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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⑨ - “스승 김수근에게 처절하게 도전, 판판이 깨지면서 성장했다” 

건축가 승효상 

글·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 사진·김현동 기자
대학 4학년 때 스승 만나 경동교회, 청주박물관 지으며 15년간 동고동락…‘빈자의 미학’ 건축론 견지하며 지속가능한 집 짓기 추구

▎건축가 승효상은 스승 김수근을 뛰어넘고, 그와 다른 건축세계를 구축하겠다는 일념이 오늘의 그를 형성했다고 믿는다.
스승에게 건축의 모든 것을 배웠다. 수없이 많은 스케치를 주고받으며 아이디어와 영감을 교환했다. 스승을 뛰어넘고자 했으나 역불급이었고, 스승에게 다시 묻고자 했으나 그는 대답이 없다. 스승이 세운 집의 기억을 지우지 않고, 고쳐 다시 짓는 지혜를 배우려 한다.

건축가 승효상은 한국 현대건축의 거목 김수근 선생의 문하에서 15년간이나 ‘복무’했다. ‘복무’라는 표현에 걸맞게 그는 자신의 거의 모든 재능과 노고를 스승과 함께한 일에 바쳤다. 스승은 늘 벅찬 과제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에게 던져주곤 했다. 그러나 승효상은 스승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아이디어, 더 많은 퍼포먼스를 이뤄내야 직성이 풀렸다.

무수한 밤을 하얗게 새야 했다. 밤을 꼬박 새워 스케치한 구상을 들고 아침에 스승을 만나면 길고 지리한, 그리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그 셀 수도 없는 토론과 논쟁에서 “한 번도 스승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이제는 스승을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이미 그 스승은 여기에 없다.

“15년 동안 건축가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철저하게 배웠어요. 건축의 기본에서부터 건축이 해야 할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건축이라고 하는 게 고객을 상대하는 거지만, 15년간 제 상대는 선생님이었어요. 선생님을 넘는 게 일차적인 목표였던 것이죠. 선생님이 ‘낼 아침에 10장 그려놔라’ 하면 저는 20장을 그렸습니다. ‘선생님이 그리라고 한 거는 이건데, 제가 생각해보니까 그것보다 나은 게 이런 게 아닐까요?’ 하고 내밀면 선생님도 대개는 즐거워하셨어요. 뭐, 항상 일하는 게 그런 식이었죠.

그래서인지 선생님도 저와 직접 일하시길 좋아하셨죠. 제가 직급이 낮았지만 실장·차장, 거치지 않고 곧장 제게 설계를 맡기시기도 했죠. 물론 대항하는 족족 처참하게 무너졌지만, 다시 도전하고 또 도전했어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어요. 논리적으로 지고, 특히 미학적으로 철저히 패배하고. 스트레스로 엄청나게 술을 먹었어요.”

김수근이 1986년 사망한 후 그는 스승의 건축사무실 ‘공간’을 떠맡아 30억 원에 달했던 채무 청산작업에 나서야 했다. 스승에서 비롯된 빚잔치에 심신이 멍들었지만 그는 한 번도 스승을 원망하지 않았다. 김수근 없이 승효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김수근을 넘겠다는 일념이 오늘의 승효상을 형성했다고 믿는다. 어쨌거나 스승은 고마운 존재다.

김수근 없이 승효상은 없다


▎1960년대 초반에 촬영된 부산 아미동 산자락의 피란민촌 전경.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자란 승효상은 건축철학에서도 ‘빈자의 미학’을 추구한다.
그는 스승의 유업 ‘공간’에서 손을 떼고 1989년 건축 사무소 ‘이로재(履露齋)’를 열면서 비로소 승효상이 되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빈자의 미학’이란 승효상 특유의 철학으로 건축가의 길을 걷고 있다. ‘빈자의 미학’은 어린 시절의 공간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 공간은 6·25 때 부산 피란민의 판자촌, 평북 정주가 고향이었던 부친이 월남해 정착한 달동네였다.

