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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을 간다① - ‘1등 관광지’ 문경시의 깜짝 변신 

한국의 관광메카 문경, 웰빙·힐링도시로 성장하다 

사진 주기중·오상민 기자
명품도자기 찻사발축제와 ‘문경새재아리랑’ 유래한 국민관광지…문경레저타운 골프장과 리조트, 관광사격 등 레포츠 문화로 각광

▎흙과 불과 바람이 어우러져 하늘이 준 때(時)를 만나면 문경이 자랑하는 전통찻사발과 생활자기들이 만들어진다.



경상북도 문경시청 청사 앞에는 ‘聞喜慶瑞’라고 새겨진 기념비가 있다. 문경(聞慶)의 옛 이름이 바로 문희(聞喜)다. 경서(慶瑞)는 경사스러운 일을 이르는 것이니 문경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옛 사람들이 전하는 소식마다 각기 개성적인 등장인물이 있고, 희로애락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경은 곳곳에 스토리텔링이 있는 관광자원의 보고다. 1970년대 석탄도시였던 문경은 민관의 노력에 힘입어 고품격 웰빙과 힐링의 문화도시로 성장했다. 한국의 관광메카로 떠오른 문경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으러 길을 떠나보자.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감춰둔 불을 훔쳐내 인간에게 선물했다. 불은 원시의 인간에게 화식(火食)의 즐거움과 난방의 아늑함을 가져다줬다. 음식을 담아낼 밥그릇과 찻사발 등 갖가지 그릇도 불이 만들어준 유익한 선물이다.

문경 고을이 말하는 첫째 이야기는 바로 흙과 불로 생활자기를 만들어낸 어느 사기장(沙器匠) 집안의 역사다. 문경시는 지금 전통찻사발축제(4월30일~5월6일) 준비가 한창이다. ‘국민 관광지’로 꼽히는 문경새재 사극촬영장에서 열리는 올해 축제의 주제는 ‘발물레 차는 사기장 이야기’다. 문경이 도자기 장인들의 고장이라는 것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국내 도예명장으로 지정된 7명의 도예가 중 3명이 문경에서 배출되었을 정도로 문경의 도예장인들은 명성이 높다. 문경의 도자기 문화는 광복 전후부터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까지가 전성기였다. 당시 36개의 가마가 문경에 있었는데, 양은그릇이 나오면서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줄기 전까지 문경은 밥그릇과 사기그릇을 다량으로 생산해 전국에 공급했다. 문경의 도자기 문화를 말하기 위해서는 8대를 이어져 내려온 한 사기장 집안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문경의 ‘새재’가 영남대로의 관문이 되기 전에는 ‘하늘재’ 고개가 한양으로 올라가는 하늘아래 첫 고개였다. 하늘재로 가는 문경읍 관음리를 지나다 보면 ‘朝鮮窯’라고 씌어진 표지석과 널찍한 기와집 두 채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예가인 문산(聞山) 김영식(45)이 지은 ‘망댕이요박물관’과 그의 공방이다. 그는 문경의 이름난 사기장 가문의 8대 장손이다. 현재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제 105호) 사기장이면서 한국 최초의 도자기 명장인 백산 (白山) 김정옥(73) 선생이 바로 그의 숙부다.


▎조선요를 운영하며 8대째 사기장 가업을 잇고 있는 도예가 김영식 씨.
8대째 이어 내려온 사기장

지난 4월 3일, 김씨는 새벽부터 일어나 전통찻사발축제에 출품할 그릇을 만들어내기 위해 가마에 불을 때고 있었다. 그는 순백자, 청화, 철화백자, 분청자 등 다양한 조선백자와 차를 마실 때 쓰이는 각종 다기(茶器)와 찻사발을 전통적인 도자기 기법으로 굽고 있다. 이미 대중화된 가스가마나 기름가마를 이용하지 않고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문경 고유의 망댕이가마를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있다. 망댕이란 사람 장딴지와 같은 모양의 길이 20~25㎝의 진흙덩어리를 말하는 문경의 사투리다. 이 망댕이를 촘촘히 박아 반구형의 가마 칸 3~8개를 나란히 연결한 것이 망댕이가마다.

