는 장계가 <선조실록>에 여러 편 남아 있다.

하지만 정기룡의 경우는 일기는 물론, 7년 전쟁 동안 <선조실록> 1593년 6월 26일자에 단 한 차례의 장계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상하리만치 공적을 보고한 흔적이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송시열이 쓴 “공은 항상 물러앉아 큰 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公常退坐大樹之根)”라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큰 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는 본래 한나라 장군 풍이(馮異)가 전공을 많이 세워도 논공행상을 할 때는 항상 물러나 큰 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서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것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풍이를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송시열은 기록이 거의 없는 정기룡의 삶을 정리하면서 ‘대수장군 풍이’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는 정기룡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다고 보았다.

자신의 공을 드러내길 꺼린 ‘대수장군(大樹將軍)’

둘째는 홍량호의 기록처럼 60여 회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대부분 소규모였기에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처럼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유재란 때의 고령대첩도 저평가되어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셋째는 그가 대수장군으로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평생을 변방의 직업군인으로 살았기에 오히려 잊혀지기 쉬웠다. 전쟁 초기의 공로로 관직을 얻었고, 공로를 세울수록 관직은 높아졌지만, 중앙의 요직은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변방의 장수 자리가 그의 자리였다. 심지어 전쟁 후에도 중앙의 고위관직에 오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어쩌면 아주 단순할지도 모른다. 임진왜란 후 명장의 반열에 오른 이순신·권율·곽재우는 모두 세상이 다 알아주는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정기룡은 그와 달리 자신이 훗날 곤양 정씨(昆陽鄭氏)의 시조가 될 정도로 가문의 위세에 기댈 곳이 없었다.

정기룡은 시대가 만든 영웅이다. 전쟁이 없었더라면 그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무관(無官)의 무인으로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에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정기룡 개인에게는 전쟁이 기회였고, 거꾸로 나라에는 정기룡이 있어 행운이었다. 전쟁도 전쟁이지만, 그는 오직 자신의 실력과 노력만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탁월한 능력을 세상에 보였음에도 한 걸음 물러나 해야 할 일만 묵묵히 했다.

때문에 선조 때의 이순신과 김덕령, 곽재우, 중국 전국시대의 악의(樂毅)와 염파(廉頗), 송나라의 악비(岳飛)처럼 역사 속에 무수히 등장하는 성공한 장수의 비극을 겪지 않았다. 심지어 30대에 종2품 경상우도병마사 및 명나라 총병관까지 임명되었으나, 나라와 임금에 대한 변하지 않는 단심(丹心)을 인정받아 시기하고 질투하는 세력의 의심이나 견제, 모함도 받지 않았다.

정기룡도 선비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본래 선비를 지칭하는 ‘사(士)’는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다양했다. ‘학문을 하는 사람’과 같은 정의는 물론이고, ‘선배(先輩)’ ‘전사(戰士)’ ‘군사(軍士)’를 지칭하기도 했다. 그런 측면에서 특히 용기와 지혜를 갖춘 장수, 덕을 베푼 목민관으로 평생을 살았던 정기룡은 선비라는 말의 역사가 살아있는 진짜 선비다. 칼과 붓 모두를 들었고, 또 고위직에서 선배로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정기룡과 같이 용기와 지혜, 덕으로 백전백승한 명장을 <해동명장전>에서 찾아보면, 이순신을 제외하고는 정말로 흔치 않다. 혹자는 그래서 그를 ‘육지의 이순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조자룡처럼 단기필마로 적진을 누볐기에 ‘조선의 조자룡’도 부르기도 한다. ‘정기룡’ 그 자체를 더욱 드높이는 일은 후손의 의무다.

201403호 (2014.0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