“어느 날 금호동 달동네를 지나가는데 그 모습이 어릴 때 살던 부산 판자촌과 너무나 비슷한 거예요. 건축가적 시각으로는 그 공간 구조에 무궁무진한 건축의 지혜가 담겨 있었어요. 남루하고 초라하지만 많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며 사는 사람들의 집이죠. 그래서 서울에 있는 달동네를 전부 돌아다니며 조사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1992년 ‘빈자의 미학’이라는 말을 내걸고, 이것으로 내 건축의 화두로 평생 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키고 있죠.”

‘이로재’ 사무실을 열고 수졸당(1993), 수백당(1998), 웰콤시티(2000) 등 역작을 선보이며 상도 많이 탔다. 파주출판도시의 코디네이터로,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으로도 그는 널리 알려졌는데 그런 상과 거대 프로젝트보다 ‘빈자의 건축철학’을 실천하는 일 속에서 더 큰 만족과 자유로움을 느낀다. “자기의 철학 안에서 노닐 때 사람은 행복하다”고 그는 말했다.

“건축가에게 공간은 참 중요하죠. 제가 생애 처음으로 기억하는 공간은 여덟 가구가 모여 살던 부산 피란민촌 마당입니다. 여동생이 태어나 엄마 품을 빼앗기고 ‘실의’에 빠졌던 세 살 때, 옆집에 살던 누나와 그 공동 마당의 길다란 공간을 함께 뛰고 걸었던 기억이 있어요. 동네에 화장실 하나, 우물이 하나 있었으니 아침이면 늘 북새통이었죠. 그리고는 대낮의 정적, 다시 저녁이면 부산해지는 그 정겨운 공동체의 시간 흐름과 박자가 지금도 그리워요.”

부친은 종교 문제로 월남했지만 남쪽에서의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사업은 아주 드물게만 성공했고, 대부분은 실패했다. 방랑벽이 자주 도져 그때마다 객지를 떠돌았다. 가세는 형편없이 기울었고 중학교 때는 수업료를 제 때 못 내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대신 부친은 무엇인가를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다.

“가구 만들기를 좋아하셨어요. 톱과 망치만 있으면 뚝딱 하나씩 만드는 솜씨가 비상했죠. 그건 단순한 손재주가 아니라 공간 지각 능력입니다. 공간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목수가 될 수 없습니다. 건축가도 마찬가지죠. 건축가에게 제일 중요한 자질은 공간지각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없으면 절대 건축가가 될 수 없어요. 제가 타고난 건축가의 소양이 있다면 그것은 ‘가구 잘 만들었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공간감각이 아닌가 합니다.”

화가 꿈 접고 건축가의 길로


▎승효상의 스승 김수근의 1970년대 말의 모습. 역동적 조형미가 돋보이는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1960~70년대를 풍미했다.
학창 시절에는 신학대학 진학을 꿈꿨다. 꿈이라기보다 ‘관성’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그의 신앙생활이 그리 신실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 그는 교회 학생회의 중심 인물로 교회일에 매진했으나 수시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으며 목사에게 대들곤 했다. 교회일을 잘한다는 이유로 용서를 받았지만 “왜 나는 이렇게 교회에 얽매여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에 늘 시달렸다. 신학대학 진학은 어머니가 반대해 자연스럽게 무산됐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무너뜨린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기대가 강했어요. 공부도 잘하는 녀석이 신학대학이 웬 말이냐, 이렇게 꾸중하셨죠. 한때 화가가 되는 꿈도 있었지만 역시 어머니가 반대해 포기했죠. 우리 동네에 생활이 엉망인 화가가 한 명 살고 있었거든요.

건축학과 진학은 제일 좋아했던 바로 위 누님이 권해서 결정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니 건축과가 제격이라는 설득을 받아들인 거죠. 나중에 알고 보니 좋아했던 대학생 중에 건축학도가 있었나 봅니다. 언젠가 누님이 건축 공부했던 그가 굉장히 멋져 보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어요.”