소나무를 알맞게 쪼갠 질 좋은 땔감을 가마 안으로 집어넣던 그는 200여 년 전 문경에 정착했던 집안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씨의 집안은 대대로 사기장을 했다. 9대조부터 문경에 정착하게 됐는데, 8대조 할아버지 김취정이 240여 년 전에 충북 단양에서 가마를 열어 사기장 일을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이어 7대조 김광표가 경북 상주에서, 6대조 김영수가 문경에서 망댕이가마를 처음 만들어 도자기를 구웠다.

1843년에 김영수가 지은 이 망댕이가마는 무려 170여 년간 그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돼 현재 ‘경상북도 민속자료 135호’로 지정돼 있다. 문경은 예로부터 좋은 백자를 만들 만한 흙이 풍부했고, 도자기 재료인 유약토와 땔감인 소나무가 많아 도자기를 구울 만한 최적의 지역이었다고 한다. 남한강과 낙동강을 이용해 서울과 예천, 영주 등으로 이동이 쉬워 지게꾼들이 도자기를 팔러 다니기에도 좋았다.

김씨의 증조부 김운희는 문경에서 사기장으로 일하다가 왕실에 도자기를 공급하던 경기도 광주(廣州)의 분원에 발탁돼 관요(官窯) 일을 했다. 김씨의 조부인 김교수도 광주 분원에서 19세 때까지 살며 관요일을 도왔다고 한다. 그 뒤 김교수는 집안 선조들의 고향인 문경으로 돌아와 도자기를 구웠고, 그의 아들이자 김씨의 부친인 김천만이 사기장의 뒤를 잇게 된다.

가마에 불을 때던 김씨는 “군 입대 전까지 아버지 옆에서 일을 돕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도자공이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군 복무 중이던 1989년 부친이 갑자기 사망했다. 1991년에 제대를 하고 집에 돌아와보니 먹고 살 길이 막막해 김씨 역시 결국 아버지처럼 가마에 불을 때고 발로 물레를 차게 되었다고 했다.

김씨는 한 달 동안 빚은 그릇들을 굽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가마에 불을 땐다고 한다. 그때마다 1t 트럭 두 대 분이 넘는 소나무 장작이 가마 속으로 들어간다. 불을 땔 때 가마 속의 온도는 1300℃까지 올라간다. 화력이 좋은 소나무로 높은 온도를 유지해야만 불의 기운이 제대로 도자기에 새겨진다고 했다. 밥그릇과 국그릇 같은 생활자기에 이어 조선 다기와 전통 다완까지 만들어내는 그는 지난해 공방 옆에 ‘망댕이요박물관’을 세웠다.

그가 문경시의 도움을 얻어 세운 박물관에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사기장의 역사는 물론 선대 조부의 도예작품부터 아버지인 김천만의 그릇, 그리고 김씨가 만들고 있는 도자기까지 전시해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김씨 같은 기술 좋은 사기장이 문경의 도자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인재들이다. 인근에서 ‘영남요’를 운영하고 있는 김씨의 삼촌 김정옥도 아들과 손자에게 도공의 길을 가르쳐주며 사기장 가업을 잇고 있다.

최근에 문경은 전통 사기장뿐만 아니라 명품 찻사발로 명성을 더 높여가는 듯하다. 문경출신 도예명장 천한봉(81)은 이도다완(井戶茶碗)을 재현해낸 ‘마지막 조선 도공’으로 꼽힌다. 천한봉 선생이 찻사발을 재현해낸 과정은 흥미롭다. 어릴때부터 도자기 만드는 데 재능을 보여 이미 18세 때 문경에서는 최고의 기술자 대접을 받았다.

천한봉은 1970년대에 문경읍 관음리에서 조령요업사를 차려서 사기화분이나 만들어서 팔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1973년, 그에게 일본 교토의 대각사 주지였던 ‘사쿠라가와’란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이런 것을 한 번 만들어보라”며 책을 한 권을 꺼내 보였다. 임진왜란 때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발 그릇으로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일본의 국보 28호로 지정된 이도다완에 대한 책이었다.