1971년 서울공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승효상의 학교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유신 전후 대학가에는 반정부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그는 데모대의 선두에 서서 돌을 던졌다. 데모가 있던 없던 수업은 거의 듣지 않았다. 학교가 정상적이었다면 퇴학을 맞거나 자퇴를 했을 터인데, 수업에 들어가지 않으니 퇴학이든 자퇴든 별 의미가 없었다.

“1학년 때는 주로 교양과목을 배우고 2학년부터 건축학을 접하게 되는데 그 첫 시간에 실망하면서 학교생활에 더욱 흥미를 잃었죠. MIT에서 학위를 받은 젊은 교수가 첫 수업시간에 ‘제도기’의 중요성에 대해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는데 ‘이거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건축이란 무엇인가, 건축가란 누구인가, 이런 궁금증을 저는 첫 수업시간에 풀고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건축은 독학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미국 문화공보원에 가서 엔사이클로피디아(백과사전)를 빌려 수십 쪽에 달하는 ‘아키텍쳐(건축)’편을 찾아 읽었어요. 달달 외울 정도로 읽었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건축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더군요. 외국서적이 들어왔다는 소문만 들으면 서점에 달려가 구해 읽었습니다. 대학 시절 건축공부는 전부 독학이죠.”

1970년대 초반 당시 한국 건축계는 척박했다. 학생들 사이에선 ‘박조건축(朴朝建築)’이란 말이 유행했다. ‘박정희 왕가의 건축’이란 의미다. 유신정치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했던 것처럼 건축학계에서도 ‘전통의 현대화 문제’가 화두가 됐다. 정신문화연구원이 생겨 실학을 강조하며, 이순신 장군의 영웅화 작업을 한창 진행할 때다.

뛰어난 용모에 카리스마 넘치는 태도

“건축계도 정권에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때였죠. 광주박물관·민속박물관 등 어떤 건물이든 기와만 얹으면 정부는 무조건 좋아했어요. 거기에 육영수 여사가 좋아했던 계란색만 칠하면 금상첨화였죠. ‘박조건축’이란 말을 제일 먼저 쓴 사람이 김수근 선생이었어요.

정부의 그런 움직임에 냉소적이었죠. 그랬던 김 선생이 당시 김종필 씨의 총애를 받으면서 엄청난 정부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 아이러니입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60년대 초중반, 30세를 갓 넘은 선생은 JP의 후원을 받으면서 승승장구했습니다. 건축계의 질시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워커힐 힐탑 바, 남산 자유센터, 여의도 마스터플랜 등 어마어마한 규모의 정부 프로젝트를 독점했으니까요.”

김수근은 1931년생으로 함경남도 청진이 고향이다. 초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와 사대문 안의 북촌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중학교 시절, 미군을 통해 근대건축을 접하고 건축가가 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1950년 서울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그는 전쟁 통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예술대학 건축학과와 도쿄대 대학원을 나온 그는 일본의 신문화를 접하며 건축에 대한 눈을 더욱 크게 틔우고 실무를 익혔다. 그가 우리 건축계의 대부가 되는 계기는 1959년 유학생 신분으로 박춘명·강병기 등과 함께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설계에 응모해 당당히 1등으로 당선한 ‘사건’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5·16으로 백지화되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고, 이를 발판으로 그는 국내에 들어와 자신의 건축 인생을 화려하게 펼쳤다.