일본 국보인 이도다완을 재현해내면 돈도 벌고 성공할 수 있다는 사쿠라가와의 말을 듣고 천 선생은 책 속의 그릇과 똑같은 것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는 1974년 일본에 건너가 1년 동안 도자기 공부를 했고, 일본의 유명한 도자기 공장을 다 돌아본 뒤 귀국했다. 그리고는 공방에 틀어박혀 이도다완의 재현에 몰두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문경의 질 좋은 흙을 아무리 빚어 정성을 쏟아도 이도다완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이도다완의 생산지인 경남 진주와 하동, 김해 등지의 흙을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찻사발은 밥그릇과 달리 찻물이 배어서 소박한 아름다움이 나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문경의 흙에 남쪽 지방의 흙을 섞어서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오랜 노력 끝에 문경의 흙과 남쪽지방의 흙을 섞어서 이도다완 못지 않은 기가 막힌 그릇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일본인들이 찾아와서는 천 선생이 만든 다완을 두 손으로 만져보고는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천 선생은 재현이 어렵다는 일본왕실 화병도 전통방식으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덕분에 일본정부로부터 문화훈장도 받게 된다.

찻사발인 이도다완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또 있다. 이도다완의 바닥인 굽에는 보통 1~4개의 홈이 있다. 미시적인 것에 관심이 깊은 일본사람들은 특히 이것들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천 선생은 이 홈이 옛 사람들이 찻사발을 만들어서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팔 때 지게에 딱 걸리도록 포장하기 위한 용도로 그릇에 홈을 판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요란하게 미적 감각을 운운하던 일본 사람들이 많이 멋쩍어할 만한 이도다완의 비밀이었던 셈이다.

현재 ‘문경요’를 운영하는 천한봉 선생의 문하에는 40여 명의 제자가 있고, 그의 딸 천경희 씨가 무형문화재 전수자로 전통 방식으로 찻사발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후 천 선생뿐만아니라 문경의 다른 도공들도 전통 방식으로 찻사발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면서 문경은 이도다완을 재현해낸 명장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찻사발과 생활자기, 백자 등 문경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는 주로 서민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꾸밈 없고 자연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어 우리 민족 고유의 순수한 멋과 투박한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경시(시장 고윤환)는 이러한 문경 도자기의 전통을 살려 매년 전통찻사발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축제를 통해 문경지역 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도모하고 찻사발 관련 유·무형자산(무형문화재, 명장, 망댕이가마)을 널리 알려 문경의 문화브랜드 가치를 높이자는 목적이었다. 1999년부터 시작된 전통찻사발축제가 올해로 벌써 16회째를 맞는다. 축제에 참여하는 문경의 도자요는 처음에는 11개 요장에 그쳤지만 지금은 40개로 늘어났다. 문경의 도자기가 지역경제의 한 산업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문경시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시작한 전통찻사발 축제 역시 국민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2009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우수축제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 연속 최우수 문화관광축제에 선정됐다. 문경시는 매년 ‘문경전통찻사발축제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해를 더할수록 축제의 내용을 풍성하게 하고 있다. 신록의 계절 5월을 앞둔 지금 문경에 가면 도예명장들이 만들어낸 도자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문경새재 사극촬영장은 또 하나의 관광명소다.



온 국민이 가장 걷고 싶은 황톳길

청정고을 문경이 담고 있는 둘째 이야기는 문경새재아리랑고개 스토리다. 사람들은 문경하면 문경새재 고갯길을 떠올린다. 문경은 명실상부한 길의 고장이다. 길은 뭇 생명이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면 교통(交通)이 된다. 백두대간의 한복판인 조령산(鳥嶺山)은 충청북도 괴산군과 문경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1017m의 산으로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嶺南大路)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였다.

옛 사람들은 큰 수레 두 대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도(道)로, 큰 수레 세 대가 지나가는 길을 로(路)로 구분했다. 대로(大路)는 수레 두 대가 서로 교차해 지나갈 수 있는 왕복 2차로를 말한다.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부산 동래까지 내달릴 수 있는 조선시대 기간 축인 여섯 대로 중 하나다.

문경(聞慶)이란 지명의 유래도 문경새재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다. 이를테면 한양에서 영남으로 내려오는 수령이 처음으로 경상도 사투리를 듣는 곳이 새재였고, 과거시험을 보러 간 선비가 합격의 기쁜(慶) 소식을 가장 먼저 듣는(聞) 고개도 새재였기 때문이다. 새재는 또한 국방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 뒤에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 등 세 개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해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조령의 제3관문은 그때도 충청도와의 경계 역할을 했다.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제3관문인 조령관까지는 약 6.5㎞로 천천히 걸으면 왕복 4시간 정도가 걸린다. 흙길인 데다 길이 평평해서 걷기 좋은 길이 된 문경새재길은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중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지금 새재는 실제 사람과 물자의 교통은 끊어진 ‘관광’에 적합한 황톳길이다. 지금의 흙길로 남게 된 데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조언이 있었다고 한다.