“선생을 처음 만난 때는 1974년 대학 4학년 때였죠. 서울대 건축학과 몇몇 친구와 학교 선배이기도 한 그분을 뵙고 처음 인사를 드렸습니다. 축구를 하다 아킬레스건을 다쳐 다리에 깁스를 했는데, 탁자에 다리를 턱 얹고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이 그렇게 거만할 수가 없었어요. 뛰어난 용모에 카리스마 넘치는 태도가 불쾌할 정도로 오만하게 느껴졌죠. 그때는 아, 저 사람 밑에는 절대 들어가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967년 김수근이 설계한 국립부여박물관. 일본 신사(神社)를 닮았다는 논쟁에 휩싸이며 김수근 건축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수근은 1967년 그가 설계한 국립부여박물관의 형태가 일본 신사(神社)를 닮았다는 논쟁에 휩싸이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8년간의 도쿄 유학이 그에게 일본 건축의 잔영을 남겼다는 설도 제기되지만 당시 정권의 후원을 받았던 그에 대한 건축계 일반의 부정적 정서가 논쟁의 불씨를 키운 측면도 있다.

역설적으로 부여박물관 논쟁은 그를 더욱 성숙한 건축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미술사학자 최순우와의 만남이 그의 건축관을 바꿨다. 김수근은 최순우가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취임할 때까지 전국의 민가와 초가, 사찰을 함께 누볐다.

“부여박물관 사건 이후 선생은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탐구에 매진하기 시작했어요. 최순우 씨와 함께 우리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우리 전통 건축의 공간개념을 파악하는 아주 큰 안목이 생겼어요. 김수근 고유의 건축관이 비로소 형성되기 시작한 겁니다. 박정희 정권과의 관계는 늘 불안정했죠. 그건 JP의 정치적 부침과도 관련이 깊었어요. JP가 힘을 잃으면 선생도 어려워지는 상황을 주기적으로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도 정부와 거리를 두려고 했던 측면이 있고, 정부 쪽에서도 선생을 배제하고 다른 사람을 물색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어요.”

승효상이 김수근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대학 졸업 직전인 1974년 말이었다. 수업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던 승효상은 ‘기념으로’ 마지막 수업에 참석해 유일하게 존경하던 김희춘 교수를 만났다. 수업 중 김 교수는 다른 학생의 진로에 대해서는 물었지만 그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이 잠깐 자기 방에 오라는 거예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자네는 김수근 선생 밑으로 가서 일하게’라고 하시는 겁니다. 연구실에서 바로 선생에게 전화를 하더니 저를 추천하는 것이었어요. 놀랍고도 감사했죠. 다음날 김수근 선생을 뵙고 인사를 드렸는데 바로 프로젝트 과업을 주시는 거예요. 이듬해 8월 15일 여의도에 오픈할 광복 30주년 기념전시관 프로젝트였습니다. 3공화국의 치적을 찬양하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갈등이 참 많았습니다.

그때 나중에 특허장장을 지낸 최홍근 씨가 정부 감독관 비슷한 자격으로 사무실에 상주했죠. 그 사람과는 싸움도 자주했는데 어느 날 둘이 밤새 술 마시며 논쟁하다 결국 참여하기로 했죠. 지금도 최홍근 씨의 말이 생각납니다. ‘이봐 승군, 애국하는 길은 말일세,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 거야’라고 했던….”

김수근은 초장부터 20대 중반의 ‘수습 건축가’ 승효상에게 덩치가 큰 일을 맡겼다. 1977년 초 마산 양덕성당 건축을 맡긴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 정도 규모라면 보통 실장급의 베테랑이 맡아야 하는 일이다. 그가 양덕성당 건축을 맡으면서 자존심에 상처 입은 건축사무실의 실장 한 사람이 사표를 내기도 했다.


▎김수근과 승효상이 설계해 건축된 마산 양덕성당. 김수근 건축을 진일보케한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양덕성당은 김수근 건축을 진일보시킨 역작

“마산 성당을 지을 때의 클라이언트는 오스트리아 출신 신부 요셉 플라츠였어요. 성당을 지을 때 저는 선생과 무수히 많은 스케치를 주고받으면서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일방적으로 배운 것만은 아니었어요. 선생은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점을 보완해드렸고, 설계 과정에서 제 아이디어가 선생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양덕성당 건축은 김수근의 작품임에는 틀림 없지만 구체적인 작업 과정에서는 서로 교감하며 협업했습니다. 결국 성당은 선생의 건축을 진일보시킨 역작으로 탄생했습니다. 완공 후 양덕성당은 유명한 일본 건축잡지의 표지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성당 건축을 계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겁니다.”


▎승효상은 스승 김수근의 대표작으로 그의 아틀리에이기도 했던 서울 원서동 ‘공간’ 사옥을 꼽는다.
승효상이 꼽는 김수근 건축의 대표작에도 양덕성당이 포함돼 있다. 그 밖에 경동교회와 청주박물관, 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과 아르코미술관을 꼽을 수 있다. 남산 자유센터와 KIST 본관 건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백미 중의 백미는 역시 그의 건축사무실 ‘공간’의 사옥이다.

그 자신의 아틀리에인 이 건축물은 1970년대 초와 후반 두 차례에 걸쳐 덧대어 지어진 검은 벽돌 건물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건축물이라는 점에 이견이 거의 없다. 이 사옥은 밖에서 보면 좁고 긴 네모반듯한 덩어리들로 조합되어 있고, 외부 벽은 검은 벽돌로 쌓아 지은 평범한 모습이다. 그러나 내부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다.

“공간사옥의 내부 구조는 미로와 같습니다. 계단참 몇 개를 올라 다른 방들이 만들어지고 또 옆에 나 있는 몇 개의 계단참을 따라 또 다른 방이 높이를 달리하며 연결되곤 하지요. 그렇게 복잡한 방들이 구석구석 박혀 있지만 공간은 꼭 필요한 정도의 크기죠. 복도나 계단을 통과하는 동선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약간의 빈 곳이나 벽면까지도 수납공간이나 디스플레이 공간으로 사용하는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 건축에 끼친 김수근의 영향은 지대하다. 우선 부여박물관 사건 이후 우리 건축의 전통을 디자인으로 구현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멈춘 적이 없다. 소규모 기술용역업체가 태동하던 시기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 대형사업을 수행하는 새로운 형식의 건축 시스템도 그가 구축했다. 남산 자유센터 건축에서는 최초의 본격적인 노출 콘크리트 공법을 선보였고, 중동의 건설 붐을 타고 이란 엑바탄에 주거단지를 기획하며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해외시장에 건축 디자인을 ‘수출’하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동전의 양면과 같은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군, 경찰, 민간, 정부 부서할 것 없이 건축주가 두루 넓은 것이 김수근 건축의 특징인데, 특히 개발시대 독재 정권이 발주한 대형건축물 위주의 설계와 건축을 주도했다는 비판이 있다. ‘한국기술개발공사’의 대표이사를 맡아 여의도·한강·남산·서울 도심 등의 개발을 추진한 독재시대의 대표 건축인이라는 것이다.

“굉장히 열정적이셨지만 실은 굉장히 소심한 분이었어요. 사실 건축가는 대범해서는 안됩니다. 타인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집을 지어주면서 통 크게 나갈 수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건축가는 밤을 새워 고민합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해볼까 햄릿처럼 고민하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소심하니까 건축을 할 수 있는 거죠.

제가 한번은 지방에 갔다가 회사 카메라를 분실한 적이 있어요. 그 양반 소심하게 저더러 물어내라는 겁니다. 제가 막상 돈을 물어내니까 제 자리에 오시더니 슬그머니 그 돈을 다시 돌려주는 거예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을 많이 했을 겁니다. 그런데 부당한 요구를 하는 클라이언트에게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카리스마가 있어요. 일종의 이중성격이랄까, 아무튼 세심함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갖춰 인간적인 매력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스승이 건축 맡긴 경동교회·청주박물관에 애착

김수근은 경동교회와 청주박물관 건축도 승효상에게 맡겼다. 김수근의 ‘감독’ 하에 이뤄진 작업이지만 그 작업의 실무를 맡았던 승효상의 자부심도 크다. 그만큼 두 건축물이 담고 있는 건축사적 의미가 자못 심장하다는 얘기다.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 건물은 수도원 형식으로 건축됐다. 도심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도시의 큰 길로부터 틀어진 곳에 건물 입구를 두고 있다.