▎문경새재 아리랑고개를 넘기 위해 문경을 찾은 사람들. 문경새재는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중 1위에 꼽혔다.
1976년 도로공사가 길이 4㎞, 너비5m의 포장도로를 개통하려고 했지만 문경을 방문한 박 대통령이 “흙길로 놔두는 것이 낫겠다”라고 말해 황톳길이 보존된 것으로 알려진다. 문경에는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박 전 대통령이 교사로 첫 부임했던 문경초등학교 교사(校舍)와 당시 박 전 대통령이 묵었던 하숙집 등 몇몇 유적이 있다.

아리랑의 발상지 문경새재

풍광이 수려한 문경새재는 1981년 6월 4일 경북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문경새재 사극촬영장이 들어서면서 관광객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문경새재 고갯길은 온 국민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문경에는 더 재미있고 독특한 이름의 길이 허다하다.

2007년 길 문화재 최초로 명승(제 31호)으로 지정된 토끼비리는 ‘토끼가 다닐 만큼 좁은 벼랑길’이라는 뜻으로 문경 오정산의 층암절벽을 깎아 만든 길이 1㎞, 폭 1m의 벼랑길이다.

문경에는 토끼비리같은 천도(遷道: 하천변의 바위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길)나 잔도(棧道: 강가의 험한 벼랑부분의 선반처럼 달아서 만든 길)가 특히 많다. 토끼비리는 바위를 파서 만든 길이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다니다 보니 바위가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라고 한다.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박사가 채록한 문경새재아리랑 악보. 아리랑 노래의 효시가 되었다.
최근 들어 문경새재는 ‘문경새재아리랑’의 스토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더 적신다.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인 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등이 유명하지만 최근에는 문경새재아리랑이 아리랑의 원조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

문경새재아리랑의 첫 구절이다. 조선말 고종의 외교 고문이던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는 1896년 서양식 악보로 문경새재아리랑을 처음 기록해 서양에 소개한 인물이다.

헐버트 박사가 펴낸 <조선유기>란 잡지에는 ‘Korean Vocal Music’이란 제목으로 “아라릉 아라릉 아라리오 아라릉 얼싸 배 띄워라/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 다 나간다”라는 채보(採譜) 기록이 나온다. 문경시는 이 기록을 바탕으로 문경새재가 오래전부터 서울과 영남지방을 잇는 연결로로 이용돼왔기 때문에 ‘아리랑고개의 원조’라고 강조한다.

문경새재아리랑은 1800년대 후반에는 한양에서까지 불렸는데, 경복궁 중건 때 문경새재를 넘어 전국에서 모인 인부들이 이 문경새재아리랑을 부르면서 아리랑이 전국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곧 문경새재아리랑이 근대 아리랑의 효시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문경시는 이에 따라 아리랑을 문경의 대표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문경시를 아예 ‘아리랑 도시’로 선포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이를 위해 아리랑세계화포럼(회장 이곤)이 주도해 서예로 아리랑가사 1만수 쓰기, 아리랑 열 두 고개 넘기 체험프로그램 만들기, 아리랑 무형문화센터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문경을 ‘아리랑의 허브도시’로 만드는 데 민관이 똘똘 뭉쳐 마음을 모으기로 했으니 조만간 문경은 아리랑도시라는 또 하나의 스토리를 갖게 될 전망이다.

문경고을이 품고 있는 셋째 이야기는 탄광으로 흥청거렸던 옛 석탄도시와 관련된 스토리다. 문경시는 크게 보면 관광명승이 많은 문경읍과 도심인 구 점촌(店村)시가지 지역으로 나뉜다. 옛 문경군청은 문경면 상리에 있었지만 1949년 4월에 문경에서 24㎞ 떨어진 점촌리로 이전한다. 이때부터 문경은 점촌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문경은 1960~70년대에 석탄과 시멘트 산업이 발달하면서 부자도시로 이름을 날렸다. “지나가던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로 돈이 흔했다. 문경·가은 방면에서 생산된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점촌역에는 화물열차가 부지런히 철로를 왕복했고, 객차에는 돈을 벌러 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인구도 늘어나면서 1986년에는 문경군의 일부였던 점촌읍이 따로 떨어져 나와 점촌시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탄광이 하나둘 문을 닫자 점촌시는 쇠락하게 된다. 석탄산업의 쇠퇴로 인구가 줄고 위기를 겪었지만 문경 출신 주민들의 애향심은 하나로 똘똘 뭉쳐 고향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1995년에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원래 하나의 행정구역이었던 점촌시와 문경군은 다시 하나로 통합해 지금의 문경시가 됐다. 문경시 안에는 지금도 구 점촌시와 문경읍이 공존한다. 옛 점촌시 지역인 모전동에 문경시청이 있고, 문경읍에는 소박한 문경읍사무소가 관광객들을 반긴다.