큰길에서 예배당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교회 외벽을 빙 둘러 들어와야 한다. 겉으로는 배타적인 모습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도시를 향해 굉장히 따뜻하게 공간을 배려하고 있다. 교회를 향하여 들어오는 길목으로부터는 좌우 양면에 수많은 계단이 이어지는데, 이는 예수가 최후의 순간 골고다로 향해 걸었던 길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경동교회의 건축사적 의미는 보통 교회로서의 형태미보다 그 공간에 있는 거예요. 굉장히 긴 진입로가 있는데 그것은 세속 공간에서 종교 공간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상징합니다. 단순히 집회의 공간이 아닙니다. 스승이 해석한 것처럼 교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드림 스페이스, 자궁 공간, 모태 공간으로 느껴지도록 기능하는 거죠. 청주박물관은 도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중턱에 있습니다. 마치 산사처럼 작은 건물들이 집합을 이루어 만든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한옥을 콘크리트로 지었지만 가짜 한옥이란 느낌이 들지 않아요. 그게 설계와 디자인의 힘이죠. ”

승효상은 김수근의 ‘공간’에 입사하자마자 거의 내리 석 달을 밤을 샜다고 한다. 세상과 완전히 절연하고 ‘공간’이라는 공간에서 먹고 자고 했다. 그리고 나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나 궁금해 1년 동안 외도를 하고는 또다시 들어갔다. 그러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더 이상 이 땅에 살기 싫어서 유학을 빙자하고 한국을 떠났다.

“1970년대 중동 붐이 일면서 대기업이 중동건설을 위한 엔지니어회사를 만들 때였어요.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길래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해봤어요. ‘공간’보다 네 배 많은 월급 지급, 대학원 진학 지원, 자유로운 출퇴근 시간 보장 등 수락하기 힘든 조건을 재미삼아 제시했는데 그걸 받아들이더라고요.

선생님은 만류했지만 한번 그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기도 해 ‘공간’을 떠났어요. 1년 내내 주머니에 10만원권 수표가 가득 들어 있었죠. 원 없이 좋은 술도 많이 마셨고요. 딱 1년이 지나니까 회의감이 밀려들어요. 거기가 제 자리가 아니었던 거죠. 다시 ‘공간’으로 돌아와 선생님과 함께 한 작업이 경동교회와 청주박물관 설계였습니다.”


▎1989년 ‘공간’을 떠나 ‘이로재’를 차리며 독립한 승효상은 절제와 소통을 추구하는 집짓기를 계속하고 있다.
건축으로 혁명한 아돌프 로스와의 만남

광주민주화운동 때 그는 도망치듯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마산 성당 건축 때 클라이언트였던 오스트리아 신부 요셉 플라츠가 비엔나공대 유학을 주선했다. 비엔나에서 어학원을 다닐 때 교수가 ‘아돌프 로스(1870∼1933)’라는 건축가의 책을 권유해 읽게 됐다. 그 책에서 청천벽력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다시 건축을 하고 싶었고, 그것도 아주 잘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아돌프 로스는 건축으로 시대를 혁명했어요. 아돌프 로스 이전의 세계 건축은 관습과 역사, 전통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어요. 건물마다 불필요한 장식이 덕지덕지 했죠. 비엔나에는 하수구 시설에마저 현란한 장식이 이뤄질 때죠. 장식이 미학적인 의미를 상실했고, 건축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했어요. 그때 아돌프 로스가 ‘장식은 죄악이다’라고 하면서 새로운 건축물을 빈 시내에 세운 거예요. 바로 그곳에서 세계 건축계의 모더니즘이 탄생했습니다.

건축을 통해 혁명을 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아주 통렬했습니다. 건축가는 예술가가 아니라, 오히려 지식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사회를 의미 있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새로운 건축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그 새로운 생각을 확인해줄 사람도 김수근 선생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다시 도전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요.”

1982년 무렵의 김수근은 심신은 피폐했다. 특히 경제적인 형편이 좋지 않았다. 당시 정권은 김수근을 모든 정부 프로젝트에서 배제했다. 거기에 불치의 암에 걸려 50대 중반의 나이에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됐다. 1986년 숨지기 한 달 전 김수근은 가장 아끼는 제자 승효상을 불러 사후 자신의 아틀리에 ‘공간’의 운영을 부탁했다.

“선생님이 유언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돌아가신 후 대표이사를 맡고 살펴보니 당시 ‘공간’의 부채가 30억 원이나 된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전혀 몰랐죠. 지금 돈으로 몇 백억 원에 달하는 거금이었어요. 은행장들한테 매일 불려가고 사채업자에게는 멱살을 잡혔습니다.

직원 임금체불로 노동부에 고발당하고, 회사가 어려움에 위기의식을 느낀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압박하더군요. 이를 악물고 2년을 버텼어요. 버티다 보니 맷집도 생기고 길이 보입디다. 갚을 수 없는 빚은 법적으로 처리해서 잘랐습니다. ‘공간’이 보유한 팔리지 않던 부동산이 처분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호전됐죠.”

김수근에게 ‘공간’은 사업체라기보다 하나의 문화공동체였다. 일생 동안 이 작업 공간을 통해 수많은 직능과 분야의 사람을 만났다. 그것은 형식적인 만남이 아니라 늘 무언가를 도모하며 일을 꾸미기 위한 만남이었다. 주변에는 각 분야의 문화예술인이 들끓었다. 김덕수 사물놀이를 한국의 전통예술을 상징하는 세계적인 예술로 키웠고, 공옥진의 ‘병신춤’을 우리 춤의 진수로 국제무대에 소개하는 예술가적 안목을 발휘했다.

“‘공간’의 대표이사를 맡았을 때 고객을 설득하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쓰러지는 회사에 일을 맡기는 바보는 없죠.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수근보다 더 김수근적인 설계를 할 수 있다고요. 그런데 그런 말을 하고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면 회의감이 몰려왔어요. 도대체 김수근보다 더 김수근적이라는 말을 누가 확인할 수 있겠는가.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 김수근 건축을 한다는 게 참 허무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 전에는 뭘 해서 보여주면 맞다 틀리다 분명한 대답이 돌아왔는데, 확인할 방법이 없어진 거죠. 그래서 선생님이 없는 3년 동안의 작품은 사생아적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승효상 건축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1989년에 독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승효상 건축에 대해서는 그전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 막상 독립하니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죠.”

빈자의 미학은 ‘가난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것

승효상은 김수근을 떠난 자신의 건축세계에 무력감을 느꼈을 때 비슷한 나이 또래의 건축가들을 모아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그 모임이 4·3그룹이다. 한국 건축계의 고질인 학연을 거부하고 젊은 건축가끼리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밤새도록 논쟁하면서 자신과 남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를 알게 됐다. 그의 건축론 ‘빈자의 미학’은 그런 집단토론을 통해 확인한 그의 정체성이었다.

“빈자의 미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미학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난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한 미학이죠.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살아야 해요. 즐거운 불편함이지요. 예컨대, 방과 방 사이를 될 수 있는 한 떨어뜨립니다. 이 방에서 저 방 가려면 몇 걸음이라도 걸어야 하죠. 그 사이에 바깥 풍경이 보여요. 그 사이에 생각을 하게 되고, 그만큼 공간은 풍부해져요.

스스로 불편하게 살려고 결심하고 그걸 실천하면 삶의 새로운 국면이 보입니다. 굉장히 건강하고 아름답게 변할 수 있죠. 우리 회사 건물만 해도 5층인데 엘리베이터도 없고 불편하죠. 뭐 하나 버튼으로 되는 게 없고 전부 다 나가서 열어줘야 해요. 그러나 방들도 다 터져 있어서 소리 지르면 다 들립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201405호 (201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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