▎탄광촌으로 번성하던 문경은 이제 한국의 관광 메카로 성장했다.



석탄의 고장에서 관광의 메카로

문경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관광산업으로 부를 구가하고 있다. 문경관광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관광의 종합선물세트’라할 수 있다. 사실 앞서 거론한 세 가지 문경 이야기를 관통하는 키워드 역시 관광이다. 문경에는 황장산·희양산 등 산림청이 선정한 대한민국 100대 명산이 자리하고 있고, 쌍용계곡·용추계곡 등 원시림을 간직하고 있는 천혜의 경관도 자랑거리다.


▎문경은 레포츠와 휴양의 천국이다. 폐광이 된 폐철로를 이용한 레일바이크(철로자전거)는 가족단위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숲이 울창하고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절경을 이뤄 ‘문경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경북8경’ 중 으뜸으로 꼽히는 진남교반(鎭南橋畔)은 빼어난 봄 풍광과 더불어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근대, 현대 등 우리 역사의 발자취를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는 명소다. 봉암사·대승사·김룡사 등 문경의 산자락이 품고 있는 천년고찰을 볼 수 있는 것은 문경을 찾는 이들에게 덤이다.

문경은 레포츠와 휴양의 천국이기도 하다. 폐광이 된 폐철로를 이용한 레일바이크(철로자전거), 몸에 좋은 광물성 물질이 많은 기능성 온천장, 사격장 시설을 활용한 관광사격장, KBS 인기 사극 <정도전>에 출연하는 탤런트들을 흔하게 볼 수 있는 문경새재 사극촬영장, 그리고 이글루와 스머프, 방갈로, 황토방 등 다양한 휴양시설과 지역 농특산품직판장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특히 문경새재로 가는 길목에 조성된 애니메이션 스머프 마을을 닮은 휴양시설은 가족단위 휴양객들에게 큰 인기를 누린다. 이름난 관광지에 먹거리가 없을 리 없다. 문경에서만 나는 ‘거정석’이라는 몸에 좋은 돌을 갈아 먹인 기능성축산품인 약돌한우와 약돌돼지는 문경을 대표하는 먹거리가 되었다. 껍질째 먹을 수 있는 문경사과와 문경오미자는 오래전부터 문경이 자랑하는 건강식품이다.

서울특별시(605.28㎞²) 보다 넓은 면적(911.73 ㎞²)에 인구 8만 명이 채 안 되는 웰빙도시 문경은 천혜의 관광자원으로 21세기를 선도해가는 강소(强小) 자치단체가 되었다. 국도 제3호선과 제34호선이 관통하고 있지만 중부내륙고속도로 개통 이후 서울과의 거리가 두 시간 이내로 줄어들면서 교통이 특히 편리해졌다. 폐광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광해관리공단과 강원랜드, 문경시와 문경시민이 투자한 공기업 성격의 (주)문경레저타운이 설립돼 문경의 관광산업을 선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앞으로 수도권-충주-문경을 잇는 중부내륙철도가 건설되면 문경은 경북선 철도와 중부내륙 철도, 중부내륙고속국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 그 위상이 급부상할 것이라도 지역민들은 자랑삼아 말한다. 게다가 내년에 열릴 ‘2015 경북문경 세계군인체육대회’의 주 개최도시로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릴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문경은 이제 탄광보다 더 돈이 되는 ‘먹고 살 길’을 찾아내 부자도시의 옛 영광을 회복해가고 있다. 끊어진 옛 길과 버려진 역과 기찻길 등 옛것들을 버려두지 않고 창조적으로 재활용한 문경은 민관이 합심해 관광산업으로 전국 최고 중소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월간중앙>이 이번 ‘지방이 뛴다’ 기획의 첫 번째 고장으로 문경에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1405호 (201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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